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 원어 설교

[소경 바디매오 설교문] “그를 부르라”(막10:46-52)

체데크 2020. 9. 22.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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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소경 바디매오 설교문 중에서 그를 부르라는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그를 부르라”(막10:46-52)

 

명제: 예수님께서는 바디매오의 간청에 부르고 있다.

목적: 우리도 주님 만나기를 간절히 원하면 만나 주신다.

 

예수님께서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여리고를 나갈 실 때에 거지 바디매오가 길가에 앉아 있다가 예수님이라는 소리를 듣고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소리를 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도 거지 바디매오처럼 자신의 문제 때문에 고민에 빠져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디매오는 앞을 보지 못하는 장애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살아가기가 힘듭니다. 또한 거지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성경시대의 사람들은 먹고 살기가 너무나 힘이 들었습니다. 가난한 자들은 한 끼를 먹기 위해 하루를 일해야 합니다. 만약에 일이 없으면 굶어야 하는 실정입니다. 그런데 바디매오는 거지의 삶을 살다 보니 더 힘이 듭니다. 그런데 정상적인 사람이 아닙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가난한 사람입니다. 가난한 것은 돈이 부족한 것도 가난한 것이지만 정상에서 벗어난 것도 가난한 것입니다. 히브리인들은 정상에서 벗어난 상태를 가난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현재 바디매오는 가난한 상태입니다. 그 이유가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정상에서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 앞에 나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에게 가장 치명적인 것은 부정입니다. 부정하면 성전에 나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바디매오의 마음에는 자신도 정상적인 자가 되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싶은 간절한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 주님께서 바디매오를 불러 가난에서 정상적인 상태로 만들어 주시는 것처럼 영적으로 가난한 나를 정상적으로 만들어 주셔서 주님과 함께 하는 자로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주님과 함께 하는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10:46) 그들이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예수님이 여리고를 빠져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아있었습니다.

‘바디매오’ (ברטימי바르타이마이 1247+2931) 부정한 아들, 이라는 뜻입니다. 바디매오는 부정하고 더러운 아들을 말합니다. 이 사람은 세상에서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는 자입니다. 부정한 자로서 하나님의 성전에도 올라갈 수 없습니다. 거지의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자라는 것을 말합니다.

 

‘나가실 때에’ יצא(야차 3318) 이끌어 내다, 건져내다, 끌어내다, 놓아주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여리고를 빠져나가시는데 이곳은 달 신을 섬겼던 장소입니다. 배설물과 같은 더러운 똥으로부터 빠져나가시는데 이곳이 여리고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여리고의 장소를 말하는 것도 있지만 영적으로 보면 타락하고 더러운 곳에서 주님이 건져내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리고에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오늘 주님의 뜻이 있는 사람은 맹인 거지 바디매오입니다. 바디매오는 이름에서 나오는 것처럼 더럽고 추악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을 더럽고 추악한 곳으로부터 건져주고 이끌어 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바디매오의 삶은 사람의 더러운 배설물과 같은 인생을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볼 때에 우리도 거지 바디매오처럼 육신적으로는 깨끗한 척하면서 살았을지 모르지만 영적으로 너무나 추악하고 더러운 똥물이 튀기는 그런 곳에서 인생을 살았습니다.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절대 빠져나올 수 없는 이런 곳에서 살다가 예수님을 만나고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 것입니다.

 

(10:47)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바디매오는 예수님이란 소리를 듣고 소리를 지르기 시작합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님 나를 불쌍히 여겨주옵소서!라고 외칩니다.

‘불쌍히 여기소서’ ελεεω(엘레에오 1653) 긍휼히 여기다, 불쌍히 여기다, 라는 뜻입니다. 부정한 사람인 바디매오는 주님이라는 소리를 듣자마자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소리를 치고 있습니다. 바디매오는 주님의 긍휼이 없이는 절대 부정한 자가 정결한 자로 바뀔 수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자신이 정결하게 되는 방법은 오직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명령법을 쓰고 있는 것은 주님께 대한 간절한 간청의 메시지입니다. 주님이 아니면 자신의 죄를 해결해 주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신은 육신적으로 보지 못하고 있지만 이것은 부정한 자가 되어 하나님을 만날 수 없으며 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자신이 앞을 보지 못하게 된 것은 자신의 죄악으로 된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태어나면서부터 이렇게 부정한 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통해 현재 주님을 만나게 되고 고침을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바디매오의 고백은 주님께서 긍휼을 직접 베풀어 달라는 것입니다. 오직 주님만이 자신을 불쌍히 여겨주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인 맹인이 되어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주님을 거부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주님 앞에 나오려고 해도 나의 죄악 때문에 주님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나를 불쌍히 여겨주셔서 영적인 눈을 열어 주시고 하나님을 보게 되었습니다. 바로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십자가의 보혈이 나의 죄악들을 씻겨 주시고 나의 눈에 덮여 있던 율법의 수건을 벗겨주신 것입니다.

