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 원어 설교

[아브라함 설교문]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창17:1-5)

체데크 2020. 6. 2. 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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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 오늘도 복음 빵집에 오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오늘은 성경에서 이름이 바뀐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바뀌면서 인생이 달라진 것에 대해서 영적인 의미를 알아보겠습니다.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창17:1-5)

 

 사람에게 있어서 이름은 아주 중요합니다. 그 사람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옛 어른들도 나이가 들면 자신의 이름값을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 만큼 이름은 중요한 것입니다. 자신의 이름을 통하여 다른 사람에게 많은 것을 나타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이름이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모든 동물들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만들고, 그 이름을 사람이라고 지으셨습니다. 여기에 사람이라는 단어는 (אדם아담) 인데 이 뜻은 붉다, 인류, 인간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인간을 최초로 창조하시고 이름을 주신 것입니다.

 

2:19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하나님께서는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이것들을 아담에게 이끌어서 무엇이라고 부르는지 보시기 위해서 아담에게 이끌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아담이 부르는 것이 그 이름이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생물들도 이름이 생긴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이름이 없다면 얼마나 비참한 것입니까? 과거에 우리나라에서는 노비제도가 있었습니다. 양반과 상놈이라는 개념으로 노비들은 이름이 없었습니다. 그 이유가 이름이 있으면 그 사람의 정체성이 성립되기 때문에 이름이 없이 언년, 개똥이, 등으로 불렸던 것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이름이 없이 산다는 것은 고향이 없이 태어난 사람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이름이 있어야 합니다. 이름이 있어야 다른 사람으로부터 불려짐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이름이 육신적인 이름으로 끝나서는 안됩니다. (אברם아브람)은 고귀한 아버지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단어입니다. 한 족장의 이름으로 한 가문의 이름으로 귀하게 높임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 이름은 육신적인 이름으로 한 가정의 사역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한 가문의 이름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99세에 나타나서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라고 말씀하시면서 언약을 체결해 주시는 것입니다.

 

 아브람을 75세에 하란에서 부르시고 언약을 하십니다. 그리고 내가 지시하는 한 땅으로 가라고 명령을 하십니다. 24년 만에 나타나서 다시 언약을 체결해 주십니다. 하란에서 말씀하신 약속을 다시 상기하게 하시면서 2절에 보면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두어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겠다고 언약을 체결할 때에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이 근본이 되어 주실 때에 받을 수가 있습니다. 아브람에게 약속했던 번성의 복을 24년 후에 다시 완벽하게 체결하여 도장을 찍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름을 바꾸어 주십니다. 전에는 아브람이었는데 이제부터는 (אברהם아브라함) 이라고 불러짐을 받는 것입니다. 이 뜻은 아버지는 높임 받으신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고 많은 무리의 아버지라는 뜻도 있습니다. 이제부터 아브라함의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한 족장으로 한 가문으로 살아갈 인생이 이제는 한 민족과 많은 나라의 아버지로 살아가는 인생으로 바뀐 것입니다. 이 약속을 하나님은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인생은 어떠해야 합니까? 우리도 한 가문으로 한 가정으로 끝나는 인생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구원받은 우리가 이제부터는 영적인 삶으로 인생을 바꾸고 세상의 사람이 아닌 주님께 속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을 호령하면서 사는 인생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세상에 파묻혀 세상이 끝날 때에 나도 같이 끝나는 인생을 살겠습니까? 이제부터 우리는 영적인 아브라함, 주의 영이 임하는 아브라함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아브라함은 이름이 바뀌면서 후사의 복을 받는 것입니다. 이삭을 통하여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뜻을 이루어 나가시는 것입니다. 결국 아브라함을 통하여 메시아가 오시는 길을 연 것입니다. 이 얼마나 축복받은 인생입니까? 자신의 가문에서 메시야가 탄생했다는 것은 엄청난 복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가문에서도 목사님과 영적 거장들이 많이 나타나시기를 바랍니다.  

