사무엘상 6장에서는 벧세메스로 가는 두 암소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 블레셋 민족을 하나님이 재앙을 내려 심판하니 블레셋 민족은 언약궤를 다시 이스라엘로 보냈다. 하나님이 블레셋 신인 다곤을 쳐버리니 블레셋 민족은 두려워했다.
벧세메스로 가는 두 암소(삼상 6:1-21)
블레셋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돌려보내려 함(1-2)
• 6:1-2 여호와의 궤가 블레셋 사람의 지방에 있은지 일곱 달이라 블레셋 사람이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을 불러서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의 궤를 어떻게 할꼬 그것을 어떻게 본처로 보낼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라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궤를 블레셋에 빼앗긴 후 하나님의 궤가 아스돗에서 가드로, 가드에서 에그론으로 이동되었지만 가는 곳마다 하나님께서 재앙을 내려 많은 피해를 입혔다. 블레셋 사람들은 이스라엘 신의 궤를 돌려보내기 위하여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을 불러서 그 방법을 물어보았다. 하나님의 궤를 다른 지방으로 보내었다가는 그 지방이 또 하나님의 큰 재앙을 받을까 두려워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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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 속건제를 드려야 한다고 함(3-6)
• 6:3-6 그들이 가로되 이스라엘 신의 궤를 보내려거든 거저 보내지 말고 그에게 속건제를 드려야 할지니라 그리하면 병도 낫고 그 손을 너희에게서 옮기지 아니하는 연고도 알리라 그들이 가로되 무엇으로 그에게 드릴 속건제를 삼을꼬 가로되 블레셋 사람의 방백의 수효대로 금독종 다섯과 금쥐 다섯이라야 하리니 너희와 너희 방백에게 내린 재앙이 일반임이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너희 독종의 형상과 땅을 해롭게 하는 쥐의 형상을 만들어 이스라엘 신께 영화를 돌리라 그가 혹 그 손을 너희와 너희 신들과 너희 땅에서 경하게 하실까 하노라 애굽인과 바로가 그 마음을 강퍅케 한 것같이 어찌하여 너희가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겠느냐 그가 그들 중에서 기이하게 행한 후에 그들이 백성을 가게 하므로 백성이 떠나지 아니하였느냐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이 말하기를 속건제를 드려야 병도 낫고 재앙을 거두지 아니하는 연고도 안다고 하였다. 그들은 이방사람 이지만 여호와의 궤로 말미암아 가는 곳마다 재앙을 만나므로 속건제를 드려야 할 것으로 알았으니 그들이 이스라엘 백성의 종교 활동을 어느 정도 이해했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은 이스라엘 신께 영화를 돌리라”고 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였다.
무엇으로 속건제를 삼아야 하느냐고 백성들이 다시 물었을 때 금독종 다섯과 금쥐 다섯으로 속건제를 드려야 한다고 하였다. 제사의 방법은 바르지 못하고 저희들 방법대로 한 것 같다.
금독종 다섯과 금쥐 다섯을 만들었으니 많은 비용이 들었을 것이다. 방법은 옳지 않았으나 물질을 희생하여 속건제를 드려야 하겠다는 그럴듯한 생각이 나온 것이다. 성경을 모르므로 방법이 틀리긴 하였지만 가장 좋은 물질(금)을 바쳐서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려는 생각은 좋은 것이다.
궤를 돌려보낼 때, ① 속건제를 드리고, ②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③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고 마음을 겸손하게 가지라고 하였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려야 할 것을 이방 사람들도 깨달았는데 성도들이 이 점을 명심해야 한다.
