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 원어 설교

[아브라함 설교문] “아브라함과 하나님의 언약”(창17:1-8)

체데크 2020. 6. 2.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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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 오늘도 복음 빵집에 오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오늘은 아브라함 설교문 중에서 아브라함과 하나님과의 언약적 관계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아브라함과 하나님의 언약”(창17:1-8)

 

 아브라함의 인생은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게 됩니다. 아버지 데라를 따라 하란으로 오고 그곳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서 다시 지시하는 땅으로 정처 없이 갈 바를 모르고 떠나게 됩니다. 하나님은 달 신의 우상을 섬기던 갈대와 우르와 하란 땅에서 구별시키기 위하여 떠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은 고향과 친척과 본토와 아비를 떠나서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가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과 믿음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갈 수 있다는 것은 오직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믿음이 없다면 전혀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은 구별되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75세에 자신의 고향을 떠나고 아비를 떠나서 하나님의 뜻을 세워나가는 것입니다. 세상의 것을 버리고 하나님의 품으로 왔을 때에 고생과 번민과 어려움이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란을 떠나서 가나안 땅의 여정을 가게 됩니다. 500Km가 넘는 길을 걸어서 여행을 하는 것입니다. 고대 근동지역에서는 가족과 함께 여행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이미 가나안 땅에는 다른 족속들이 자리를 잡고 살고 있었고 나그네들이 가서 자리를 잡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나라도 과거에 못 살 때에 이민을 많이 갔습니다. 미국에 가서 사탕수수밭에서 일을 하면서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남의 나라에 가서 자신의 터전을 잡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3500년 전에 남의 나라에서 자리를 잡는다는 것은 엄청난 시련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브라함이 모르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길을 떠났던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가나안 땅에 들어가 보니 기근이 시작된 것입니다. 팔레스틴 지방은 비가 거의 오지 않습니다. 우기와 건기 때가 있어서 건기 때에는 전혀 비가 내리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뭄까지 겹쳐서 먹을 양식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복의 근원이 된다고 했는데 믿음으로 왔더니 막상 지시하는 땅에 들어와 보니 먼저 부딪히는 문제는 기근입니다. 먹을 양식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자손에게 주시겠다고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의 제단을 쌓았습니다. 그런데 기근으로 인하여 먹을 양식이 부족한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세상에서 부름을 받고 교회에 들어오게 됩니다. 세상에서 살 때에는 잘 살고, 편하고, 먹을 양식 풍부하고, 고통 없이 살다가 막상 교회에 들어와 신앙생활을 하다 보니 여러 문제들이 터지기 시작합니다. 물질적인 어려움이 찾아올 수도 있고 세상과의 연락을 끊고 살아야 하니 쾌락적인 것들을 끊지 못하고 다시 세상을 바랄 볼 때도 있습니다. 과거에는 자신이 스스로 하고 싶은 것 다 하면서 살아도 제약을 받지 않았는데 교회에서는 하나님 안에서는 말씀으로 많은 것들을 제약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신앙은 고된 연단이 있을 때에 성숙해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점점 더 기근이 심해지니 남방으로 옮겨갔더라고 창세기 12장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기에서 남방은 (נגב네게브) 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의 뜻은 바싹 마르다. 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실 이름처럼 이 지역은 팔레스틴 남쪽에 있는 지역으로서 황폐한 곳이고 광야 지역입니다. 이곳에서는 전혀 식물이 자라기 힘든 장소입니다.

 

 아브라함은 지금 이곳을 통과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가나안 땅까지 왔지만 당장 힘들고 어려운 상황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남쪽으로 계속 내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께서 부르셔서 신앙의 길을 갈 때에 문제가 없는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문제가 먼저 생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갈 때에 문제가 있습니다. 먹는 문제가, 물질의 문제가, 우리에게 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극복하지 못하고 예수님만 따라가면 무조건 복이다. 라고 생각한다면 금방 시험에 걸려 넘어지는 것입니다. 결국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버리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런 믿음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란에서 떠날 때에는 아주 강한 믿음을 가지고 떠났습니다. 전혀 상상할 수 없는 강력한 믿음으로 세상의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약속만 믿고 떠났습니다. 그런데 막상 시간이 흐르고 가나안 땅에 들어와 보니 육신적인 문제들이 걸리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들을 보면서 믿음이 점점 흐려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점점 네게브 지역으로 내려갔던 것입니다. 그 이유가 애굽으로 가기 위해서입니다.

