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3장에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서 말씀한다. 아브라함도 하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았고 의롭게 되었다. 아브라함이 행위로 의롭게 된 것이 아니라고 했다. 행위로 의롭게 되었다면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 있다. 인간이 자기의 의로 구원받았다면 하나님 앞에서 삯으로 받은 것이요 자랑할 것이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게 되었고 구원받았다.
아브라함의 믿음(롬 4:1-8)
여기서 사도는 아브라함에 행위가 아니라 신앙에 의해서 의롭게 되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모든 인류 중에 자기들이 누리는 특권과 자기들이 행위에 의해서 의의 몫을 차지하겠다고 그렇게도 떠들어대는 민족은 유대인이었다. 따라서 그는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의 경우를 예로 들어 호소하는 가운데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인 자신도 여기에 연관을 시키고 있다.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 육신으로 그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자들 못지않게 위대한 특권이 아닐 수 없다. 이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온 세상이 찾아 헤매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가 헛된 것을 찾아 스스로 지쳐 있는 만큼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된 자가 아니고서는 참으로 무엇을 얻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이 경우에 아브라함은 영리한 상인처럼 양질의 진주를 찾는 가운데 더없이 귀중하고 값진 이 진주를 발견한 것이다. "육신으로"(카타 사르카) 곧 할례와 기타 외적인 특권과 실천에 있어서 그가 얻은 게 뭣인가?(빌 3:3) 정말 얻은 게 뭔가? 그가 이걸로 의롭게 되었는가? 하나님의 영접을 사게 한 것이 바로 이 행위의 공적이었던가? 어림없는 얘기다. 따라서 바울은 이 점을 여러 가지 면에서 입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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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만일 그가 행위로 의롭게 되었더라면 자랑할 건더기가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이것은 완전히 배제되고 있다. 그렇다면 "자랑할 것이 있었겠지만"(2절) 그게 사실상 허용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하고 유대인들은 대들 것이다. "그의 이름은 위대하게 되었으며(창 12:2), 그런 만큼 자랑해도 무방하지 않은가?"라고. 가능한 얘기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불가능한 얘기다. 사람에게서는 칭찬이 있을 수 있으나 하나님 앞에서는 공적이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바울 자신만 해도 "사람들 앞에서는 자랑할 것이" 있었지만 그러나 그것은 겸손이 뒤따르는 자랑이었고 하나님 앞에서는 자랑할 게 전무했다(고전 4:4; 빌 3:8, 9). 아브라함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는 그 어느 것을 가지고도 자랑하려 들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기정사실로 들고 나오고 있다. 그처럼 위대하고 선한 아브라함조차도 그럴 수 없었다는 얘기다. 따라서 바울은 여기서 논리를 빌려 얘기하고 있다. "여호와 외에 그 어느 것이든 그걸 잡고 자랑하기 위해 자랑하려 드는 자"야말로 어리석지 않을 수 없다고.
Ⅱ. 아브라함의 신앙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있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93절) 우리 종교의 모든 문제 해결은 이 질문에 들어 있다. "성경은 뭐라고 하는가?" 이 사람 저 사람 위대하고 선하다는 사람의 말이 문제가 아니라 성경이 뭐라고 하는가가 문제다. 아벨에 가서 문제의 핵심을 얘기하고 문제를 끝내도록 하시라(삼하 20:18). "율법과 증거의 말씀"(사 8:20) 거기에만 최종적인 탄원이 있을 뿐이다. 이제 성경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바 되었느니라"(창 15:6)고 말한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거리가 없게 되고 만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순수한 은혜에 따라 그렇게 전가된 것이지 그 자체에 형식적인 의의 성질이 내포되어 있지는 않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친히 기꺼이 그를 의롭다고 여겨 주신 것뿐이다. 이것은 약속된 후손을 두고 벌어진 위대한 역사적 신앙의 발로를 계기로 창세기에서 얘기되고 있다. 그게 더더욱 돋보이는 것은 그것이 전에 가졌던 불신과의 대결 뒤에 이어지는 신앙이라는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의 그의 신앙은 전쟁터에서 새로이 살아 돌아온 승리의 신앙이다. 칭의에 필요한 것은 완전한 신앙은 아니다(불신앙의 소지가 남아 있어도 받아들일 만한 신앙이 가능할 수 있다). 오직 필요로 하는 것은 이기는 신앙 곧 불신의 머리 위에 앉아 있는 신앙이다.
