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 원어 설교

[누가복음 2장 예수님 말씀] 소년 시절의 예수님(눅 2:41-52)

체데크 2023. 1. 4.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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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장에서는 예수님이 어린 아기에서 성장하여 소년 예수님이 되었다. 요셉과 마리아는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예루살렘에 올라갔다. 예수님이 소년이 되어 예루살렘에 올라갔다. 예수님은 성전에서 랍비들과 율법을 토론하고 있었다.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며 사람으로 이 땅에 오셨다. 하나님이기 때문에 랍비들이 가르치는 것과는 다른 말씀이다.  

 

소년 시절의 예수님(눅 2:41-52)

 

우리의 복되신 구주의 유아 시절에서부터 29세가 되어 이스라엘에게 자기를 드러내기까지, 그 어간에 관해 기록된 유일한 이야기를 접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야기를 최대한으로 이용하려고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그 이상의 것을 알려고 해 봐야 헛일이기 때문이다.

Ⅰ. 그리스도는 "그의 부모와 함께" 유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41, 42절). 나사렛에서 예루살렘까지는 비록 긴 여행이고, 그들은 가난했으므로 크게 절약해 살지 않고는 거기까지 갈비용도 부담하기 어려웠겠지만, 그들은 율법에 따라 규칙적으로 예루살렘 유월절에 참여했다. 공중 규례는 종종 있어야 하며, 우리는 "어떤 사람들처럼 모이기를 폐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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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적인 일은 영적 관심사에 양보해야 한다. 요셉과 마리아는 같은 집에서 아들과 같이 지냈다. 그래서 그들은 예루살렘의 모든 랍비들 이상으로 영적인 일을 잘 가르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로, "절기의 전례(前例)를 떠나서 올라갔다." "주는 야곱의 모든 거처들보다도 시온의 문들을 더 사랑한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래야 한다.

아마 "오순절"과 "초막절"에도 역시 요셉과 마리아는 올라갔을 것이다. 모든 남자들은 "일 년에 3번 성전에 나타나야" 한다. 그러나 마리아는 "유월절"에만 거기에 나타났는데, 그 절기는 3대 절기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절기이며, 복음을 가장 많이 간직하고 있는 절기이다.

2. 어린 예수가 "열두 살 때"에 그들과 함께 올라갔다. 유대 학자들에 말에 의하면, 열두 살 된 어린이는 때때로 금식하는 것을 시작하여, 속죄일에 금식하는 훈련을 쌓아야 한다. 그리고 13세가 되면 어린이는 "계명의 아들"이 되기 시작한다. 즉 교회 어른들의 의무를 감당하게 된다. 그는 이미 유아기 때부터 할례에 의하여 "계약의 아들"이 되었기 때문이다.

본문에는 예수가 절기 때에 예배 보려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것이 이번이 "처음"이란 말이 없다. 아마 여러 해 전부터 그랬을 것이다. 그의 지혜와 정신이 그 나이에 비해 강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총명으로 들을 수 있는" 모든 자들은 공중 예배에 참여해야 한다(느 8:2). 다른 면에서 남보다 앞선 어린이는 신앙에서도 남보다 앞서야 한다. 어린이들이 공중 예배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리스도는 어린이들이 공중 예배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리스도는 어린이들의 호산나 찬송을 기뻐하신 다는 사실은 그리스도의 영예에 속하는 일이다. 그리고 어린 유아시절에 하나님께 봉헌된 어린이들은 어른들이 되었을 때에는, "복음의 유월절'에, 곧 주의 만찬에 초대되어야 한다. 그래서 그들이 자기들의 행동으로 스스로 주님과 연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Ⅱ. 그리스도는 "그의 부모들 뒤에 예루살렘에 머물렀다." 부모들은 그것을 몰랐다. 이것으로써 그리스도는 자기가 무엇을 위해 있는지 그 초기의 전조를 보이려 하셨던 것이다.

1. 그의 부모들은 "그날들을 마치기"까지는 돌아가지 않았다. 즉 유월절 기간 중의 첫 이틀이 지나면 그때 많은 자들이 빚으로 돌아간다. 꼭 머물러 있어야 하는 의무가 없었지만, 그들은 그 절기가 계속되는 7일 간을 줄곧 거기에 머물러 있었다.

"여기가 좋사오니"라고 말한 자들처럼, 규례가 끝날 때까지 머물러 있는 것이 좋은 일이다. 그리고 도엑처럼 "주님 앞에 억류된" 사람같이 서둘러 가지 않는 것이 좋다(삼상 21:7 참조).