 

 이 당시에 애굽은 매우 선진국가입니다. 땅이 너무나 비옥하여 항상 풍년이고 먹을 양식이 떨어지지 않는 그런 장소입니다. 그 이유는 나일강이 흐르고 있기 때문에 이 나일강이 범람하면 땅은 농사를 짓기에 아주 좋은 땅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일강이 수시로 범람하면 농사짓기가 힘든데 주기적으로 비가 많이 오는 우기 때에 범람하고 건기 때에는 범람하지 않기 때문에 농사를 지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요셉 때에도 다른 곳에는 가뭄으로 곡식이 없었지만 애굽에는 곡식이 전국에 많이 있었습니다. 7년 동안 풍년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풍년이 온다고 해도 비옥한 땅이 없으면 많은 곡식을 추수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풍년이 왔을 때에 많은 곡식을 거둘 수 있는 조건적인 땅이었기에 추수를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애굽은 좋은 땅이고 살기 좋은 땅입니다. 아브라함은 가뭄을 만나 애굽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보면 애굽은 보통 세상이라고 말을 합니다. 아브라함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하나님께서 지시하는 땅으로 왔지만 육신적인 어려움으로 다시 세상으로 눈을 돌리는 것입니다. 우리도 얼마든지 아브라함처럼 이렇게 예수님 안에서 신앙을 시작했지만 어려운 문제들이 나를 힘들게 하면 다시 세상을 바라보면서 다시 가고 싶은 생각들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절대 세상을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믿음을 더 세워 나가야 합니다.

 

‘기근이 심하였더라’ 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 단어는 (כבד카베드) 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의 뜻은 애통하는, 맹렬한, 무겁게 하는, 어려운, 심히 라는 뜻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만난 가뭄은 그냥 지나칠 정도로 생각되는 가뭄이 아니라 아브라함을 맹렬하게 공격하고 문제를 더 무겁게 가중시키고 믿음마저도 흔들리게 할 정도로 심히 어려운 가뭄이었던 것입니다. 이 정도의 어려운 가뭄이기 때문에 아브라함도 믿음이 흔들린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애굽으로 내려가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애굽에서 많은 일들을 겪게 됩니다. 자신의 아내 사래를 애굽의 바로에게 아내로 주게 되는 일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결혼지참금으로 바로는 아브라함에게 많은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낙타를 얻게 됩니다. 구약시대에는 항상 아내를 데려오기 위해서는 신랑이 처가에 결혼지참금을 주어야 했습니다. 이렇게 아브라함도 결혼지참금을 바로에게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개입하심으로 아내를 다시 찾게 됩니다. 그러면서 다시 애굽에서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많은 소유를 가지고 오게 되었지만 이 재산은 하나님 앞에 합당한 재산이 아닙니다. 결국 육신적인 생각으로 내려갔다가 바로에게 아내를 주고 결국 그 대가로 받은 재산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재산은 반드시 대가가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이 재산 때문에 아브라함은 롯과 헤어지게 되는 결과를 만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종과 롯의 종들이 서로 싸우고 자신의 재산이 불어나서 결국 함께 살 수가 없는 상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들처럼 생각했던 롯에게 배신을 당하는 것입니다.

 

13:14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롯이 아브라함을 떠난 후에 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 단어는 (פרד파라드) 입니다. 이것은 니팔형으로 수동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롯을 떠나보내기 싫었는데 롯은 아브라함을 떠나기 위해 모든 모진 말을 다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뜻은 나누어지다, 흩어지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신이 흩어지는 것이 아니라 상대에 의해서 그렇게 흩어짐을 당하는 것이고, 나누어짐을 당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조카 롯을 아들처럼 키우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만약에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면 하란에서 조카를 데리고 나오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밖에 없는 혈족이 이제는 원수가 되어 떠나겠다고 하니 마음이 무거운 것입니다. 같이 있자고 부탁을 해도 거절하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지금 남의 나라에 와서 혈족이 얼마나 필요한 상황입니까? 사방으로 모두가 적인데 이런 곳에서 터를 잡고 살아가려면 자신을 믿을 수 있는 혈족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롯은 매정하게 떠나겠다는 것입니다. 결국 아브라함은 애굽에서 가지고 온 재산 때문에 혈족인 롯과 헤어지게 되는 아픔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방법으로 재산을 모아도 결국 그것 때문에 다른 문제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낙심되고 힘이 빠져서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상태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땅을 너의 후손들에게 줄 것이다. 라고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75세에 번성의 복을 받고 나서 길을 떠나 86세에 이스마엘을 낳게 됩니다. 사라의 종 하갈 사이에서 이스마엘이 탄생하게 됩니다. 어떻게 보면 사라의 몸에서 나와야 약속의 자녀가 되는 것인데 아브라함은 사라의 말을 듣고 자식이 없다고 하갈과 동침하게 됩니다.