 

 또 이름을 바꾸어 주셔서 복을 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잘 아는 야곱입니다. 야곱이라는 단어는 (יעקב야아코브) 라는 단어인데 이 뜻의 어근을 찾아가 보면 (עקב아카브) 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발꿈치에서 유래하였으며 발꿈치를 잡다, 대신 들어 앉다, 찬탈하다, 음흉하게 공격하다. 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름이 정말 중요한 것이 야곱은 이 이름대로 인생을 살게 됩니다. 에서와 야곱은 쌍둥이입니다. 에서가 나올 때에 발뒤꿈치를 잡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창세기 25:29절에 보면 자신의 형 에서가 밖에 나가 피곤하여 돌아와 배고플 때에 죽 한 그릇으로 장자의 명분을 팔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 죽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 단어는 (נזיד나지드) 라는 단어인데 이 단어의 어근을 보니 (זוד주드) 라는 단어입니다. 이 뜻은 무례하다, 주제넘다, 건방지다, 외람되다. 라는 뜻이 있습니다. 야곱은 건방지게 죽으로 장자의 명분을 받으려고 했습니다. 이것은 주제 넘는 짓이고, 무례한 짓인 것입니다. 고대 근동지방의 장자권은 아버지의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는 엄청난 복을 받을 수가 있는 직분이고 아버지의 대를 잇는 직분입니다. 결국 야곱은 계속적으로 이름대로 형을 속이고 이삭인 아버지를 또 속여서 에서에게 돌아갈 복을 중간에서 가로채서 자신이 복을 받게 됩니다. 이렇게 이름이 중요합니다. 결국 이름대로 자신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야곱은 속이고 남의 것을 찬탈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밧단아람으로 쫓기는 신세가 되어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가게 됩니다. 밧단아람은 하란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가 거처했던 곳입니다. 야곱이 있던 브엘세바에서 하란까지는 500Km가 넘습니다. 그리고 (חרן하란) 이라는 단어는 바싹 마른, 건조한 뜻이 있다. 야곱은 이제 속이는 자로 살다가 인생이 메마르고 건조하고 힘든 인생의 노정을 겪게 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야곱은 밧단아람으로 가는 도중에 벧엘에 머무르게 됩니다. 이곳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 언약을 체결하게 됩니다.

 

28:20-22 야곱이 서원하여 이르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야곱은 앞길이 불확실 했습니다. 자신이 가는 길에 어떠한 일이 일어날지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하나님께 서원을 하게 됩니다. 떡을 주시고 옷을 주시고 평안히 고향으로 돌아오게 해 주시면 반드시 십의 일을 드리겠다는 약속입니다. 야곱은 이런 약속을 하나님과 체결하고 밧단아람으로 떠나게 됩니다.

 

 하지만 야곱은 라반의 집에 가서 많은 환란을 받게 됩니다. 20년 동안 열심히 일을 했지만 라반의 속임으로 인하여 재산도 아무것도 없게 되고 라헬을 사랑했는데 첫 결혼은 레아와 하는 비극적인 일들을 만나게 됩니다. 야곱의 이름처럼 속이고 찬탈했더니 결국 자신도 그렇게 당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서원한 것은 까맣게 잊어버립니다. 자신의 인생에 정신이 팔려 결국 하나님과의 약속은 지키지 않고 하나님을 속이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야곱은 20년 후에 라반의 집에서 기적적으로 많은 양과 염소를 얻게 되고 라반의 집에서 쫓기듯이 도망쳐 나오게 됩니다. 그런데 라반의 집에서 나오면 모든 일이 다 해결될 줄 알았지만 자신의 형인 에서가 4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자신을 죽이러 오는 것입니다. 이런 엄청난 인생의 풍파를 거치고 야곱은 하나님과 서원을 체결한 벧엘로 올라가야 하는데 숙곳이라는 곳에 머물게 됩니다.

