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 원어 설교

[요한복음 3장 주석 강해설교말씀] 니고데모와 예수님(요 3:1-21)

체데크 2023. 1. 8.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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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3장에서는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대화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자 밤에 왔다. 거듭남에 대해서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예수님이 복음을 전해주었을 때 니고데모가 복음을 깨닫고 구원받았다.

 

니고데모와 예수님(요 3:1-21)

 

앞장의 끝에서는 예루살렘에 머무시는 그리스도에게 몇몇 사람이 왔는데, 여기서 상당한 지위에 있는 한 사람이 그에게 왔다. "한 사람"이지만, 구원을 위해서라면 먼 길을 갈 만한 값어치가 있다.

Ⅰ. 니고데모란 어떤 사람인가? 많은 권세자가 나오지는 않았다. 그러나 여기에 다소의 권세를 지닌 한 사람이 있다. "많은 지도자"가 아니라 한 "바리새인"이다.

1. 이 사람은 "바리새인 중 한 사람"으로, 학식을 가진 선생이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이 "교육을 받지 못한 무식한 사람들"이란 이야기는 하지 말자 바리새인의 원리들과 그 파의 특색은 기독교의 정신과 직접적인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거만한 사상을 포기하고, 그리스도에 복종까지 한 사람이 몇 명 있었다. 그리스도의 은혜는 최대의 반대자도 굴복시킬 수 있다.

2. 그는 "유대인의 관원"으로 유명한 산헤드린의 회원이고, 귀족이며, 추밀원 회원이다. 예루살렘에서는 권세 있는 사람이었다. 사태가 좋지 않았으나, 잘해 보려는 몇몇 관원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당시의 풍조가 그들에게 너무 강하게 영향을 줌으로써 거의 선을 행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다수라는 무기를 지나치게 휘둘렀으며, 부패한 자들과 어울려서, 그들이 바라는 선을 행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계속 그의 직책에 있으면서, "바라는"것은 못했지만 "할 수 있는"한 선은 행할 수가 있었다.

Ⅱ.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그이 진지한 말(2절).

1. 그의 방문 시기를 보자. 그는 "밤에 예수에게 찾아왔다."

(1) 그는 그리스도와 개인적으로 특별한 이야기를 했다. 그리스도의 공적인 설교를 듣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단독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이야기하기로 결심했다. 우리 자신의 문제에 대하여 유능하고 신앙이 돈독한 목사님들과의 개인적인 대화는 우리에게 매우 유익되게 한다(말 2:7).

(2) 그가 이런 이야기를 "밤에" 했다는 것에 주목할 만하다.

① 그의 "신중성"과 "사려분별"한 행위를 보여 준다. 그리스도는 온종일 공적인 일을 행하시고도, 기대치 않은 그의 밤 방문을 거절하지 않으셨다. 즉 쉬실 때이지만 맞아들였다. 우리 자신과 가족들의 개인적인 편리가 공적인 임무를 수행하는 사람의 쉼을 침해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에게는 많은 적이 있었다. 그러므로 니고데모는 대제사장들에게 알려지지 않도록 몰래 그에게 왔는데, 만일 대제사장이 이 사실을 안다면 그를 그리스도보다 더 미워하게 되기 때문이다.

② 그의 "열성적이고 재빠른" 행동. 니고데모는 사업가여서, 낮에는 그리스도를 방문할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방문 시간을 저녁이나 밤의 휴식을 택하기로 했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잠자고 있을 때, 다윗이 명상에서 위로를 받은 것처럼(시 43:6; 119:148). 그는 지식을 얻고 있었다. 아마 그가 그리스도를 방문한 때는 그리스도의 표적을 본 바로 그다음 날 밤일 것이다. 그래서 그는 확신을 얻을 수 있는 첫 기회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는 그리스도가 이 도시를 조만간 떠날지도, 또는 이 축제 중에 무엇이 발생할지도 모르기 때문에, 결코 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다. 또 밤중에는 그리스도와의 대화가 더 자유스러울 것이며, 그만큼 방해를 덜 받게 될 것이다. 이것이 아태스(Attic)의 밤들보다 훨씬 더 교훈적인 기독교인의 밤들이다.

③ "두려움"과 "소심한" 행동이다. 그는 그리스도와 만나는 것이 두려웠거나 부끄러워 밤중에 찾아갔다. 한 종교가 쇠퇴할 때는 관리들 중에서 특히 니고데모와 같은 사람들이 많이 속출하는 데, 이들은 전에 자기들이 섬기던 종교보다 그리스도와 그의 종교에 더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

첫째, 그가 비록 밤에 찾아갔지만, 그리스도는 그를 환영하고 그의 연약성을 용인했다. 그는 그의 "기질"을 존중했다. 그는 아마 성격 탓으로 소심하고 지위와 직책에서 오는 유혹도 받고 있었을 것이다. 이로써, 그리스도는 자기 제자들에게 모든 사람의 본의 되며, 비록 연약하지만 이들의 초창기 신앙을 격려토록 가르쳤다. "바울도 유명한 사람들에게 사사로이 가르쳤다"(갈 2:2).

둘째, 비록 그가 "밤중에" 왔지만, 그러나 이후에 기회가 있을 때 그는 그리스도를 "공공연하게" 인정하였다(7:50; 19:39) 처음엔 비록 한알의 겨자씨 같은 은혜이지만 점점 자라서 큰 나무가 된다.

2. 그가 한 말은 무엇인가? 그는 비록 관원(정치 지도자)이었지만 정치나 사회문제에 대하여 이야기하려고 찾아온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영혼과 구원 문제를 해결하려고 지체하지 않고 왔다. 그는 그리스도를 랍비라 불렀는데, 이것은 "위대한 사람"을 나타내는 말이다(사 19:20 참조). "여호와께서는 그들에게 한 구원자, 위인을 보내시리라." 원문은 "한 구원자와 랍비"라 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소망이 있기 때문에, 그들은 그를 명예스럽게 말한다. 그는 자기 지식은 그리스도와는 비교가 안 된다고 했다. "주는 선생인 줄 압니다."

(1) 그리스도에 대한 그이 "단언"을 보자.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이십니다." 다른 선생들처럼 사람에 의하여 교육받고 임명받은 선생이 아니라, 신의 영감과 권능에 의하여 교육받은 선생이 아니라, 신의 영감과 권능에 의하여 인정받은 선생이었다. 왕국의 통치자가 될 그는 먼저 선생으로 오셔서 엄한 대신에 이성으로, 무력 대신에 진리의 힘으로 다스릴 것이다. 이 세상은 무지하고 오류에 빠져서, 유대인 선생들은 부패되어 있고, 사람들을 오류로 이끌고 있었다. 주님의 일하실 때가 바로 이때이다. 그는 자비스러운 아버지처럼 어두운 거짓 세상을 긍휼히 여겨,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이었다. 즉 이 하나님은 빛의 아버지이며, 진리의 근원이시고 또한 우리의 영혼을 감히 내맡길 수 있는 모든 빛과 진리이시다.

(2) 그리스도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임을 "확신"했다. "우리가 압니다." 그리스도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이란 사실은 분명하고 당연한 사실로 여기고 있다. 아마 그는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 바리새인들과 관원들 사이에도 차이가 있다는 것, 그리고 그들은 은혜를 모른다는 사실을 알았다. 또는 그가 그리스도에게 가르침을 받도록 자기의 동료들과 관원들 한두 명을 그에게 데려 왔기 때문에 그가 "우리"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라 볼 수도 있다. "선생님"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가르침을 받고 당신의 제자가 되려고 찾아왔습니다."

(3) 이런 확신의 근거를 보자.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습니다."

