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 원어 설교

[야고보서 4장 주석 성경말씀] 비방과 오만에 대한 경고(약 4:11-17)

체데크 2023. 2. 18.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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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 4장에서는 다른 사람을 비방하는 것에 대해서 말씀한다. 형제를 서로 비방하지 말라고 했다. 사람은 자기의 기준에 맞추어 사람을 판단하여 비방한다. 하나님은 이렇게 하지 말라고 했다. 율법적인 잣대를 가지고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고 했다. 자기가 다른 사람을 비방하면 자기도 다른 사람으로부터 비방받는다.

 

비방과 오만에 대한 경고(약 4:11-17)

 

Ⅰ. 우리는 악한 말을 하는데 죄에 대한 경고를 듣는다. "형제들아 피차에 비방하지 말라"(11절). ‘카탈랄레이테’ 남을 해치고 상하게 하는 말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비록 다른 사람들이 잘못을 하였을지라도 우리가 그 일에 대한 증인으로 불림을 받지 않았으면 그들을 비방해서는 안 된다. 그 잘못을 들추어내는 것이 필요한 때가 종종 오는 법이다. 타인의 잘못이 분명하든지 분명치 않던지 간에 그 잘못을 드러내는 일에 신중해야 한다. 우리의 입술은 진리와 정의의 법을 따를 뿐만 아니라 친절의 법도 따라야 한다. 솔로몬은 덕 있는 여인에게 필요한 것에 대하여 "입을 열어 지혜를 베풀며 그 혀로 인애의 법을 말하며"(잠 31:26)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모든 진실한 그리스도인에게도 필요한 것이다. "피차에 비방하지 말라"는 말씀은,

1. 너희가 서로 형제이기 때문이다. 야고보는 여기서 형제들이라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다음과 같이 논리를 성립시킨다.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형제가 되기 때문에 서로를 더럽히고 명예를 훼손시키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서로 형제라는 말로써 사랑스러운 관계가 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좋은 말을 할 수 없을 때에는 전혀 말하지 않는 것이 악한 말을 하는 것보다 더 낫다. 우리는 남의 비밀을 폭로하여 그 잘못을 세상에 알리는 일을 즐겨해서는 안 된다. 또한 실제의 잘못 보다 더 과장하여 말한다든지 심지어 무죄한 사람에 대해서가지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 이런 행위는 우리와 똑같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 세상 안에서 미움과 박해를 당케 할 뿐이며, 결국 우리 자신도 그들과 같은 처지에서 흥하거나 망해야 한다. "너희가 서로 형제임을 명심하라."

2. 이러한 행위는 율법을 판단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그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11절). 모세의 율법에 보면 "너는 네 백성 중으로 돌아다니며 사람을 논단하지 말고 네 이웃을 대적하여 죽을 지경에 이르게 하지 말라"(레 19:16)고 하였다. 또 그리스도의 법을 보면,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마 7:1)고 기록되어 있다. 위의 두 구절의 본 뜻은 인간의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남을 상하게 하는 혀가 이웃을 비방할 때에, 그것은 곧 하나님의 율법과 그리스도의 계명을 정죄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명을 파괴하는 행위는 사실상 그것이 너무 엄격하며 우리에게 너무 무거운 짐을 짊어져 준 것처럼 나쁘게 말하고 판단하는 것이다. 여기서 야고보가 대상으로 삼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간에 자주 의견의 대립을 보였는데, 그 이유는 아무래도 좋은 일들(롬 14장에서 볼 수 있는 고기 먹는 문제 등과 같은)에 대한 견해의 차이 때문이었다.