소수레에 궤를 실어 보냄(7-12)
• 6:7-12 그러므로 새 수레를 만들고 멍에 메어 보지 아니한 젖 나는 소 둘을 끌어다가 수레를 소에 메우고 그 송아지들은 떼어 집으로 돌려보내고 여호와의 궤를 가져다가 수레에 싣고 속건제 드릴 금 보물은 상자에 담아 궤 곁에 두고 그것을 보내어 가게하고 보아서 궤가 그 본 지경 길로 올라가서 벧세메스로 가면 이 큰 재앙은 그가 우리에게 내린 것이요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를 친 것이 그 손이 아니요 우연히 만난 것인 줄 알리라 그 사람들이 그같이 하여 젖 나는 소 둘을 끌어다가 수레를 메우고 송아지들은 집에 가두고 여호와의 궤와 및 금쥐와 그들의 독종의 형상을 담은 상자를 수레 위에 실으니 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며 갈 때에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블레셋 방백들은 벧세메스 경계까지 따라가니라
블레셋 사람들이 새 수레를 만들어서 금보물을 상자에 담아 여호와의 궤와 함께 실려 보내는 것도 그들이 하나님을 거룩한 하나님으로 아는 까닭이다. 보낼 때 젖 나는 소 둘을 끌어다가 수레를 메우고 그 송아지들을 떼어 집으로 돌려보냈다. 이것은 소가 송아지 생각을 하여 뒤로 돌아올 가능성을 크게 한 것이다. 이것으로 재앙이 하나님의 섭리로 온 것인지를 시험하여 알아보려고 한 것이다. 즉 소가 돌아오면 블레셋 사람에게 내린 재앙이 우연히 온 것이고 소가 똑바로 가면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알기 위해서였다.
또 가벼운 법궤를 소 두 마리가 끌게 한 것도 같은 의도로서 소 두 마리가 마음을 같이 하고 보조를 같이 하여 똑바로 나아간다면 하나님의 섭리인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섭리가 아니고서는 새끼를 떼어놓은 소 두 마리가 한결같이 똑바로 나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과연 하나님께서 그 소들을 인도하시므로 송아지 생각이 나서 울면서도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똑바로 나아갔던 것이다. 그때 블레셋 방백들이 벧세메스 경계까지 따라갔다.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영접함(13-16)
• 6:13-16 벧세메스 사람들이 골짜기에서 밀을 베다가 눈을 들어 궤를 보고 그것의 보임을 기뻐하더니 수레가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 큰 돌 있는 곳에 이르러 선지라 무리가 수레의 나무를 패고 그 소를 번제로 여호와께 드리고 레위인은 여호와의 궤와 그 궤와 함께 있는 금 보물 담긴 상자를 내려다가 큰 돌 위에 두매 그날에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께 변제와 다른 제를 드리니라 블레셋 다섯 방백이 이것을 보고 그날에 에그론으로 돌아갔더라
벧세메스 사람들이 밀을 베고 있다가 여호와의 궤를 보고 기뻐하였고 수레는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 큰 돌 있는 곳에 머무르게 되었다. 사람들이 크게 기뻐하고 수레의 나무를 패어 그 소를 변제로 여호와께 드렸다.
하나님이 소를 이용했다. 하나님께서는 사자, 당나귀, 닭 같은 짐승도 필요에 따라 이용하신다. 이 소들은 끝까지 하나님께 이용당하여 하나님께서 가게 하는 곳까지 가서 서게 할 때 섰고 나중에는 번제물로 희생의 제물이 되었다. 두 마리가 똑같이 이용당하였다. 사람도 이렇게 하나님께 이용당할 때 복이 있다. 소를 이용하시는 하나님께서 사람은 더 많이 이용하신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이스라엘에게 맡겨졌었고, 초대교회 시대에는 특별히 바울에게 이방 사람에게 복음 전하는 사명이 맡겨졌었다. 현재에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메고 나아가는 직책을 맡았다(고후3:9). 초대교회 시대에는 복음 운동을 사도들이 메고 나아갔고 그 후에는 교부들과 신앙의 선배들을 통하여 복음을 메고 나아가게 하였으며, 오늘날에는 우리들에게 복음의 수레를 끌고 나아가게 하셨다.
