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 원어 설교

[로마서 3장 헬라어 강해] 유대인 할례를 반박하는 바울(롬 3:1-8)

체데크 2021. 5. 1.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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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로마서 3장 헬라어 강해 중에서 유대인 할례를 반박하는 바울이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주의 신앙을 하고 있었습니다. 할례를 받아야 만이 구원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유대교에서 그리스도교로 왔음에도 불구하고 할례를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할례를 받아야 만이 구원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방인들이 그리스도교로 들어오면 할례를 받게 했습니다. 또한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선민이라고 생각하여 교만했습니다. 바울은 이런 것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교회에서 유대인처럼 율법주의 신앙을 해서는 안 됩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유대인 할례를 반박하는 바울(롬 3:1-8)

 

1절 티 운 토 페릿손 투 이우다이우 에 티스 헤 오펠레이아 테스 페리토메스

롬 3:1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냐

=====3:1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 지금까지 할례의 무효성과 표면적인 유대인에 대해 공격하던 것을 잠시 멈추고 바울은 이제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다. 비록 불법과 불신앙으로 인해 하나님의 축복에 동참하지 못한 유대인이라 할 지라도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바 축복은 일단 인정해 줄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바울은 그 자신이 유대인이면서 이방인의 사도가 될 수 있었던 사실에 비추어 유대인의 우선순위 내지 우월성에 대해서 언급한다. 즉 바울 자신이 말씀을 먼저 받은 유대인이기 때문에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다는 것을 고백적으로 본절과 2절에서 진술하고 있다.

한편 '나음'에 해당하는 헬라어 '토 페릿손'은 '넘치는', '남아도는', '두드러진', '필요 없는' 등의 의미를 가진 형용사가 정관사 ''함께 명사형으로 사용되었다. 이 말은 '쓸모없이 남아도는 여분'을 의미할 때도 사용되었고(고후 9:1), 부사적 용법으로서 '과도하게 풍부하다'는 의미로도(고후 10:8) 였다. 본절에서는 의문대명사 ''( )와 함께 사용되어 유대인이 가진 '탁월성' '우월성'(superiority)을 의미한다.

2절 폴뤼 카타 판타 트로폰 프로톤 멘 가르 호티 에피스튜데산 타 로기아 투 데우

롬 3:2 범사에 많으니 우선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

=====3:2

범사에 많으니 - '많다'(폴뤼)라는 말은 1절의 '토 페릿손'을 의미한다. 유대인들에게 유익이 많았다는 의미는 바울이 밝힌 바와 같이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9:4)이 주어졌다는 표면적인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실제로 그들은 하나님의 정하신 제도와 규례 아래서 많은 유익을 얻을 수 있었다(2:25). 바울이 이와 같이 유익을 인정하는 것은 지금까지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서 섭리하신 하나님의 경륜(經綸)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며, 또한 인간의 불신앙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폐할 수 없기 때문이다(31).

첫째는 - '첫째는'으로 번역된 '프로톤 멘' 뒤에는 당연'둘째', '셋째' 등의 서수가 기대되지만 바울은 '첫째는' 외에 더 이상의 논리를 전개시키지 않는다(1:8). 본절에서는 문맥상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1) 순서상 앞선다는 의미로서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느 민족보다도 '먼저' 받았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고(Robertson),

(2) 그 중요도나 비중에 있어서 첫째라는 의미로서 유대인에게 가장 첫째 되는 유익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Bruce). 문맥상 (2)의 견해가 타당하다.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 - 9:4, 5에서 바울은 보다 자세하게 유대인이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특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중에는 '하나님의 말'과 관련된 것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언약들과 율법', '예배와 약속들'이 그것이다.

칼빈은 '하나님의 말씀'을 좁은 의미로 해석하여 율법과 선지자들을 통해서 증명되고 해석된 '언약'이라고 지칭하였다. 그러나 블랙(Black)'말씀'에 해당하는 헬라어 '로기아''예언적인 말씀'(oracles)으로 번역하여 주로 '구약의 약속''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한 것으로 이해한다. 또한 구약성경을 포함하고 있다는 생각을 배제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대부분의 주석가들도 9:4, 5를 근거로 '말씀''구약성경'이라는 포괄적인 의미로 해석한다(Matthew Henry, Greijdanus, Hendriksen, Murray, Lenski, Barmby). 왜냐하면 바울은 유대인들이 구약성경 전체를 통해 하나님의 특별 계시를 받음으로써 이방인과 달리 하나님의 뜻을 더욱 잘 아는 백성이 되는 축복을 받게 된 점에 대해 진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맡았음이니라'는 용어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것뿐 아니라 그것을 전승시키고 가르치며 전파하는 등, '말씀'관련된 사역 전체를 함축하고 있다.