 

33:17 야곱은 숙곳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짓고 그의 가축을 위하여 우릿간을 지었으므로 그 땅 이름을 숙곳이라 부르더라

 

 야곱은 벧엘로 올라가지 않고 숙곳에 머무르게 됩니다. 이 ‘숙곳’이라는 단어는 (סכות숙코트) 입니다. 이 뜻은 오두막, 우릿간, 초막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야곱은 얍복강에서 하나님의 응답을 받습니다. 그 응답은 이름이 바뀌는 응답을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숙곳으로 우릿간으로 내려간 것입니다. 야곱이라는 이름에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어주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שרה사라) 라는 단어와 (אל엘) 이라는 단어의 합성어입니다. 사라의 뜻은 다투다, 싸우다, 노력하다, 능력을 가지다. 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고 엘은 강한자, 권능자, 영웅이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야곱은 속이는 자에서 강한 자로 하나님께서 이름을 바꾸어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야곱은 과거의 이름대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벧엘 하나님의 집을 기억하고 올라가야 하는데 우릿간으로 과거의 삶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만났다면 과거의 삶을 청산해야 합니다. 과거의 속이는 자처럼 살았던 인생을 버리고 이스라엘의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주님을 만나고 구원을 받고도 야곱의 삶처럼 과거로 다시 돌아가면 반드시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백성은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의 옷을 입어야 되는 것입니다.

 

 숙곳으로 돌아간 야곱의 삶은 어떻습니까? 숙곳에서 살면서 세겜으로 들어가 성읍에서 장막을 치고 살게 됩니다. 아무런 불편함이 없이 살고 있습니다. 문제와 근심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야곱의 딸 디나가 세겜의 성읍에 다른 여자들을 보러 갔다가 그곳의 추장 하몰의 아들 세겜에게 강간을 당하는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고대 근동지역에서는 여자 혼자 다닐 수가 없습니다. 누가 보호해 주지 않으면 강간당하는 일은 태반이었습니다. 처녀 혼자 길을 다닌다는 것은 엄청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디나가 혼자 낯선 성읍에 들어갔다가 강간을 당한 것입니다.

 

 이것은 야곱에게는 충격적인 사건입니다. 자신의 딸이 강간을 당했다고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마음이 무너지고 통탄할 노릇입니까? 결혼적령기에 들어선 처녀가 다른 남자에 의해서 강간을 당했다는 것은 엄청난 수치인 것입니다. 그리고 딸이 받을 마음의 충격은 더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건을 통해서 디나의 오빠들인 시므온과 레위가 세겜의 남자들을 살인하는 사건이 생겼습니다. 결국 복수를 한 것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결국 야곱은 마음이 더 무거워졌습니다. 남의 타지에 와서 이런 끔찍한 살인을 아들들이 했으니 이제 복수를 당할 것이 뻔하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결국 야곱은 하나님을 처음 만났던 벧엘로 올라가게 됩니다. 그곳에서 하나님께 다시 제단을 쌓고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보면서 하나님이 주신 대로 살지 않으면 결국 고통이 온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났다면 하나님을 만난 벧엘로 올라가야지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니 결국 고통이 오고 문제가 터지고 울면서 다시 벧엘로 올라가야 하는 상황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교회생활을 하면서 영적인 이스라엘의 이름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세상의 끈을 놓지 못하고 다시 우릿간 같은 세상으로 돌아가면 편하고 쉽고, 재미있고, 즐거울 것 같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좋을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가면서 결국 문제가 터지고 자신이 해결할 수 없는 엄청난 문제가 발생하여 결국 마음에 상처만 남고 회복 불가능한 상태로 다시 교회로 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야곱의 이름으로 살면 안됩니다.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살아야 합니다. 야곱의 이름으로 살면 늘 고민하고 괴롭고, 고생스럽고, 힘들고, 속이고, 남을 끌어내는 인생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삶은 전능자의 삶이요,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인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영적 이스라엘의 삶을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이름이 바뀌어서 또 복을 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베드로와 바울입니다. 베드로는 직업이 어부입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평생 고기만 잡았던 사람입니다. 그 시대에는 천한 직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느 날 베드로가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를 부르십니다. 네가 지금까지는 고기를 잡는 어부였지만 이제부터는 내가 너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베드로의 원래 이름은 시몬입니다. 이 시몬은 구약의 (שימון쉬몬) 이라는 말에서 유래 했습니다. 이 어근을 따라가 보니 (ישם야샴) 이라는 단어에서 나왔습니다. 이 단어의 뜻은 황폐해지다, 황량해지다, 괴멸되다. 라는 뜻이 있습니다. 시몬의 삶은 인생에 소망이 없는 삶이었습니다. 이름에서 나오는 것처럼 매일같이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나 잡고 더 이상 좋은 인생을 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인생에 황폐함만 있고 열심히 사는 것 같은데도 고민하는 삶이고 즐겁지 못하는 것입니다. 인생이 사막 같다고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고달픈 인생입니까?