① 우리는 그리스도가 행한 표적이 진실하다는 것을 확신하며, 이 표적들이 허위가 아닌 것도 안. 여기서 니고데모는 사려분별이 있고, 현명하며, 호기심이 강한 사람으로, 그리스도가 행한 표적들을 "이유"와 "기회"를 가진다. 니고데모는 사려분별이 있고, 현명하며, 호기심이 강한 사람으로, 그리스도가 행한 표적들을 "이유"와 "기회"를 가진다. 니고데모는 이런 표적들이 진실로써, 그리스도 자신의 이익과 지식의 획득을 위해서가 아니라는 사실에 매우 만족했다.

② 그리스도의 표적으로부터 어떤 차이점을 보게 된다. 그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임을 알게 된다. 그의 표적들을 그의 표적들은 그의 신임장들이다. 자연의 순리는 변경될 수 없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는 가능하시다. 이런 표적은 하나님의 진리이시고 선이시며, 결코 자신을 감추거나 가장하려고 하지 않으신다.

Ⅲ. 그리스도와 니고데모 사이의 대화 혹은 오히려 그가 니고데모에게 가르친 설교. 본문의 내용은 그의 공적 가르침이 요약된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11,12절 참조). 여기에 우리 주님이 가르치신 4가지의 사실들이 있다.

1. "거듭남의 필요성과 본질"을 가르쳤다(3-8절). 이제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1) 이것도 니고데모의 말에 대한 "예수의 적절한 대답"이었다.(3절). 이 대답은 다음 두 가지 뜻 중 하나일 것이다.

① 니고데모의 말에서 발견한 결점을 "꾸짖음"이라 할 수 있다. 그가 그리스도의 표적을 칭송하고 그의 기적을 칭송하고 그의 사명을 인정하는 것으로 할 바를 다 했다고 볼 수 없다. 그는"거듭나야 한다"라고 니고데모가 "하늘나라" 즉 메시아의 왕국이 곧 임하기를 바란 것은 분명하다. 그는 그날의 여명을 즉시 알고 있었다. 그래서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견해에 따라서, 그날이 웅장한 모습으로 능력을 수반하고 나타날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는 표적을 나타내신 예수가 메시아이거나 혹은 하나님의 예언자임을 의심치 않았다. 그래서 그에게 비위를 맞추고, 아첨해서, 그의 왕국에 대한 유리한 위치를 확보하려 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거듭나는 것에 상응하는 "정신, "원리, 성질 등의 변화가 없이는 즉 사람의 외적 변화만으로는 그 나라의 혜택을 누리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다. 니고데모는 밤중에 찾아왔다. "그러나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라고 그리스도는 말씀하셨다. 사람 이전에 그 사람의 신앙이 인정되어야 한다고 하몬드(Hammond) 박사는 말하고 있다.

② 니고데모의 말속에 "숨겨진 의도"에 대한 그리스도의 "대답"이라고도 볼 수 있다. 니고데모가 그리스도를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 즉 하늘로부터 특별한 계시로 오신 선생임을 고백했을 때에, 이런 계시가 무엇인지를 알려고, 그리고 이 계시를 받을 수 있는 준비에 대한 바람을 분명하게 시사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그것을 밝혀 주었다.

(2)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중생을 "적극적이고 열렬하게" 강조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른다." 즉 "나는 아멘이요, 아멘이므로 네게 이른다." 다시 말한다면 "나는 신실하고 진실 증인이다." 여기서 확실한 것은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네게 이르노니, 바리새인이거나 이스라엘의 선생이거나 거듭나야 한다."

① 이 말이 요구하는 것이란 "거듭나야 한다"는 것이다

첫째, 우리는 "새 생명"으로 태어나야 한다. 출생이란 생명의 시작이다. 중생은 이제까지 많은 잘못을 범했거나, 헛되이 살았던 사람들이 거듭나서 새롭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낡은 건물을 수선하는 것이 아니라, 기초부터 새로 시작해야 된다.

둘째, 우리는 새로운 본성, 새로운 원리, 새로운 사랑, 새로운 목표들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위로부터 거듭나야 한다. 우리는 다시 새롭게 태어나야 하며(갈 4:9), 근원으로부터(눅 1:3), 거듭나야 한다. 우리의 첫 번 태어남에서 우리는 부패되어 죄와 불의에 심히 빠져들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위로부터 거듭나야 한다. 즉 우리의 영혼이 새롭게 형성되어 활기를 띠어야 한다. 또 우리는 "위로부터" 나야 한다. 이 말은 복음서 기자에 의하여 사용된 단어로써(3:31; 19:11) 여기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위로부터" 낳는다는 것은 거듭남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새롭게 남이란 하늘로부터의 남을(1:13), 그리고 하늘을 향하는 자세이다. 다시 말하면 거룩하고 신적인 생명으로, 하나님과 하늘나라와 교제하는 삶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신의 본성을 나누어 받아야 하고 "신의 형상"을 지녀야 한다.

② 거듭남의 필요불가결을 보자.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은총으로 시작해 영광으로 완성된 하늘나라를 볼 수가 없게 된다." "위로부터 태어난" 사람이 아니고서는 결코 하늘나라를 볼 수 없다.

첫째, 우리는 중생의 "성질"을 "이해할 수 없다." 하늘나라에 관련된 사물의 본성(니고데모가 알기를 바랐던)은 우리가 그것을 깨닫고 이해하기 전에 먼저 다시 태어나 영적으로 변화되어야 한다(고전 2:14).

둘째, 우리는 그리스도가 그의 복음에서 어떤 혜택을 기대할 수 없다면, 역시 하늘나라의 위로도 받을 수 없다. 다시 탄생한다는 것은 앞으로 우리의 행복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현재 우리의 본성을 생각해 본다면 대단해 부패하고 죄로 가득 차 있어서, 하나님 안에서만 우리는 행복해질 수 있으며, 하늘나라에서 완전한 행복을 누릴 수 있다. "우리는 거듭나야 한다." 우리가 거룩하게 되지 않고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고전 6:11, 12), 이와 같이 거듭남의 필요성에 대한 진리가 강조되고 있다.

a. 니고데모는 의혹을 가졌다.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습니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습니까?"(4절). 여기에서

(a) 그의 지식의 연약함이 드러났다. 그리스도가 영적으로 말씀하신 것에 대하여 그는 육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육의 다시 태어남이 아니라, 불멸하는 영의 새로운 탄생을 모르는 것과 같으며, 또한 영과 육의 관계에 있어서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육만을 새롭게 태어나는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다른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니고데모는 분명히 자기의 출생과 거룩한 땅인 예루살렘의 경건과 권위들과 자기의 가문, 예를 들면 바울이 누릴 수 있는 혈통(빌 3:5)을 아주 대단하게 여겼다. 그러므로 거듭난다는 소리가 그에게는 매우 놀라웠다. 그래서 그는 거듭남이란 이스라엘인으로 태어나서 자란 것보다 더 좋은 출생과 성장으로 또는 메시아 왕국에서의 출생과 성장을 생각했을 것이다. 참으로 그들은, 개종된 이방인들이 다시 태어나거나 새롭게 되는 것으로 여겼지, 유대인 더구나 바리새인이 거듭난다면, 처음 출생 방법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첫 출생을 자랑하기 때문에 다시 "새로운 출생"이란 거의 생각할 수가 없었다.

(b) 가르침을 받으려는 그이 열의가 있다. 니고데모는 그리스도의 난해한 말씀 때문에 떠나지 않고 보다 더 잘 이해하려는 욕심에서 솔직하게 자기의 무지를 인정했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가 말씀이 나에게 하나의 수수께끼이므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사람이 자기 어머니를 통하지 않고 태어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습니다." 어두움에 감추어져 이해하기 어려운 하나님의 진리에 접했을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시해 줄 때까지" 우리는 겸손과 근면으로써 계속 지식의 수단을 활용해야 한다.

b. 우리 주 예수에 의해 더 자세히 설명된다.