복음의 수레를 끄는 자는 송아지 생각이 나도 뒤를 돌아보지 말고 끝까지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대로만 똑바로 나아가야 된다. 송아지 걱정은 하지 말고 떼어놓고 가야 한다. 송아지도 하나님의 것이므로 하나님께서 친히 간섭하신다. 인정을 다 끊어 버리고 자기의 생각, 자기의 뜻은 모두 버리고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목적지까지 끝까지 이용당하여 나아가야 한다. 나아갈 때 두 마리가 끝까지 같이 나아가야 한다. 한 마리가 돌아서거나 보조를 같이 하지 않으면 나아갈 수 없다.
수레를 패어서 땔나무로 한 것같이 자기가 끌고 가는 수레라고 애착을 가져서는 안 된다. 자기는 죽어서 번제물로 타서 없어지고 하나님의 말씀(법궤)만 남게 되는 생활을 하여야 한다. 도중에 돌아보거나 좌우로 치우치는 소는 합당치 않다. 끝까지 이용당하여 수레도 없어지고 자기도 없어지되 하나님의 영광만 나타나게 하는 데까지 이용당하여야 한다.
금보다 귀하고 천하보다 귀한 하나님의 말씀을 메고 나아가는 사명을 깨닫고 끝까지 충성하며 하나님께 이용당하는 성도를 하나님께서는 원하신다. 사도 바울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희생하였다(행20:24 ; 빌2:17), 하나님의 복음을 메고 나아갈 때는 모든 것을 희생하고 좌우로 치우치지 말고 정로(正路)로만 나아가야 한다. 신비주의로, 신신학으로 치우치지 말아야 한다. 신비주의로 치우치는 것은 우로 치우치는 것이요, 신신학으로 치우치는 것은 좌로 치우치는 것이다. 또 세속주의로나 인본주의로도 치우치지 말고 똑바로 나아가야 한다.
금독종자 금쥐와 성읍의 수효(17-18)
• 6:17-18 블레셋 사람이 여호와께 속전제로 드린 금독종은 이러하니 아스돗을 위하여 하나요 가사를 위하여 하나요 아스글론을 위하여 하나요 가드를 위하여 하나요 에그론을 위하여 하나이며 드린 바 금쥐는 여호와의 궤를 놓은 큰 돌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견고한 성읍과 시골 동리 곧 다섯 방백에게 속한 사람의 모든 성읍의 수효대로였더라 그 돌은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에 오늘까지 있더라
하나님의 궤는 세 도시로 옮겨갔지만 다섯 성읍의 사람이 죽은 것 같다. 하나님의 궤가 머무른 근처의 큰 도시에도 재앙이 내렸던 것 같다. 금쥐 다섯은 쥐의 피해를 받은 성읍의 수효대로였다. 여호수아는 모세 시대나 스룹바벨시대의 여호수아가 아니고 이 당시의 벧세메스 사람이다.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 본 자들의 죽음(19)
• 6:19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 본고로 그들을 치사(오만)칠십 인을 죽이신지라 여호와께서 백성을 쳐서 크게 살륙하셨으므로 백성이 애곡하였더라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 본고로 그들을 치사(오만)칠십 인을 죽이신지라 어떤 사본에는“오만”이란 숫자는 없고“칠십”이라고만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죽은 자는 칠십이고 징계받은 자까지 합하며 오만 칠십 인인 것 같다.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은 징계를 받는 자가 많고 죽는 자는 소수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올 때도 범죄하면 많은 사람이 징계를 받았고 죽은 자는 소수였다. 성찬예식에 합당치 못하게 참여하는 자들 가운데에도 징계를 받은 자는 많았고 죽은 자는 적었다(고전11:2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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벧세메스 사람들이 법궤를 들여다보았을 때 왜 죽었을까? 제사장 외에는 성물을 보거나 만져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민4:15, 20). 하나님을 보면 죽는다고 했고(출33:20), 하나님의 거룩한 지경을 범하지 말라고 하였다(출19:12), 거룩한 하나님 앞에 죄인이 서게 되면 죽고 만다. 어두움이 빛을 보면 어두움이 사라지고 마는 것과 같다.