3절 티 가르 에이 에피스테산 티네스 메 헤 아피스티아 아우톤 텐 피스틴 투 데우 카타르게세이

롬 3:3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냐

=====3:3

어떤 자들이 - 유대인들 가운데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도 있으므로 바울은 '유대인'이라 총칭하지 않고 부분적인 의미의 부정 대명사를 사용했다.

어찌하리요(티 가르에이). 빌 1:18에 기록된 '그러면 무엇이'(티 가르)와 같은 감탄조의 어투이기도 하지만 본장에서는 이어지는 두 가지의 질문 형식과(5, 8) 같이 부정의 대답을 원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바울은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특권을 완전히 무사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그 특권 속에서 무한한 것을 기대하며 착각하는 자들을 깨우치기 위해 '결코 그럴 수 없다'는 강한 부정을 유도하는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용법은 바울이 흔히 사용하는 논쟁적인 문체 속에서 자주 발견되는 것으로서 유대교 랍비들의 논쟁법을 인용한 수사법(修辭法)이라고 할 수 있다(E. Kasemann).

믿지 아니하였으며...그 믿지 아니함이 - 본 구절은 해석상 여러 견해가 있다. 절에 사용된 동사 '에피스테산'과 명사 '에피스티아'가 개역성경처럼 '불신앙'의 의미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성실함이나 믿음의 부족'을 의미한다는 견해도 있다.

혹자는 이 두 가지 의미를 다 포함한다고 주장하지만(Greijdanus) 본질적으로 두 가지 의미를 합쳐질 수 없다. 영역본의 견해는 다음과 같이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1) '불신앙', 의미에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배척했다는 어감이 있다.

나아가 하나님을 대적할 정도로 신앙이라고는 조금도 없고 오히려 적이 되었다는 의미이다(Alford, Bultmann, Hodge, Lenski, Hendriksen, Ridderbos, Harrison, Bruce, RSV, NEB, Moffat, JB). (2) '믿음의 결여'. 이 해석은 하나님을 배척했다는 의미보다 '적은 믿음'이라는 의미로 '믿음'에 있어서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는 것이고, 믿음의 강도(强度)가 어느 정도 약하다는 의미가 강하다(Cranfield, Greijdanus, Sanday, KJV, NASB, NIV). 따라서 이 해석은 믿음이 있다는 것을 전제하는 해석이 된다.

그러나 히 3:12에서 언급된 '아피스티아'는 분명히 '불신앙'을 나타내며, 딤후 2:13에서도 하나님의 '미쁘심'과 인간의 '미쁨 없음'을 대조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본절도 그러한 형식을 취해 '불신앙'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4:20의 경우와 같이 해석하기 애매한 구절이 있기는 하지만, 일반적으로 성경 전체에서 이 단어들은 '믿음의 결여'라기보다는 '불신앙'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또한 히브리서 저자가 '그 들은 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함이라'(4;2)고 언급한 것은 유대인들의 '불신앙'에 대한 것이지 '믿음의 결여'대한 것이 아니다. 이는 히 4:3에서 '불신앙'으로 인해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유대인들에 대하여 설명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본절도 약속에서 제외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졌던 '불신앙'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뇨 -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의미에서의 백성에서 제외된 것은 그들의 불신앙에 기인한 것이기에 하나님께서 약속에 신실하지 못했다는 논리는 있을 수 없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말씀에 불성실하거나 불신앙의 삶을 살 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하신 약속을 취소(取消)하실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신 적은 있다(신 8:18-20;2:19-21). 그렇지만 그들의 불신앙으로 인해 하나님의 약속에 포함된 것들 특히 메시아 예언 등이 무효화될 수는 없다.

4절 메 게노이토 기네스도 데 호 데오스 알레데스 파스 데 안드로포스 프슈스테스 카도스 게그랍타이 호포스 안 디카이오데스 엔 토이스 로고이스 수 카이 니케세스 엔 토 크리네스다이 세

롬 3:4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기록된 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함과 같으니라

=====3:4

그럴 수 없느니라 - 이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 게노이토'는 히브리어 '할릴라'와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70인 역(LXX)'할릴라'를 '메게노이토'로 번역하고 있다(44:7; 24:16; 왕상 21:3). 이 말은 강한 부정을 나타내는 데 사용된다.

