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장에서는 베드로가 복음을 선포할 때 사람들이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복음을 듣고 회개하여 구원받았습니다. 초대 교회는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 많은 사람이 죄 사함을 받고 성령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지금 시대도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선포하여 많은 사람이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복음이 아니면 절대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이 세대에서 구원 받으라(사도행전 2:37-41)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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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순절날 성령께서 강림하시는 큰 역사가 있은 뒤에 성령 충만한 베드로가 설교를 합니다. 이것은 베드로의 첫 번째 설교말씀이자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본문말씀이기도 합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은 베드로 설교의 결론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오늘 이 시간에는 베드로의 첫 설교를 들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어떤 역사가 일어났는가 하는 설교의 결과에 대하여 생각하고자 합니다. 베드로의 설교는 모든 설교의 대표요 모범이요 근원이라고 생각됩니다. 이 설교에 대해서는 두 가지로 특징지어 말할 수 있습니다.
먼저, 베드로의 설교는 예수님의 권능으로 충만한 설교입니다. 베드로의 지혜가 아닙니다. 베드로의 말재주가, 지식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그의 설교를 통해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폭발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설교를 우리는 권능 있는 설교라고 합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지식은 있는데 권능이 없습니다. 때문에 교회가 부흥하지 못합니다. 철학적이요 교육적인 말씀은 있는데 권능이 없습니다. 때문에 생명의 역사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첫 설교는 분명 권능 있는 설교였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베드로 설교의 두 번째 특징은 생산적 설교라는 데에 있습니다.
보십시오. 이 설교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 한 번의 설교로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습니다. 삼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앞다투어 세례를 받습니다. 이들이 나가서 복음을 전합니다. 이렇게 해서 초대 교회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것은 엄청난 역사적 사건입니다. 한번의 설교로 삼천 명이 회개하고, 그 삼천 명이 나가서 복음을 전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 얼마나 굉장한 사건입니까? 얼마나 위대한 설교입니까? 베드로의 설교는 생산적인 설교였다고 한마디로 말할 수 있습니다. 본문말씀에서 볼 수 있듯 베드로의 설교는 모범적인 설교요 표본적인 설교요 성공한 설교였습니다. 쉬운 말로 잘한 설교, 바로 된 설교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베드로 설교의 본래적 의미를 한번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첫째, 처음부터 그랬듯이 베드로의 설교는 성서적입니다. 계속적으로 성경을 들어 증거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본뜻을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물론 성경에는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 등 많은 이야기가 어찌 보면 잡다하게 드러나 있습니다마는, 베드로는 성경 속에서도 가장 중요한 복음에 대해서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중심으로 복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성서적 복음을, 성경의 중심 맥락을 찾아서 설교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그의 설교는 성경이 말씀하는 본뜻을 깨끗하게 바로 전해주는 설교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능력이 나타났던 것입니다.
