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 원어 설교

[히브리서 6장 헬라어 주석 강해] 한 번 빛을 받고 타락한 자(히 6:4-8)

체데크 2021. 6. 22. 11:59
반응형

안녕하세요. 오늘은 히브리서 6장 헬라어 주석 강해 중에서 한 번 빛을 받고 타락한 자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었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 사람들은 창세전에 선택받지 못한 자들입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었던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 똑같이 은혜는 받지만 구원받지는 못한 사람들입니다. 내세에 대해서 알고도 있지만 천국에는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으려고 한 것이 아니라 행위로 구원을 얻으려고 했기 때문에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받으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죽은 사실을 믿을 때 구원을 받습니다. 이제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고 다시 율법의 행위로 돌아가지 않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한 번 빛을 받고 타락한 자(히 6:4-8)

 

4절 아뒤나톤 가르 투스 하팍스 포티스덴타스 규사메누스 테 테스 도레아스 테스 에푸라니우 카이 메토쿠스 게네덴타스 프뉴마토스 하기우

히 6:4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6:4

한번 비췸을 얻고 - 저자는 4-8절의 내용을 통해 자신의 믿음을 성숙시키지 못하고 헛된 교훈에 미혹된 배도자(背道者)의 결말에 대해 경고한다. 본절과 다음절은 개종자들의 첫 신앙 체험을 기술한 것으로 그 표현이 추상적이어서 구체적으로 해석하기에 다소 난점이 있다. '비췸을 얻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포티스덴타스'는 '비추다'라는 의미의 동사 '포티조'의 부정과거 수동태 분사이다.

혹자는 이 단어가 2세기경에는 '세례를 베풀다'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고 주장하면서 '포티스덴타스'가 '개종자들이 세례 받는 것'을 가리킨다고 해석한다(Kasemann, Conzelmann, Bruce). 그러나 이러한 용례에 대한 분명한 증거가 없으므로 이 단어가 세례 베푸는 것을 뜻한다고 단정하기가 어렵다. 도리어 '포티스덴타스'는 신약성경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이나 그리스도 자신을 암시하는 '세상의 빛'으로 묘사되고 있으며(1:9; 고후 4:4,6; 벧후 1:19) 복음을 믿는 자들을 의미하는 '세상의 빛'(5:14; 8:12)으로 표현되는 것으로 보아 복음의 진리를 믿고 받아들인 행위를 의미한다고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 '하늘의 은사'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 혹자'성찬'(聖餐)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Bruce). 왜냐하면 '맛보고'의 헬라어 '규사메누스'가 문자적으로 '음식을 맛보다'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2) 혹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의 선물이라고 주장한다(Lane). 그러나 본절의 '하나님의 은사'는 어느 한 가지로 규정하기 어렵고 다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시는 귀한 선물 중의 하나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Morris).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 '참예한'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토쿠스'는 '참여하다', '교제하다'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본문은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을 체험한 것을 가리킨다(Lane, Bruce).

5절 카이 칼론 규사메누스 데우 레마 뒤나메이스 테 멜론토스 아이오노스

히 6:5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6:5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 '선한 말씀을 맛보았다'는 말은 하나님 말씀의 귀중한 가치를 깨달았다는 의미인 듯하다(Morris, Hewitt). 한편 '내세의 능력'은 미래적인 것으로 그리스도의 재림과 더불어 장차 올 세계의 능력을 의미한. 이것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현재에도 신앙의 공동체 안에서 실현되고 있다(Lane, Morris). 이와 같이 4-5절에 걸쳐 진술된 영적인 체험은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한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누구든지 체험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은사(恩賜)이다.