2. 그 어린이는 "예루살렘에 남아서 머물렀다." 집에 가기가 싫어서가 아니다. 또 부모와 동행하기가 부끄러워서도 아니다. 거기에 볼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자기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모시고 있으며, 그는 "그들"에게 보다는 그 아버지의 말씀에 더욱 "복종"해야 된다는 것을 알리고자 하셨다. 그러나 한편 "그분"에 대한 그의 관계가 "그분들"에 대한 그의 무관계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어떤 이들은, 그가 성전에 남은 것은, 경건한 유대인들이 집으로 가는 날 아침에 먼저 성전에 가서 하나님께 경배하던 습관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거기에 가서 "뒤에 머물렀고," 그들이 다시 그를 찾기까지 거기서 재미있게 지냈다.

아니면 아마 그는 부모들의 하숙하던 집, 또는 어떤 자는 친구의 집에 머물렀다고 본다(예수와 같은 어린이는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의 귀염둥이일 수밖에 없고, 모든 사람이 그의 친구가 되려 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예배 시간이 되자 성전으로 갔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혼자서 남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무든 "주의 집에 거하기"를 즐거워하는 젊은이를 본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그들은 이때의 그리스도와 같은 자들이다.

3. 그의 부모는 어린 예수를 뒤에 두고, 아무런 의심도 없이 "하룻길의 여행"을 갔다. 그들은 "그가 동행중에 있는 줄로 알았기" 때문이었다(44절). 이때에는 대단히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고, 특히 첫날의 여행길은 사람들로 붐볐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아마 그가 자기들의 이웃 사람들과 섞여서 오고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내려가다가 길에서 "친족과 아는 자들 중에서 그를 찾았다." 당신은 혹 우리 아들을 못 보셨습니까? 당신은 그를 보았습니까? 마치 결혼한 자들의 질문같이, "그대는 내 영혼이 사랑하는 자를 보았느뇨?"라고 물었다.

이 사람은 찾을 만한 가치가 있는 보석이었다.

그들은 모두가 그의 동행이 되려 하는 것을 알고 있었고, 특히 어린 예수는 "자기 친족과 아는 자들"중에서 자비를 베풀기를 좋아하고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 중에서는 만나지 못했다"(45절).

우리에게는 우리가 피할 수 없이 교제해야 할 친족과 지인(知人)들이 많이 있고, 너무나도 많이 있지만, 그들 중에서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라곤 거의 아무것도 찾아볼 없다.

그들은 시골로 내려가는 그 길에서 이 사람 저 사람들에게 물어보았으나 예수에 대한 것은 아무것도 듣지 못하게 되자, 자기들이 지난밤에 유숙하던 그곳에 가면 필경 그를 만나게 되리라는 희망을 가졌다. 그러나 "거기서"도 그들은 그에 관한 소식을 들을 수가 없었다. 이 구절과 요한복음 23장 8, 9절을 비교해 보라.

4. 그들은 지난밤의 숙소에서 그를 찾지 못하자, 다음날 아침 "예루살렘으로 그를 찾아 되돌아갔다."

그리스도를 만나려는 자들은 "만날 때까지 찾아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왜냐하면, 마침내는 그리스도를 찾는 자에게는 그가 만나질 것이요, 풍부한 상급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던 위안을 잃어버린 자들, 그리고 그와의 관계성을 상실한 자들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잃어버리게 되었는지 자기를 되돌아보고, 자기들이 그것을 누렸던 그 마지막 지점까지 "되돌아가야" 한다. 즉 "그들이 언제 넘어졌고, 회개했느냐를 기억하고, 처음 일을 다시 하여", "처음 사랑으로 돌아가야" 한다(계 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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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와의 친근성을 잃었다가 다시 회복하고픈 자들은 예루살렘, 곧 "우리의 절기의 성읍," 그가 "자기 이름을 거기 두시기로 택하신" 그곳까지 가야 한다. 그리고 그의 규례, 그의 복음을 통해서 그에게 나아가야 한다. 그래야 그를 만나리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