 

 우리의 인생도 주님을 만나지 못하면 시몬처럼 황폐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사막처럼 뜨겁고,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황량한 인생 공허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을 만나면 사막 같은 광야에도 물줄기가 들어가는 것처럼 우리에게 소망의 빛이 들어오고 생수의 강이 흐르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런 인생을 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시몬을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더하여 주셨습니다. 여기에서 이 베드로는 (Πετρος페트로스) 입니다. 이 뜻은 돌, 바위, 반석, 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시몬의 삶이 페트로스의 삶으로 바뀐 것입니다. 황폐했던 인생이 바위처럼 단단하게 흔들리지 않는 인생이 된 것입니다. 이것은 스스로 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예수님을 만나 처음으로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게 되고 예수님께서 교회를 세우신다고 했습니다.

 

16: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예수님은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운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바로 예수님의 반석 위에 베드로의 페트로스 돌을 주춧돌로 삼아 흔들리지 않는 교회를 세우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막과 같은 황폐한 믿음 생활을 하면 결국 영혼이 곤핍하여 죽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페트로스처럼 단단한 돌과 같은 신앙이 되면 예수님의 반석 위에 흔들리지 않는 주춧돌이 되어 교회를 든든히 세워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흔들리지 않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반석 위에 있는 신앙이 될 때에 사단의 세력도 이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시몬의 삶은 계속적으로 세상의 일만 하는 삶입니다. 바다에서 고기만 잡다가 인생 끝나는 삶입니다. 자신의 욕구만 채우다가 끝나는 삶입니다. 그런데 주님께 부름 받은 베드로는 페트로스로 이름이 바뀌니 이제 예수님이 인정하는 삶이요, 교회를 세우는 삶이요,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죽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오순절 날에 성령을 받고 죽기까지 복음을 전했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로마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네로 황제 때에 십자가에서 거꾸로 매달려 순교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페트로스의 삶은 마지막 주님의 날에 칭찬받는 삶이요, 거룩한 삶이요, 하늘 나라의 상급 받는 삶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도 시몬의 삶이 아니라 페트로스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 삶은 오직 주님께 드려진 삶이요, 주님의 영이 함께 하는 삶입니다. 세상과 즐겁게 먹고 노는 삶이 아니요, 주님의 나라를 위해서 복음을 전파하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삶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도 이런 삶이 되어야 합니다.

 

 바울의 삶은 어떻습니까? 바울은 원래 사울이었습니다. 구약에 보면 (שאול샤울) 인데요. 어근을 찾아가 보니 (שאל샤알) 이라는 단어입니다. 이 뜻은 요청하다, 찾다, 심문하다. 라는 뜻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사울은 그리스도인들을 심문하는 일을 했습니다. 숨어 있는 곳을 찾아다니면서 율법의 잣대로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도록 요청을 했습니다. 이것이 사울의 모습입니다. 이 당시에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사울의 이름만 들어도 떨 정도로 잔인하게 심문하고 괴롭혔던 것입니다.

