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마가복음 11장 설교문 중에서 예수님의 성전 청결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예수님의 성전 청결(막 11:15-18)
♣명제: 예수님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성전을 세상의 장터로 만든 것을 심판하셨다.
♣목적: 우리의 교회와 내 마음의 성전을 장사하는 곳으로 만들면 안 된다.
유대인들은 항상 부정을 씻기 위해 성전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유대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부정입니다. 그들은 부지중에라도 부정이 있을까 봐! 물로 항상 손과 발을 씻었습니다. 부정해지면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전에 나가서 제사를 드리려면 제물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에는 예루살렘에서 제물로 드리기 위해 특별히 제사장들이 관리하여 양과 염소와 비둘기들을 키우게 됩니다. 예루살렘을 순례하는 자들이 여행을 하면서 제물을 가지고 오기에는 너무 힘이 들고 혹시 모를 제물의 부정 때문에 예루살렘에서 나오는 제물을 사서 성전에 들어가 제사를 드렸습니다.
또한 성전 세를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이 성전 세는 반드시 내야 하는데 거지라도 속전 세를 하나님께 드려 자신의 생명을 속전해야 합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속전받아 구원을 얻는 것을 상징합니다. 이 속전 세는 부자나 가난한 자나 동일하게 내야 합니다. 부자라고 더 내며 가난한 자라고 덜 내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부자나 가난한 자나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통해 구원을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시간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전을 정화시키시며 하나님께 온전하게 영광을 돌리는 성전이 되기를 원하시는 것처럼, 우리도 나의 마음과 내가 섬기는 교회가 주님의 온전한 뜻을 세워 오직 십자가 복음만 전파되는 교회와 나의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막 11:15) 그들이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시며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의 성전에 들어가셔서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고 있습니다. 또한 성전세로 바꾸어 자신의 배를 불리는 자들과 비둘기의 제물을 팔아 자신의 욕심을 채우고 있는 자들을 하지 못하도록 예수님께서 저지하고 있습니다.
‘들어가사’ εισερχομαι(에이셀코마이 1525) 들어가다, 참여하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셨는데 예수님의 눈에 비친 모습들은 모두가 자신의 욕심에 가득 채워진 모습들로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 성전 세를 바꾸어 주고 있고 비둘기의 제물을 성전에서 매매하면서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제물을 팔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화가 났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제사를 드려야 할 장소에서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장사를 하는 모습들이 너무나 좋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장사하는 자들에게 다가가셔서 부정행위들을 하지 못하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시고 예수님은 비둘기 파는 자들과 매매하는 자들을 향하여 다가가 상을 엎으셨습니다. 그런데 성전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이곳에 제사장들과 사람들이 타락하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장사할 일이 이미 하나님 안에서 계획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시간 예수님을 통해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능동적으로 성전을 청결하게 하시고 모든 더러워진 것들을 깨끗하게 하시기 위해 성전에 들어가셨던 것입니다.
(막 11:16) 아무나 물건을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예수님께서는 아무나 물건을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의 기구를 아무나 손대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허락하지’ ינח(야나흐 3240) 머물게 하다, 드리다, 평안함을 얻다, 안식하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아무나 성전의 물건을 가지고 다니면서 성전 안으로 지나다니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성전에서 아무나 머물면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평안함을 누리지 못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자들이 성전 안에서 돌아다니는 것을 주님은 허락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에 영원한 안식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고 있습니다. 이미 성전에서 비둘기 팔고 성전 세를 바꾸어 매매하던 자들은 구원받지 못한 자들입니다. 자신의 소욕에 따라 성전에 남아 있었던 자들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자들을 모두 쫓아버렸습니다. 그리고 아무나 성전에서 기구를 가지고 다니지 못하게 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 선택받지 못한 자들은 절대 성전에 들어올 수 없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선택되지 못한 자들을 쫓아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절대 성전 안에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완전하게 쫓아버려 더 이상 평안함과 안식을 주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버림받은 자들의 최후입니다.
‘아니하시고’ לא(로 3808) 아니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들이 성전에 다니지 못하도록 허락하지 않았는데 영원히 성전 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선택받지 못한 자들은 주님의 평강과 안식이 영원히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볼 때에 교회 안에 있다고 해서 모두가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서 복음의 말씀으로 확신을 얻지 못하면서 세상의 욕심만 따라가면서 자신의 유익을 위해 신앙생활을 하는 자들은 구원받았다는 착각에 빠져 사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확실히 선택받은 백성으로 구원을 얻어 영원히 주님 안에서 평강과 안식을 얻고 천국에 거주하는 자가 되었다는 것을 확실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막 11:17)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매매하는 자들과 비둘기 파는 자들을 모두 쫓아내시고 바로 천국복음을 가르쳐 주시고 있습니다. 무엇이 진정한 하나님의 성전인지를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바로 성전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는 것입니다. 많은 자들이 성전에 나와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장소입니다.
‘가르쳐’ διδασκω(디다스코 1321) 가르치다, 교훈을 받다, 배우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청결하게 하시고 나서 바로 하나님의 성전이 어떤 곳인지를 따르던 자들에게 가르쳐 주시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자들은 하나님의 성전에 대해서 말씀으로 듣고 배워 교훈을 받게 된 것입니다. 주님의 교훈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는 사실을 배우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 정화를 하신 사건은 실제로 있었던 것이며 이 사건이 끝나고 나서 말씀을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말씀으로 가르치신 사건은 이때의 한 번으로 끝이 난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계속해서 주님은 말씀으로 우리들도 가르쳐서 교훈을 주시고 있습니다. 주님 자신이 직접 몸소 성전을 청결케 하시고 말씀으로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기도하는’ תפלה(테필라 8605) 기도, 중재, 탄원, 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하는 곳입니다. 억울함이 있으면 하나님께 탄원하면서 부르짖어 기도하는 집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럼 ‘테필라’의 히브리적 의미는 무엇입니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생명을 계약받은 자들이 마음으로 믿어 입으로 시인하고 주님의 말씀으로 통제함을 받아 복음의 말씀을 배우고 삶에 익혀 주님과 영원히 호흡하며 예배드리는 삶을 산다는 의미입니다.
