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 원어 설교

[마태복음 12장 헬라어 주석 강해] 예수님의 진정한 가족(마 12:46-50)

체데크 2021. 5. 8. 15:47
반응형

안녕하세요. 오늘은 마태복음 12장 헬라어 주석 강해 중에서 예수님의 진정한 가족이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예수님이 무리에게 말씀을 전하실 때에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와 동생들이 찾아왔습니다. 예수님은 진정한 가족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도 주님 안에서 형제자매들이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진정한 가족(마 12:46-50)

 

46절 에티 데 아우투 랄룬토스 토이스 오클로이스 이두 헤 메테르 카이 호이 아델포이 아우투 헤이스테케이산 엑소 제툰테스 아우토 랄레사이

마 12:46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그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예수께 말하려고 밖에 섰더니

=====12:46

예수께서 무리하게 말씀하실 때에 - 문자적으로 '예수께서 무리에게 여전히 말씀하시고 있는 동안'이다. 이는 앞 구절과의 연관성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예수께서는 집안에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3:20, 21).

그 모친과 동생들 - 13:55-56에 의하면 예수에게는 모친 마리아와 그 형제들 야보, 요셉, 시몬, 유다와 그 누이들이 있었다. 여기 언급된 형제들은 같은 어머니에서 출생한 예수의 동생들이다. 그런데 신약 성경이나 초대교회 교부들과는 거리가 먼 것이지만 마리아의 평생 처녀설을 주장하기 위해 로마 가톨릭은 다음과 같은 견해를 펼친다.

즉 로마 가톨릭은 '형제들'이 요셉의 전처(前妻) 사이에서 출생한 아들들이거나(Hillary, Epiphanius) 아니면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똑같은 이름을 지닌 동생 마리아에게서 출생한 아들들이라는 견해이다(Lange, McHugh, Jerome, Lightfoot).

사실 '형제들'이란 남자 친척들이라는 광의적인 의미로 사용될 수도 있다(22:1). 그러나 이런 광의적 의미에 근거하여 '형제들'을 전처소생으로 본다면 예수는 법적 측면에서 다윗 왕위를 계승할 수 없게 된다. 또한 이름이 동일한 마리아의 여동생의 아들이라고도 볼 수 없는데, 이유는 두 딸에게 똑같은 이름을 지을 부모가 없는데, 이유는 두 딸에게 똑같은 이름을 지을 부모가 어디 있겠느냐는 것이다.

따라서 전통적 견해로서(Tertullian, Heggesipus) '형제들'은 예수의 친동생으로 봄이 옳을 것이다. 한편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훗날 예수가 최후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그 무리에 함께 가담하여 예수의 처형 장면을 지켜보았으며(19:25) 예수가 승천한 이후에는 오순절 사건에 참여하였다(1:14). 또한 주의 형제 야보고는 초대교회의 중요한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15:13 ; 21:18 ; 고전 15:7 ; 1:19 ; 2:9, 12 ; 1:1).

47절 에이펜 데 티스 아우토 이두 헤 메테르 수 카이 호이 아델포이 수 엑소 헤스테카신 제툰테스 소이 랄레사이

마 12:47 한 사람이 예수께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서 있나이다 하니

=====12:47

예수께 여짜오되...말하려고 밖에 섰나이다 - 본절은 권위 있는 사본들(시내, 바티칸 등)과 역본들(시리아 역, Vulgate )에는 생략되어있기 때문에, 46절과 48절을 자연스럽게 잇기 위해 후대 필사자들이 의도적으로 첨가한 설명 구로 보기도 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본절은 분명히 이 부분의 의미를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평행 구절(막 3:32 ; 눅 8:20)에서 그 타당성을 보인다는 점에서 적어도 원문(the Original Text)에는 기록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학자도 있다(D.A. Carson).

한편 예수의 어머니와 그 형제들이 예수를 만나려고 진지한 노력을 한다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1) 예수가 전통적 권위를 지닌 바리새인들의 대적자(適者 )가 되고 있었기 때문에, (2) 예수의 발 빠른 선교사역으로 인해 그의 건강상 어려움을 직감했기 때문에(3:21), (3) 나사렛에서 가버나움의로의 이사에 대한 의구심 때문에(4:13 ; 눅 4:16-31 ; 2:12) 등으로 볼 수 있다. 여하튼 그들은 수없이 운집한 무리들 때문에 예수와의 접촉이 심히 어려운 상태에 놓여 있었다(눅 8:19).