Ⅲ. 그가 신앙으로 의롭게 되지 않았다면 그 보상은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겼"을 것이다. 당연한 말씀이다. 이것이 바로 그의 논리다(4, 5절). 아브라함의 상은 하나님 자신이었다. "나는 너의 지극히 큰 상이라"(창 15:1)고 하신 말씀과 같다. 그러지 않고 만약 아브라함이 이것을 완전한 순종에 의해서 획득했더라면 그건 하나님의 은혜의 행위가 될 수 없었을 것이며 아브라함 역시 포도원에서 한두 푼 번 것을 가지고 내놓으라고 졸라대는 일군들처럼 자신 있게 하나님에게 요구하고 나섰을 것이다. 그러나 이건 불가능한 얘기다. 인간, 특히 죄 많은 인간으로서는 어림도 없는 얘기다. 감히 하나님을 빚쟁이로 몰 수가!(롬 11:35) 불가능한 얘기다. 모든 영광을 거두시는 데 있어 하나님은 값없는 은혜를, 곧 은혜를 위한 은혜를 마구 베푸시는 것이다(요 1:16). 그러므로 "일을 하지 않는 자에게" 곧 그러한 공로를 내세우지 않으며 자신의 행위에 그 어떠한 가치도 두지 않는 자, 그러한 보상을 설령 받을 만해도 그걸 거절하고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에 몸을 내어 던지는 자, 바로 이런 자에게 그 믿음을 의로 여기시"는 것이다. 이들이야말로 사죄받아 구원받는 모든 자들의 자격을 갖춘 자들인 것이다. 이 모두가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 곧 이전의 불신자를 의롭다 하시는 그분의 하시는 일이다. 그의 이전 불경건이 그가 믿는 순간 획득하는 칭의에 방해거리가 될 수 없다는 얘기다 이것이 "경건치 아니한 자(톤 아세베, 4:5)다. 곧 아브라함도 회개 이전에는 갈대아 우상 숭배라는 도도한 물결에 휩쓸려 다니던 사람이다(수 24:2). 그러므로 절망할 필요가 전혀 없다. 비록 하나님은 거역하는 죄는 깨끗이 없이해 주시지 않지만 그리스도를 통해서는 불경건한 자들을 의롭다 하시는 분이다.
Ⅳ. 그는 다윗이 죄의 면제에 대해서 얘기하는 시편을 인용해서 말을 계속하고 있다. 칭의의 대종을 이루는 죄의 면제야말로 인간의 행복과 축복의 기본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복이 있다는 말은 전혀 죄가 없는 인간이나 또는 죽을 만한 건더기가 전혀 없는 그런 인간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그렇다면 인간은 그처럼 죄악투성이요, 하나님은 그처럼 의로우신데 복되다 할 인간이 어디 있겠는가?),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할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곧 저는 "무죄입니다"하고 말할 수는 없어도 사면 신청을 내서 그의 탄원이 허락된 그런 사람은 복되다는 말이다. 이것은 시편 32편 1,2절에서 인용한 것인데 다음 몇 가지를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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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용서의 특색. 이것은 채무나 범죄의 면제다. 곧 그것은 죄를 오물이나 영혼의 발가벗은 수취로 보고 덮어 준다는 얘기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주의 등 뒤에 던지시고 얼굴을 가리시는 분이라는 말씀이 있듯이 우리의 복됨의 바탕은 우리의 결백이나 죄를 범하지 않았다는 데 있는 게 아니라(제 아무리 가려 있어도 오물은 오물로 남는 것이요 칭의란 전에 죄를 짓지 않은 것으로 치거나 죄를 죄가 아니라고 하는 게 아니다), 그걸 하나님께서 우리의 몫으로 쳐주지 않으시는 데 있다. 곧 "죄로 인정치 아니하시는 것"이다(8절). 이것이야 말로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운 행위로 마땅히 엄정한 공의에 따라 처벌하지 않는 것이요 심판석에까지 데리고 가지 않는 것이며 죄를 꼬집어 지적하지 않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순전히 은혜의 행위요 하나님 편에서 진 채무로서의 용납과 보상으로 봐서는 안된다. 따라서 바울은 6절에서 이걸 가리켜 행위와 무관한 의의 전가라고 말하고 있다.
2. 용서의 복됨. "……한 자는 복이 있나니" "행위가 완전하여 여호와의 법에 행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요,"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쫓지 아니하며……" 할 때의 "복이 있다"는 말은 복된 자들의 특성을 보여 주려는 것이요 "그 불법(죄악)의 사하심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할 때의 "복이 있다"는 말은 축복의 본질과 그 바탕이 무엇인가를 보여 주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죄를 용서받았는가 안 받았는가 하는 걸 명확히 해두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겠다. 왜냐하면 이것이 다른 모든 축복의 바탕이기 때문이다. 내가 저들에게 이런저런 일을 베푸는 것은 내가 긍휼히 여기기 때문이다(히 8:12)
[요한복음 3장 주석 강해설교말씀] 니고데모와 예수님(요 3: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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