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 1장에서는 성도가 받을 환난의 시험을 참아야 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시련을 통해서 믿음이 더 견고해지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는 행위로 구원을 얻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백성이 행함으로 믿음이 견고해지고 성화 구원을 이루어나가야 하는 것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백성으로서 거룩한 삶을 세상에서 살아야 합니다.
성도가 시험을 참음(약 1:1-27)
1절, 문안 인사
[1절]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 . . .
야고보는 말한다.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
본서의 저자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이었다고 본다. 그는 예루살렘 교회의 유력한 지도자이었다. 예루살렘에서 모였던 중요한 교회 회의에서 야고보의 발언은 결론을 내리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행 15:13-21). 갈라디아서에 보면, 바울은 ‘주의 형제 야고보’를 사도들과 같은 권위를 가진 인물로 언급했고(1:19) 또 ‘기둥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이라고 표현하였다(2:9).
야고보서 저자가 자신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표현한 것은 예수님을 단순히 혈육의 형인 한 인간으로 생각하지 않고 주님으로 고백한 것, 즉 그에 대한 자신의 순종을 고백한 것이라고 본다. 예수님은 인간적으로는 그의 형이었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그에게 주님 곧 그가 순종해야 할 분이심을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 즉 수리아와 소아시아 등지에 흩어져 살고 있었던 유대인들에게 편지하였다. 유대인들은 이스라엘과 유다 왕국의 멸망 이후 온 세계에 흩어져 사는 민족이 되었다.
2-4절, 시험을 기쁘게 여기라
[2-4절]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 . . .
야고보는 또 말한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형제’라는 말은 본 서신에 19번이나 사용된 말로서 초대교회에서 성도들 상호간에 사용된 매우 친근한 명칭이었다. 우리는 모두 주 안에서 형제들이다. ‘여러 가지 시험’이라는 말은 성도에게 닥쳐오는 시험이 다양함을 보인다. 어떤 때는 육체적 질병이 있고, 또 어떤 때는 실직이나 부도, 파산 등의 물질적 손실이 있다. 어떤 때는 가족들의 질병과 사고와 죽음이 있고, 어떤 때는 친구의 비방과 배신이 있다. 어떤 때는 가정의 파탄이나 국가의 경제 공황이나 전쟁이 있다. 성도는 이런 다양한 시험을 당할 때에 그것을 불평하지 말고 그것을 온전히 기쁘게 여겨야 한다. 그 이유는,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고 인내를 온전히 이루면 온전하고 구비된,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인격자가 되기 때문이다(롬 5:3-4). 신앙 인격은 시험과 시련을 통해 단련되고 성숙케 된다. 온전한 인격자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우리가 이 세상에서 힘써야 할 성화의 목표이다.
5-8절, 지혜가 부족하면 구하라
[5-8절]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 . . .
야고보는 말한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성도가 시험을 잘 참고 잘 대처하려면 지혜가 필요하다. 지혜는 하나님의 말씀의 지식을 현실에 잘 적용하는 능력을 가리킨다. 그것이 지식과 다른 점이다. 지혜 있는 자는 현실에서 하나님 말씀대로 잘 대처하여 나간다. 만일 우리가 지혜가 부족하다고 느낀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구하여 얻을 수 있다. 주께서는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 7:7). 또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데 우리는 왜 그에게 지혜를 구하여 얻기를 주저하겠는가?
우리는 하나님께 지혜를 구할 때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지혜를 구하면서 의심하는 자는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고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지혜를 구할 때 의심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기 때문이다. 솔로몬이 지혜를 구할 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였듯이(왕상 3:10), 우리가 지혜를 구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맞는 내용을 구하면 하나님께서 잘 들어주실 것이다(요일 5:14).
9-11절, 성도의 자랑
[9-11절]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부한 형제는 . . . .
야고보는 또 말한다.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우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
사회적 신분이 낮거나 경제적 어려움이 있는 성도들은 존귀하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영광스럽고 복된 천국의 시민이 된 것을 자랑할 수 있다. 흔히 성도에게 닥치는 큰 시험거리는 물질 문제이지만, 성도들은 세상 것들이 헛되다는 것과 주 예수님 안에서 얻은 구원과 복이 지극히 크고 가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것으로 만족하며 즐거워하고 자랑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 사회적 신분이 있거나 물질적 유여함이 있는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적 부요의 헛됨을 인정하고 낮은 형제들과 교제하게 된 것을 자랑할 수 있어야 한다. 그들은 이전에 가치 있게 여겼던 세상의 것들이 풀같이 시들고 아름다운 꽃같이 없어지는 것임을 깨달았고 거기에 더 이상 큰 가치를 두지 않는다. 성도의 가치는 오직 ‘썩지 않고 쇠하지 않는’ 천국 기업이요 영원히 죽지 않는 영광스러운 부활의 몸이다.
