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 원어 설교

[성경 인물 노아 설교말씀] 홍수심판이 끝난 후의 노아의 준비(창8:6-12)

체데크 2020. 5. 9. 2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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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 오늘도 복음 빵집에 오신 여러분 환영합니다. 오늘은 성경인물 노아 설교말씀 중에서 노아가 홍수 심판이 끝난 후에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로 작정한 것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홍수심판이 끝난 후의 노아의 준비(창8:6-12)

 

명제: 홍수 심판이 끝난 후에 노아는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한 준비를 하였다.

목적: 구원받은 백성들이 마지막 심판이 끝나고 난 후에 어떻게 살 것인지를 보여준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이유가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타락하고 나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자신의 뜻대로 살면서 죄악 된 인생으로 하나님 앞에 기쁨이 되지 못하는 삶으로 전락되었습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는 홍수로 심판하시기로 마음에 결정하시고 심판의 때가 가까이 오매 하나님은 노아를 선택하셔서 방주를 지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방주를 지었고 홍수 심판은 하나님의 예정된 시간에 오게 되었습니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방주에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물로 가득 채워지고 땅에서 숨 쉬는 존재들이 모두 죽었을 때에 이 방주가 아라랏 산에 멈추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방주를 아라랏 산에 가져다 놓으신 것입니다. 노아의 의지로는 절대 방주가 아라랏 산에 갈 수 없습니다. 노아는 자신의 힘으로 노를 저은 것도 아니고 돛을 달아서 간 것도 아닙니다. 방주는 하나의 상자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의 의지로 아라랏 산에 간 것입니다.

이 방주가 아라랏 산에 도착하고 나서 물이 줄어들기 시작했습니다. 노아는 밖의 상황이 궁금했습니다. 물이 얼마나 감해졌는지를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 까마귀와 비둘기를 방주에서 내어 보내 물이 얼마나 감했는지의 여부를 알고자 했던 것입니다. 노아는 홍수 심판이 끝나고 난 후의 삶을 준비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가 이 말씀을 통해 노아가 심판이 끝나고 나서 취한 행동들을 보면서 우리도 신앙의 점검을 하여 마지막 날에 주님이 오셨을 때에 어떻게 주님과 함께 하는 신앙을 할 것인지를 교훈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노아가 홍수 심판이 끝나고 난 후에 취한 행동들은 무엇입니까?

 

첫째, 방주에 있는 창문을 열었습니다.

 

창8:6 사십 일을 지나서 노아가 그 방주에 낸 창문을 열고

 

노아는 홍수 심판이 끝나고 방주가 아라랏 산에 멈추었을 때에 방주 밖의 상황이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방주에 만들어진 창문을 열었습니다. 우리는 노아가 창문을 연 것을 보면서 깊은 영적 진리를 발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방주를 지으라고 명령하시고 창을 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창6:16 거기에 창을 내되 위에서부터 한 규빗에 내고 그 문은 옆으로 내고 상 중 하 삼층으로 할지니라

 

하나님께서는 창을 내는데 위에서부터 한 규빗에 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방주에는 반드시 창이 있어야 합니다.

‘창을’ צוהר(초하르 6672) 창, 대낮, 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יצהר(이츠하르 3323) 신선한 기름, 기름 부 음 받은 자,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창을 만들라고 한 것은 십자가가에 고난당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창을 만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방주는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분은 십자가에 죽으시기로 기름 부음 받은 자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기름부음 받으셔서 선택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없어서는 안 될 것이 올리브기름입니다. 이 기름을 짤 때는 큰 틀에 올리브를 짓이겨 넣고 무거운 추로 기름을 짜내게 됩니다. 올리브 입장에서는 엄청난 고난과 고통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고난을 당하신다는 것을 예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방주가 아라랏 산에 멈추고 노아가 방주의 창을 열고 있는데 단어가 다른 것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성경인물 주일말씀 설교문] 겸손한 자 모세(출 4:1-7)

