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 원어 설교

[사도행전 4장 설교말씀] 복음 전파자로서 베드로와 요한의 각오(행 4:15-22)

체데크 2023. 1. 12.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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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4장에서는 베드로와 요한이 더욱더 복음을 전파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산헤드린에서 심문을 받았지만 마음이 꺾이는 것이 아니라 더 열심히 복음을 전파하겠다는 열정이 쏟아 올랐다. 성령의 충만한 은혜가 임하니 복음을 전하겠다는 마음에 열정이 생겼다. 우리의 삶에도 복음을 전해야 한다. 아직 구원받지 못한 백성에게 십자가 복음을 전하여 그들의 구원받을 수 있게 해야 한다.

 

복음 전파자로서 베드로와 요한의 각오(행 4:15-22)

 

본문에서는 공회 앞에서 베드로와 요한의 재판 결과를 수록하고 있다. 이제 그들은 승리하고 나온다. 왜냐하면 그들은 점진적으로 고통에 직면하도록 훈련받도록 되었고 작은 시련으로 보다 큰 시련에 대비시키고자 작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지금은 "보행자와 함께 달리는데 불과하지만" 앞으로 그들이 "말과 경주하게 됨"을 볼 수 있을 것이다(렘 12:5).

Ⅰ. 본문에서 이 사건에 대한 배심원들의 논의와 결정. 이에 따른 소송 절차가 다루어진다.

1. 죄수들에게 물러갈 것을 명한다(15절). 그들은 그들의 양심을 괴롭히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았고 사도들로부터 억지 자백을 받고 싶은 마음도 없었으므로 명하여 "공회에서 나가라고" 한다. 그러나 그들이 듣지 않으려 했던 말이 본문에 수록되고 있음을 우리는 보게 된다. 그리스도의 적들의 음모는 치밀하였고 그들은 그들의 공회를 주님에게 숨기려는 듯이 깊이 음모의 구멍을 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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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 문제로 논쟁이 제기됨. "그들은 서로 의논하였다." 누구나 마음에 있는 말을 자유롭게 털어놓아 이 중대한 사건에 조언을 하고자 했다. 이제 관헌들이 "주를 대적하여 논의하여,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나이다"라는 "성서 말씀이 이루어짐을 보게 된다"(시 2:2). "이 사람을 어떻게 할꼬?"라는 의문이 제기된다(16절). 만약 그들이 확신 어린 압도적인 진리에 굴복하였다면 그들이 아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라고 지시하기가 쉬웠을 것이다. 그들은 사도들을 마땅히 공회 앞자리에 모셔놓고 그들의 가르침을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받고 그들과 함께 사귀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흔히 그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에 대해서 설득당하지 않을 때 때때로 그들이 무엇을 할지 몰라 당황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만일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진리를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그 진리가 그들에게 아무런 고통이나 불편을 주지 않는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불의"로 진리를 "막고" 유폐시키려 한다면(롬 1:18) 그 진리는 그들이 어떻게 다룰지 몰라서 당황하게 되는 부담스러운 돌덩이가 되고 마는 것이다(슥 12:3).

3. 드디어 그들은 두 가지로 결단하였다.

(1) 사도들을 그들이 행한 대로 처벌하는 것이 좋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마음대로라면 그들을 처벌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할 만한 용기가 없었다. 왜냐하면 백성들이 사도들을 지지하였고 기적에 대해 칭찬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전에 "백성들을 두려워하여" 감히 그리스도에게 손을 대지 못했던 것처럼 사도들을 두려움으로 대하였다. 전에는 구세주를 대적하여 외친 폭도들로 인해 문제가 쉽게 처리되었으나 지금은 그와 정반대의 기세에 있었다. 이제 그들은 이 "백성들 때문에" 베드로와 요한을 어떻게 처벌할지 무슨 구실을 잡아내야 할지 알지 못했다. 그들은 사도들을 처벌하는 것이 불의한 일인 줄 알았으므로 한편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자기들을 자제하였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위험스러운 일이라 느꼈기 때문에 또한 백성들에 대한두려움에 제일 압도되었기 때문에 이 문제를 고려하였다. "백성들을 두려워"한 이유를 생각해 보자.

① 사람들은 기적이 사실이었음을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특기할 만한 기적"이었고(그노스톤 세메이온, 4:16) 그러기에 이미 "알려진 기적"이었다. 사도들이 이 일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하였고, 그리스도 자신이 전에 자주 같은 일을 행하였다는 것이 잘 알려졌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능력의 구체적인 본보기였고 그의 가르침의 증거였다. 그것이 위대한 기적으로 그들이 가르친 교리를 확인해 주는 사실이란 것이 "예루살렘에 거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명백히 알려졌다." 그것이 일반적인 견해였고 더구나 그 기적은 누구나 볼 수 있는 곳인 성전 문 앞에서 일어났었다. 그러므로 그들 자신도 모든 술책과 기교를 다 동원해서도 그것이 참된 기적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었다." 만일 그들이 그것을 부인한다면 모든 사람들이 야유를 할 것이었다. 그들은 자기의 양심은 쉽사리 속일 수 있었지만 세상을 속일 수는 없었다. 복음의 증거는 부인될 수 없는 것이다.