역대상 13:7-10에 보면 하나님의 궤를 수레에 싣고 가는데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펴서 궤를 붙들므로 여호와께서 진노하사 웃사를 죽이셨다. 비록 웃사가 좋은 동기에서 붙들었지만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진노하신 것이다. 사람의 생각으로 궤가 넘어질 것 같아서 붙들려고 하였으나 그렇게 생각한 것부터가 잘못이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실패하지 않으신다. 왜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자기가 붙들려고 하는가? 베드로는 예수님을 위하는 마음으로 예수님께서 실패하는 것 같을 때 붙들려고 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하셨다(마16:21-23). 법궤는 복음 운동이며 생명을 살려 나가는 운동이다. 이 운동이 실패할까봐 손으로 붙들다가 망하는 자가 많다.
벧세메스 사람들도 여호와의 궤가 온전한가 하여 들여다보다가 죽었다. 오늘날에도 교회를 자기의 힘으로 붙들려고 하는 자들이 많이 있다.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요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이루어 나가신다. 모세가 자기의 힘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려고 하다가 도리어 사람만 죽이고 바로의 체포령이 내리자 미디안 광야로 도망하여 40년간 숨어살았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하시고 성도(나)는 진리의 멍에를 메고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대로 순종만 하고 나아가면 된다. 일은 하나님께서 하신다. 자기가 붙들어야만 교회가 잘될 수 있다는 생각을 아예 버려야 한다. 어떻게 하여야 말씀을 받아먹고 말씀대로 순종하고 말씀대로 따라갈 수 있을까 하는 것만을 생각하고 나아가면 교회는 하나님께서 잘되게 하신다.
지경(한계)을 범하면 안 된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는 한계가 있는데 그 한계를 범하면 죽는다. 하나님의 궤를 성소에 둘 때는 휘장을 쳐서 한계를 정하고 궤가 있는 곳은 지성소라 하여 제사장만 일 년에 한 번씩 들어가게 하였다. 제사장 아닌 다른 사람이 들어가면 죽는다. 제사장도 제사를 드려 몸을 거룩하게 하고 반드시 피를 가지고서야 들어갈 수 있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성소의 휘장이 찢어 졌으므로 제도적인 한계는 없어졌으나 영적인 한계는 지금도 있다.
주일에 대한 한계는 주일 새벽 0시부터 주일 밤 12시까지이다. 주일에는 신문을 보거나 사사로운 말을 하거나 오락을 행하지 않아야 하며 더욱이 자기 개인을 위한 일은 하지 말고 거룩하게 지켜야 한다. 물질에 대한 한계에 있어서는 소득의 십분의 일(십일조)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쳐야 된다. 예배시간에 대한 한계는 예배를 시작할 때부터 끝날 때까지이다.
거룩한 한계를 절대 범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어떻게 하면 될까 하고 궁리하면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신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는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세상 임금에게도 충성을 하여 법을 지키고 순종하되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날 때에는 순종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가이사와 하나님과의 경계이다.
이기선 목사가 신사참배에 반대하여 감옥에 갇혔을 때 한 번은 나오라고 하여 신사(신사) 앞까지 데리고 가서“최(最)경례”하는 구령이 내렸는데 절하지 않았다. “왜 여기까지 와서 절하지 않느냐”고 물으니 그때 이기선 목사의 대답이“여기까지 온 것은 국가에 순종하기 위해서 왔다”고 하였다. 그러자 순경이“절하라는 명령은 왜 순종하지 않느냐”고 또 물었다. 그때 대답하기를“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해야 하므로 절할 수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기선 목사에게는 나라의 법과 하나님의 말씀에 뚜렷한 경계가 있었던 것이다.