사람은 다 거짓되되 - '모든 사람이 거짓되다'는 것은 시 116:11의 인용구로서 인간의 불의함, 신실치 못함 등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더 나아가서 23절의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다'는 내용과도 부합된다.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 3절의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보다 강력하게 하나님의 미쁘심을 설득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참'(알레데스)되시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알레데스'는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로기아), '미쁘심'(피스티스), '의'(디카이오스)와 함께 연결되어 서로 보충적으로 하나님의 속성을 보여준다.

인간이 가진 불신앙과 거짓과 불의는 참되신 하나님을 자기의 소욕에 따라 마음대로 판단하려는 죄악 된 생각으로 나타난다. 반면에 ''(알레데스)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자신의 목적과 약속은 일관성이 있으므로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J. Murray).

이처럼 변하지 않는 참되신 하나님의 속성 때문에, 사람의 믿음이나 진실 여부에 관계없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영원히 동일하(100:5).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 본 구절은 시 51:4(LXX 50:6)의 인용으로, 천상(天上)의 법정을 연상시키는 동시에 시편 저자 자신의 죄와 무법을 생생하게 표현한다. 그는 죄에 대한 고백을 반복적으로 하는데(LXX 50:4, 5, 7, 11), 이러한 표현은 시편에 그리 흔하지 않은 독특한 용법이다. 아마 유대적 관점에서 무법(lawlessness)과 불신앙(faithlessness)을 동일하게 보기 때문에 바울이 이 구절을 인용한 것 같다(Dunn).

바울은 시편 기자의 표현과 같이 천상 법정의 공의로움이 사람의 죄악을 드러내기에 충분하고, 그 판단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 이처럼 사람의 상대적인 믿음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미쁘심을 어떻게 하지 못한다는 것(3)을 설득력 있게 말한다. 요컨대 이 인용은 인간의 불의함과 거짓됨을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참되심에 대조시키기 위한 것이다.

판단받으실 때에 - '판단받으실 때'에 해당하는 시 51:4의 히브리 본문이 개역성경에는 능동형인 '판단하실 때'로 번역되어 있으나 70인 역(LXX)에는 바울의 인용대로 수동태로 번역되었다. 개역성경은 하나님께서 그 어떤 것으로부터도 판단받을 수 없다는 입장에서 번역하고 있지만, 우리는 수동형이든 능동형이든 하나님께서 그 어떤 것으로부터 판단받는다는 의미로 다윗이 고백하거나 바울이 인용한 것이 아님을 주목해야 한.

즉 시편에 나타난 다윗의 의도는 비록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를 범했으나 그 죄에 대해 책망하시는 하나님은 의로우심을 나타내는 데 있다. 죄인 된 인간은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에 대해서 아무리 판단해 보아도 하나님의 순전(純全)하심에는 손상을 가할 수 없다.

따라서 죄인 된 인간이 하나님의 판단에 대해 논하든지 하나님께서 그 죄인된 인간을 판단하시든지 그 어느 것도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순전하심에 한치의 도전도 되지 못한다. 하나님의 판단이 어떠한 일에 있어서도 결코 왜곡되지 않고 의롭기 때문에 '이기려 하심이라'는 표현이나 '순전하시다 하리이다'(51:4)란 표현은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이기려 하심이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니케세이스'를 제외한 본절 전체가 70인 역의 번역과 똑같다. '이기다'에 해당하는 이 단어는 비교적 오래된 사본들(A, D)에서는 미래형 '니케세이스'로 되어 있고 70인 역(50:6)과 몇몇 사본들(B, G, L,)에서는 단순과거 가정법 동사인 '니케세스'로 되어 있다. 바울이 자신의 의도대로 시편의 내용을 인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바울은 종말의 심판과 사람의 죄를 연관 지어 생생하게 표현하려고 미래형으로 쓴 것 같다.