48절 호 데 아포크리데이스 에이펜 토 에이폰티 아우토 티스 에스틴 헤 메테르 무 카이 티네스 에이신 호이 아델포이 무

마 12:48 말하던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누가 내 어머니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12:48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 이는 어머니와 동생들의 존재, 즉 혈연관계를 부인하려는 것이 절대 아니다(19:26, 27). 이 말은 출생과 유전(遺傳)으로 이뤄지는 혈연관계보다 영혼의 거듭남으로 이뤄지는 하나님과의 영적, 신앙적 관계가 더 중요함을 보여주는 것일 뿐이다.

실제로 예수는 당신의 죽음과 부활로 세워진 교회를 통하여 보다 더 위대하고 영속적인 영적 가족관계를 형성하기 위한 기초적인 노력으로 이 땅의 한 가정에 태어나 혈연관계를 맺으셨던 것이다.

한편 본문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대하여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지 아니할 것임이니"(1:9)한 선언과 긴밀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바로 본문의 이 구절이 예수의 '로암미(Lo-Ammi) 선언'에 해당한다.

이미 선택된 백성이라고 해서 개별적으로 영원히 선택된 각각의 인격들이라고 볼 수는 없듯이,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는 자는 비록 혈연적 가족일지라도 예수가 선언하시는 하늘나라의 영적 가족이 아님을 선언하신 것이다.

49절 카이 에케테이나스 텐 케이라 아우투 에피 투스 마데타스 아우투 에이펜 이두 헤 메테르 무 카이 호이 아델포이 무

마 12:49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이르시되 나의 어머니와 나의 동생들을 보라

=====12:49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 여기 손을 내뻗은 것은 예수의 애정 어린 마음의 표현인(Hendriksen) 동시에 최대의 겸손(Bengel)이며 확신에 찬 행동 언어였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몸짓과 더불어 자신을 구주로 믿고 따르는 제자들을 향하여 '() '이라는 영광스러운 선언을 하셨다. 이로써 예수께서는 신앙으로 이뤄지는 공동체 안에서는 모두가 한 아버지를 모신 동일한 가족의 일원이 됨을 보여주셨다.

비록 이들 중 나약한 본성에 의해 넘어지는 경우가 있을지라도 예수는 여전히 그를 향하여 가족 됨을 선언하실 것이며, 그들을 내 형제라 부르기에 부끄러워 아니하실 것이다(8:17, 29 ; 2:11).

50절 호스티스 가르 안 포이에세 토 델레마 투 파트로스 무 투 엔 우라노이스 아우토스 무 아델포스 카이 아델페 카이 메테르 에스틴

마 12:50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더라

=====12:50

누구든지 - 이는 성() 가족의 개방성과 포괄성 및 무한대 성을 나타내 주는 표현이. 실로 성부 하나님을 중심 하여 이뤄지는 영적 가족은 빈부의 차이나 지역, 문화, 사상 및 계급 간의 차이 없이 그리고 영원한 세대에 이르기까지 그 대상이 확대될 수 있다.

이는 만유(all thing under the sun)의 주인이시요 만유보다 크신 분이 바로 이 가족의 친부(親父)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구든지'는 무조건적 개방성을 띤 것만은 아니다. 이에는 철저한 제한성과 배타성이 내포되어 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 행함과 동참하는 자'라는 절대적 제한이 바로 그것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 - 이는 신령한 가족을 정의하는 말로 눅 8:21에 의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들'이다. 주를 따르는 성도들은 모두 하나님의 권속(眷屬)이요(2:19), 믿음의 식구들(6:10)이다.

여기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란 초자연적인 차원의 신비를 함축한 말로써 예수께서 절대적 존재자로서의 성부 하나님과 특별한, 곧 부자(父子)의 관계를 이루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리'아버지의 뜻을 행하다'는 것은 어떤 의롭고도 선한 일을 몸소 행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예수 안에서 계시된 그분의 구원 의지로서, 예수를 신앙하고 그의 뜻을 따라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위해 애쓰는 일을 의미한다(6:29).

[잠언 2장 주석강해] 하나님 지혜에 대한 촉구(잠 2:1-8)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