 

이것이 사울이 가지고 있었던 이름대로 자신도 행동을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이 대제사장의 부름을 받고 다메섹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잡아서 감옥에 넣기 위하여 의기양양하게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이 때에 큰 빛이 사울을 비추었고 주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그리고 사울은 앞을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는 일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사울의 인생이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사울은 혈기 왕성한 자였지만 예수님을 만나고 유대식의 이름을 로마식의 이름인 바울로 바꾸면서 예수님의 종으로 섬기기 시작한다. 전에 사울은 자신이 혼자 스스로 하는 삶이었다면 바울의 이름으로 나갔을 때는 오직 예수님의 종으로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울은 율법으로 가득 채워졌던 사람이었지만 바울은 예수님의 복음과 성령으로 가득 채워진 인생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울의 인생은 판단하는 자요, 율법에 매여 있는 자요, 늘 자신의 힘으로 하려고 하는 혈기왕성한 자요, 자신이 최고라도 생각하는 자입니다. 하지만 바울의 삶은 자신이 낮추어지는 사람이요, 오직 예수님만이 나타내지는 인생이요, 복음을 전파하는 것을 기뻐하는 인생입니다. 이제 우리는 사울의 삶이 되면 안됩니다. 이제는 바울의 삶으로 예수님을 만나는 체험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나야 예수의 사람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름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았습니다. 이름은 그 사람을 대표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도 영적으로 하나님 앞에 이름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우리의 이름이 생명 책에 기록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얼굴을 기록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을 기록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름을 기록한다고 했습니다.

 구약에서 보면 대제사장들은 항상 판결 흉 패를 가슴에 붙이고 다녔습니다. 이 흉 패는 보석으로 되어 있습니다. 12개의 보석으로 박혀있고 그곳에 이스라엘 12지파의 이름들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것은 대제사장이 이스라엘 지파들의 영적 상태나, 신앙상태나 모든 상황을 관찰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관리하게 하셨고 대제사장에게 그런 능력을 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우리의 대제사장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대제사장의 직분을 가지고 계십니다. 구약에서 기름을 부어 세우는 사람이 3명 있습니다. 왕과, 선지자와, 제사장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이 직분을 모두 가지고 오신 분입니다. 그 중에 대제사장의 직분을 가지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가슴에는 모든 성도들이 있습니다. 그곳에 이름들이 새겨져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로 시인한 자들은 예수님의 가슴에 새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도들의 모든 영적인 상황과, 믿음의 상태와 육신적 상황까지도 모두 파악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받지 못한 인생들은 예수님의 가슴에 이름들이 새겨져 있지 못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12지파 이름만 새겨져 있지 다른 어떠한 이름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구원을 받지 못한 인생들은 생명 책에 기록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생명 책에 기록되지 못한 인생들은 모두 마지막 때에 불 못에 들어간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신앙이 어떻게 되어야 합니까? 계시록에 3장에 나와 있는 빌라델비아 교회처럼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어려움이 있어도 참고 이겨내야 합니다. 어떠한 시련이 와도 연단이 와도 이겨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지켜 빼앗기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이기는 자는 성전의 기둥이 되게 하고 결코 다시는 나가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이름과 새 이름을 새겨 놓으신 다고 했습니다.

 천국에는 열 두 진주 문이 있고 그곳에도12 사도의 이름들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 문들 통과하여 천국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이것도 구원받은 자 외에는 절대로 통과할 수가 없는 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이 기뻐하는 삶을 살도록 해야 합니다. 육 적인 이름을 가진 아브람이나, 야곱이나, 시몬이나, 사울이나 이런 사람으로 살아서는 절대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이제는 아브라함의 인생이 되어야 하고, 이스라엘의 이름의 인생이 되어야 하고, 페트로스의 인생이 되고, 바울의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영원히 하나님의 나라에 이름이 새겨지기 위하여 우리는 주님을 의지하고 끝까지 시련을 이기고 열심히 교회생활하고, 매일매일 구원의 확신을 얻고, 주님이 주시는 은혜를 사모하는 삶을 살 때에 우리의 이름이 생명 책에서 흐려지지 않고 지워지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는 구원받았다는 것을 확신하고 나는 매일 주님과 함께 영원히 동행하는 승리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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