5절 에이 데 헤 아디키아 헤몬 데우 디카이오쉬넨 쉬니스테신 티 에루멘 메 아디코스 호 데오스 호 에피페론 텐 오르겐 카타 안드로폰 레고

롬 3:5 그러나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 하리요 [내가 사람의 말하는 대로 말하노니]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

=====3:5

본절에서 바울은 앞절(4)에서 인용한 시 51:4에 대해 유대인들이 오해할 것을 염려하여 부가적인 설명을 덧붙여야 할 필요성을 느낀 것 같다. 혹자는 이러한 견해와는 달리 바울은 단지 자기 교훈에 대한 유대인의 반대에 답변하고 있는 것이지, 오해나 잘못된 추론(推論)에 답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Hodge). 그러나 바울은 8절에서 단순한 유대인의 반대가 아니라 앞에서 이미 언급한 바 있은 바울의 진술에 대한 오해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약속을 어기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모양으로 신실하게 언약을 맺어 오셨던 유대인들을 버리신 것은 공정한 처사가 될 수 없다는 유대인들의 반론이 나올 수 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시거나 약속을 저버리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저지른 죄악에 대하여 공의의 판단으로 징계(懲戒) 하시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유대인으로서 바울은 자신의 체험을 통해서도 이 사실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하리요 - 지금 바울은 5;20에서와 같이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나니'라는 의미로 진술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불의는 결코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빛나게 할 수 없다. 오히려 인간의 불의를 의로우신 판단으로 징계하심으로써 상대적으로 하나님의 의가 더욱더 드러나게 된다.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 - 유대인들에게 할례와 언약들과 율법을 주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진노를 내리셨다고 해서 하나님이 불의하신 분은 아니다(3). 문제는 유대인의 불신앙과 불의며, 하나님은 그에 대해 공의로운 판단을 내리셨을 따름이다.

6절 메 게노이토 에페이 포스 크리네이 호 데오스 톤 코스몬

롬 3:6 결코 그렇지 아니하니라 만일 그러하면 하나님께서 어찌 세상을 심판하시리요

=====3:6

결코 그렇지 아니하니라 - 본 구절의 헬라어 본문은 4절과 마찬가지로 '메 게노이토'이다(4절 주석 참조).

하나님께서 어찌 세상을 심판하시리요 -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들의 불신앙과 불의에 대해 진노를 내리신 하나님이 불의하시다면, 하나님은 심판주로서 자격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는 절대적이므로 이러한 '절대 의'로 인하여 발생하는 진노는 정당성을 갖는다.

구약에서는 심판자의 개념을 사사들에게서 찾을 수 있는데 이들은 법률에 적용되는 소송을 심리(審理)함으로써 공정하게 권위를 사용하는 공직자로서 법정 안에서만 정당한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족장 시대에는 가장이 가정의 재판관이었으며(21), 왕정 시대에는 왕이 최고의 재판관이었다(삼하 15:2, 3).

때로 제사장들도 재판관 노릇을 하였으므로 성소가 재판 장소가 되기도 하였다(33:8; 17:12). 그 외에 성읍의 장로들도 재판관의 임무를 감당했으나(8:6; 4;2) 사람에 관한 판결을 선언하는 데 있어서 최고의 심판자 개념은 언제나 하나님에게 있었다(18:25; 33:22; 4:12). 하나님은 '모든 세계를 판단하시는 분'(94:2),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는 분'이다(2:4).

그러나 죄인은 언제나 공평한 하나님의 심판을 회피하려고 하였다(7:8; 50:4, 5; 10:30). 신약에서는 '심판''크리노' '크리마', '크리시스'등의 단어로 나타나는데, '조사한 후 판결하다' 또는 '분별'이나 '결정' 등의 의미로 쓰였다.

구약의 심판이 하나님의 모든 율법과 규례에 대한 도덕적 판단의 의미로 사용되었다면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어진 새로운 권위에 의하여 판단하는(8:16; 5:9; 벧전 4:5) 종말적인 의미로 더 많이 쓰여졌다(고전 6:2, 3;딤후 4:1).

따라서 본절에 쓰인 '심판'(크리네이)의 개념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이룩된 신성한 도덕적 질서, 다시 말해서 율법적인 기준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받았느냐 하는 것에 의하여 판단받는 것을 의미한다(24-26).

후자의 조건을 갖춘 자는 전자의 조건과 관계없이 그의 영원한 운명이 결정될 것이지만(8:1)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은 전자의 판단 기준 곧 심은 대로 거두게 되는(6:7) 육체의 법을 따라 정죄받으며 육체로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없는 종의 자리에서 율법에 의하여 정죄와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2:12; 2:16).