구약에서 하나님께 칭찬받은 사람이 모세입니다. 모세는 예수님의 모형을 닮고 있습니다. 율법의 대표이면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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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을’ חלון(할론 2474) 창, 창문, 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חלל(할랄 2490) 구멍을 내다, 관통하다, 꿰뚫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아라랏 산에 멈추었던 방주는 바로 저주받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홍수 심판으로 죽었지만 노아는 예수 그리스도가 대신 죽으시고 살아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노아가 창문을 열었는데 하나님께서 창을 만들라고 했던 단어와 다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들을 죽이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그래야만이 노아가 살아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노아는 십자가에 고난당하셔서 두 손과 발에 대못이 박히시는 것을 보았고 주님의 몸이 창으로 찔리실 것을 알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믿고 홍수 심판이 지난 다음에 창문을 여는 것입니다. 주님의 고난과 죽으심이 없이는 절대 심판을 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노아는 고난당하신 주님을 통해 구원을 얻고 새로운 삶의 시작을 준비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제 방주에서 나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까? 마지막 종말의 때에 심판이 지나고 난 후에 삶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사십일을 지나서’ קץ(케츠 7093) 마지막, 끝날, 종말, 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קצץ(카차츠 7112) 파괴하다, 찍어버리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종말의 때에 홍수로 심판을 하셔서 선택받지 못한 백성들은 모두 철저하게 파괴되고 구원에서 찍어버려져 지옥의 불 못으로 던져지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종말의 때를 지나고 나서 노아가 창문을 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40일이 지나서 이렇게 했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40의 숫자적 의미는 시련, 응징, 기다림, 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종말의 때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신앙의 연단을 받으면서 고통을 당하고 어려움의 시기가 있지만 끝까지 믿음을 버리지 않고 주님의 재림을 고대하면서 기다리는 것이고 심판받을 백성들은 마지막 날에 하나님께 도전한 대가를 받게 되어 징벌받게 되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까? 고난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얻고 재림하시는 주님을 기다리면서 거룩한 신부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노아도 하나님께서 홍수로 심판하신 후에 주님과 영원한 소망을 누리면서 살 것을 준비하고 고대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노아도 믿음으로 고난당하신 주님의 창을 열면서 새로운 소망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노아는 방주 밖의 상황과 여건을 알기 위해 창문을 열었던 것입니다. 재림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사람은 반드시 초림하신 예수그리스도를 믿을 때에만 가능한 것입니다. 나의 모든 죄를 사해주시고 고난당하신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영원한 심판이 없기 때문입니다.

둘째, 까마귀를 방주에서 내어 놓았습니다.

 

창8:7 까마귀를 내놓으매 까마귀가 물이 땅에서 마르기까지 날아 왕래하였더라

 

노아는 방주에 많은 동물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일 먼저 까마귀를 창문을 열어 날려 보내고 있습니다. 노아가 까마귀를 날려 보낸 것에 대한 영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까마귀를’ עורב(오레브 6158) 까마귀, 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ערב(아라브 6150) 기쁨이 지다, 어두워지다, 방황하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성경에서 까마귀는 부정한 새로 하나님께서 취급하셨습니다. 노아는 방주에서 물이 감해졌는지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제일 먼저 보낸 새가 까마귀입니다. 그런데 이 까마귀는 밖에 나갔다가 방황하고 다시 돌아왔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홍수 심판 이후의 삶은 오직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만 사는 천년왕국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까마귀와 같은 부정한 자들은 어둡고 기쁨이 없는 자들로서 절대 주님이 재림하실 때에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결국 구원받지 못한 자의 삶은 천국에 들어갔다고 하더라도 앉을자리도 없이 방황만 하게 된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내 놓으매’ שלח(샬라흐 7971) 보내다, 베풀다, 통보하다, 라는 뜻입니다. 노아는 까마귀를 방주에서 날려 보내고 있습니다. 노아의 마음에 까마귀가 날아가서 홍수가 감해졌는지를 알아 오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까마귀를 보낸 것이고 이것은 먼저 까마귀에게 특혜를 베풀어 준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까마귀가 돌아와 통보해 주기를 노아가 원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까마귀는 밖으로 나갔지만 자신이 앉을자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물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까마귀는 물이 마르기까지 쉬지도 못하고 방주로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노아는 방주의 창문을 열자마다 즉시로 까마귀를 날려 보내게 됩니다. 이 까마귀는 방주를 떠나 자신이 앉을 장소를 찾아 계속해서 배회하고 있습니다. 까마귀는 자신이 방주 밖으로 나가기 싫어도 억지로 나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노아가 나가도록 강권적으로 밀어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구원받지 못한 자들이 천국에 들어와도 쉼이 없고 앉을 장소가 없다는 것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물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복음의 말씀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 많아 까마귀는 앉지를 못했습니다. 바로 심판이 끝난 후의 삶에 선택받지 못한 자들은 결국 안식이 없다는 것을 상징해 주는 것입니다.

 

셋째, 노아는 까마귀 대신에 비둘기를 날려 보냈습니다.

 

창8:8-9 그가 또 비둘기를 내놓아 지면에서 물이 줄어들었는지를 알고자 하매 온 지면에 물이 있으므로 비둘기가 발붙일 곳을 찾지 못하고 방주로 돌아와 그에게로 오는지라 그가 손을 내밀어 방주 안 자기에게로 받아들이고

 

[창세기 5장 성경주석] 므두셀라와 노아에 관한 기록(창 5:25-32)