(a) 예수는 자기의 이야기를 되풀이하고 확신시킨다.(5절).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전과 같으니라." 성경의 교훈들은 "예"와 "아니요"가 아니라 "예"와 "아멘"이다.

(b) 예수는 거듭남에 대해서 분명하고 상세하게 말씀하셨다.

[a] 예수는 이 복된 변화의 "저작자"이시다. "거듭난다는 것은 영으로 태어난다는 것이다"(5-8절). 이 변화는 우리 자신의 어떤 지식이나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은혜의 성령에 의한 권능과 강화에 의해서이다. 이것은 성령의 성화에 의해서(벧전 1:2), 그리고 새롭게 하시는 성령에 의해서 (딛 3:5)이다.

[b] 이러한 변화를 가져오는 본질은 "영"이다(6절). 거듭난자들은 성령으로 난 사람으로서, 육욕의 찌꺼기가 없어진다. 이성적이고 불멸하는 영의 명령에 의하여 거듭난 자들은 육을 지배할 수 있는 권한을 회복한다. 바리새인들은 외적인 경건과 행함에도 그들에게는 참으로 굉장한 변혁이 될 것이다.

③ 이런 변화의 "필요성". 무엇보다도 그리스도는 "일의 성질상" 거듭남의 필연성을 보여 주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거듭나지 않고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합당치 않기 때문이다. 즉 "육으로 난 것은 육이다"(6절). 육을 입었다는 것이 우리의 병패이므로 거듭나지 않고서는 다른 방도가 없다.

첫째, 현재의 우리들은 "썩어질 육체"이다(창 6:3). 영혼은 여전히 영적인 실체이지만 육과 결합되어 있으며, 육의 의지에 따라 개발될 수 있고, 육의 사랑에 빠질 수도 있다. 이런 상태에서는 영이신 하나님과 우리에게 어떤 사귐이 가능하겠는가?

둘째, 육을 입고 태어난 우리가 "어떻게" 거듭날 수 있겠는가? 육을 입은 우리들은 타락되어 있으므로, 새로운 본성 즉 영은 두 번째의 태어남에서 비롯됨이 틀림없다. 니고데모는 모태에 다시 들어갔다가 날 수 있느냐고 말하지만, 만약 그렇게 된 들 무슨 의의가 있겠는가? 만약 그가 100세에 모태에 들어갔다가 다시 태어나더라도 소용이 없다. 그 이유는 육으로 태어난 사람은 여전히 육이기 때문이다. 그는 또 다른 근원을, 곧 성령으로 거듭나야지만 영의 사람이 된다. 즉 간단히 말하자면, 처음에는 인간이 육과 영이 조화가 되어서 영이 육을 거의 주관함으로써 살아있는 영(창 2:7)의 인도를 받았지만, 육의 탐심으로 금지된 과일을 먹음으로써 영의 주관을 받던 인간이 육욕적인 탐심의 횡포의 노예가 되어 더 이상 살아 있는 영, "생명"으로서의 인간이 아니라 육의 인간이 되어 버렸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살아있는 영이 거의 무력하고 침체되었다. 아담이 죄를 범한 이후 참 인간은 죽고, 인간은 육적인 존재가 되었다. 이런 타락의 상태에서 하나님은 자기의 형상인 그리스도를 보내셨다. 아담은 하나님께서 주신 참 인간성을 부패시키고 타락시켰으며, 이러한 나쁜 상태가 계속 만연되고 있다. 그래서 부패와 죄가 우리 안에서 활동하고 있다. 즉 우리는 죄에 젖어 있기 때문에 우리의 본성이 변화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가 새로운 옷이나 새로운 얼굴을 갖추는 것으로는 충분치 못하다. 새로워져야 한다. 그리스도는 말씀으로 그렇게 되기를 거듭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본성이 변화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가 새로운 옷이나 새로운 얼굴을 갖추는 것으로는 충분치 못하다. 새로워져야 한다. 그리스도는 말씀으로 그렇게 되기를 거듭 강조하고 있다.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고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7절). 그리스도가 거듭나도록 말씀하신 것을 사람들이 반박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들은 그의 말씀에 따라서 거듭나야 한다. 그리스도는 위대한 법률가로서, 그의 뜻이 곧 법이다. 즉 그는 신학의 위대한 중재자로서, 우리와 하나님을 화해시킬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을 소유하고 계신다. 또한 그는 영혼의 위대한 치유자로서, 우리의 병을 잘 아시며, 치유토록 강조하신다. "너희들은 거듭나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즉 모든 사람들에게 말한다. 너희들은 거듭나야 한다. 이스라엘의 피지배자들과 지배자들 그리고 제사장들 모두가 마찬가지이다."

또 "거듭나란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우리가 치러야 하는 것들, 즉 우리의 구원에 대한 위대한 계획, 우리의 본성의 부패, 그리고 우리 앞에 놓인 행복의 성취와 함께 하나님의 거룩함을 깊이 생각해 볼 때 우리에게 필요한 유일한 한 가지를 강조한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거듭나야 한다"라고 하는 것이다. 그 강조를 우리는 이상스럽게 여길 필요가 없다.

[d] 두 개의 비교로써 이러한 변화가 설명되고 있다.

첫째, 성령으로 인한 거듭남의 역사가 물로 비교되고 있다.(5). 거듭남에는 " 물과 성령"으로 난다는 말이다. 즉 성령과 불로 써란(마 3:11) 말이 불과 같은 성령을 뜻하는 것으로써, 물과 같이 역사하는 성령을 의미한다.

1. 원래 여기서 뜻했던 것은 영혼을 성화시키는 성령을 말하고 있다.

(1) 하나님 나라에 합당토록 물로써 죄를 씻고 깨끗케 하여야 한다. 우리의 구원은 중생의 씻음(딛 3:5)이며, 씻기움을 받아야 한다(고전 6:11; 슥 36:25 참조).

(2) 물이 상한 마음과 피곤한 여행자를 진정시키는 것처럼 성령은 우리의 영혼을 진정시키고 새롭게 하신다. 성령이 물로 비유가 되고 있다.(7:38, 사 44:3). 첫 창조 시에, 하늘의 열매들이 "물로 태어났다"(창 1:20). 이 말은 아마도 암암리에 위로부터 태어나는 자는 물로 태어남을 가리키는 것 같다.

2. 그리스도는 세례 의식을 염두에 둔 것 같다. "너희는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것은, 영적인 은혜의 보이는 징표로써, 물로 세례를 베푸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모든 유대인 중에서 오직 세례 받은 사람만이 구원을 받았다. 즉 성령의 세례에 의하지 않았지만, 물세례에 의해서 거듭나게 되었다. 유대인들은 메시아 왕국을 차지할 수가 없다. 그런데 그들은 그토록 오랫동안 그 나라를 갈망해 왔다. 그러나 그들이 율법의 공로를 주장하지 말고 죄의 사면을 위한 복음과 그 의무를 수락하지 않는 한 그 나라를 차지할 수가 없게 된다는 말이다.

둘째, 성령은 "바람"으로 비유된다. "바람이 임의로 불 듯" 성령으로 난 사람도 그러하니라"(8절). 바람과 성령은 같은 단어이다. 성령이 "급하고 강한 바람"처럼 제자들에게 임했으며(행 2:2). 죄인들의 마음속에"놀랄 만한" 영향력을, 성도들의 영혼 속에는 "바람의 호흡"이 작용한다고 했다(사 41:16). 이러한 비유를 통해서 중생에 있어서의 성령은 "임의로운," 자유로운 행위자처럼 작용한다.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우리가 마음대로 할 수 없으며, 우리의 지시에 종속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람을 지시하시며," 바람은 그 말씀을 쫓는다(시 148:8). 성령은 어느 장소나 때나 사람에게 감화를 주며, 정도에 따라서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다"(고전 12:11).

