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 원어 설교

[호세아 4장 주석강해 설교말씀] 제사장과 백성의 죄(호 4:12-19)

체데크 2022. 12. 19.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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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세아 4장에서는 이스라엘 제사장과 백성들의 죄에 대해서 말씀한다. 제사장들이 타락하니 백성들이 여호와를 버리고 우상을 숭배하게 된다. 이 시대도 영적 지도자들이 타락하면 하나님 백성들이 거짓 복음을 따라가게 되고 세상으로 돌아간다. 교회는 항상 십자가 복음으로 깨어 있어야 한다. 예수님을 선포하지 않으면 영혼은 죽을 수밖에 없다.

 

제사장과 백성의 죄(호 4:12-19)

 

Ⅰ. 여기서는 하나님이 쟁론하시는 이스라엘 백성의 죄가 기소된다. 즉 그 죄는 다음과 같다.

1. 영적 음행 또는 우상 숭배. 그들은 음란한 마음을 품고 있다. 그들은 음란의 죄에 대한 강력한 경향성을 지닌다. 그들의 마음은 그쪽으로 치우쳐 있고 구부러져 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의 죄였다. 그들은 말할 수 없는 맹렬한 힘으로 그 죄를 향해 끌려가며 이것은 그들을 미혹하게 한다. 판단의 실책과 실수는 부패한 애착에 기인한다는 것을 주목하자. 사람들은 죄에 대한 기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죄를 좋게 생각한다. 우상에 대해 그토록 그릇된 견해를 품으며 우상을 향해 그토록 열정이 작용하므로 그런 머리와 마음을 지닌 자들이 하나님의 수하를 떠나 행음한다 해도 하등 이상할 것은 없다(12절). 그들은 머리와 남편 되신 하나님께 복종해야 마땅했고 그의 인도하심과 명령 아래 있어야 옳았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 대한 충성을 떠나 거짓 잡신들의 인도와 보호 아래로 들어갔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행음하였다(15절). 그들이 우상을 섬기는 행동은 방종하고 뻔뻔스러운 음부와 같았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완강한 암소처럼 완강하다" (원의는 뒷걸음질치는 암소 뒷걸음질한다:흠정역). 그들은 길들지 않은 암소 같다(혹자는 그렇게 해석한다). 또는 패역하거나 고집 센 암소 같다(다른 이들은 그렇게 해석한다). 고삐풀린 소가 풀밭에서 미친 듯 날뛰는 것과 같다. 멍에를 지운 소가 앞으로 나아가기는커녕 뒤로 물러나며 목에서 멍에를 벗으려고 기를 쓰며 밭이랑에 발을 들여놓지 않으려고 버티는 것과 같다(본문은 오히려 이것을 가리킬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와 같이 제어하기 힘들고 고분고분하지 않으며 불순종하였다. 그들을 앞으로 몰기 위해 선지자들이 책망의 막대기로 보내졌을 때 그들은 가시채를 뒷발질하고(행 26:14), 뒤로 달아났던 것이다. 이 모든 것의 합계는 "에브라임이 우상과 연합했다" (17절)는 것이었다. 그들은 완전히 우상과 결합하고 그 애정은 아교처럼 우상과 접착되며 그 마음도 우상에게 가 있었다. 그들의 영적 간음에 대한 사례가 두 가지 나오는데 이 일에서 그들은 하나님께만 돌려야 할 존귀를 우상에게 돌렸다.

(1) 그들은 우상에게 신탁을 묻고 우상의 사제들에게서 배운 점술을 사용했다(12절). "내 백성이 나무를 향하여 묻는다." 그들은 나무로 된 신들에게 지도를 구하며 충고를 의뢰하였다. 그들은 어떻게 행해야 할지 지시와 권고를 의뢰하며 사건에 대한 정보를 물었다. 그들은 나무에게 "너는 내 아비라" (렘 2:27)고 말했다. 그게 참으로 아비라면 이런 존귀를 받을 만했다. 그러나 그들이 나무를 향하여 이렇게 묻는다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큰 모욕이었다. 하나님은 그들의 참 아버지며 그들 중에는 살아 있는 그의 신탁이 있어서 어느 때든지 자유로이 물을 수 있었던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 막대기가 그들에게 어떤 길을 취해야 할지와 사건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고해 줄 것으로 기대한다. 이것은 아마 이방인 사이에 사용되던 악한 점술을 가리킬지도 모른다. 유대인들은 그들에게서 그 점치는 방법을 배웠을 것이다. 그것은 느부갓네살이 화살로 점을 쳤듯(겔 21:21) 한 조각의 나무 또는 막대기로 치는 점이었다. 하나님의 신탁을 버리고 세상과 육으로부터 방도를 구하는 자들은 사실상 자기 나무나 막대기와 상의하는 셈이다.