② 그들이 시간을 끌수록 기적이 진실됨을 확신시켜 줄 뿐 아니라 "이루어진 일로 인하여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기 때문이었다." 그 일로 인하여 아직 그리스도를 믿도록 설득되지 않은 사람들도 가난한 사람에게 베풀어진 자비와 그들 지방이 받게 된 명예로 깊은 감화를 받았고 그러므로 그들은 그 인에 대해서 하나님께 찬양을 돌리 수밖에 없었다. 일반 종교를 지닌 사람조차도 그렇게 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그런데 만약 모든 사람들이 그 일로 인하여 하나님을 영광 돌리는 그것을 기유로 제사장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처벌한다면 그들은 백성들에게 인기를 상실하고 하나님과 사람 양쪽의 적으로 간주되어 버림받고 말 것이었다. 이러므로 그들의 진노는 오히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했고 그들은 말을 잃었다.

(2) 그렇지만 앞으로 그들이 더 이상 활동하지 못하도록 금하는 것이 필요하였다(17,18절). 그들은 사도들이 말하고 행한 것에서 트집잡을 만한 것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더 이상 전하거나 그들이 행한 일을 계속하지 못하도록 할 필요는 있었다. 그들의 관심은 어떻게든지 "그리스도의 도리가 더 이상 퍼지지 못하게 하는데 있었다." 병고친 사실이 염병처럼 퍼지기 시작했으므로 그 전파력을 저지시켜야만 했다. 우리는 어떻게 악마의 궤교가 천상의 세력에 대항하여 싸우는지를 보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 전 세계에 전파되기를 계획하시나 대제사장들은 그리스도가 더 전파되지 못하도록 막고 있다. 하늘에 있는 분이 웃으심이여! 이제 그들은 이 가르침이 더 이상 확장되지 않도록 방해하고 있다.

① 그들은 사도들에게 더 이상 복음을 전파하지 못하게 저지하였다. 그들은 권위로써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18절) 제정한다(그들은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양심의 판단에 따라 예수에게 복종하게 될까 두려워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왜 금해져야 되는지 이유를 제시하는 것을 발견할 수 없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거짓이라거나 위험하다거나 나쁜 조짐이 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정당성을 인정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었다. 그 가르침은 그들의 위선 됨과 사특함을 들어내 주었고 그들의 독단적 처사에 충격을 주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들의 뜻을 관철시키는 데 있어서 이유를 댈 도리가 없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너희에게 엄히 명하노니 이 도리를 공개적으로 가르치지 말며 사적으로 어떤 특정인에게도 이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17절)"고 한다. 신실한 사역자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고 세상의 빛을 말 아래 두는 행위보다 악마를 기쁘게 하는 일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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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그들은 사도들이 전파하면 그들을 엄하게 다루리라고 협박하였다. 즉 대단히 위험할 것이라고 한다. 이들 재판자들은 사도들이 어기고 행하면 떳떳이 그들에게 욕보일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요 그러기에 사도들이 언짢은 일을 당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에게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전하라 명하셨을 뿐 아니라 그들을 도우실 것과 상 주실 것을 약속하셨다. 이제 이들 제사장들은 복음 전파를 금할 뿐 아니라 극악한 범죄로써 처벌하리라고 협박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약속의 참 가치를 바르게 아는 사람들은 그들이 비록 죽인다는 협박을 당한다 할지라도 세상의 위협을 가볍게 여길 수 있는 것이다(9:1).

Ⅱ. 죄수들은 배심원들의 결단과 그 결단의 선포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그들의 임무를 수행할 것을 용기 있게 결심함을 본문에서 볼 수 있다(19, 20절). 베드로와 요한은 서로 서로 마음을 알았기 때문에 머리를 맞대고 논의할 필요가 없었다(그들은 모두 한 분 같은 성령에 의해 행동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즉시로 같은 심정이 되어 함께 답변하였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와 우리가 누가 옳은지 판단하라. 하나님의 말을 듣는 것 보다 너희 말을 듣는 것이 옳은지 너희 스스로 판단해 보라. 우리는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사람들 앞에서 말하지 않을 수 없노라. 또한 마음 속에 가득 찬 것을 공개하지 않을 수 없노라"라고 답변한다. 간교한 뱀이 그들이 복음을 전하지 못하도록 이렇게 유혹했을지도 모른다. 즉 양심이 바로 되어 있다면 더 이상 복음을 전하지 않겠다고 약속할 수야 없겠지만 구태여 전하겠다고 관헌들에게 말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러나 사도들은 사자와 같은 용기를 갖고 그들의 박해자의 권위와 악의를 무시하고 떳떳이 대하였다. 그들은 계속해서 가르칠 결심이란 것을 그들에게 말하였다. 그들이 가르치겠다는 말에는 두 가지 사실이 포함되어 있다.