두 번째로 베드로는 합리적으로 설명합니다. 성경을 들어서 설명하고, 사건을 들어서 설명하고, 이치에 맞게 알아듣도록 설명합니다. 이것이 설교입니다. 무조건 믿으라 회개하라, 하고 소리 지르는 것은 설교가 아닙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사실 하나를 놓고도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저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성경을 들어서, 저들이 이미 알고 있는 지식을 더듬어서 체계 있게 합리적으로 설명합니다. 그것이 중요합니다. 이렇듯 베드로는 이치에 맞게 합리적 논리를 따라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베드로의 설교가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세 번째로 베드로의 설교는 적중도가 있었습니다. 설교를 하는 데 그것이 먼 이야기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옛날이야기나 앞으로 될 이야기나 남의 이야기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 설교를 듣는 모든 사람의 이야기가 되어야 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관계되는 이야기가 되어야 합니다. 가만히 보면 교회에 나와서 설교시간에 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비교적 우리 교회에는 조는 사람이 적은 편입니다. 다행스럽게도 지금은 아무도 졸고 있지는 않습니다마는, 조금 있으면 조는 사람이 생깁니다. 왜 조는 것일까요? 물론 피곤해서 졸기도 하겠지만, 설교시간에 조는 이유는 따로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못 알아듣기에 조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는 알아듣도록 해야 합니다. 알아듣도록 설명을 해야 합니다. 설교를 알아듣지 못하게 되면 생각이 따라가지 못하고, 결국은 집중력이 흩어져서 졸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와 상관없는 이야기를 하면 졸게 됩니다. 제가 가끔 설교시간에 부부관계에 대한 이야기나 혹은 자녀교육에 대한 이야기를 예로 들어서 설명을 합니다. 언젠가도 그런 내용의 설교로 예배를 마치고 나오니 어떤 아가씨 세 명이 저를 찾아와서는 정중하고도 심각하게 이런 말을 하더군요. "우리는 노처녀입니다. 우리와 관계된 이야기도 좀 해주세요. 남편이 어떻고 아내가 어떻고 하는 이야기는 우리와 상관이 없습니다. 게다가 자녀교육이 어떻고 하시는데 아이도 없는 우리에게 자녀교육이 무슨 소용 있습니까? 그러니 독신은 어떻고 하는 이야기도 좀 해주세요." 듣고 보니 맞는 이야기더군요. 무릇 설교는 듣는 사람 모두와 관계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사실 알아들을 필요도 없고요. 들어서 뭣해요? 골치만 아프게 말입니다. 설교는 내 생활과 내 현장과 내 처지와 내 생명과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모두와 관계되는 이야기를 한번 해볼까요? 당신들은 다 죽습니다.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과 다 관계되는 이야기입니다. 당신들은 다 죄인입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와 관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부한 자 이야기나 강한 자 이야기를 한다고 해보십시오. 가난한 사람들은 나와 상관없는 이야기다 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적중되는 설교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들어가 바로 먹힐 수 있는 설교가 중요합니다. 또한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 설교는 마음에 찔려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에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37절)"라는 말씀이 나오듯이 설교를 듣고도 마음에 찔리는 것이 없으면 소용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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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설교 듣고 은혜받았다는 말을 하지요? 그것이 바로 찔린 것입니다. 우리는 설교를 들으면서 계속 콱콱 찔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고개가 푹 수그러져야 합니다. 빳빳해져 가지고는 안됩니다. 순간순간 찔리면서 모든 것이 내 잘못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모든 것이 나 자신의 문제로 와닿는 설교, 내 마음을 찌르는 설교-이것이 베드로의 설교입니다. '찌른다'라는 말은 내 문제가 여기서 다루어진다는 말입니다. 나와 무관하게 느껴졌던 것이 바로 나 자신의 문제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 말은 말씀 속에서 자신의 죄인 된 모습이 노출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치 밝은 빛 앞에서 더러운 것이 다 노출되는 것같이 말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도 예쁘게 화장하고 오신 여자분들이 계십니다마는, 원래 이 화장이라는 것은 밤에 하게 되어 있습니다. 화장을 하고 밝은 대낮에, 해가 쨍쨍 내리쬐는 데에 한번 나가보세요. 시커멓게 칠한 눈두덩, 못 봐줍니다. 그 모든 위장이 다 드러나고 맙니다. 어차피 거짓말이니까요. 좀 예쁘게 보이려고 이렇게 저렇게 칠해는 놓았습니다마는 밝은 빛 앞에서는 소용없습니다. 다 노출되고 맙니다. 밝은 빛 앞에서는 화장이 통하지 않습니다. 화장은 밤이나 불그스레한 불빛 아래서나 통하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보통 때에는 다 의인 같고 다 잘난 것 같습니다마는 밝은 빛 앞에서는, 권세 있는 설교 앞에서는, 말씀의 빛 앞에서는 죄인임이 드러납니다.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설교를 들음으로 마음에 찔리는 것이 있습니다. 나는 용서받지 못할 사람이다, 죽일 놈이다, 하는 뉘우침이 듭니다. 만일 설교를 듣고도 이런 느낌이 없다면 그는 구원받지 못할 사람이요 은혜받지 못할 사람입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본문말씀을 보십시오.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베드로의 설교말씀을 들은 뒤에 마치 밝은 빛 앞에서 더러운 모습이 드러나는 것처럼 저들의 죄인 된 모습, 저들의 더러운 모습이 그대로 노출됩니다. 죄인 된 자신의 모습에 참지 못한 저들은 결국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묻습니다. 우리가 어찌하면 좋겠느냐고 부르짖습니다. "What shall I do?" - 내가 어찌하면 좋을까 하고 묻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 마음, 이 반응이 베드로 설교의 결과입니다. 좀 더 심각하게 이야기하자면 그것은 십자가사건을 만남입니다. 왜 찔렸느냐, 이것은 일반적인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무슨 죄를 짓고 무슨 실수를 하고…… 그런 이야기를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십자가사건입니다.