5. 그들은 "제3 일"에 "성전에서," 즉 성전에 속한 어떤 부속건물에서 그를 만났다. 그곳은 율법 학자들이 ─ 법정이 아니라 ─ 회의 장소나 논쟁 교실로 삼던 곳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율법 학자들) 한가운데 앉아 있는" 예수를 보았다. 그때 예수는 그들의 교훈을 듣고 시험을 받는 "학생"으로서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미 그에게서 상당한 지식과 지혜를 보았기 때문에, 자기들과 같은 부류로 치고 자기들 중에 앉도록 허락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가 "지혜로 충만했다"(40절)는 사실뿐만 아니라, 그가 그 지혜를 증가시키고 서로 그것을 주고받기를 바라는 자임을 보여 주는 실례이다. 이 점에서 그는 어린이들과 젊은이들의 한 모범이다. 젊은이는 자기들에게 맞는 자들의 동료가 되어 기쁨으로 그리스도를 배워야 하고, 놀고 잇는 자들이 아니라 학자들 "한가운데 앉기"를 선택해야 한다. 그들에게 "12세 때"부터 혹은 그 이전부터라고 지식을 추구하고, 자기들에게 교훈을 줄 만한 사람을 사귀게 하자. 젊은이가 교훈을 바란다면, 그것은 희망적이고 약속 있는 전조이다.

이때에 그리스도와 같은 나이의 많은 어린이들이 "성전에서 다른 어린이들"과 함께 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성전의 학자들"고 더불어 앉아 있었다.

(1) 그는 그들의 말을 들었다. "배우기"를 원하는 자들은 "듣기"를 계속해야 한다.

(2) 그는 "그들에게 물었다." 선생으로서(그는 그렇게 물을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또는 배우는 자로서(그는 그렇게 물을 만큼 겸손했다). 혹은 진리를 추구하는 협동 구도자의 자세로 물었는지, 그것은 알 수 없다. 그러나 진리는 서로 우호적인 질문을 통해서 탐구되어야 한다.

(3) 그는 그들에게 "대답"을 했다. 그의 대담은 매우 놀랍고 만족한 것이었다(47절). 그리고 그의 질문에서 뿐만 아니라 그의 대답에서도 지혜와 "총명"이 드러났으므로, 그의 말을 듣는 모든 자들이 "기이히 여겼다." 그들은 그렇게 어린 사람, 아니 아무리 위대한 학자들에게서라도 그와 같이 말하는 것을 들어본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윗과 같이, 그는 "그의 모든 선생보다 총명이 뛰어났다." 아니 "노인들보다도 승했다"(시 119:99, 100).

이제 그리스도는 자기의 영광의 빛줄기를 다소 보인 셈이다. 그는(칼빈의 말대로) "그들에게 맛을 주었다." 곧 그이 신성한 지혜와 지식을 맛 보여 주었다. 내 생각으로는, 그리스도가 성전에서 공공연히 선생의 모습을 드러낸 것은 모세가 이스라엘을 구원하려고 처음에 시도했던 그 시도와 같다. 스데반은 이 사건을 가리켜 해석하기를, "그는 자기 형제들이 이해하는 줄로 알았고" 그래서 "하나님이 그의 손에 의해서 그들을 어떻게 구원할 것"을 아는 줄로 알았다고 했다(행 7:24, 25).

그들은 그 당시에 어떤 암시를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깨닫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여기에서(내 생각으로는) 그리스도로 하여금 그의 사업을 지금 곧 시작하도록 하실 수도 있었을 것이다. 단지 그들은 "기이히 여겼을" 뿐 그 의미를 "깨닫지 못했다." 그러므로 모세와 같이 그는 다시금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물러났고, 그들은 여러 해가 지나기까지 그에 대해 더 들을 수 없게 된 것이다.

6. 그의 어머니는 그 일에 대해서 그와 조용히 이야기했다. 일단 그 무리들이 해산하자, 그녀는 그를 따로 불러서, 부드러운 애정을 가지고 그 일에 대해서 그에게 물었다(48절).

요셉과 마리아는 그를 거기서 만났다는 사실, 그리고 그가 크게 존경을 받아 "학자들 중에 끼어 앉을" 수 있는 허락을 받았고, 또 그들의 주목을 끌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놀라워했다." 그의 아버지는 자기가 명목뿐인 아버지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런 말도 안 했다. 