(2) 그들은 그것을 신으로서 그것에게 제사를 드렸다. 그들은 그 은총을 원했고 그것의 노여움을 두려워하고 그 진노를 입지 않도록 빌었다(13절). 그들이 그것들에게 제사를 드린 것은 속죄를 위해서이며 그것들을 달래기 위해서이다. 그들이 분향한 것은 그것들을 즐겁게 하고 흡족하게 하며 이로써 그것들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이름을 기록하고 싶은 곳을 선정하셨지만 그들은 그곳을 버리고 자기들의 상상력을 만족시키며 불경건한 의식에 알맞은 장소를 택했다.

[1] 그들은 높은 곳을 택했다. 그들은 산 꼭대기와 작은 산 위에서 제사를 드렸다. 이것은 땅의 높이가 하늘을 향한 접근에 유리하리라는 어리석은 생각에서이다.

[2] 그들은 참나무와 버드나무와 상수리나무 아래의 음지를 택했다. 이는 그 그늘이 그들에게 즐거웠기 때문이다. 더운 지방에서는 특히 그러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런 응달이 자기들의 신에게 즐거운 곳이 되리라고 생각했다. 아니면 그들은 짙은 녹음이 명상학에 알맞고 두려운 마음 같은 것이 들게 하기 때문에 예배의 적지(適地)라고 상상했을 것이다.

2. 육체적 간음이 여기서 그들의 또 다른 범죄로 추궁되고 있다. "저희는 행음하기를 마지 아니하였다" (18절). 그들은 음란을 업으로 삼았다. 그것은 때때로 범한 단일 행위가 아니라 음심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범죄 하기를 쉬지 않는 많은 사람들의 경우처럼(벧후 2:14) 그들의 변치 않는 행위였다. 이스라엘에게서 발견된 것은 가증스러운 불결과 음란이었다.

(1) 그것은 우상 숭배의 부수물로 언급된다. 그들의 거짓 신들은 그들을 음란으로 이끌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섬긴 악마는 비록 영이긴 하지만 음란한 영이기 때문이다. 우상을 섬긴 자들은 창기와 함께 나가며 음부와 함께 희생을 드렸다. 왜냐하면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여 그를 욕되게 했으므로 하나님께서도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악한 애정:흠정역)대로 내버려 두사 자기 몸을 서로 더럽게 하신 때문이다(롬 1:24, 28).

(2) 그것은 우상 숭배의 벌로 언급된다. 우상을 숭배한 자들은 바알브올의 숭배에서처럼(민 25:1, 2) 우상 숭배 의식에 참가한 창기들과 함께 나갔다. 이를 벌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아내와 딸들을 마찬가지의 악한 애욕에 내버려 두셨다. 그들은 행음하며 간음하였으니(13절) 이는 그 남편과 부모들에게 큰 슬픔과 수치가 되었다. 자신은 정숙하지 않은 자라도 아내나 딸들은 정숙하기를 바라는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형벌에서 자기들의 죄를 읽을 수 있었다. 이는 마치 다윗의 간음이 자기 아들에 의한 후궁들의 겁탈로 벌 받은 것과 같다(삼하 12:11). 그들은 간음죄를 범했지만 남들도 그들에게 꼭 같은 죄를 범함으로써 그들을 슬픔과 고통 속으로 몰아넣는다. 그럴 때에라도 그들은 하나님이 의로우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3. 정의의 왜곡(18절). "저희 방백들은 달라 하기를 사랑한다(흠정역)." 즉 그들은 뇌물을 사랑한다. 그 입에서는 "달라 달라" 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그들은 부정 이득에 미쳤다. 그들과 볼일이 있는 자는 누구든지 "너는 무엇을 주렸는가?"라는 물음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들은 방백(통치자)으로서 직분상 정의를 행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도 사례금을 주어야 정의를 행해준다. 그들이 사례금을 위해서 부정을 행하리라는 것은 확실하다. 금전에 대한 사랑은 공평을 파멸시키며 모든 악의 뿌리가 된다는데 주의하자. 그러나 "달라" 고 하기를 사랑하는 것은 어느 누구보다 통치자에게 수치가 된다. 통치자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탐욕을 미워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아마 이것은 여기 "그들의 술이시다" (한글개역 성서:저희가 마시기를 다하고)는 표현의 의도일 것이다. 그들의 마시는 것은 김이 빠지고 맛이 나갔다. 정당하게 행사되는 정의는 목마른 자에게 대한 음료처럼 원기를 북돋우는 것이 되나 정의가 왜곡될 때 즉 지배자들이 보수를 받고 죄인을 방면하거나 무죄한 자를 정죄할 때는 그 마시는 것이시다. 그들은 "공법을 벌레로 변하게 하는 자들이다" (암 5:7). 아니면 이것은 일반적으로 전 국민의 타락된 도덕을 가리킬 수도 있다. 그들은 자기들의 모든 생명과 정신을 상실했고 하나님께는 죽은 것만큼이나 역겨운 존재였다. 그들은 신술처럼 역겨운 존재였다(신 31:32, 33 참조).