1절부터 11절까지의 교훈은 세 가지 정도이다. 첫째로, 우리는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날 때 그것을 온전히 기쁘게 여겨야 한다. 왜냐면 성도에게 닥치는 시험은 인내를 만들고 인내를 온전히 이루면 온전한 인격자가 되기 때문이다. 성도에게 닥치는 여러 가지 시험은 다 유익하다.
둘째로, 만일 우리에게 지혜가 부족하면 우리는 하나님께 그것을 구하여 얻어야 한다. 구할 때 우리는 의심치 말고 믿음으로 구해야 한다. 왜냐면 하나님께서는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시며 지혜를 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셋째로, 우리들 가운데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낮은 형제들은 주 안에서 자신들의 높은 신분을 자랑하고, 또한 부유한 형제들은 자신들의 낮아짐을 자랑해야 한다. 왜냐하면 성도들은 세상의 것들이 다 풀과 같고 풀의 꽃과 같이 헛됨을 배웠고 깨달았기 때문이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하나님의 자녀 됨과 천국과 영생과 부활만이 참으로 귀하고 가치 있는 것임을 성경과 이성으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12-18절, 시험의 원인
[12절]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 . . .
야고보는 또 말한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야고보서 1장에서 ‘시험’이라는 원어(페이라스모스)(2, 12-14절)는 ‘시련’이라는 원어(도키미온)(3절)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는 것 같다. 사람이 환난과 고난의 시험을 잘 참으면 온전한 인격자가 되므로 복되다(3-4절).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이라는 원어(도키모스)는 ‘시험을 받은’이라는 의미이다. 성도들의 시험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시험이다. 그것을 잘 통과하는 자들은 그들에게 참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있음이 증명될 것이다.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이란 영생을 가리킨다. 면류관은 승리한 자들에게 주는 상을 의미한다. 성도는 이 세상에서 승리할 것이다. 바울은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고 증거하였다(롬 8:35, 37). 요한도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고 말했다(요일 5:4).
영생은 행위의 대가가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시험을 통과하고 승리하는 믿음의 삶의 결과라는 뜻에서 상이라고 표현되었다고 본다. 영생은 성도의 정상적 신앙생활의 결과이다. 로마서 6:22,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갈라디아서 6: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그러므로 영생의 영광을 얻을 자들은 세상에서 시험을 잘 참아야 한다.
[13-14절] [그러나]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 . . .
야고보는 말한다. “[그러나]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시험의 원인은 무엇인가? 물론 하나님의 주권 진리에서 보면 모든 일들의 제일 원인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 악의 책임을 전가시키는 방식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고 말하지 말라고 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께서는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않으시고 친히 누구를 시험하지도 않으신다.
시험의 원인은 각 사람의 욕심이다. 각 사람은 자기 욕심에 이끌려 미혹될 때 시험에 떨어진다. 예를 들어, 남에게서 비난을 받는 것이 시험이 되는 것은 자존심이나 명예심 때문이며, 물질적 파산이 시험이 되는 것은 물질에 대한 애착 때문이며, 몸의 질병이 시험이 되는 것은 세상에 대한 애착 때문이다. 만일 이런 애착이나 욕심이 없다면, 그것들이 시험거리가 될 수 없을 것이다. 모든 일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지혜로우시고 공의로우신 판단과 처분과 보응을 믿는다면, 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실 것을 믿는다면, 또 인생의 최고의 목표를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으로 확신한다면,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들도 시험거리가 되지 못할 것이다. 사람의 시험은 자신의 욕심에서 오는 것이다.
[15-16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 . . .
야고보는 또 말한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세상의 것들에 대한 욕심에서 죄가 생긴다. 물질에 대한 욕심, 쾌락에 대한 욕심, 명예에 대한 욕심 등이 살인과 간음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의 죄를 낳는다. 또 그 죄가 장성하면 사망을 낳는다. ‘장성한다’는 원어(아포텔레오)는 ‘끝까지 마친다’는 뜻이다. 즉 죄가 죄로 끝마치고 사람이 그 죄를 끝까지 회개치 않는다면 죽음에 이른다는 뜻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죽음은 지옥 형벌을 포함한다. 또 본문은 사람의 시험이 욕심에서 나는 것이므로 ‘속지 말라’고 말한다. 그것은 자신이 시험받는 것을 하나님 탓으로 돌리지 말라는 뜻이라고 본다.