그래서 지금 야고보 사도는 말하기를, "하나님의 율법이 아무래도 좋도록 허락하고 있는 일에 대하여 자기와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고 해서 자기의 형제를 욕하고 비난하는 자는 율법이 잘못을 저지른 것처럼 율법을 욕하고 비난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지정해 놓지 않은 것을 자기 맘대로 주장하여 형제와 다투고 비난하는 사람은 마치 하나님의 말씀이 완전한 법칙이 아닌 것처럼 하여 하나님의 말씀은 귀중함을 손상시키고 잇는 것이다. 율법을 판단하지 않도록 주의하자. 왜냐하면 주의 율법은 완전하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율법을 파괴한다면 그 율법으로 심판을 받을 것이다. 만일 그가 율법을 파괴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를 판단하지 말자." 율법을 파괴하는 일은 흉악한 죄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우리들로 하여금 율법을 따라 행하여야 하는 우리의 처지를 망각시키고, 마치 우리가 율법의 심판자인 것처럼 율법 위에 군림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여기에 경계된 죄를 범하는 사람은 율법에 순종하는 사람이 아니고 율법을 판단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자기 소관이 아닌 일과 직책에 관여하며, 마침내 그 외람됨으로 인하여 고난을 당할 것이 분명하다. 율법을 판단하는 일에 가장 앞선 자는, 일반적으로 그 율법을 순종함에 가장 실패한 자이다.

3. 율법을 제정하신 하나님은 인간을 최종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유일한 분이다. "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하나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관대 이웃을 판단하느냐"(12절). 왕들과 나라들로 법을 제정하고 또 그 법을 복종함에서 제외되기는 하지만, 그 중에서도 하나님은 최고의 법을 복종함에서 제외되기는 하지만, 그 중에서도 하나님은 최고의 입법자로서 양심의 법을 주시는 분이시며 절대적으로 복종을 받으실 오직 한 분이시다. 법을 제정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권리는 논의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법을 시행하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지만" 그 외의 어느 누구도 그렇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율법을 준수하는 자에게는 보상을 주시며, 율법을 거역하는 자에게는 벌을 내리실 수 있는 충분한 권세를 가지고 계신다. 하나님께서는 영혼을 구원하시고, 또 그 영혼을 영원히 복되게 하실 수도 있으며, 반면에 영혼을 죽이신 후 지옥에 던져 넣으실 수도 있는 분이다. 그러므로 가장 위대하신 입법자로서 그를 두려워하고 순종해야 하며, 모든 심판은 그분에게만 위탁되어야 한다. 오직 한 분이신 입법자가 계신고로 우리는 우리의 양심을 다스리는 법을 어느 한 인간이나 인간 집단이 제정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결코 침해될 수 없는 하나님의 특권이기 때문이다. 야고보 사도는 앞에서 많이 선생되려고 하는 것을 경고했듯이 여기서는 많이 심판자가 되려고 하는 것을 경고하고 있다. 우리는 형제를 지시하거나 또는 욕하지 말아야 하겠다. 하나님의 율법은 우리 모두를 다스릴 수 있는 법이므로 그 자체로써 충분하며, 더 이상의 법을 제정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특별한 사상이나 견해를 가지고 자기 주위를 모든 것을 판단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입법자는 오직 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Ⅱ. 우리는 여기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우리의 생명이 계속되리라는 외람된 확신과 또 매사에 성공하리라는 자신에 대한 경고를 듣는다(13,14절). 야고보는 율법을 판단하고 비방하는 자들을 책망하면서 이제는 하나님의 섭리를 무시하는 자들을 책망한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유하며 장사하며 이를 보리라 하는 자 들아"(13절).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의 말과 행실을 신중히 검토해 보면 실수로 인하여 많은 악을 계속해서 저지르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바와 마찬가지로, 야고보 당시에도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이런 일도 하고 저런 일도"하리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것은 모두 하나님의 섭리를 부인하는 태도였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의 것들을 관찰할 수 있다.

1. 세속적이고 자기 머리를 신뢰하는 인간들이 그들이 세운 계획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떠나게 얼마나 쉬운가! 누구든지 세상적인 것에 집착하게 되면, 그것은 그의 마음을 사로잡아 그 일에 깊숙이 빠져들도록 만드는 이상한 힘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 속한 어떤 것을 추구하고자 하는 거센 의도와 열심을 주의하여 견제하여야 한다.