(1) 그의 어머니는 자기들이 고생했다는 것을 그에게 알려 주었다. "아들아,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대하느냐? 왜 네가 우리를 이렇게 놀라게 만드느냐?" 그들은 야곱이 요셉에게 하듯, "사나운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도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어떤 무서운 원수의 손에 걸려들었을 것이다. 그 무서운 원수가 헤롯이 몇 해 전에 찾던 그 어린 생명을 마침내 찾아낸 모양이다"라고 말하려던 참이었다. 아마 그들은 수천 가지의 상상을 했을 것이고, 갈수록 무서운 생각을 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얘야, 왜 너는 우리에게 이런 무서운 일을 겪게 하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얼마나 근심하며 찾았는지 아느냐? 너를 잃어버린 줄 알고 걱정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너를 잘 살펴서 데리고 가지 못한 우리 자신들 때문에 얼마나 화가 났는지 아느냐?"

그리스도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는 자들이야말로 진정으로 자기들의 손해를 원망할 자격이 있는 자임을 기억하자. 그러나 그들의 눈물은 "씨뿌림"을 방해하지 않았다. 그들은 근심한 나머지 절망에 싸여 앉아 있지 않고, 근신하며 "찾았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만나려면, 우리는 "근심하면서," 즉 우리가 그를 잃어버린 사실을 근심하며, 그를 떠나게 해 버린 우리의 죄를 근심하며, 또 더 빨리 찾으러 나서지 않은 우리 자신에 대해 근심하며 찾아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자. 그를 근심하며 찾는 자들은 마침내 그를 만나서 보다 더 큰 즐거움을 맞게 되리라.

(2) 그는 그들이 자기에게 대해서 평상시 이상으로 조급하게 생각한 사실을 얌전하게 비난한다(49절).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여기서 용무를 마치면 당신들을 따라 집으로 갔을 것이라는 사실을 믿었어야 하셨을 겁니다. 난 결코 예루살렘에서 길을 잃어버리지 않을 겁니다. 당신은 내가 ‘엔 토이스 투 파트로스’ ─나의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것을 모르셨나이까?"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도 해석한다. "영원토록 집에 머무는 아들, 내가 그밖에 있어야 할 곳이 어디이겠습니까?"

① "내 아버지의 염려와 보호 아래입니다. 그러므로 당신들은 내게 대한 염려는 그분께 맡기시고, 스스로들 괴로워 마옵소서."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화살통에 재빨리 숨었다(사 49:2). 이와 같이 그는 자기의 교회를 보살핀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의 안전에 대해서 절망하는 일이 없도록 하자.

② "내 아버지의 일에(영어 성경 KJV는 그렇게 읽었다) 참여해야 합니다. 나는 나의 아버지의 일에 관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당신들처럼 속히 집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이 아닙니까? 생각지 못했습니까? 아직도 내게 대하여 모르셨습니까? 즉 나는 이미 나를 신앙의 사업에 바쳤고, 따라서 신앙의 문제에 관한 일에 임해야 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이 집에서 그는 우리들에게 한 모범을 보이셨다. 그리스도를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자기들의 하늘 아버지의 일에 참여하고, 다른 모든 일은 거기에 우선권을 양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이 말씀을 우리는 잘 이해하고 있다고 지금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가 자기의 언행으로 그것을 해명하셨기 때문이다. 그가 이 세상에 온 것, 이 세상에서 먹고 마시는 것은 그의 아버지의 뜻을 행하고 그분의 일을 마치기 위함이다. 그러나 이 당시에 그이 부모들은 "이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50절). 그들은 이 당시 그가 자기 아버지를 위해서 성전에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몰랐다. 그들은 그가 앞으로 메시아가 될 것을 믿었다. 그래서 그가 장차 그의 아버지 다윗의 왕좌를 차지하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왕궁에서 할 일이지 성전에서 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그의 예언자적 직능을 "깨닫지 못했다" ─ 그러나 그에게는 예언자적 직능으로 해야 할 일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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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그들은 나사렛으로 돌아갔다. 그의 영광의 이러한 섬광은 순간적이었다. 이제 그 빛은 사라졌다. 그는 부모들에게 예루살렘에 이사 와서 살자거나 자기만이라도 거기에 정착하겠다고 간청하지 않았다(그곳은 교육과 출세의 도성이었고, 자기의 지혜를 과시할 수 있는 최적의 고장이기는 했지만). 오히려 나사렛으로 잠적하여 빛 없이 살기를 좋아했다. 말하자면 여러 해 동안 그는 거기에서 묻혀 살았다.

의심할 것도 없이, 그는 1년에 3번씩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절기 예배를 드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성전에 다시 들어가서 학자들과 논쟁을 벌였는지는 전혀 알 수가 없다. 그가 그런 일을 했을 것이라는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이렇다.