또 성령은 "힘 있고" 확실한 증거로 역사하신다. "너희가 그 소리를 듣는다." 즉 비록 그 원인은 감추어져 있지만, 그 결과는 뚜렷하다. 영혼이 죄 때문에 신음할 때, 타락의 멍에로 괴로워할 때 그리스도가 마지막 숨을 내쉬며 "아비"라 부르짖을 때 우리는 성령의 소리를 들으며, 그의 역사 하심을 볼 수 있다. "그가 기도 하도다"(행 9:11).

성령은 "신비스럽고" 감추어진 방법으로 역사하신다. "너희는 성령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갔는지를 알 수 없다." 성령이 어떻게 임해서, 어떻게 작용되는지는 우리에게 하나의 수수께끼이다. 즉 성령이 역사하는 모양과 방법은 하나의 신비이다. 어느 길이 성령이 다니는 길이냐?(왕상 22:24)(전 11:5; 시 139:14 비교)

3. 복음 진리에 대한 그리스도의 말씀과 니고데모의 무지.

(1) 니고데모는 여전히 반론한다(9절).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거듭남의 필요성에 대한 그리스도의 설명이 그에게 분명히 이해되지 않은 것 같다. 거듭남의 "필연적인" 것으로는 매우 수수께끼 같았다. 비록 그가 그리스도를 선한 선생으로 인정했지만 그가 알고 있던 사상과 반대되자 그리스도의 교훈을 거부하고 있다. 이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대체로 그리스도의 교훈을 인정은 하지만, 아직도 기독교의 진리들을 믿지 않으며, 기독교의 율법에 복종치 않고 있다.

① 니고데모는 결국 그리스도가 말씀하신 뜻을 알지 못했다.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이러한 것은 내가 알지 못하는 것으로 내 능력이 거기까지 미치지 못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은 보통 사단에게는 어리석게 보인다." 사람은 그런 것들과 멀어져 있기 때문에 반대로 그를 모를 뿐 아니라 거기에 대해 나쁜 편견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 것들이 사람들에게는 어리석게 보인다.

② 이러한 교훈이 그에게 "불가해적으로" 보였기 때문이다(그래서 그는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그것에 대한 진리를 알려고 물었다. 마치 그러한 진리가 그에게 역설이었기 때문에, 그 자체가 괴물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지식의 한계를 느끼고, 그들이 알지 못하는 것은 증명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지식으로 그리스도를 알지 못한다.

(2) 그의 우둔과 무지에 대한 그리스도의 책망을 보자. "네가 이스라엘의 선생인가?" 선생이란 가르치는 자로서, 모세의 위치에 서있는 자이다. 그러나 아직도 거듭남의 교리도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 교리도 이해할 능력이 없는가? 이 말씀은 하나의 책망이다.

① 사람들을 가르치는 선생들이 의(義)의 말씀에 아직도 무시하고 서툴렀다. ② 종교의 개념들과 의식들, 성서의 미묘한 점들과 비판들을 배우고 가르치는 데에 시간을 보내야 하는 선생들이, 마음과 삶을 실제적으로 개혁시키는 데 소홀히 했다. 책망하는 이 두 말씀이 매우 두드러지게 눈에 띄고 있다.

첫째, 그의 운명이 던져진 장소가 이스라엘로서, 그곳은 지식을 받을 수 있는 방편이 많이 있으며, 신의 나타남이 있었던 장소이었다. 따라서 그는 이런 거듭남의 교훈을 구약 이외에도 직접 알 수 있는 터이다.

둘째, 그가 알지 못했던 거듭남이란, 필연적인 일, 중요한 일, 거룩한 일이었다. 그는 시편 1편 5, 10절, 에스겔 18장 31절, 36장 25,26절을 읽지 않았던가?

(3) 복음의 진리에 대한 확실성과 웅대함을 말하는 그리스도의 담화(11-13)가 어리석은 사람들에게는 이상하게 보이며, 그들을 통하여 우리도 알도록 해 주고 있다.

① 그리스도가 가르치고 있는 진리들은 아주 확실하므로 우리들은 과감히 나가야 한다(11절). "우리는 우리가 안다고 이야기한다." "우리"란 그리스도 외에 누구를 가리키는가? 혹자는 그리스도를 증거 하고, 또한 지상에서 그와 함께 전도 사업을 한 예언자들과 세례 요한을 말한다고 본다. 그들은 자기들이 "알고," 보았던 것을 "말하고" 있어서, 스스로 그것을 입증할 증인을 대동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성령을 말한다고 본다. 하나님 아버지는 그리스도와 함께 계시며, 주의 영은 그리스도 주위에 머물러 계신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가 저에게 가리라"(14:23)처럼 복수로 말씀하신다.

첫째, 그리스도의 진리들은 의심할 바 없는 확실성이 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교훈이 신실성 있는 교훈이란 확실한 근거를 가지고 있으므로, 그에게 우리의 영혼을 과감히 맡기고 있다. 다시 말하면, 그분은 우리를 속이지 않는 "신실한" 증인이실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이 속임을 받지 않는 "유능한" 증인이시다. "우리는 우리가 보았던 것을 증언한다." 그분은 소문에 의하지 않고 가장 확실한 증거 위해서 말씀하시므로, 가장 위대한 확증자이시다. 그가 하나님, 보이지 않는 세계, 천국과 지옥, 우리와 관련된 신의 의지, 그리고 평화의 사자 등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은 그가 알고 있고 이미 보았던 것들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 곁에 있어서, 날마다 기뻐하신 바가 되었기 때문이다(잠 8:30). 그가 말씀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자기 자신의 지식에서 나온 말씀이시다.

둘째, 죄인들의 불신앙으로 전혀 오류가 없는 그리스도 진리의 확실성이 심히 악화되어가고 있다. 그의 진리는 이렇게 확실하고 분명한데, 아직도 그들은 우리의 증거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무리들은 믿지 않는 자들이지만, 믿음의 계기가 너무 설득력이 있어서,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② 그리스도가 가르치신 진리들이, 비록 일반적이고 세속적인 일들에게서 나온 용어와 표현들로 전달되었지만, 사람들에게는 매우 고상하고 거룩하게 들려졌다. 이런 암시가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12절), 즉 거듭남과 바람의 비유처럼 무리들이 더 쉽고 더 잘 알 수 있도록 땅의 일들을 비유로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이야기하려 해도 또 내가 이와 같이 사람들의 한계에 나를 적응시켜, 사람의 용어로 말하더라도 사람들은 나의 교훈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만일 내가 자신을 일들의 특성에 적응시켜 천사의 입으로 말을 한다면 사람들은 어떻게 될까? 만일 그렇게 낯익은 표현들이 방해물이 된다면 추상적인 관념은 오죽하랴?"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첫째,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높고 깊음을 존중해야 한다. 그의 진리는 훌륭한 선의 신비이다. 복음 사업들은 훌륭한 사업으로 인간 이상의 물음을 넘어서서, 그 이상(以上)을 발견토록 한다.

둘째, 그리스도의 겸손을 감사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그는 복음을 우리의 능력에 알맞도록 드러내시는데, 마치 어린아이에게 이야기하듯이 그는 우리가 땅에서 태어나, 땅에서 생활하는 우리의 처지를 고려해서, 땅의 일로 말한다. 그래서 땅의 일을 영적인 전달의 수단으로 삼아 우리에게 더 쉽고 잘 알 수 있도록 한다. 이와 같이 그는 비유와 의식을 활용하셨다.