2. 인간들이 자기 마음속에 이전부터 마음먹고 계속하여 오는 일에는 세속적인 큰 행복이 들어 있다. 그들의 머릿속은 장차 무엇을 할 것인가, 또 무엇이 될 것인가, 그리고 이제 곧 즐기게 될 것에 대한 아름다운 환상으로 가득 차 있으나, 그들은 그것이 언제 이루어질 것이며, 그것이 그들 자신에게 무슨 유익을 가져다 줄 것인가에 대해서는 전혀 확실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3. 하나님의 섭리하심과 관계없이 미래에 대하여 화려한 기대를 갖는다는 것이 얼마나 헛된 일인가!라는 것이다.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그들이 말하기를)라는 말은 그 당시에 커다란 교통의 요지였던 안디옥이나 다메섹 그 도시를 중의 하나에 꼭 도착하게 되리라는 확실한 보장이 어디에 있었겠는가! 중도에 무슨 일이 생겨서 못 가게 되거나 아니면 다른 곳으로 이끌려 가기도 하고 심지어는 그 실낱같은 생명을 잃기도 했었을 것이다. 실제로 여행을 떠난 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잃었고, 자기들이 목적한 도시에 도달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이 그곳에 갈 수 있었다고 가정해 볼 때, 그들이 거기에서 무엇을 하여 머무를 수가 있었겠는가! 무슨 일이 생겨서 그대로 다시 되돌아가거나 그곳에서 호출을 당하고 체류 기간이 단축되기도 했을 것이다. 또는 그들이 그 목적한 곳에 충분히 머무를 수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곳에서의 장사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보장은 없었다. 아마도 그 도시에서 앓아 누울지도 모르며, 장사하려고 기대하고 있었던 사람을 만나지 못할지도 모르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그 도시에 갈 수 있었고 거기서 일 년을 유하며 장사했다 할지라도 이익이 남지 않았을 것이다. 이 세상에서 이익을 남긴다는 것은 기껏 노력해 봤자 불확실한 것이며 오히려 이익되기보다는 손해 보는 장사이기가 쉽다. 그러므로 이생의 모든 특성과 덧없음과 불확실성을 감안하여 미래의 생에 대하여 헛되고 외람된 확신으로 계획하는 일들을 점검해 보아야 할 것이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모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14절). 하나님께서는 지혜로우신고로 인간들로 하여금 미래에 관하여 예측하지 못하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인간이 살 동안의 일조차도 미리 알 수 없도록 하셨다. 우리는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하려고 하며 또 장차 되고자 하는 계획들을 가지고 있으나 수없이 많은 일들이 생겨나서 우리의 계획을 방해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삶 자체가 마치 잠시 보이기는 하나, 손으로 잡을 수 없고 있는지 없는지 확신할 수도 없으며, 또 곧 사라지고 마는 안개와 같으므로 삶에 대한 확실한 보장을 가질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내일 해가 뜨고 지는 시각을 알 수는 있으나 언제 안개가 흩어져 버릴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인생은 마치 이 안개의 흩어짐과 같은 것이다. "너희는 잠깐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인생은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만다. 그러나 또 다른 세상에서 계속될 삶이 존재한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삶이 너무나 불확실한 것이므로, 우리는 장차 올 세상을 위하여 준비하고 모든 것을 저장해 두는데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Ⅲ. 우리는 여기서 우리의 생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우리가 의존되어 있음을 항상 명심하여 우리의 모든 행동과 기쁨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도록 주의해야 할 것을 배운다.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 저것도 하리라 할 것이거늘…"(15절). 이제까지 잘못을 범한 자들을 책망하던 야고보는 이제 그들이 장차 되어야 할 모습과 좀 더 나은 행실을 행하여야 할 것을 가르쳐 준다. "너희는 항상 마음 가운데 생각하며 특히 너희의 정해진 기도 시간과 헌신의 시간에 입으로 고백하기를 만일 주께서 우리의 생명을 연장시켜 주시고 우리의 소유하시며 축복하여 주신다면, 우리가 장수하고 주의 축복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고백은 경솔하거나 습관적인 표현으로 가 아니고, 깊이 생각하는 중에 고백하는 것이어야 하고, 그 고백 속에 경건됨과 신중함이 깃들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우리의 신앙을 고백할 때에도 마찬가지로 이렇게 신중하고 경건되게 고백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고백이 우리 자신을 향해서 말해져야 한다는 것은 필수적인 것이다. 희랍인들은 모든 일을 시작할 때에 ‘쉰 데오’ - 즉 하나님의 허락하심과 축복이 함께 하시길!라고 말했다 한다.