1. 그는 "부모에게 복종했다." 비록 한 때는 자기가 "단순한 사람 이상"이라는 것을 보이기 위해 부모를 떠나서 하늘 아버지의 일에 참여하고 있은 적이 있었지만, 아직은 그 일을 자기의 계속적인 업으로 삼지 않았고, 그 몇 해 후에도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오직 "그들에게 복종하여," 그들의 명령을 지키고, 그들의 지시대로 오고 갔다. 그리고 그는 자기 아버지와 더불어 복수의 일에 종사했을 것이 분명하다.

이 점에서 그는 주(主) 안에서 부모에게 의무를 다하고 복종해야 한다는 것을 어린이들에게 본으로 보이셨다. 그는 "여자에게서 난 사람"인고로, 제5 계명 아래서 났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신실한 자들의 "자손"들은 또한 스스로 신실한 자손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셨다. 그의 아버지는 가난하고 비천했고, 또 그의 아버지는 "명목상"의 아버지(2:23의 참조)였지만, 그는 "그들에게 복종했다." 그는 "심령이 강하고" "지혜로 충만해" 있었고, 나아가 하나님의 아들이었지만, 그는 자기(육신)의 부모에게 순복 했다. 그렇다면, 우매하며 연약하면서도 부모에게 불복종하는 "그들"은 어떻게 응답될 것인가?

2. 그의 어머니는 그 아들의 말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그 모든 말씀을 마음에 두었다." 훗날에는 그 모든 말씀이 그녀에게 이해되리라는 것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고, 그때만 그 말씀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고, 그 말씀의 유용성도 알게 되리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남들의 말이 모호하다 하여서 그 말을 무시하기도 한다(이해될 수 없는 것은 가치가 없다). 그렇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처음에는 애매하여, 그 말씀을 응용할 줄 몰랐던 말이라도 나중에는 아주 명백히 이해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중을 위해서 "그 말씀을 간직해야" 한다(요 2:22 참조). 지금 당장은 우리가 그 쓸모를 모르던 말씀도 언젠가는 그 쓸모를 깨닫게 되리라.

"학생들"은 당장에 쓸모를 모르면서도 문법의 법칙들을 암기해 두는데, 그 이유는 나중에는 쓸모 있게 되리라는 이야기를 듣기 때문이다. 우리도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그런 것을 발견하게 되리라.

3. 예수는 계속 발전하여 감탄할 만큼 되었다(52절). "그는 지혜와 키가 자라 나갔다"라고 했다. 그의 신성(神性)의 완벽성에서 보면 더 이상의 성장은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의 인성(人性), 즉 그의 "키"와 "체구" 등의 몸집이 성장했다는 것을 말한다. 그는 성장하는 연령층을 맞이하여서는 성장했다. 또 한편 그의 영혼이 "지혜에서" 그리고 인간 영혼의 재능이란 면에서 자랐다.

영원한 말씀이 비록 그가 잉태되었을 때부터 그의 영혼에 연합되어 있었지만, 그분 안에 거한 신성은 점차적으로, 그의 역량에 비례하여 그의 인성에 발현되었다. 그의 인간적 영혼의 기능은 점차적으로 완전해져 갔듯이, 그의 영혼이 인성으로부터 받은 은사는 점차적으로 잘 소통되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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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는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점점 더 "사랑스러워 갔다." 즉 그로 하여금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도록 해 주는 모든 은총(장점)이 더해갔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볼 때, 그리스도는 자신을 자기의 겸비한 처지에 조화시킨 것이다. 즉 그는 하나의 유아로, 어린이로, 청년으로 되기까지 낮아지셨듯이, 하나님의 형상은 그가 "유아"와 "어린아이"였던 시절에서보다는 청년이 되기까지 자라났을 때에 그(예수) 안에서 더욱 밝게 빛나게 된 것이다. 젊은이는 키가 자람에 따라서 지혜도 자라야 하고, 지혜가 자람에 따라 또한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더욱 귀여움을 받게 되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라.

[신약히브리어성경 로마서]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려진 성도(롬 6:12-14)

 

[신약히브리어성경 로마서]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려진 성도(롬 6:12-14)

로마서 6장에서는 구원받은 성도의 몸이 불의의 무기로 사용하면 안 된다고 했다. 거룩한 몸을 죄악의 도구로 사용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쓰임 받아 의의 무기로 쓰임 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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