셋째, 우리의 본성의 부패를 슬퍼하셨다. 즉 그리스도의 진리를 받아들여 즐거워하지 못하는 우리의 큰 불합리, 땅의 것은 천하고 하늘의 것은 알기 어렵기 때문에 모두 멸시된다. 그래서 어떠한 방법이 취해지든 여전히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마 11:17).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지혜로 정당화되며, 또한 될 것이다.

③ 우리 주 예수만이 우리에게 그의 교훈을 분명하게 그리고 자세하게 나타내 주신다.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다(13절).

첫째,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 주실 분이다. 니고데모는 그리스도를 하나의 예언자로서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구약의 모든 예언자들보다 위대하신 분임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어떠한 예언자도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기 때문이다.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성서를 기록했지, 자기 자신의 지혜로 기록한 것이 아니다(1:18 참조). 모세는 산으로 올라갔지 하늘로 올라간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도 그리스도처럼 하나님에 대한 확실한 지식과 하늘의 일을 지닌 사람은 없다(마 11:27 참조). 우리는 가르침을 위하여 하늘로 올리워지지 못한다. 하늘의 뜻이 우리에게 보내져, 받을 수 있도록 우리는 기다려야 한다(잠 30:4; 신 30:12 참조).

둘째,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나타낼 수 있으며, 모든 면에서 자격을 갖추셨다. 그는 "내가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너희가 어떻게 믿겠느냐?"라고 했다(12절). 여기에서

1. 그는 무리들에게 하늘의 일에 대한 실증을 주려고 하늘에서 내려온 자, 그러나 "인자"이신 분을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사람의 영혼"에 거듭남을 신비스럽게 여긴다면, "하나님의 아들"이 성육신 한 것도 마찬가지로 여길 것이다. 이러한 일들은 참으로 거룩하고 신성한 일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한 인격에 있는 두 본성을 알 수가 있다. 하늘로부터 내려 온 그의 신성과 사람의 아들인 그의 인간성이다. 그는 아직도 "하늘에 있는" "사람의 아들"로서 이 두 본성이 결합되어 있다.

2. 그는 무리들에게 하늘의 일을 말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며 그들을 하늘나라의 신비로 안내할 수 있다고 증거 한다.

(1)"그가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교통이 위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보내어진다. 그것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해서 우리에게 보내어졌기 때문이다. 이런 것은

① 그리스도의 신성을 암시한다. 그가 "하늘로부터 내려왔기" 때문에, 그는 확실히 인간 이상이다. 즉 그는 하늘로부터 온 주(主)이시다(고전 15:47).

② 그는 하나님의 뜻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것은 그가 하늘로부터 내려왔기 때문에 하나님과는 계속적인 친교를 맺고 있다.

③ "하나님을 나타내심"이다. 구약에서는, 자기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은총을 "하늘의 소리에 귀를 기울임"으로써(대하 7:14), 또는 "하늘을 바라봄"으로써(시 80:14), 또는 "하늘로부터 말씀함으로써(느 9:13), 나타났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우리를 가르치고 구원하시려고 하늘로부터 내려오시는 하나님이 보여 주고 있다. 이와 같이 그가 내려오신 것은 놀랄 만한 하나의 신비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자기 위치를 변경시키거나 하늘로부터 자신의 몸을 가져오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내려 오심"은, 정말 그의 놀라우신 자비로써, 여기에 그의 사랑이 있다.

(2) "그는 인자(人子)이다." 이 말은 다니엘(7:13)이 한 것이며, 유대인들은 항상 있지만, 아직도 하나님처럼 하늘에 속해 있다. "인자"로서는 승천할 때까지 하늘에 있지 않고 땅에 있으나 신성으로서는 하늘에 있다. 영광의 주 자체는 십자가에 달릴 수 없으며, 하나님 자신도 그럴 수 없다. 그러나 영광의 주이신 그 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며(고전 2:8),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신의 보혈로" 교회를 사셨다(행 20:28). 메시아를 그렇게 불렀다. "인자"로 칭함으로써 그리스도는 자기를 제2의 아담임을 보여 주고 있다. 그것은 첫 번째의 아담이 "사람의 시조"였기 때문이다. 모든 구약의 이름이 메시아로 되어 있지만, 그는 거의 "인자"란 말을 사용하고 있다. 그것은 이 말이 자기의 겸손을 가장 잘 나타내며, 현재 자기의 초라함과 거의일치하게 때문이다.

(3) 그는 "하늘에 있다." 그가 땅에서 니고데모와 이야기하고 한 인격 안에 두 본성이 아주 긴밀히 결합되어 서로 본질적인 교통을 하고 있다. 하나님은 "스스로 있는 분"이며, 하늘은 "그의 거룩함"의 처소이다.

3. 그리스도는 자신이 "세상에 내려온 위대한 의도와 자기를 믿는 자의 행복"을 말한다(14-18절). 여기에 모든 복음의 핵심이 들어 있다. 그리스도는 신실한 말씀으로(딤전 1:15), 죽음으로부터 세상을 구하시러 오셨다고 말씀하신다. 이제 세상 사람들은 죄인이므로, 이중적으로 죽었다.

(1) 치명상을, 혹은 불치의 병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뱀에 물린 이스라엘인들을 구리뱀이 치유시킨 것처럼(14,15절) "우리들을 치유하러"오셨다.

(2) 용서받지 못할 범죄로 죽음이 선고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율법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들의 처지를 생각하셔서, 그리스도는 배상의 행위를 치르는 왕자나 재판관으로서 혹은 어떤 조건하에서 관용을 베풀기 위해 오셨다. 이러한 구원은 정죄와는 정반대다(16-18절).

① 이스라엘 백성이 불뱀에 물리어 죽어가고 있을 때 능력의 지팡이를 바라봄으로 생명을 건지게 한 것처럼(민 21:6-9) 그리스도는 우리를 "치료하시러" 오셨다. 범죄 한 자기 백성이 죽음 직전에서, 모세의 손을 통하여 구원받은 마지막 기적을 우리는 볼 수 있다. 이 같은 그리스도의 모형에서 몇 가지 주목할 점이 있다.

첫째,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의 본성" 죄책은 불뱀에 물린 "고통"과 같다. 타락의 힘은 이와 같이 독액이 퍼지는 것과 같다. 악마는 처음에는 간교하나(창 3:1), 나중에는 그 유혹이 불과 같이 급격해, 그의 공격은 무시무시하며, 그의 승리는 파괴적이다. 깨어 있는 양심에게 물어보라. 저주받은 죄인들에게 물어보라. 그들은 죄의 유혹이 얼마나 달콤한지를 이야기할 것이다. 그러나 "결국에는 뱀에게 물릴 것이다"(잠 23:30-32). 죄 때문에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불뱀을 보내어 그들의 불평거리를 처벌하는 것과 같다. 율법의 저주는 불뱀과 같아서, 그것이 신의 분노에 대한 징표가 되고 있다.