 

(10:48)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거지 바디매오의 간청하는 소리가 너무나 시끄러워 많은 사람들이 꾸짖어 잠잠하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저지를 당할 때에 바디매오는 더욱 크게 소리를 질러 예수님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말합니다.

 

‘꾸짖어’ επιτιμαω(에피티마오 2008) 꾸짖다, 경고하다, 책망하다, 라는 뜻입니다. 정상적인 많은 사람들은 부정한 자인 바디매오를 꾸짖으며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 경고는 무엇입니까? 부정한 자가 어디서 정결한 자와 함께 하기를 원하느냐는 것입니다. 이 시대 부정한 자는 정결한 자와 함께 할 수 없었습니다. 부정한 자들은 항상 소외된 사람들입니다. 정상적인 자들이 부정하고 더러운 자들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주의자들이 자신들은 깨끗한 척하면서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정상적이라고 주님을 따라다니는 자들이 부정한 맹인 바디매오를 꾸짖고 책망한 사실이 실제적으로 있습니다. 그런데 언제까지 꾸짖으며 책망하고 있습니까? 부정한 자신을 깨끗하게 고쳐달라고 응답을 받기 원하여 소리칠 때까지 계속해서 고침 받지 못하도록 방해를 할 것입니다. 이들은 주님의 긍휼이 없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닌다고 하면서도 정죄만 하는 자들이지 부정한 자들을 불쌍히 여기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들도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주님을 믿고 따르면서 자신보다 못한 자들을 비웃거나 무시하면서 정죄하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을 믿는다면 주님의 긍휼을 배우고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부정한 자들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또한 나도 이렇게 부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율법의 잣대를 가지고 남을 판단하여 교회에서 정죄한다면 주님이 부정한 자를 책망하시는 것이 아니라 나를 책망하실 것입니다.

 

(10:49)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라 하시니 그들이 그 맹인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 하매

예수님께서 바디매오의 말을 들으시고 가시던 길을 멈추고 거지 바디매오를 부르라고 하셨습니다.

‘부르라’ φωνεω(포네오 5455) 부르다, 청하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불쌍히 여겨달라는 소리를 듣고 바디매오를 주님께서 불러오라고 초청하고 있습니다. 따르던 무리에게 명령하셔서 반드시 주님 앞으로 데려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부르신 것은 바로 바디매오를 하나님 앞으로 불러올 계획이 이미 있었습니다. 이것이 현재에 예수님을 통해 나타나고 있으며 바디매오가 맹인이 되어 앞을 보지 못할 것도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있었다면 고쳐질 것도 하나님의 계획에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직접 많은 사람들 중에 있는 바디매오를 지칭하여 부르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부르실 때도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서 불러 주신 것입니다.

 

(10:50) 맹인이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바디매오는 너무나 기뻤습니다. 주님께서 자신을 불러 주셨다는 사실이 기뻐 주님을 향해 겉옷을 버리고 뛰어 일어나 가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겉옷은 아주 중요합니다. 자신의 지위를 나타내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추운 날에 겉옷은 자신을 보호해 줄 수 있는 옷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남의 겉옷을 전당 잡았을 때에 해가 넘어가면 주인에게 돌려주라고 하셨습니다. 겉옷이 없으면 추워서 밤에 잠을 잘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겉옷은 아주 중요한 위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디매오는 겉옷을 집어던지고 주님께 달려갔습니다. 자신의 목숨과도 같은 겉옷보다 더 중요한 것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부정을 깨끗하게 씻겨주실 분은 예수님 외에는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향해 달려갔던 것입니다.

 

(10:51) 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맹인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데 무엇을 해 주기를 원하느냐고 할 때에 바디매오는 보기를 원한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정상이 되어 하나님께 경배하기를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현재 자신은 부정한 자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나갈 수도 없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라 가난한 상태의 사람입니다. 이 상태로는 하나님께 나갈 수가 없습니다. 바디매오는 자신의 육신적인 눈이 열려 자신의 유익을 위해 보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경배하기 위해 눈을 뜨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경배하기 위해 부정한 자에서 의로운 자로 주님께서 구원시켜 주신 것입니다. 영적인 맹인에서 정상적인 자로 열어 주셔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주님을 섬기라고 하신 것입니다.