W.C.C.(세계 교회 협의회)는 불교, 마호멭교 등 이방 종교와 기독교가 아무 경계도 두지 말고 한데 어울려 교리 같은 것은 생각하지 말고 오직 사업만을 같이 하자는 것이다. 구약시대에 쪽발이 갈라지고 새김질하는 짐승은 먹고 그렇지 않은 것은 가증한 것이므로 먹지 말라고 하였다. 쪽발이 갈라진 것은 거룩한 것과 거룩하지 못한 것을 갈라놓으라는 뜻이다(신약시대에는 그 진리만 지키고 고기는 먹어도 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것과 하나님의 것이 아닌 것과 한계를 구별하여 지키라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무슨 일을 하든지 경계를 범하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경계선에 오면“이 이상은 못 간다. 이 선은 하나님께서 넘지 말라고 하셨으므로 넘어가면 망한다.”고 하며 벌벌 떨면서 그 선을 넘지 않도록 힘써야 하겠다. 자녀들에게도 한계를 범하지 않도록 가르쳐 주고 또 자신이 한계를 범하지 않는 생활을 하여야 한다. 그저 경계 없이, 아무 생각 없이 나아가면 실수하기 쉽다.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요 신성한데 여기에 대하여 관계할 만큼 관계하고 알만큼만 알고 더 이상 관계하거나 알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온갖 것에 다 참여하고 온갖 것을 다 비판하고 하나님의 종에 대한 한계를 무시할 때, 교회를 어지럽게 만들고 자기도 망하게 된다.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이기 때문에 인간적으로는 다 같으나 직책상으로 볼 때는 하나님 앞에 차이가 있다. 한계를 범하여 보통 사람같이 여겨 핍박하고_비방하여 멸시하다가 망한 사람이 많다. 경계를 지키는 것은 복을 받는 비결이다. 하나님의 경계를 지키지 못한 사람은 믿음을 지킬 수 없다. 엘리의 아들들이 하나님의 제물과 자기가 먹을 것과의 한계를 범하여 망하고 말았다.
벧세메스 사람들이 하나님의 괘를 옮겨가라고 함(20-21)
• 6:20-21 벧세메스 사람들이 가로되 이 거룩하신 하나님 여호와 앞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를 우리에게서 뉘게로 가시게 할꼬 하고 사자들을 기럇여아림 거민에게 보내어 가로되 블레셋 사람이 여호와의 궤를 도로 가져왔으니 너희는 내려와서 그것을 너희에게로 옮겨가라
벧세메스 사람이 법궤를 들여다 보다가 많은 사람이 죽자 법궤를 자기들이 모실 수 없다고 생각하여 어디로 보내야 좋을까 의논한 결과 기럇여아림에 기별하여 법궤를 가져가라고 했다. 하나님의 궤를 잘 모시고 있으면 큰복을 받을 것인데 궤를 들여다보다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았기 때문에 두려워하여 다른 곳으로 보내 버렸다. 벧세메스 사람들이 자기들의 잘못한 것을 회개할 생각은 아니하고 궤만 가져가라고 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오벧에돔은 하나님의 법궤를 잘 모시므로 복을 받았다(대상13:13-14). 모처럼 벧세메스에 하나님의 법궤가 왔으므로 잘 모셨으면 큰 복을 받을 수 있었는데 궤를 들여다보다가 죽은 것만 생각하고 궤를 가져가라고 하였으므로 이들은 매우 어리석은 일을 저지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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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마치 신약시대에 군대 마귀들린 사람에게서 나간 귀신들이 돼지 2천 마리 속에 들어가 돼지 떼가 비탈길로 내리 달아 바다에 빠져 죽은 것을 본 거라사인들이 예수님께 그 지방을 떠나시기를 간구한 것과 같다. 자기들의 돼지가 또 죽을까 보아 예수님을 떠나게 하였다. 예수님을 돼지나 죽이러 다니는 사람으로 알았던 모양이다. 복의 근원이 되시며 죽은 자를 살리시는 예수님이 떠나시면 복이 떠나는 것이요 생명이 떠나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예수님을 떠나라고 하였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벧세메스 사람들이 언약궤를 바로 잘 모셨으면 복을 받을 수 있었는데 다른 곳으로 보낸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시편 34편 알파벳 상형문자]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라(시 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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