둘째, 능력 있는 치료에 의해서만 이런 치명적인 질병을 구할 수 있다. 죽은 죄인들의 경우는 애처롭다. 그러나 그들은 어쩔 수 없었을까? 그렇지 않다. 길리아드에 향유가 있음을 하나님에게 감사드려야 한다. "모세가 광야에서 구리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한다."

a. 이스라엘 백성을 치료한 것은 "구리뱀"이다. 구리(영문은 "놋")란 "밝은"색으로 성서에서 보면, 그리스도의 발이 "구리처럼 빛나고" 있음을 본다(계 1:15). 구리가 영속성이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도 그러하다. 이 구리가 "불뱀"의 모양으로 만들어졌으나, 독이 없고 쏘지 않아 그리스도를 표상하기에 적절하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죄를 지셨지만, 죄를 알지 못하며, 죄로 물든 육의 형상을 가졌지만, 죄로 물들지 않으셨다. 이것은 마치 독이 없는 구리뱀과 같으시다. 뱀은 저주받은 짐승으로, 그리스도도 우리를 위하여 저주받으셨다. 그들의 치유를 통해서 그들의 곤경을 상기토록 하셨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죄가 무서울 정도로 분명하게 드러났다.

b. 모세의 지팡이가 들려진 것처럼 인자도 들려져야 한다. 이와 같이 "그를 바라보라"(눅 24:26, 46). 이제는 치유가 끝났고, 그리스도는 들려지고 있었다.

(a) 들려짐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수난을 상징한다. 그는 십자가에서 들려졌다. 그의 죽음이란 "십자가에 들려짐"이라 했다(12:32, 33). 마치 그가 무가치하게 되고 버림받은 사람처럼 하늘과 땅 사이에 들려졌으나, 실은 일대의 장관처럼 그리고 하나의 징표로써 들려졌다.

(b) 그의 "영광"을 나타낸다. 그는 아버지의 오른편에 드리워져,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신다. 그가 십자가에서 들려짐으로 옥좌에까지 들려지게 되었다.

(c) 그의 영원한 복음이 "가르쳐지고 전파됨"을 상징한다(계 14:6). 수천 만의 이스라엘인들이 볼 수 있도록 구리뱀이 들려졌다. 복음 안에서 그리스도가 우리 앞에 확실히 드러내지고 있다. 다시 말하면 하나의 징표로써 들려지고 있다(사 11:10).

c. 그것은 모세에 의하여 들려졌었다. 그리스도는 모세의 율법하에 들어갔고, 모세가 그를 증거 하였다.

d. 이와 같이 들려졌다는 것은, 불뱀에 물린 사람들을 치유하려고 지정된 일이다. 재앙을 보낸 분이 치료책을 마련하셨다. 우리를 자기의 의로 정죄하신 분 이외는 어떠한 사람도 우리를 구원할 수가 없다. 하나님만이 속량의 근거가 되시며, 그 속량의 효험은 그의 지시에 달려 있다. 그들이 그리스도를 의심했기 때문에 처벌토록 "불뱀"이 보내어졌으나(그래서 사도들이 이야기함-고전 10:9), 그들이 다시 돌아섰기 때문에 치유되었다. 우리가 거역한 그리스도가 "우리의 평화"이시다.

셋째, 이러한 최상의 "적용"은 "믿음"을 통해서 된다. 즉 이스라엘인들이 치유받기 위해서 구리뱀을 "바라보기만"하면 된다고 했던 것은 바로 그것을 말해 준다. 만일 뱀에 물린 어떤 이스라엘인이 거의 자기 고통과 위험을 깨닫지 못했거나 혹은 모세의 말을 믿지 않고 구리뱀을 바라보지 않았다면, 그는 기필코 상처로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구리뱀을 "바라보았던" 사람들은 치유되었다(민 21:9). 만일 이제까지 죄로 인한 질병과 그리스도에 의한 처방을 조금이라도 경솔해 여긴다면 그들의 피는 그들에게 돌아갈 것이다. 그는 "보라, 그러면 구원을 얻으리라고"했다(사 45:22). 위대한 희생 제물이시고 중재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화해로, 죄악 된 세상을 구하시려는 그의 무한한 지혜의 방법에 우리는 만족하고 찬성해야 한다.

넷째, 신앙으로 그를 바라보도록 우리에게 커다란 용기를 준다.

a.. 그가 "들려지심"은 이런 목적에서다. 그를 따르는 자는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다.

b. 그에 의하여 "누구나" 구원받는다.

c. 주려고 내놓은 구원은 완전하다.

(a) 그들은 "멸망되지 않으며," 상처로 죽지 않을 것이다. 비록 그들이 고통을 당하고, 심히 두려워했을지 모르나, 범죄로 멸망받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뿐이 아니다.

(b) 그들은 "영원한 생명을 차지할" 것이다. 그들은 광야에서 그들의 상처로 죽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가나안 땅에 도착할 것이다 (그때의 그들은 가나안 땅에 즉시 들어가려 했다). 그들은 약속된 안식을 누릴 것이다.

②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용서함으로" 우리의 구원이 임했다. 그래서 우리는 율법의 선고에서 해방받게 되었다(16,17절). 여기에 참으로 복음이 있으며, 하늘에서 땅끝까지 이르는 최고의 소식이 있다. 여기에 화해의 말씀이 모두 내포되어 있다.

첫째, 여기에 "세상을 사랑하사 자기의 아들을 내 준"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16절). 우리는 여기서 세 가지의 일을 볼 수가 있다.

a. 위대한 "복음의 신비"가 나타남. "하나님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여 독생자를 주셨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은 성령에 의하여 우리의 거듭남과 아들의 들려지심에 의한 우리의 화해의 근원이 되신다.

(a)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다. 이 독생자를 우리에게 주시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주신 하나님의 사랑은 위대하시다. 그러므로 우리를 위하여 자기의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역에는 또한 아버지의 위엄과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사랑이 표현되어 있다. 그는 항상 아버지의 즐거움이 되신다.

(b)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서이다. 하나님은 기꺼이 자기 "독생자를 주셨다." 하나님은 차고 넘치는 능력으로 하늘과 땅을 화해시키려고 자기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을 뿐만 아니라, 자기 아들을 주셨다. 즉 훌륭한 화해자로서 혹은 속죄의 희생자로서, 우리를 위하여 자기 아들이 고통당하고 죽도록 하셨다. 여기에 그리스도가 "들려져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아버지에 의해서 결정되었고 계획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목적 때문에 자기 아들을 육신으로 보내셨다. 아버지가 자기 아들을 허락치 않으시면, 원수들이 그리스도를 취할 수가 없다. 비록 그가 아직도 십자가에 달리시지 않았지만, "아버지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 주었다"(행 2:23). 즉 하나님께서 그를 진실히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또한 새 언약의 취지와 목표로써 그를 제공하셨다. 그래서 그를 증언하는 우리의 예언자로, 우리의 평화자로, 교회의 머리로,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필요되시는 자로 내어 주셨다.

(c) 하나님은 자기의 사랑을 세상에 주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다." 그의 피조물들은 그의 지극한 사랑을 깨달아야 하며, 또한 피조물들이 잘되기를 원하는 하나님을 알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이 타락된 천사들을 미워하는 만큼 타락된 인간의 세계를 그만큼 사랑하신다(롬 5:8; 요 14:10 참조). 보라, 이 놀라운 사실을! 전능하신 하나님이 "쓸모없는"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시다니! "거룩하신" 하나님이 어떠한 위로도 기대할 수 없는 이 사악한 세상을 선하신 뜻으로 사랑하셨다. 이러한 사랑이 참 사랑이다(겔 16:6, 8). 유대인들은 자기 백성만이 사랑하는 메시아가 오셔서 이방나라들을 황폐시켜서 지배한다는 헛된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유대인들에게 자기는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전 세계의 이방인들까지 사랑하려고 왔다는 것을 전파하고 있다(요일 2:2). 비록 온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멸망할지는 모르나, 하나님께서 그의 독생자를 보내심은 이 세상에 대한 그의 사랑의 실증이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온 인류에게 생명과 구원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돌아와서, 회개하고, 헌신하려는 모든 자들에게 죄의 용서와 사면을 선포함으로써, 거역하고 불순종한 이 세상을 사랑하고 계신다. 이제까지 하나님은 거역되고 타락된 세상에 자기 아들 독생자를 보내실 정도로 사랑하시니,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을 것이다."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유래되었지만 이제는 그리스도가 이 세상 끝까지 구원자로서 알려지고 있다.

b. 위대한 "복음의 임무"가 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보내 주신 그리스도), 그의 은혜를 받아들여 보내 주신 자의 뜻에 응답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자기 아들에 관한 말씀의 기록에 성실히 수긍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는 우리의 예언자, 제사장, 그리고 왕이 되심으로 우리는 그에게 통치되고 가르침을 받으며, 그에 의해서 구원을 받아야 한다.

c. 복음의 유익함이 나와 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으면 멸망을 받지 않는다." 그가 전에 말씀하신 이 구절이 여기에서 되풀이되고 있다. 이 구절은 믿는 사람 모두에게 말할 수 없는 기쁨이 된다. 그것은 그들이 그리스도에게 영원히 빚지고 있기 때문이다.