6절 카이 파라페손타스 팔린 아나카이니제인 에이스 메타노이안 아나스타우룬타스 헤아우토이스 톤 휘온 투 데우 카이 파라데이그마티존타스

히 6:6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6:6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 '타락한 자들'의 헬라어 '파라페손타스'는 '한쪽으로 떨어져 나가다'라는 의미의 동사 '파라피프토'의 부정과거 능동태 분사이다. '파라페손타스'는 4,5에서 언급한 영적 체험을 받아서 그리스도인들이 되어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좋은 은사를 체험하였다가 하나님을 거부하고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나간 자를 가리킨다.

'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다는 본절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다. (1) 본절은 다시 용서함을 받지 못한다든가 구원받지 못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저자가 뜻하는 바는 '다시 회개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회개'는 회개하는 자가 자신의 삶 전체의 방향을 전환시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결코 반복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일회적인 것이다. 라서 본절은 타락한 자들이 일회적인 회개를 다시 반복할 수 없음을 시사한다

(Morris). (2) 저자는 구약 시대에서와 마찬가지로 알고 지은 고의적으로 배도한 본절'타락한 자들'이 돌이킬 수 없을 만큼 타락하여 다시 회개할 수 없는 자임을 의미한다(Bruce). 이러한 두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갖는다. 그러나 다시 회개할 수 없다는 것은 결국 구원받지 못한 상태를 말한다. 타락한 것이 과거 시제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나스타우룬타스'에서 '다시'로 번역된 접두사 '아나''다시'라는 의미가 아니라 '위에'라는 의미이다(Robertson, Hewitt, Morris). 이것은 타락한 자들이 예수를 두 번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단순히 '십자가 위에 못 박아'라는 의미로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자들이 골고다 언덕에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던 자들과 다를 것이 없음을 시사한.

7절 게 가르 헤 피우사 톤 에프 아우테스 폴라키스 엘코메논 휘에톤 카이 티크투사 보타넨 유데톤 에케이노이스 디 후스 카이 게오르게이타이 메탈람바네이 율로기아스 아포 투 데우

히 6:7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이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6:7

개역 성경에는 '가르'('왜냐하면')가 생략되어 있다. '가르'는 본절과 다음 절이 앞서 언급한 내용에 대한 근거가 됨을 시사한다.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의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서 복을 받고 - 본절은 그리스도인의 장성함에 대한 비유로 사 5:1 이하의 '포도원의 노래'와 내용 면에서 유사하다(Bruce). ''은 그리스도인들을 비유한 것이며(13:18-23) ''는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감화 등을 비유한 것이다(44:3; 55:10). 밭을 가는 자가 열심을 다해 밭을 갈았을 때 밭이 그에 맞는 소출을 내면 밭을 가는 농부가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이 배도하지 아니하고 성숙한 신앙으로 발전해 나아갈 때 은혜를 베푸시고 돌보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주신다(Hewitt, Morris, Lane).

8절 에크페루사 데 아칸다스 카이 트리볼루스 아도키모스 카이 카타라스 엥귀스 헤스 토 텔로스 에이스 카우신

히 6:8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6:8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와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 본절은 배교자에 대한 비유이다. '가시와 엉겅퀴'는 창 3:17, 18의 내용과 연관된다. 창세기에서 가시와 엉겅퀴는 인간의 불순종으로 인해 야기된 저주의 산물이었다. 본절에서 '가시와 엉겅퀴를 낸다'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이 성장하지 못하고 배도함을 의미하는 것으로(Lane) 그것의 '마지막' 즉 결과는 불사름을 당하는 것이다. '불사름'의 헬라어 '카우신'은 마지막 심판 때의 엄격함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그 불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을 소멸하는 도구가 된다(10:27; 12:29).

정결에 대한 바리새인과 논쟁 사건(마 15:1-6)

 

[마태복음 15장 헬라어 강해] 정결에 대한 바리새인과 논쟁 사건(마 15:1-6)

안녕하세요. 오늘은 마태복음 15장 헬라어 강해 중에서 정결에 대한 바리새인과 논쟁 사건이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께 와서 예수님께 당신이

cdk153.tistory.com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