1.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이라 한다. "너희는 우리에게 복음을 전하지 말라고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것을 전하라 하신다. 그는 우리를 믿고 의탁하셨고 그것을 전하는 데 성실히 충성할 것을 요구하신다. 그러나 하나님과 너희 중에 우리가 누구에게 복종해야 하겠는가!"라고 항변한다. 본문에서 그들은 자연법에서의 "공인된 정언(定言)" 즉 인간의 명령에 하나님이 개입하면 하나님의 명령이 우선적이라는 법칙에 호소하고 있다. 만일 어떤 법령이 하나님의 율법에 상치되면 그 법령은 효력을 잃는다는 것이 영국 헌법에 규정되어 있다. 무한히 지혜로우시고 거룩하시며 우리의 창조자시며 주권자이시고 우리 모두가 그로 말미암아 판단을 받는 심판자이신 하나님에게 순종하지 않고 나약하고 흔들리기 쉽고 같은 피조물이며 같이 하나님에게 예속된 그 인간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것은 없다. 경우가 너무나 분명하고 돌이킬 수 없이 자명하므로 비록 너희가 편견에 사로잡혀 있지만, 너희에게 판단을 맡긴다는 말아다. 그래 하나님이 보시는 데 인간의 명령에 복종하기 위해 신의 명령을 어기는 것이 옳은지 너희가 생각해 보라고 한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옳은 것이 참으로 옳은 것이다. 우리가 확신하기는 그의 심판은 진리에 의한 것이요 그러기에 우리도 그것에 의하여 다스림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2. 그것은 그들 양심에서 우러나는 확신이기 때문이었다. 비록 그들이 하늘로부터 그리스도의 도리를 전하라는 이 같은 구체적인 명령을 받지 않았다 해도 "그들이 보고 들은 바를" 공개적으로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엘리후처럼 그들은 "말이 가득 차고 그들 안에 계신 성령이 그들을 강박하였으므로"말할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해야 마음이 시원하였다(욥 32:18, 20).

(1) 그들은 어떤 힘이 그들에게 가해짐을 느꼈다. 그들에게 얼마나 축복된 변화가 일어났는가! 그 결과 그들은 새 세계로 들어오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것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스도의 도리를 말하는 사람들은 그 능력을 느낄 수 있으며 그 오묘함을 맛볼 수 있으며 그들의 "뼈속에서 불"이 붙는 것 같아서(렘 20:9) 깊은 감동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2) 그들은 복음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멸망할 수밖에 없는 영혼들에 관심이 있었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지 않고는 그들이 영원한 파멸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들을 열심히 깨우치고 바른 길을 제시해 주었다. "우리가 전하는 것은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확신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일을 보고 들은 사람이 우리밖에 없는데 만일 우리가 전하지 않으면 누가 전하겠는가. 주님에 대한 두려움과 마찬가지로 그의 사랑도 알므로 우리가 사람들을 설득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뭇 영혼에 대한 사랑이 우리를 강박하도다"(고후 5:11, 14)라고 그들은 말한다.

Ⅲ. 죄수들의 석방(21절). "그들은 사도들을 다시 위협하고" 그들이 사도들을 놀라게 한 줄로 여기고 "그들을 놓아주었다." 그들은 많은 사람들을 위협하여 그들의 불의한 선고에 복종하도록 하였었다. 그들은 추방한다고 위협하여서 사람들을 순복 하게 하는 방법을 알았다(요 9:22). 그러므로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하듯이 사도들도 똑같이 다룰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들은 잘못 판단하였던 것이다. 왜냐하면 사도들은 다른 사람들과 달리 예수와 함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사도들을 협박하였다. 그리고 그것이 고작 그들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런 후에 그는 "그들을 석방했다."

1. 그들은 "이루어진 일에 대해서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고" 있는 백성들을 감히 반박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들이 사도들을 그 행위대로 처벌한다면 백성들이 자기들을 의자에서 끌어낼 것같이 생각되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임명된 관헌들이 악한 백성에게 위협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처럼 백성들도 하나님의 섭리에 따를 때 악한 위정자들에게 위협과 통제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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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들이 기적을 반박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왜냐하면 "이 표적으로 병 나은 사람은 사십여 세나 되었기 때문이었다"(21절).

(1) 그가 "모태에서부터" 앉은뱅이였으므로 기적은 더욱 놀라운 것이었다(3:2). 그가 나이 먹을수록 그 병은 더욱 깊어졌고 따라서 더욱 고칠 수 없었다. 성인이 되어 악에 깊이 젖어있던 사람들이 영적 무기력을 치료받고 악습에서 떠난다면 하나님의 은총의 능력이 더욱 증대하지 않겠는가!

(2) 병 고친 사실이 더 확실히 입증될 수 있었던 것은 그리스도가 치료해 주었던 장님과 같이 그도 직접 자신에 대해서 말하라고 요구받았을 때 그는 "40여 세나 되는 성인이었으므로" 답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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