(a) 그들은 지옥의 비참에서 구원되었으며, 끝없는 함정에서 건지어졌다. 그들은 멸망받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이 그들의 죄를 사하시니, 그들은 죽지 않을 것이다. 그들에게 용서가 주어짐으로 권리를 되찾았다.

(b) 그들은 하늘의 기쁨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즉 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이고 유죄로 선고된 반역자가 용서함을 받고 또 등용되어 사랑을 받는 사람이 되고 나중에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왕 중 왕이 되었다. "그는 옥에서 나와 왕이 되었다"(전 4:14).

둘째, 자기 아들을 세상에 보낸 하나님의 의도가 있다. 그것은 그를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것이었다. 그는 판단과 능력으로써 세상을 구원하러 오셨다. 그러므로 앞서 말한 그리스도의 생명과 구원을 우리에게 확실히 주셨으므로, 믿음으로 그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선하게 될 것이다(7절).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이 세상," 즉 죄가 많고, 반역하고 불순종하는 세상에 "보내셨다." 다시 말하면 때때로 그가 세상의 방문자이고 거주자인 천사들처럼 보낸 것이 아니라 자기의 사자나 대사로서 보냈다. 인간이 죄를 범한 이후부터 죄책을 느끼고 심판을 염려하는 것처럼, 또한 하늘에서 어떤 특별한 사자의 출현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았기 때문에 정녕 죽을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난다면, 그가 어떤 목적으로 오시는지를 인간들은 관심 갖게 된다. 평화를 주시려고? 사람들이 사무엘에게 두려운 마음으로 물었던 것처럼, "그분은 평화를 위해 오십니까?" 한다. 그가 평온하게 오심을 성서에서 찾아보면

a. 그는 세상을 정죄하러 오시지 않았다. 우리는 이 세상이 죄로 더럽혀졌기 때문에, 그가 확실히 오시리라 기대하고 있었다. 율법에 따르면 유죄의 선고는 처벌받아야 하는데, 어째서 그러한 처벌이 주어지지 않는가? 그 명분이란 무엇인가?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셨다"(행 17:26)는 사실 때문에 게하시의 문둥병처럼 인류는 유전병으로 "감염되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자손까지 멸망시킨 아말렉의 범죄처럼 "죄책을"지게 되었다. 그래서 세상이 심판받는 세상으로 되었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시려 했다면, 불꽃같이 무서운 검을 가진 그룹들(천사들)로 하여금 즉시 멸망시키도록 명했을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멸망시키려 했다면 그이 아들을 우리에게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은 심판하실 수 있는 능력이 계시지만(5:22, 27), 아직도 심판하시지 않았고, 그의 은총을 거두어 가지 않았으며, 또한 거룩한 계약에 대한 우리의 불이행을 추궁하지 않고 오히려 은혜의 옥좌 앞에서 재심을 받도록 했다.

b. 하나님은 아들을 통하여 세상이 구원받도록 하셨다. 또 그 구원의 문을 세상에 열어 놓고, 누구든지 그 문을 통하여 들어오도록 하셨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와 세상을 화해케 하고, 세상을 구원시키려 하였다. 사면조치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취해짐으로 이 세상 사람들은 첫 계약에 의하지 않고 둘째 계약에 의하여 구원받게 될 것이다. 즉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세상은 구원받게 될 것이다. 그것은 그를 통하지 않고서는 결코 구원 얻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즉 "다른 어떤 사람에게도 구원은 없다." 이것은 상처받고 피 흘리는 영혼을 치유키 위한 복음인데, 곧 그리스도는 우리의 재판관으로서 우리를 정죄하지 않고 구원하시려고 오셨다는 사실이다.

③ 이런 모든 것으로부터 믿는 자의 참 행복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한다"(18절). 비록 예수 안에 있는 자도 죄인이며, 자기의 신앙 고백대로 "유죄"로 선고받았으나, 그 재판은 지연되고, 정지되며, 결국에는 정죄받지 않는다. 이것은 단순히 형 집행의 연기가 아니다. 그는 "정죄받지 않는다." 즉 그는 무죄하다. 그가 정죄받지 않는다면 그는 혐의가 없는 것이다. 그는 죄과 대로 판결받지 않는다. 그는 "기소되어 있다." 기소자에게 자기의 "무죄"를 변호할 수도 없다. 그러나 바울이 변호할 것처럼 변호할 수 있다. "정죄하는 이가 누구입니까? 죽으신 그리스도입니다." 그는 고통당하고 세상 사람에게서 박해를 받았다. 그러나 정죄받지는 않았다. 아마도 십자가가 그를 무겁게 누르고 있었지만, 그는 그 저주에서 벗어났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롬 8:1; 고전 11:32).

4. 믿지 아니하는 자와 무지몽매한 자들의 비참한 상태에 관한 그리스도의 설명을 듣자(18-21절).

(1)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의 운명을 볼 수가 있다. 그들은 이미 정죄를 받고 있다. 여기서 관찰해 보면

① 믿지 않는 자들의 죄가 얼마나 큰 가를 알 수 있다. 그들이 경시한 그분의 존엄성 때문에 그들의 죄가 더 무겁다. 즉 그들은 무한히 진실하신 하나님의 독생자 이름을 믿지 않았으며, 그의 무한히 선하심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가치가 있음을 믿지 않았다. 하나님은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시어 우리를 구원토록 하셨다. 그런 하나님이 우리를 그만큼 사랑하시지 않는단 말인가?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이름보다 뛰어난 그이 이름을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는가?

② 믿지 않는 자들의 비참이 얼마나 큰가를 알 수 있다. 그들은 이미 "정죄를 받았다."

첫째, 확실한 정죄를 말하고 있다. 이미 그들이 정죄함을 받은 것처럼, 마지막 날에 반드시 심판날에 반드시 정죄받는다.

둘째로, 현재에 정죄함으로써 그들에게 이미 저주가 임했다. 지금 그들에게 하나님의 분노가 앞당겨지고 있다. 그들은 이미 정죄함을 받았다. 그것은 그들의 마음이 그들을 스스로 정죄하고 있기 때문이다.

셋째, 과거 그들이 죄를 범한 근거가 정죄함이 된다. 그의 모든 죄가 법에 의해서 드러났기 때문에 그는 이미 정죄함을 받았다. 법의 의무가 그를 완전히 고발하고 있다. 그가 신앙에 의하여, 복음 안에서 율법이 폐기되는 것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믿지 않기 이미 정죄함을 받았다. 불신앙은 진정 파멸시키는 큰 죄라고 칭할 수 있다. 그것은 우리를 또 다른 범죄들로 충동하기 때문이다. 죄는 치유와 대조이며, 우리의 호소를 가로막고 있다.