므두셀라와 노아에 관한 기록(창 5:25-32) 창세기 5장에는 아담의 족보가 기록되어 있는데 이 시간에는 므두셀라와 노아에 대한 기록에 대해서 알아보자. 므두셀라는 에녹의 아들로서 성경에서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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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는 까마귀가 돌아오자 비둘기를 날려 보내게 됩니다. 땅에서 물이 줄었는지를 알기 위하여 비둘기를 내 보냈습니다. 그런데 비둘기도 발붙일 곳을 찾지 못하고 방주로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비둘기’ יונה(요나 3123) 비둘기, 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יין(야인 3196) 포도주, 잔치,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노아가 비둘기를 까마귀 대신에 보낸 것에 대한 영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선택한 백성들이 마지막 심판이 끝나고 난 후에 안식하며 영원한 천국에서 누릴 것을 예표 해 주고 있습니다. 비둘기라는 어원을 따라가면 잔치라는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구원받은 백성들은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또한 포도주는 유대인들의 개념에 기쁨과 즐거움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새로운 포도주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물이 줄었는지를’ קלל(칼랄 7043) 줄어들다, 멸시하다, 저주하다, 업신여기다, 라는 뜻입니다. 노아가 방주에서 까마귀 대신에 비둘기를 내어 놓으면서 물이 줄어들었는지를 알기 위해서 날려 보냈습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이 비둘기가 방주를 떠나 온 지면에 물이 있기 때문에 앉을자리를 찾지 못했습니다. 물은 하나님의 은혜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멸시하고 저주하면서 업신여기는 자들은 구원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심판 후에 주님과 함께 기뻐하며 즐겁게 누리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내가 구원을 받았다고 해도 천국에서는 받을 상급이 없다는 것을 말씀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을 받았다고 끝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해야 하며 절대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불성실하게 업신여기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에 들어왔다고 해도 주님과 함께 누리는 삶은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비둘기는 앉을자리가 없어서 방주로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창8:10-12 또 칠 일을 기다려 다시 비둘기를 방주에서 내놓으매 저녁때에 비둘기가 그에게로 돌아왔는데 그 입에 감람나무 새 잎사귀가 있는지라 이에 노아가 땅에 물이 줄어든 줄을 알았으며 또 칠 일을 기다려 비둘기를 내놓으매 다시는 그에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더라

 

노아는 칠 일을 기다렸다가 다시 다른 비둘기를 방주에서 내보내게 됩니다. 이 비둘기는 저녁에 돌아왔는데 입에 감람나무의 새 잎사귀를 물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노아가 보고 땅에서 물이 줄어들었다는 것을 감지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칠 일을 기다렸다가 비둘기를 내놓았더니 다시는 방주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다른’ אחר(아헤르 312) 다른, 또 다른, 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אחר(아하르 309) 머물러 있다, 머무르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노아는 처음에 날려 보냈던 비둘기가 앉을 장소가 없자 돌아옴으로 다른 비둘기를 날려 보내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원어에는 있지만 번역된 성경에는 빠져있는 단어입니다. 우리는 처음 비둘기가 다시 날아간 것으로 알 수 있지만 이 비둘기는 다른 비둘기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다음에 나간 비둘기는 입에 감람나무 새 잎사귀를 물고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칠일 후에 다시 날려 보냈는데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감람나무’ זית(자이트 2132) 올리브 나무, 라는 뜻입니다. 이 나무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는 나무입니다. 그 이유가 이새의 뿌리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실 것을 예언하고 있는데 이 나무가 올리브 나무를 상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비둘기가 올리브 나무 새 잎사귀를 물고 온 것에 대한 영적인 의미가 무엇일까요?

 

‘새 잎사귀’ טרף(타라프 2965) 새 잎사귀, 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טרף(타라프 2963) 갈기갈기 찢다, 끌려가다, 잡아 뜯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노아가 보낸 다른 비둘기가 올리브 새 잎사귀를 가져왔다는 것은 바로 십자가에서 주님의 몸이 갈기갈기 찢기고 고통 가운데로 끌려가셔서 주님의 몸이 완전히 죄악 된 자들에게 잡아 뜯기신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새로운 잎사귀를 가져왔다는 것은 바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해주는 것입니다. 홍수 심판이 지난 후에 노아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 수 있다는 것을 예표 해주는 것입니다.

노아는 비둘기가 가지고 온 올리브 나무의 새로운 잎사귀를 보고 물이 없어졌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로 구원을 받고 난 후에 더 이상 영원한 심판이 사라지고 주님과 영원히 살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우리도 이와 같이 마지막 날에 심판이 임하고 난 후에 노아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 받으심을 믿고 구원을 받고 나면 재림하시는 주님과 영원히 신랑과 신부의 삶을 살게 될 것을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 비둘기는 칠일 후에 방주를 나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처음 비둘기는 주님의 은혜를 업신여기고 저주한 자들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다른 비둘기는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주님의 뜻대로 살아간 자들이 받을 상급에 대해서 상징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재림의 준비를 해야 할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노아는 방주 안에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통해 구원을 얻었습니다. 방주는 교회도 예표하고 있습니다. 노아는 방주 안에서 아무런 준비가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홍수 심판 이후에 밖으로 나가서 주님과 함께 누릴 것에 대해 준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지막 심판 날에 우리는 영원하신 주님의 영광스러운 몸을 맞이할 신앙을 준비해야 합니다. 아무런 준비 없이 주님을 만난다면 천국에서 신랑 되신 주님과 영원히 기쁨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노아의 행동이 홍수 심판 이후를 준비했던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마지막 재림하실 주님을 준비하면서 기다리는 저와 여러분들의 신앙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에덴에서 발원한 네 줄기 강”(창2:10-14)

안녕하세요. 오늘도 복음 빵집에 오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오늘은 에덴에서 발원한 네 줄기 강의 이름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의미를 발견해 보겠습니다. “에덴에서 발원한 네 줄기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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