 

16:2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 원하건대 내 여종에게 들어가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여기에서 보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라고 하는 단어가 나옵니다. 이 단어는 (שמע샤마) 라는 단어입니다. 와우계속법 칼형으로 능동형입니다. 이 말은 사래의 말을 듣자 마자 즉시로 실행에 옮겼다는 것이고 능동형으로 자신이 직접 행동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지만 시간이 흘러가면서 자신도 나이가 먹어가고 더 이상 나이가 들면 자식을 낳을 수가 없다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즉시로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지 않고 하갈과 동침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시간이 흐르다 보면 믿음이 흐려질 때가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끝까지 믿음을 지키면서 하나님의 계획을 따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뜻대로 길을 열어가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낳은 후 13년 후에 하나님은 다시 나타나십니다. 그때 나이가 99세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제일 먼저 하시는 말씀이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무엇입니까? 나는 이 세상에 못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린다면 너의 나이가 아무리 많아도 나는 너에게 자식을 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도 어느 때에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잊고 살 때가 있습니다. 많은 문제와 큰 시련에 빠지면 전능하신 하나님을 잊고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이 못하실 일이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깨닫고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나타나서 하시는 언약이 무엇입니까? 번성의 약속을 하시는 것입니다.

 

17:2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두어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 하시니

 

 그러면서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브라함은 이제 믿는 것입니다. 믿음이 부족하여 이스마엘을 낳았던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다시 약속하신 약속을 굳게 믿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17:6 내가 너로 심히 번성하게 하리니 내가 네게서 민족들이 나게 하며 왕들이 네게로부터 나오리라

 

 아브라함의 후손으로부터 많은 왕들이 나타난 다고 약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왕들이 바로 아브라함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약속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아브라함을 통해서 이스라엘 땅에 엄청난 왕들이 나온 것입니다. 그중에서도 성왕은 다윗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에서 다윗이 나왔고 다윗의 후손으로 내려가서 2000년 전에 만 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나오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생애를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통하여 왕이 나온다고 했던 것처럼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으로 믿음의 왕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믿음이 된 것입니다. 100세에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지고 이삭을 기다려 자식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이삭을 모리아의 한 산에 바치라고 했을 때에도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이삭을 제단에 바쳤습니다. 이것은 바로 믿음의 왕으로서 인생을 살아간 것입니다.

 

 만 왕의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잘 나타내고 있는 복음서는 바로 마태복음입니다. 이 복음서는 왕으로 오실 메시아를 그리고 있습니다. 마태는 왕으로서의 예수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장에 족보로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왕이 족보가 없다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족보가 없는 왕이 어디 있습니까? 족보가 없다면 그것은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인간들도 족보를 많이 따집니다. 너의 씨가 어디에서 나온 것이냐! 너의 혈통이 어떠냐에 따라 많이 좌지우지합니다.

 

 사람뿐만 아니라 개들도 족보를 따지고 있습니다. 족보가 있는 혈통 있는 개는 가격도 대단히 높습니다.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족보가 있는 말은 가격이 천문학적인 가격이 나가는 것도 있습니다. 그것이 왜 그렇습니까? 혈통이 섞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서에 족보가 두 군데 나옵니다. 하나는 마태복음과 또 하나는 누가복음에 족보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마태복음은 왕으로 오신 예수님이기 때문에 족보가 필요하고 누가복음은 인자로 오신 예수님이기 때문에 족보가 필요한 것입니다. 사람도 반드시 족보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냥 하늘에서 떨어진 분이 아니라 혈통 있는 가문에서 예수님이 나왔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의 족보를 가만히 읽어보면 모두가 왕의 족보입니다. 왕의 후손에서 예수님이 나온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온다고 했습니다.

 

11:10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치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가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

 

 바로 예수님이 이새의 뿌리 다윗에서 나올 것을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왕의 후손으로 오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만 왕의 왕이신 것입니다.

 

11:1-3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의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며 그의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며

 

 예수님은 여호와의 영이 충만하셨고 지혜와 총명이고 모략과 재능의 영이라고 말씀하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한다고 말씀하시면서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고 예수님의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고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만 왕의 왕으로 오셔서 함부로 판단하시지 않고 가난한 자들과 압제당하는 자들을 풀어주셨고 주님의 권능으로 천국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왕으로서 많은 죄인들을 풀어주셨습니다. 영적으로 죄를 지어 영원히 죽어야 할 영혼들을 생명의 말씀으로 선포하여 풀어주신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왕으로서의 권위를 마태복음에 많이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마태복음을 사자 복음이라고도 합니다. 사자는 맹수로서의 왕입니다. 그래서 사자 복음이라고도 합니다. 그것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1:10 그 얼굴들의 모양은 넷의 앞은 사람의 얼굴이요 넷의 오른쪽은 사자의 얼굴이요 넷의 왼쪽은 소의 얼굴이요 넷의 뒤는 독수리의 얼굴이니

 

 에스겔 선지자가 하나님의 신에 감동하여 환상을 보게 됩니다. 이 환상은 앞으로 일어날 것에 대해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생물들이 있는데 이 생물들의 모양이 있습니다. 이 모양은 하나는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고, 하나는 사자의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소의 얼굴을 하고 있고, 하나는 독수리의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에스겔 선지자가 본 환상입니다.