1.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15절), 우리가 우리의 수명이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허락하심에 달려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만큼 살 수 있으며, 하나님께서 주신 환경 속에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명을 다하여 하나님께 순종해야만 한다. 그리고,

2. "주의 뜻이면 이것저것을 주관하에 달려 있다. 우리의 머릿속은 여러 가지 염려와 계략으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과 가족들과 친구들을 위하여 이것저것을 하려고 계획을 세울지라도 때때로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의 방안들을 가로막아 버리고 모든 계획들을 혼란 가운데 던져 버린다. 그러므로 우리의 행동방안과 행동에 대한 모든 주관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위탁되어야 한다. 우리의 모든 계획과 행동은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의존되어야 할 것이다.

Ⅳ. 우리는 여기서 헛된 자만심을 피하고, 그것을 과소평가할 것이 아니라 매우 악한 것으로 경계해야 할 것을 배운다.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16절). 이들은 하나님의 권능을 올바로 주시하지 않은 채, 이 세상에서 장수하며 많은 재물과 번영을 얻게 될 것을 스스로 자부한다. 그리고 그들은 이런 일들을 실제 이루어진 일들처럼 자랑한다. 이런 기쁨은 세상 사람들의 기쁨으로써 그들은 그들의 성공을 자랑하나, 때로는 장차 성공하게 될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단지 계획만으로도 자랑하곤 한다. 사람들이 그들의 허영과 외람됨에서부터 연유된 것들만으로 자랑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사도는 말하기를)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라고 하였다.

그것은 실로 어리석은 것일뿐더러 해로운 것이다. 인간들이 그들 앞에 제시된 겸손한 의무에 충실하지 않고(8-10절), 오히려 세상적인 것들과 그들이 열망하고 있는 계획만을 자랑하게 될 때에 이는 악한 일이다. 이와 같은 허탄한 자랑은 하나님편에서 볼 때 대단히 큰 죄이며, 인간 자신들에게도 커다란 실망을 가져다줄 것이고, 결국에 가서는 파멸을 초래할 것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생명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음을 알고, 또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섭리에 달려 있음을 알며 이 하나님이 우리와 계약을 맺으신 하나님이신 것을 믿고 기뻐할 때, 이 기쁨은 선한 것이다.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과 섭리는 모든 일이 우리의 유익을 이루도록 함께 역사하지만, 그러나 만약 우리가 우리의 허망한 확신과 외람된 자만으로 즐거워한다면, 그것은 악한 일이다. 모든 현명하고 선한 사람들은 이러한 악을 주의 깊게 경계하여야 한다.

Ⅴ. 우리는 여기서, 모든 행동에 있어서 우리의 확신을 따라서 행동할 것과 또 하나님을 대할 때나 인간을 대할 때나 항상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에 모순된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하여 배운다.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17절). 알고도 행하지 않은 것은 더욱 악한 죄이며, 그 죄는 증언할 증인을 가진 죄이다. 인간이 자기의 양심을 거스리는 죄를 범할 때, 그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불리한 증인을 가지는 죄에 해당된다. 다음을 명심하라.

1. 이 구절은 바로 전 절에 분명히 나타난 "만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이것저것을 하리라"란 말씀과 직접 연결되어 있다. 그들은 곧이어 말하기를 "알고도 행하지 않는 것이 죄라는 것이야 분명한 일이 아닌가! 그리고 또, 우리들 모두의 생명과 호흡과 가진 모든 것이 전능하신 하나님께 의존되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라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라는 것을 알면서도 행하지 않았을 때 이것은 더욱더 큰 죄가 된다는 사실이다.

2. 태만함과 범죄 행위와 마찬가지로 심판에 이르는 죄가 된다. 행하여야 할 것을 알면서도 선을 행하지 않은 자와 행해서는 안 될 것을 알면서도 악을 행한 자는 둘 다 마찬가지로 정죄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양심이 바로 알아야 할 것을 알게 하고, 또 그 지식에 따라 충실하고 끈기 있게 복종해 나가도록 해야 할 것이다. 만일 우리의 양심이 우리 자신을 정죄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고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본다고 하면서도 우리의 보는 바대로 행하지 않을 때, 우리의 죄는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다(요 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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