7절 에이 가르 헤 알레데이아 투 데우 엔 토 에모 프슈스마티 에페릿슈센 에이스 텐 독산 아우투 티 에티 카고 호스 하마르톨로스 크리노마이

롬 3:7 그러나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다면 어찌 내가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요

=====3:7

그러나 - 이 접속사에 대해 몇몇 헬라어 사본들(B, D, G, K, P)은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가르'('왜냐하면...때문이다')를 사용하고 있다. 개역성경과 같이 역'그러나()를 취할 경우(A), 형식상으로는 앞 구절(6)에서 언급한 것을 반대하는 구문이 된다.

그러나 본절은 6절과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 내용상으로나 문장 구조상 5절과 연결된다. 5절과 본절의 관계를 보다 명확히 파악하기 위해 6은 삽입구로 볼 수 있다. 그럴 경우에 본절은 5절과 연결되어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에 대한 진술로 서로의 내용을 보충한다.

이와 반대로 '가르'라는 이유 접속사를 사용할 경우 본절과 8절은 의미상 5절이나 6절 그 어느 절에도 자연스럽게 연결되지 않는다. '가르'는 어떤 판단의 진술 후 그 진술에 대한 이유를 설명하는 절을 이끄는 데 적합한 접속사이다.

따라서 '가르'가 본절에 사용될 경우에는 앞 구절과 연결되어, 5절의 의문에 대한 답변으로서의 절을 이끌지 못한다. 그러므로 ''더 적합한 접속사로 보인다.

나의 거짓말로...그의 영광이 되었으면...심판을 받으리요 - 이 말은 '나의 거짓과 불의가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그의 영광을 드러내고 선포하는 것이라면 나 자신은 죄인 취급되어 심판을 받을 이유가 없지 않느냐'는 의미를 지닌 궤변(詭辯)이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8절 후반부에서 '저희가 정죄받는 것이 옳으니라'고 선포하고 있다. 한편 본절만을 따로 떼어내어 '심판을 받으리요'라는 반문을 '심판을 받을 수 없다'라는 의미로 해석하여, 우리의 거짓말과 불의가 하나님의 영광이 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결론짓는 것은 불경건한 자들의 입장에서나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상황 윤리가 설 수 있는 근거가 된다.

8절 카이 메 카도스 블라스페무메다 카이 카도스 파신 티네스 헤마스 레게인 호티 포이에소멘 타 카카 히나 엘데 타 아가다 혼 토 크리마 엔디콘 에스틴

롬 3:8 또는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어떤 이들이 이렇게 비방하여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하니 그들은 정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3:8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 나의 거짓말과 불의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면 나는 결코 죄인 취급을 받지 않는다고 자신의 잘못을 합리화한 결과는 본절과 같이 보다 적극적인 궤변에 빠지게 된다.

실제로 유대인들은 부모님에 대한 공양(供養)의 책임을 하나님을 섬긴다는 이유로 무시해 버린바 있다(7:11). 바울도 예전에 하나님을 위한다는 종교적인 열심으로 선을 이루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께 대해 악을 행한 적이 있다(8:3;9:4).

비록 바울이 그때에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명목으로 사람들을 핍박하였으나 이제는 태도가 변하여, 오히려 유대인이 바울의 과거에 범했던 똑같은 잘못을 범하고 있음을 바울은 간파하고 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사실을 잘못 이해한 자들의 시각에는 바울의 주장이 도덕 폐기론(Antinomianism)과 같이 여겨질 수도 있으나 그들의 소행은 자기 눈의 들보를 보지 못하는 치명적인 잘못을 범하고 있다는 것이다.

율법 아래 매여 율법의 종 된 자들은 그들의 울타리 속에서 믿음을 판단하려 하지만, 거짓 판단으로 선을 이루려는 그들의 시도는 오히려 더 큰 악을 만들려는 노력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저희가 정죄받는 것이 옳으니라 - 이 판단의 근거는 7절과 8절의 반문식 부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의와 불법이 공존할 수 없고 빛과 어두움이 사귈 수 없으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도무지 조화될 수 없음에도(고후 6:14, 15) 그것이 가능한 것처럼 합리화하려는 자들이나 또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바울은 본 구절로써 최종적인 결론을 내리고 있다. 사실 바울 당시 그리스도인들 중에서도 바울의 교훈을 곡해(曲解)하여 도덕 폐기론을 주장하는 자들이 있었으므로 이러한 바울의 논술은 그들의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아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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