(2) 그리스도를 알 만한 빛을 주었으되, 알지 못하는 자들에 대한 파멸을 역시 알 수가 있다.(19절).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와 그의 가르침 그리고 그의 표적들을 알고 싶어 했으나, 그들은 그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그를 믿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주정뱅이처럼 무관심하고 어리석어서 그를 믿지 않았다. 이것이 정죄가 되어, 그들을 파멸시킨다. 즉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약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것이다. 여기서 관찰해 보면

① 복음은 빛이다. 복음이 세상에 왔을 때란 곧 "빛이 세상에 왔을 때이다." 빛은 자기를 스스로 증거 하듯, 복음도 마찬가지이다. 복음은 그 자신의 신적 근원을 나타내고 있다. 빛은 드러내게 하며 참 빛은 쾌적하고 마음을 기쁘게 한다. 어두움을 비추는 빛이 없으면 세상은 정녕 암흑이 된다. 복음의 빛이 "온 천하에 들어왔다"(골 1:6). 구약의 빛처럼 어느 한 장소에 한정되지 않았다.

② 빛보다도 어두움을 (더구나 빛도 복음의 빛인데) 사랑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말할 수 없이 어리석다. 유대인들은 율법이란 어두움을, 또한 그리스도의 가르침보다 눈먼 소경의 교훈을 사랑했다. 그리고 이방인들은 복음이 요구하는 온당한 예배의 대상인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미신적인 예배 행위를 사랑하였다. 죄인들은 그들의 육욕과 결합되어 무지와 과오를 사랑했으며, 그러한 것들이 그리스도의 진리들보다는 죄에 더 열중토록 했다. 금지된 지식을 사랑하게 된 인간의 거역이 오히려 무지를 더 사랑하게 되었다. 그래서 죄에 빠져 비참하게 된 인간은 자신의 질병과 종살이를 좋아하고 있다.

③ 인간이 빛보다 어두움을 사랑하는 뚜렷한 이유는 "그들의 행위가 악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의 약한 행위들을 감출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어두움을 사랑한다. 또 자기들의 죄와 비참을 드러내어, 자신들 안에 있는 선한 생각들을 잃게 한다고 하여 빛을 미워하고 있다. 그러한 경우는 비참한 상태로써 그들은 개선되지 않고, 빛을 볼 수가 없게 되고 만다.

④ 무지몽매함이 심판날에 죄의 변명이 될 수 없다. "심판은 정죄"로써, 그들의 영혼은 파멸되고, 그들의 눈은 빛을 외면하여 그리스도 그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께 말하기를 "우리를 떠나소서. 우리가 주의 도리를 알기를 즐겨하지 않나이다"하니라(욥 21:14). 그들은 주의 도리를 알아 그것을 행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알려고도 하지 않음 때문에 분명히 심판을 받을 것이다. 즉 그들은 주의 도리를 범하는 지혜뿐만 아니라 지킬 수 있는 지혜까지도 알고 있었다. 그리스도의 이러한 설명에 비추어 보면(20,21절) 인간의 마음과 삶이 선하고 악함에 따라서, 그들이 빛이신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도, 안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리스도의 오심을 영접해야 한다.

첫째, 악을 행하고 계속 악을 고집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의 빛을 싫어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것은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는"것이 일반적인 견해이기 때문이다. 악을 행하는 자들은 처벌에 대한 부끄러움과 두려운 생각을 넘어서서 자기들의 행위를 숨기려고 애쓴다(욥 24:13 참조). 악한 행위는 어두움의 행위이다. 처음부터 죄악을 숨겨 허물을 가리려 했다. (욥 31:31). 빛이 악인들을 쫓아버리듯(욥 38:12, 13), 복음은 악한 세상에 대해서 하나의 무서움이다. 그들의 행위가 고쳐지지 않는 한, 이러한 빛에 가까이 올 수 없고, 가능한 한 멀어지려고 한다.

a. 복음의 빛은 죄인들의 악한 행위를 "책망하기"위해 세상에 왔다. 즉 모든 것을 드러내고(엡 5:13), 그들의 범죄를 사람들에게 "보이고," 그들이 죄인으로 책망받았다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해서다. 그래서 "새로운" 계명에 의하여 죄는 "더욱 죄악적인"것으로 드러날 것이다. 복음은 죄에 대한 위로이면서 또한 선고이다.

b. 그래서 악을 행하는 자들은 복음의 빛을 미워한다. 그러나 "악을 행하였으나" 그것을 슬퍼하여 이러한 빛을 환영하는 자들도 있다. 세리나 창녀들이 그들이다. 그러나 악을 행하고 계속해서 악에 빠져있고, 빛을 싫어하는 자들도 있다. 그들은 자기의 잘못을 알지 못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세상에서 저항받은 것은 악한 "마음" 때문이다. 죄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미워한다.

c. "빛에 가까이 오지" 못하는 자들은 빛을 싫어한다는 증거다. 만약 그들이 "구원하는 지식"에 반감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저주스러운 무지"에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둘째, 한편으로, 하나님에게 자신의 순결함을 실증한 고결한 마음이 이런 빛을 받아들인다(21절).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나아온다." 그때 비록 복음에 많은 적이 있었지만, 소수의 복음 친구들도 있었던 것 같다. "진리를 구석진 곳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정직하게 표현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은 세밀한 조사를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러기를 바란다. 이러한 사람들이 복음의 빛에 알맞다. 복음의 빛이 악을 행하는 자들을 지적하고 두렵게 하는 것처럼, 선한 길을 걸어가는 사람에게는 안심과 위로를 준다.

a. "선한 사람"의 성격을 보자.

(a) 진리를 좇는 자이다. 즉 그의 모든 행위가 선하고 참되다. 때때로 그가 선을 행하는 데 부족할지 모르지만, 진리를 좇아서 선을 행하려는 것이 그의 목표이다. 그는 결점이 있지만, 조속히 그의 선을 회복할 것이다. 이것은 마치 신실하게 행동한 가이오나 바울(고후 1:12), 나다나엘(1:47), 아사(왕상 15:14)와 같다

(b) 빛으로 나아온 자이다. 하나님은 그가 빛으로 나온 만큼 자기를 계시하여 그가 자기를 깨닫고 영접토록 하여 주신다. 진리를 좇는 자는 스스로 진리를 깨우쳐 자기의 행위를 주의 법도에 맞게 해야 한다. 선한 사람은 하나님을 의지하여 말하기를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마음을 단련하소서"(시 26:2)라고 한다. 그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려고 열망하며, 비록 자기 자신이 뜻과 관심에 대립된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동하려고 결심한다.

b. "선한 일"의 성격을 보자. 선한 일은 하나님 안에서 그리고 헌신적인 사랑에 의한 그와의 친교 안에서, 그리고 계약 신앙에 의한 그와의 연합 안에서 역사된다. 그때에 우리의 일은 선하고 시험에 견딜 것이다. 그때는 하나님의 뜻이 우리 일의 법칙이 되고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 일의 목표가 될 것이다. 또한 그의 능력 안에서 일을 하게 될 때는 그에게 최선을 다하게 된다. 복음의 빛에 의하여 그렇게 된다면, 우리의 일도 그와 같이 됨이 명백하다. "그때에 우리가 기뻐하게 될 것이다"(갈 6:4; 고후 1:12). 이제까지 우리는 그리스도와 니고데모와의 대화를 알아보았다. 그러나 이 두 사람 사이에는 더 많은 대화가 교환되었을 것이다. 아무튼 좋은 결과가 있었다. 왜냐하면 처음에는 니고데모가 이상스럽게 여겼으나 후에는 그리스도의 신실한 종이 되었기 때문이다.(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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