 

(10:52)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데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대로 맹인 바디매오는 곧 보게 되었습니다.

‘곧’ פתאום(피트옴 6597) 갑자기, 돌연히, 별안간, 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떨어지자 갑자기 눈이 멀었던 바디매오의 눈이 별안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기적이 나타났는데 순간 돌발적으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편에서 보면 순간적인 것이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이미 계획된 일입니다. 바디매오의 고민이 해결된 것입니다.

‘구원하였느니라’ ישע(야샤 3467) 해방하다, 석방하다, 구원하다, 라는 뜻입니다. 바디매오는 주님을 만남으로 부정한 자에서 의로운 자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죄악 가운데 있으면서 부정한 자로 낙인을 찍힌 삶이었는데 죄에서 해방된 자로 영적인 맹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보는 자로 탄생된 것입니다. 가난한 자에서 석방되어 정상적인 자가 되어 하나님을 만나고 주님을 섬기는 자로 바뀌었습니다. 이렇게 구원을 베풀어 주신 분은 바로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 맹인이었던 바디매오의 눈을 열어주신 사건은 이미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주님께서는 바디매오의 육신적인 눈만 열어주신 것이 아니라 영적인 은혜도 함께 주셨습니다. 영원한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길에서’ דרך(데레크 1870) 행위, 옳은 길, 바른 길, 이라는 뜻입니다. 부정한 자였던 바디매오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정결한 자가 되어 예수님의 길에 서게 됩니다. 길에서 예수님을 따랐다는 것은 주님의 가신 그 길을 따라간 것입니다. 바로 의의 길을 따라간 것을 말합니다. 바른 길을 따라 주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따라간 것입니다. 바로 성화의 삶을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영혼이 구원을 얻은 자들은 바디매오처럼 바로 주님을 따라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올바른 길을 따라 살아가야 하며 행동이 주님이 원하시는 행위를 해야 합니다. 바디매오는 예수님의 뒤에서 오직 주님을 따라 살았던 사람입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는 거지 바디매오의 신앙을 통해 교훈을 얻었습니다. 바디매오는 이름에서 나오는 것처럼 부정한 아들입니다. 깨끗하지 못한 아들이며 죄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정상에서 벗어난 가난한 자이며 거지의 삶을 살았습니다. 소외되고 누구 하나 찾아주지 않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여리고를 지나가시다가 바디매오를 만나게 됩니다. 바디매오가 예수님을 만나기를 간절히 원해 소리를 치지만 많은 사람들은 정죄하면서 죄인은 조용히 하라고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가던 길을 멈추고 바디매오를 불러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바디매오는 주님의 말씀에 앞을 볼 수 있는 치료의 기적을 체험하게 됩니다. 자신이 간절히 원했던 빛을 보게 된 것입니다. 전에는 어둠만 보고 살았던 인생이 이제는 빛을 보고 너무나 기뻤습니다. 바디매오는 빛을 보자마자 바로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으며 주님의 행실을 따라 살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도 전에는 빛을 보지 못하고 어둠만 보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나를 불러 주셔서 영적 어둠의 고통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보게 되는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바디매오는 육의 눈이 열리면서 주님을 눈으로 직접 볼 수 있었던 것이 기쁨이었습니다. 우리도 영적인 눈이 열려 빛을 보게 되었는데 예수님을 눈으로 보고 주님을 경배할 수 있는 눈이 열린 것이 감사할 따름입니다. 육신의 눈이 열려있어도 영적인 눈이 열려있지 않으면 빨리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적인 눈을 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하나님께 책망을 받게 됩니다.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육적으로는 부러울 것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영적으로는 거지이며 누더기 옷을 입고 다니는 자들이고 영적인 맹인이 되어 앞을 보지 못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런 자들에게 주님은 안약을 사서 보게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시간 우리가 주님의 은혜로 복음의 빛을 보게 되었으며 십자가 보혈로 죄가 깨끗이 씻겨지고 말씀으로 양육받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제부터 구원받은 바디매오처럼 바로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영적으로 눈이 떠졌다고 내 마음대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나의 삶도 주님을 따라가는 거룩한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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