기도하는 것은 바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으로 인하여 생명을 얻은 것이며 항상 내 입으로 주님을 시인하는 것입니다. 또한 나의 모든 삶에 예수 그리스도와 호흡하는 삶을 살고 말씀으로 인도받아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호흡이며 나의 삶을 이끌어가는 원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이며 주님이 영원히 거하는 곳인 구원받은 백성들의 마음입니다.
‘강도의’ פריץ(페리츠 6530) 포악한 자, 난폭한 자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פרץ(파라츠 6555) 파괴하다, 침입하다라는 뜻에서 왔습니다. 성전을 강도의 굴혈로 만든 자들은 포악한 자들이며 난폭한 자들로서 성전을 침략하여 파괴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자신들 멋대로 이익을 위해서 살아가는 자들을 말합니다. 이들은 같은 동포들을 죽이고 돈을 뜯어내어 사는 자들이었습니다.
바로 이 시대에 같은 성경을 가지고 기이한 것을 행하며 이적과 기사를 나타내 영혼을 죽이는 이단들을 상징하는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이 현재 교회 안에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주님은 이런 자들을 책망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난폭하고 포악한자로서 율법주의 신앙으로 하나님의 성전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없는 교회는 빛이 없기 때문에 포악한 자들이 넘치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을 죽이게 되며 성도의 고역을 짜내서 고통을 주는 것입니다. 오직 십자가 복음을 전파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을 살려내야 합니다. 주님은 십자가 복음이 전파되는 교회를 기뻐하시며 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막 11:18)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듣고 예수를 어떻게 죽일까 하고 꾀하니 이는 무리가 다 그의 교훈을 놀랍게 여기므로 그를 두려워함일러라
항상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던 무리들이 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입니다.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이유는 주님의 교훈이 너무나 놀랍기 때문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을 따르지 않고 주님을 따르기 때문에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꾀하니’ נכל(나칼 5230) 교활하다, 속이다, 사악하다, 라는 뜻입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교활하게 서로 모여 논의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임은 사람을 죽이려고 하는 아주 사악한 자들의 모임입니다. 예수님을 속이고 죽이기 위해 모여서 토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서로 모여 예수님을 죽이려고 논의하는 이유는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서로 논의하면서 예수님을 죽이기로 도모하고 그대로 행동에 옮기게 됩니다. 결국 이들이 논의하여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 것은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들의 논의가 빛을 보고 열매로 거두어진 곳이 어디입니까?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인 곳입니다. 이들은 아주 교활하여 많은 사람들을 지옥의 불 못으로 인도하는 자들입니다. 자신의 이익이 있으면 무엇이든지 하는 자들입니다. 이 시대도 이런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교회 안에서 장사하고 자신의 유익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자들입니다. 자신에게 유익이 있다면 주님을 죽이는데 망설이지 않고 행동에 옮기는 자들입니다.
‘그를’ פנים(파님 6440) 얼굴, 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פנה(파나 6437) 쳐다보다, 살피다, 권고하다, 라는 뜻에서 왔습니다.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보고 놀랐습니다. 바로 주님의 얼굴을 보고 놀란 것입니다. 주님의 불꽃같은 눈이 그들의 마음을 꿰뚫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심령을 살피고 바라보면서 권면의 말씀을 전파했기 때문입니다. 많은 무리들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따르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심령 골수를 바라보고 있으며 우리의 생각까지도 모두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주님과 얼굴이 마주쳐야 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은 항상 눈을 마주 보며 대화를 합니다. 신랑 되신 예수님과 신부인 내가 항상 눈이 마주쳐 있어야 합니다. 신랑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그대로 행동에 옮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죄인인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주님의 얼굴을 보고 두려워 떨게 되는 것입니다. 죄인들은 주님을 바라보면 두려워 떨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선택받아 구원을 받은 자들은 주님의 얼굴을 보면 기쁨이 넘치게 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성전을 더럽게 하던 무리들을 책망하시고 심판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지금 우리에게도 적용이 됩니다. 마지막 날에 주님이 재림하시는데 우리의 심령의 성전이 타락하여 세상의 더러운 것들로 가득 채워 있으면 주님은 심판하게 됩니다. 이런 자들은 영원한 지옥의 불 못으로 던져지게 되는 것입니다.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던 자들은 성전에서 영원히 쫓겨짐을 당해 성전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습니다.
성전은 예수님께서 깨끗하게 하실 때만이 정화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심령도 주님께서 깨끗하게 해 주시고 우리의 죄악들도 주님께서 십자가 보혈로 깨끗하게 씻겨주실 때에 깨끗해질 수 있습니다. 이미 하나님께 선택받아 구원을 얻은 자들은 십자가 보혈로 깨끗이 씻겨져서 성전에서 주님과 영원히 거주하게 된 것입니다. 주님이 내 안에 항상 함께 하고 있음을 믿으시고 심령에 주님의 충만한 은혜가 넘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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