여러분, 그 당시에 있었던 장면을 마음으로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오순절이라고 했으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지 불과 50일밖에 안된 때입니다. 아직 두 달이 채 안 됐을 때입니다. 그러므로 저들은 십자가사건을 아직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개중에는 예수님께서 돌아가시는 장면을 목도한 사람도 많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베드로가 설교합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살리셨다고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36절)." 저들을 향하여 너희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외치고 있습니다. 이것이 수용할 수 있는 이야기입니까, 받아들일 수 있는 이야기입니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다는 것이 보통 죄입니까? 엄청나게 큰 죄입니다.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씻을 수 없는 죄입니다.
베드로는 말씀합니다. 너희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말입니다. 베드로 설교의 이 마지막 결론을 저들은 받아들이기가 어려웠습니다. 저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십자가사건은 50일 전의 일이므로 생생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가 누구입니까? 가야바입니다. 가야바가 원흉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그대로 못 박은, 구체적으로 못 박은 사람은 로마군인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준 사람은 빌라도입니다. 또 한 사람 가룟 유다가 관계되어 있습니다. 나아가 좀 더 넓게는 예수님 재판받으실 때에, 십자가에 매달리셨을 때에 그 밑에서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 지른, 몇 사람인지는 모르지만, 그들 역시 예수님을 죽이는 일에 가담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지금 베드로는 그들을 제쳐두고 설교를 듣고 있는 무리들에게 너희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아마 믿음이 없거나 성령의 은혜를 받지 못한 사람이라면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베드로선생, 말조심하시오. 내가 언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소? 그런 끔찍한 소리 하지 마시오."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본문을 보면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았다'라고 베드로가 말씀하자, 저들은 스스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음을 인정하고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묻습니다. 이 관계가 아주 중요합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네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라는 말을 듣고 "그렇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내가 언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소"한다면 그 사람은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 사람은 은혜에서 제외된 사람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을 보십시오. 지금 저들은 '예수님은 나 때문에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내 탓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라고 분명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바로 이 사건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는 교회에 나와서 기도할 때에 여러 말로 권면도 받고 가슴에 찔림도 받고 느낌도 받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적인 문제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죽였다. 나 같은 죄인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수밖에 없었다'라고 하는, 십자가와 나와의 관계를 바로 맺어주는 것이 설교입니다. 그것이 가장 생명력 있는 설교입니다. 그것이 가장 결정적인 문제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하는 그 가책, 그 찔림에서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는 치유의 길을 찾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우리가 어찌하면 좋겠느냐고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그 치유의 길을 묻고 있습니다. 그 물음 속에는 '하라는 대로 하겠습니다.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겠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하면 좋겠는지 가르쳐 주십시오'하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바른 설교에 대한 바른 응답인 것입니다. 저들은 바른 치유의 길을 찾기 위하여 베드로와 및 사도들을 향하여 "형제들아"하고 부릅니다. 이 부름 자체에도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베드로가 그 대안을 제시합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38절)." '어찌할꼬'하고 부르짖는 자들에게 그 대안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대안을 들은 저들은 다시금 아무 말 없이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그대로 순종해 나갑니다. 여기서 한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에 '말'이라는 단어가 거듭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37절)"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40절)" "그 말을 받는 사람들로 세례를 받으매(41절)"-여기 나오는 '말'은 전부 베드로의 '말'로, 결국은 '설교'를 의미합니다. 말을 듣고 말을 하고 말로 확증 짓고 말을 받는 사람들-거듭 나오는 이 '말'은 바로 '설교'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설교는 아주 중요합니다. 여기에 생명의 역사가 있습니다. 설교를 하고 설교를 듣고 그 설교에 그대로 순종합니다. 여러분, 교회란 무엇입니까? 말씀과 성령이 함께 하는 것이 교회입니다. 바른 말씀이 있고 성령의 역사가 있기에 교회인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 교인입니다. 그 관계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교인된 우리는 그 말씀을 들으면서 깨달아지고 마음에 찔릴 때에 바로 순종할 줄 알아야 합니다.