[17절]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 . . .
야고보는 또 말한다.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천지만물은 하나님의 창조물이며 천지만물에 있는 모든 좋은 것들은 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고 땅을 정복하고 생물들을 다스리게 하셨으므로 사람이 땅을 정복하고 생물들을 다스리는 데 쓰이는 지혜와 능력은 다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들이다. 사람이 발전시킨 음악과 미술, 그리고 문학과 과학 등도 다 하나님께서 주신 좋은 선물들이다. 이것들은 다 위로부터 즉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왔다. 성경에서 ‘빛’은, 무지와 죄와 불행과 구별되는 지식과 의와 행복을 가리킨다. 이런 점에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변함이 없으시며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다.
[18절] 그가 그 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 . . .
야고보는 또 말한다. “그가 그 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그가 만드신 피조물들 중에서 한 첫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나으신 자들이다. ‘첫열매’란 중생(重生)의 구원을 가리킨다. 그것은 천국과 부활에 비해 볼 때 첫열매에 해당한다. 로마서 8:23,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救贖)을 기다리느니라.” 세상에서 영광스럽고 완전하고 충만한 추수는 아직 미래에 있다. 앞으로 올 새 세계를 생각할 때에 성도들의 구원은 첫열매와 같다. 장차 만물이 새로워지고 회복될 것이다. 사도행전 3:21, “만유를 회복하실 때.” 로마서 8:20, 21,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영광스러운 천국과 부활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우리를 중생시키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된 것이었다. 에베소서 1:4-5,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요한복음 15:3,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에베소서 5:26,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12절부터 18절까지의 내용은 몇 가지의 실제적 교훈을 준다. 첫째로, 우리는 시험에 지지 말고 잘 참고 이겨서 생명의 면류관을 받자. 둘째로, 사람의 시험의 원인은 자신 속에 있는 욕심이므로, 우리는 쾌락과 물질과 명예 등 세상에 속한 것들에 대한 모든 욕심을 버림으로써 어떤 시험에라도 떨어지지 않도록 하자.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천국의 첫열매로 구원하신 것을 깨닫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고 천국만 바람으로써 모든 시험을 이기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
19-27절,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라
[19-20절]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그러므로] . . . .
야고보는 또 말한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그러므로](전통사본)(KJV)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이는]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 우리는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해야 한다. 잠언은 입술을 제어하는 자가 지혜가 있고 말을 아끼는 자가 지식이 있다고 말한다(잠 10:19; 17:27). 우리는 남에게 유익을 주는 말만 하고 남에게 해를 끼치는 말은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또 우리는 성내기도 더디 해야 한다. 사람이 옳지 않은 일을 보고 화를 낼 수 있겠지만, 화를 내더라도 많이 생각한 후에 내어야 한다. 잠언은 노하기를 더디 하는 것이 지혜라고 교훈하였다(잠 12:16; 14:17, 29; 15:18; 16:32; 19:11 등). 우리가 성내기를 더디 할 이유는, 우리가 화를 낼 때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화를 낼 때 남을 미워하기 쉽고 사랑의 계명을 어기게 된다.
[21절]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어버리고 . . . .
야고보는 또 말한다.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어버리고 능히 너희 영혼을 구원할 바 마음에 심긴 도를 온유함으로 받으라.” 우리는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어버려야, 즉 회개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 구원받은 성도의 특징은 죄를 버리고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다. 또 우리는 구원의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아야 한다. ‘도’(道)는 ‘말씀’이라는 뜻이며 그것은 복음을 가리킨다. 그것은 ‘너희 영혼을 구원할 수 있는 말씀’ 곧 ‘구원의 말씀’(행 13:26)이다. 이 말씀은 구약시대의 율법이 돌에 새겨졌던 것과 달리 우리 ‘마음에 심긴 말씀’이다(고후 3:3). 우리는 구원의 복음을 온유함으로 받아야 한다. 온유함은 어린아이같이 순진하고 겸손한 마음가짐을 말하며 이것이 믿음의 태도이다. 교만한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대항하지만, 온유한 마음은 말씀을 다 믿고 구원을 받는다.
[22-24절]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 . . .
야고보는 말한다. “[그러나]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누구든지 도를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리거니와.”