Ⅱ. 이런 죄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진노하실 징표는 다음 여러 가지다.

1. 그들의 아내와 딸은 그 가족들에게 끼친 피해와 치욕에 대해 처벌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14절). "내가 너희 딸들을 벌하지 않으리라." 그들은 자기 죄에 대한 벌을 받지 않음으로 해서 계속 그 죄를 범하려 할 것이다. 한 죄인의 무 형벌은 때때로 다른 죄인의 벌이 된다는 데 주목하자. 또는 "내가 너희를 벌하듯 그들을 벌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너희는 유다가 그 며느리에 대해 한 것처럼 그들이 너희보다 더 의롭다는 것을 자인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창 38:26).

2. 그들은 잠시 번영할 테지만 그 번영은 그들의 멸망에 보조 역할을 할 것이다. 그 번영은 그들에게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징표로서 등장한다(16절). "여호와께서 저희를 넓은 곳의 양같이 먹이시리라" (흠정역). 그들은 비옥하고 넓은 초장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들은 거기서 완전히 포식하게 되고 최상의 것으로 배부르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잘 먹인 양처럼 그들을 살륙하기 위한 준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살져서 차버린다면 도살자를 위해 살찌는 것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그들을 공유지, 참으로 넓은 장소의 양처럼 먹인다고 해석한다. 이스라엘의 목자는 그들을 자기 초장과 자기 보호로부터 몰아 내실 것이다.

3. 그들을 회개시키기 위한 어떠한 수단도 사용되지 않을 것이다(17절). "에브라임은 우상과 연합하여 우상을 사랑하며 우상에 빠졌으니 그를 버려두라. 아무 사람이든지 그를 책망하지 말라(4절). 그를 그 마음의 정욕대로 내버려 두며 그 자신의 의향대로 행하게 하라. 우리는 그를 고치고자 하였으나 그가 고침을 받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를 버려두라." 그들의 결국이 어떠한지 살펴보자(신 32:20). 어떤 사람이든 간에 죄 중에 혼자 버려둔다는 것은 슬프고도 쓰라린 심판임을 명심하자. 왜냐하면 하나님은 죄인에게 대해 이렇게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 우상 즉 세상 및 육신과 연합하였다. 그는 고칠 수 없을 만치 교만하고 탐욕스러우며 포악하다. 그는 고칠 수 없는 주정뱅이거나 행음자다. 그를 혼자 버려두라. 양심아, 그를 혼자 버려두라. 목사야, 그를 버려두라. 섭리야, 그를 버려두라. 지옥의 불길이 그를 깨닫게 하기까지 아무것도 그를 일깨우지 못하게 하라." 아버지가 자식을 폐적하려고 결심하는 때는 그 패역한 자식을 그 이상 더 징계하지 않는다. 자기 죄 속에서 당혹함을 느끼지 않는 자들은 그 죄 때문에 멸망받게 될 것이다.

4. 그들은 신속하고 수치스러운 멸망으로 급히 데려감을 당할 것이다(19절). "바람이 그 날개로 저를 쌌다. 이는 저를 급하고 격렬하게 그리고 불가항력적으로 포로로 끌어가기 위해서다." 그는 그들을 회리바람으로 제해 버리실 것이다(시 58:9). 그러면 그들은 그 제물로 인하여 수치를 당할 것이다. 그들은 우상에게 제물을 바친 자기 죄 때문에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며 자기들의 어리석음을 부끄러워하게 될 것이다. 즉 그들은 자기들을 도울 능력이 없는 신들에게 그토록 비용을 들이고 자기들을 멸할 만한 전능한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을 자기들의 원수로 삼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언젠가 부끄러워하고 수치를 당할 제물이 있다는 데 주목하자. 자기 시간과 힘과 명예와 모든 위안물을 세상과 육신에 바치는 자들은 곧 그것을 부끄러워하게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눈멀고 절고 마음에도 없는 제물을 하나님께 바치는 자들도 그것을 부끄러워하게 될 것이다.