설교는 은혜의 관계입니다. 설교를 들음으로 심령이 계속 성장해 나갑니다. 그래서 무디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항상 기뻐하면서 설교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고용해서 쓰시고 계시기에,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서 말씀을 전하시고 계시기에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그 사람이 마음을 열어 받아들여 기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의 확실한 믿음과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의 확실한 믿음 속에 설교가 있고 교회가 있는 것입니다.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즐겨 듣는 사람,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따라 완전히 순종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순종하고 기도하는 만큼 여러분의 마음속에 말씀의 역사가, 생명의 역사가 분명하게 나타날 것입니다. 그 심령이 치유받고 구원받고 자유하는 것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에 '구원'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구원받는 길을 베드로는 설교를 통하여 몇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 '회개하라' 합니다. '메타노이아'-이것은 방향전환을 말합니다. 뉘우치는 마음이 아닙니다. 눈물이 나 흘린다고 회개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른 방향으로 돌리는 것입니다. 동으로 가던 사람은 서로 가고, 멀리 가던 사람은 돌아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마음을 회개라고 합니다. 너희가 세상으로 기울어졌고 잘못 빠졌으나 이제는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회개하라 합니다.
둘째,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 가서 설명하기로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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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합니다. 우선 죄 문제가 해결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나옴으로 해결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문제가 바로 이 죄의 문제입니다. 예수 믿어서 잘살고 성공하고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 믿어서 해결되는 문제 가운데 근본적인, 최우선적인 것을 말하라면 그것은 단연 죄 사함 받는 문제입니다. 고난의 문제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똑같은 고난을 당한다 하더라도, 더 큰 고난을 당한다 하더라도 예수 믿기 전에는 죄 사함 받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그 고난은 죄악 가운데서 당하는 저주스러운 고난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이 당하는 고난은 죄 사함 받는 자의 고난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당하는 고난입니다. 이것은 사랑의 고난입니다. 이렇듯 의미가 전혀 다릅니다. 똑같은 고난인 것 같으나, 그 의미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하나는 지옥의 백성으로 당하는 고난이요, 하나는 천국의 백성으로 당하는 고난입니다. 하나는 마귀 백성으로 당하는 고난이요, 하나는 예수 믿는 사람으로 당하는 고난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당하는 시련입니다. 혹은 그 고난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 고난 자체에 선교적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고, 가능하게 하는 역사 위에 고난이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그리스도인이 당하는 고난은 그 차원이 전혀 다릅니다. 그러므로 '죄 사함 받으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것의 우선이요 근본입니다.