복음을 믿고 구원을 받는 것은 기본적이지만, 야고보가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참 믿음이 행함을 동반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그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라”고 강조한다.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자는 실상 믿지 않는 자이니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고 만다. 그러나 말씀을 행하는 자는 그의 행함으로 자신의 구원을 증거한다. 여기에서 행함은 우선 성급하게 화를 내지 않고 덕스러운 말을 하고 덕스러운 행동을 하는 것부터 가리킬 것이다.
말씀은 거울과 같다. 말씀을 듣는 것은 거울로 자신을 보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 것은 거울로 자신의 더러운 얼굴을 보고 그 얼굴을 씻지 않고 잊어버리는 것과 같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듣기만 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고 들은 후에 회개하며 고칠 것은 회개하며 고치고, 행할 것은 행하라고 주신 것이다.
[25절]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 . . .
야고보는 또 말한다.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 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원리]’은 복음을 묘사한 말이다. 구약의 율법은 불완전한 법이었으나 복음은 완전한 법이다. 그러므로 구약시대의 제사제도나 성막 혹은 성전은 신약시대에 다 폐지되었다. 신약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과 그가 이루신 의로 말미암은 완전한 구원의 원리이다.
복음은 또한 ‘자유하게 하는 원리’이다. 그것은 사도 바울의 갈라디아서에서 밝히 증거된 진리이다. 바울은 그 서신에서 복음 안에 율법으로부터의 자유가 있음을 증거하였다. 그 자유는 죄와 사망과 지옥형벌로부터의 자유일 뿐 아니라, 율법 제도와 율법 멍에로부터의 자유이다(갈 5:1).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라는 구절에서 ‘있는 자’라는 원어(파라메이나스)는 ‘그 안에 거하는 자’라는 뜻이다. 복음 진리를 믿고 묵상하며 그 안에 거하는 참된 성도는 말씀을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고 실행하는 자이다. 즉 참 신앙은 행위를 동반한다는 뜻이다. 로마서에서 믿음을 많이 강조한 바울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성도가 죄 가운데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하였다(롬 6:1-2, 15).
또 말씀을 실행하는 자는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을 것이다. 성도가 범죄하면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것이지만(히 12장), 의와 선을 행하면 하나님의 복을 받아 평안과 형통을 누릴 것이다. 신명기 28장에 계시된 복의 원리는 언제나 동일하다. 그것은 말씀을 순종할 때 받을 수 있는 복이다. 그것은 건강의 복, 자녀의 복, 재물의 복, 평안의 복, 존귀의 복, 승리의 복 등을 포함한다.
[26절]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 . . .
야고보는 또 말한다.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야고보는 경건과 행위의 관계를 강조한다. 그가 예를 든 행위는 말에 대한 것이다. 자신이 경건하고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는 자가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않아서 조심스런 말을 하지 않고 선한 말, 덕스러운 말을 하지 않는다면, 그는 자신을 속이는 것이며 그의 경건은 헛것이다. 그가 참으로 경건하고 믿음이 있는 자라면, 그는 자신의 언어생활부터 고쳐야 한다. 그는 사랑의 원리에 어긋나지 않는 진실한 말, 선한 말, 덕스러운 말을 해야 한다.
[27절]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 . . .
야고보는 또 말한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야고보는 참 경건이 어떤 행위로 나타나야 하는 지에 대해 말한다. 그는 두 가지를 예로 든다. 하나는 고아와 과부에 대해 사랑으로 관심을 가지고 그 환난 중에 돌아보는 구제와 봉사의 일이며, 다른 하나는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이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불쌍한 교우나 이웃을 돌아볼 줄 모른다면, 또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세상에 불경건하고 죄악되고 음란한 유행과 풍조를 배격하지 못하고 따르고 있다면, 그 사람의 경건과 믿음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참된 경건과 참된 믿음이 아니다.
19절부터 27절까지의 내용은 몇 가지의 교훈을 준다. 첫째로, 복음 신앙은 성도에게 기본적이다. 우리는 복음을 온유함으로 받고 우리를 온전히 자유케 하는 그 복음 진리 안에 거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복음을 듣고 행하지 않는 자가 되지 말고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성경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 경건은 헛것이다. 그러나 성경 말씀과 교훈을 읽거나 듣고 행하는 자는 복되다.
셋째로, 우리는 특히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고 성내기도 더디 해야 한다. 또 우리는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자신을 지켜 이 세상의 죄악된 풍조와 유행에 물들지 말아야 한다.
[고린도전서 10장 성경 좋은 말씀] 우상숭배치 말 것(고전 10: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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