Ⅲ. 범죄 한 이스라엘의 전철을 따라 죄를 짓지 말라는 경고가 유다에게 주어지고 있다. 이것은 14절 끝에서도 나온다. "깨닫지 못하는 백성은 패망하리라." 부닥치는 거침돌을 피하거나 극복할 줄 모르는 자들은 넘어지지 않을 수 없다(그러므로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특히 두 지파의 나라 유다가 그렇다(15절). "이스라엘아 너는 행음하여도 유다는 죄를 범치 말아야 할 것이라." 이스라엘은 우상 숭배에 빠질지라도 유다는 감염되지 말아야 했다. 다음을 살펴보자.

1. 이것은 매우 필요한 경고였다. 유다인에게는 이스라엘인이 형제였고 가까운 이웃이었다. 이스라엘은 유다보다 다수였고 이때에는 보다 번성하였다. 그러므로 유다인이 이스라엘의 행사를 배우고 영혼의 올무에 빠질 위험이 있었다. 우리가 죄에 감염될 위험이 크면 클수록 경계해야 할 필요성도 더욱 증대한다는 것을 유의하자.

2. 그것은 매우 합리적 경고였다. "이스라엘은 행음해도 유다는 그러지 말 것이라." 유다는 이스라엘보다 큰 지식의 수단을 소유했고 성전과 제사장과 다윗 가문의 왕이 있기 때문이다. 실로는 유다로부터 오시기로 되어 있었고 하나님께서는 유다를 위해 큰 축복을 예비하고 계셨다. 그러므로 유다는 죄를 범치 말아야 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보다 유다에게서 더 많은 것이 기대되기 때문이다. 그들이 만약 범죄 한다면 책임질 일이 더 많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더 무자비하게 다루실 것이며 그들에게서 더 많은 것을 취하실 것이다. 이스라엘이 행음한다고 하더라도 유다는 그러지 않아야 한다. 유다도 범죄 하면 하나님께는 이 세상에서 신앙을 고백하는 백성이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많은 자가 등을 돌렸을 때 "너희도 가려느냐?" (요 6:67)고 열두 제자에게 이르셨듯이 하나님께서도 여기서 유다에게 말씀하신다. 이제껏 자기 순전을 지킨 자들은 모든 사람이 타락하는 시기에조차 자기 순전을 굳건히 고수해야 한다는 데 유념하자. 유다를 이스라엘처럼 범죄 하는 것에서 보호하기 위해 두 가지 규칙이 제시된다.

(1) 우상 숭배를 범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들은 우상 숭배의 장소에 접근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너희는 길갈로 가지 말라." 그들의 모든 악은 길갈에 있었다(9:15; 12:11). 그들은 길갈에서 죄를 더했다(암 4:4). 아마 그들은 길갈에 대한 경외감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곳에서 여호수아는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다" (수 5:15)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길갈로 가지 말라고 금지를 받는다(암 5:5). 꼭 같은 이유로 그들은 벧엘로 가서는 안 되는데 벧엘은 여기서 허영의 집이라고 불린다. 왜냐하면 벧아웬은 하나님의 집이란 의미의 벧엘과는 달리 허영의 집이란 뜻이기 때문이다. 죄를 멀리하고 악마의 수중에 빠지지 않으려는 자들은 범죄의 기회를 애써 피해야 하며 악마의 땅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

(2) 우상숭배를 범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들은 신성 모독을 주의해야 하며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해서는 안 된다는 것. 그들은 진실과 공평과 정의로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라는 명령을 받았다(렘 4:2). 그러므로 여기서 금지하고 있는 것은 허위와 불공평한 불의로 하는 맹세이며 경박하고 성급한 맹세나 거짓되고 기만적 맹세나 여호와와 우상으로 하는 맹세이다(습 1:5). 꾸준히 하나님께 집착하려는 자들은 하나님께 대한 경외감과 존경심을 소유해야 하며 언제나 엄숙하고 진지하게 하나님의 말을 해야 한다. 참되신 하나님을 희롱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자는 어떤 것이라도 하나님으로 삼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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