다음으로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 합니다. 이제는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살게 될 것입니다. 과거에는 율법으로 살았고, 자기 지식으로 살았고, 죄책으로 살았지만, 이제는 성령을 선물로 받아서 성령께서 인 하시는 대로 살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합니다. 여러분, 자세히 보십시오. 이것은 구원의 순서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어떤 것이 먼저요 어떤 것이 나중이요, 하는 이야기는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다시 한번 보십시오.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 합니다. 이것은 개인적인 관계를 보여줍니다. 구원이란 개인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회개하고, 한 사람 한 사람이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그런가 하면 '너희가 구원을 받으라' 합니다. 이것은 집단적 관계를 보여줍니다. 그런데 전체적으로 보면 세례 받으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세례가 무엇입니까? 여기에 세례의 근본적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공적으로 공포하는 것을 말합니다. 개인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공개적인 고백적 신앙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저는 '세례'하면 생각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결혼입니다. 여러분, 결혼식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옛날 사람들은 서로 얼굴도 못 보다가 결혼식 날 처음 본다고 합니다만, 요새야 어디 그렇습니까? 서로 이미 사랑했고 장래를 약속했습니다. 선물교환도 다 했습니다. 그렇게 다정스레 다니고 연애하고 데이트하고 할 것 다했는데도 결혼식 날 때에 보면 벌벌 떱니다. 그런가하면 '사랑의 약속'을 할 때에 우는 사람도 많습니다. 왜 우느냐고 물어보면 좋아서랍니다. 슬퍼서 우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쉬운 줄 알았던 결혼식이 어려워서,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긴장되어서 떤다고 합니다. 결혼식이 중요합니다. 공개적이거든요. 사회계약적 의미가 있거든요. 둘이서 아무리 사랑한다고 백날 천날 외쳐봐도 소용없습니다. 많은 사람 앞에서, 특별히 하나님 앞에서 공개적으로 사랑을 고백하고 약속해야 합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이제 이 여자는 이 남자의 아내요, 이 남자는 이 여자의 남편입니다,라고 공개적으로 밝히는 것입니다. 공개적으로 결합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는 것도 그렇습니다. 세례를 받음으로 그 시각부터 내가 교인입니다. 요새도 논산훈련소에 가보면 군인들을 모아 놓고 한꺼번에 세례를 줍니다. 특히나 70년대에는 군대에서 수 천명을 모아놓고 집단 세례를 주는 일이 많았습니다. 연병장에 수천 명의 군인들을 죽 세워놓고 수십 명의 목사님이 앞에 나와서 한 줄씩 맡아서 세례를 줍니다. 저도 몇 번인가 가서 세례를 준 일이 있습니다. 그때에 세례를 받았던 한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하더군요. 그 당시 대위였던 그는 자기가 평소 존경하던 사단장이 그리스도인인 데다가 그분이 권하기에 그저 좋겠거니 생각하고 세례를 받았다고 합니다. 애초부터 예수 믿을 마음이 있어서 세례를 받은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교회 가본 적도 없고 예수 믿은 적도 없지마는, 그저 '예수 믿습니다'라고 고백하고 세례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례를 받고 나니 괜스레 기분이 좋아서 부대에 돌아와 부하들을 불러다가 모두 세례를 받게 했다고 합니다. 그러고 나서는 가끔 신상명세서를 쓸 때에 종교란에 '기독교'라고 자연스레 기입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세례를 받았으니까요. 그리고 어찌하다 보니 지금은 장로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분 말인즉 자신은 세례를 받고 나서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남들은 예수를 믿고 나서 세례를 받는데 말입니다. 이렇듯 세례는 아주 중요합니다. 모든 사람 앞에서 예수를 믿는다고 스스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례입니다. 사랑도 그렇지 않습니까? 사랑하고 결혼하는 사람도 있지만 결혼을 먼저 하고 사랑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심지어는 아이를 낳은 연후에야 사랑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은 세례를 받고 예수를 믿을 수도 있듯이 잘못은 아닙니다. '세례를 받으라'하는 본문말씀에는 이처럼 엄청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방글라데시는 법적으로 세례를 금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세례를 받겠다고 하도 조르기에 선교사로 갔던 분이 몰래 세례를 주었습니다. 세례를 받은 사람이 비밀을 지켰으면 좋았을 것을 돌아다니면서 그만 자랑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 소문이 자꾸 퍼져나가서 결국은 선교사도 세례를 받은 사람도 방글라데시에서 파키스탄으로 쫓겨나고 말았다고 합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너무나도 자유롭게 삽니다.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나무라는 사람 없습니다. 집에서 쫓아내는 사람 없습니다. 저희 할아버지는 3대 독자셨습니다. 