 

 그런데 이런 모양은 앞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사자의 얼굴은 바로 마태복음을 의미하고, 소의 얼굴은 마가복음을 의미하고, 사람의 얼굴은 누가복음을 의미하고, 독수리의 얼굴은 요한복음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얼굴은 바로 그 사람의 모든 이미지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신약의 4 복음서는 성경의 얼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4 복음서에 예수님의 모든 사역과 앞으로 하실 일에 대해서 낱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을 알아볼 때에 발만 보여주면 그 사람을 알 수 있습니까? 손만 보여주면 사람을 알 수 있습니까? 아무리 보아도 모르는 것입니다. 등만 보여주어도 안되고, 배만 보여주어도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얼굴만 보여주면 금방 사람을 알 수가 있고 찾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4 복음서는 성경의 얼굴과 같습니다. 4 복음서만 보면 예수님에 대해서 다 알 수가 있다고 했습니다. 구약도 예수님의 그림자입니다. 예수님의 실체가 아닌 것입니다. 신약에서도 가장 핵심 부분이 바로 4 복음서인 것입니다. 그래서 상징적으로 얼굴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표현은 구약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약의 계시록에도 표현되어 있습니다.

 

4:6-7 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는데 앞뒤에 눈들이 가득하더라 그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그 둘째 생물은 송아지 같고 그 셋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 그 넷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은데

 

 하나님 나라의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습니다. 그런데 앞 뒤에 눈이 가득하다고 합니다.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둘째 생물은 송아지 같고, 셋째 생물은 사람 같고, 넷째 생물은 독수리 같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생물도 에스겔서의 생물과 같은 것입니다. 이것도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의미하고 있고 복음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눈이 많다고 했습니다. 이 ‘눈’은 원어에서 (עין아인) 입니다. 이 뜻은 흐르다, 흘러나오다 물, 빛,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이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생명의 강이 흘러나오는 것이고, 생수가 흘러나오는 것이고, 빛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수의 근원은 바로 예수님인 것입니다. 이 물은 사방으로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력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복음 앞에 서면 감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나의 모든 것이 환하게 다 들춰지게 되는 것입니다. 나의 죄악도 예수님 앞에만 서면 모두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상황과 형편을 모두 아시는 것입니다. 복음은 우리의 영혼을 지켜주는 것이고 우리가 잘못된 길로 가지 못하도록 항상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눈이 있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을 표현할 때 쓰는 색깔이 있습니다. 바로 자색입니다. 이 자색은 아주 귀한 색입니다. 그래서 귀한 직분을 가지고 있는 자들만 입을 수가 있었습니다. 왕들이 주로 입었던 아주 귀한 색깔이 이 옷입니다. 과거에는 염색 기술이 없어서 색깔을 내기가 힘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자색은 조개에서 추출을 한다고 합니다. 하나의 옷을 만드는데 들어가는 조개는 수 천 개가 들어간다고 합니다. 그러니 아주 귀한 옷감입니다. 이것을 사용한 곳이 바로 성막입니다.

 

 성막은 바로 예수님을 의미하고 있고 상징하고 있는 곳입니다. 자색이 들어간 곳이 바로 성막의 문과, 휘장과, 대제사장이 입는 에봇과, 판결 흉패에 자색이 들어갔습니다. 이곳에는 자색만 들어간 것이 아니라 홍색과, 청색과, 가늘게 꼰 베실이 들어갔습니다. 자색은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나타내며 마태복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홍색은 십자가에서 고난 받는 예수님의 피흘리심을 상징하는 것이고, 황소 복음이면서 마가복음을 의미합니다. 가늘게 꼰 베실은 세마포로써 하얀색입니다. 이것은 인간으로 오신 가장 깨끗한 아무 흠도 없고 죄도 없으신 예수님을 나타내고 있으며 인자를 의미하고 바로 누가복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청색은 하늘을 상징하고 있으면서 하나님을 의미하는 색입니다. 이 색은 요한복음을 의미하고 독수리 복음이라고도 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아브라함의 삶을 보면서 예수님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족장의 삶 속에서 예수님의 그림자가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삶 속에 믿음의 조상이면서 왕의 후손이 나오는 복 있는 사람이고 아브라함의 후손에서 메시아가 나타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만 왕의 왕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원한 나라에서 함께 사는 역사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삭의 아내를 구하러 가는 엘리에셀”(창24:1-9)

샬롬! 오늘도 복음 빵집에 오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오늘은 이삭의 아내를 구하러 가는 엘리에셀을 말씀을 통해서 구속사적 모형을 발견해 보겠습니다. “이삭의 아내를 구하러 가는 엘리에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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