아직은 기독교가 금기시되던 때에 할아버지가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그 사실이 발각되어 근 한 달여 동안 집에 들어올 엄두를 못 내셨습니다. 부모님으로부터 꾸중은 물론 매도 많이 맞으셨습니다. 그러나 3대 독자이신 고로 아주 내쫓지는 못하셨습니다. 여러분, 요새 이런 집이 어디 있습니까? 세례 받았다고 하면 잘했다고 하지요. 아무튼 우리는 지금 좋은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사회학적으로는 세례를 '이미 예속되었던 공동체에서 이탈하여 새로운 Christian community - 기독교 공동체에 예속됨을 의미한다'라고 말합니다. 세례란 그리스도라는 큰 공동체에 예속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당의 당원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결코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운명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것도 공개적으로 말입니다.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이제부터 나는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이제는 죽어서도 하나님 앞으로 갈 것입니다, 이제부터 나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례입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세례를 받음으로 믿음이 생기고, 세례를 받음으로 진실로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인들도 보면 세례를 받기 전과 세례를 받은 후가 다릅니다. 어떤 분은 예수를 꽤 오래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믿음이 생길 때까지 세례를 안 받겠다고 버티는 것입니다. 저는 오래도록 교회를 다녔는데도 불구하고 세례를 안 받겠다고 하는 사람에게 꼭 이런 질문을 합니다. "결혼식을 하고 사는 것이 좋겠습니까? 결혼식을 하지 않고 사는 것이 좋겠습니까?" "그거야 당연히 결혼식을 하고 살아야지요?" 그러면 저는 "세례도 이와 같습니다. 먼저 세례를 받고 나서 예수를 믿어도 틀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좋을 수가 있습니다"라는 말로 세례 받기를 권합니다. 사실 세례 받고 난 뒤에 믿음이 훨씬 자라는 분들을 종종 봅니다. 이렇듯 세례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래서 본문은 말씀합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여러분, 세례를 받음으로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고, 그로 말미암아 핍박을 받게 되고, 나아가 운명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세례-이것은 엄청난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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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오늘의 본문은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설교입니다. 설교는 한 번에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 성서적 증거를, 역사적 증거를 들어서 확증하며 권면하는 것입니다. 이어서 본문은 말씀합니다.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며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41절)."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으라면 딴소리하지 말고 받습니다.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옵니다. 말씀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여기서 말씀하는 '구원'은 종말론적 구원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현재적 구원을 말씀함입니다. 우리가 기도드릴 때면 외는 주기도문을 한번 보십시오.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매일매일 당하는 시험, 매일매일 당하는 사건, 이 세대의 모든 유혹으로부터 구원해 주십사 하는 것입니다. 바로 현재적 구원입니다. 여러분, 세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제 나는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공개적으로 고백하고 살아갈 때에 비로소 모든 시험을 이기며 살 수 있게 됩니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여기 나오는 '제자'라는 말씀, 재미있는 말씀입니다. 마태, 마가, 누가의 복음에서 말씀하는 '제자'는 열두 제자를 가리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에서 말씀하는 제자는 예수 믿는 사람 전부를 가리킵니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서의 열두 제자를 사도행전에서는 '사도'라고 일컫습니다. 그리고 일반 교인을 예수님의 제자라고 별칭 합니다. 제자,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말입니다. 우리는 성도요 그리스도인일뿐더러, 여기에 하나의 이름이 더해집니다. 제자가 그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배우고 따르고 그와 운명을 같이하는 사람입니다. 그의 제자입니다. 성도 여러분, 모름지기 우리는 모두 예수님의 신실한 제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3장 하나님 말씀] 교회 감독의 의무(딤전 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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