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언 27장에서는 지혜자와 미련한 자의 행동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 슬기로운 자는 재앙을 보면 숨어 피해도 미련한 자는 나가다가 해를 당한다. 구원받은 성도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지혜를 받아 재앙을 피해야 한다. 하나님의 지혜를 통해서 복음을 깨닫고 세상의 삶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지혜자와 미련한 자의 행동(잠 27:11-27)
11-16절, 지혜, 재앙, 보증, 축복, 다툼
[11절] 내 아들아, 지혜를 얻고 내 마음을 기쁘게 하라. 그리하면 나를 비방하는 자에게 내가 대답할 수 있겠노라.
부모가 자녀에게 가지는 매우 중요한 소원은 ‘지혜를 얻으라’는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지혜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뜻을 행하는 것, 즉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 사는 것이다. 그 지혜를 얻는 것이 복이다. 잠언 3:13-14, “지혜를 얻은 자와 명철을 얻은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지혜를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낫고 그 이익이 정금보다 나음이니라.” 잠언 4:7은, “지혜가 제일이니 지혜를 얻으라.” 이것은 어른에게나 아이에게나 다 적용되는 진리이다. 본문은 “내 아들아, 지혜를 얻고 내 마음을 기쁘게 하라”고 말한다. 자녀가 지혜를 얻으면 복되기 때문에, 부모의 마음은 기쁠 수밖에 없다. 사도 요한은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고 말했다(요삼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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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또 “그리하면 나를 비방하는 자에게 내가 대답할 수 있겠노라”고 말한다. ‘나를 비방하는 자’는 문맥상 자녀 문제로 비방한다는 뜻이라고 본다. 예를 들어, 부모가 자녀 교육을 잘못시켰다거나 자녀 양육의 의무를 다 못했다거나 자녀에게 좋은 본을 보이지 못했다고 비방하든지, 자녀가 하나님의 복을 받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벌을 받았다고 비방하는 것 등을 말한다. 본문에 “내가 대답할 수 있겠노라”는 말은 우리의 자녀가 지혜를 얻어서 하나님의 은혜로 경건하고 선하게 살아가며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과 함께하심과 복을 얻음을 우리가 증거함으로써 우리를 비방하는 자들에게 대답할 수 있겠다는 뜻이라고 본다.
[12절] 슬기로운 자는 재앙을 보면 숨어 피하여도 어리석은 자들은 나아가다가 해를 받느니라.
잠언 22:3도 거의 비슷하다. 슬기로운 자는 재앙을 보면 숨어 피한다. ‘재앙’은 사나운 짐승이나 무서운 전염병이나 폭도들이나 핍박자들을 가리킬 수 있다. 다윗은 자기를 죽이려는 사울을 피해 여러 해 동안 도망 다녔다. 선지자 엘리야는 자기를 죽이려는 왕후 이세벨의 칼날을 피해 호렙산으로 도피하였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핍박을 피하라고 교훈하셨다. 마태복음 10:23, “이 동네에서 너희를 핍박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사도 바울도 때때로 핍박을 인해 도피했다. 그가 처음 다메섹에서 회심한 후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자 유대인들이 그를 죽이기를 공모하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켰을 때, 제자들은 밤에 그를 광주리에 담아 성에서 달아 내렸다(행 9:23-25). 그러나 어리석은 자는 재앙을 보고도 나아가다가 해를 받는다.
그러나 신자가 진리를 위해, 의를 위해 싸워야 할 때가 있고 순교를 각오하며 나아가야 할 때가 있다. 우리는 고난 때문에 전도의 일이나 기타 하나님의 일들을 중단해서는 안 된다. 사도들은 핍박을 받으면서도 전도하기를 중단치 않았다(행 5:41-42). 핍박을 두려워해 일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비겁하고 불충성된 자가 될 것이다. 디모데후서 1:8, “그러므로 네가 우리 주의 증거와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된 나를 부끄러워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디모데후서 4:5,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요한계시록 2:10,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13절] 타인을 위하여 보증이 된 자의 옷을 취하라. 외인들의 보증이 된 자는 그 몸을 볼모 잡힐지니라.
잠언 20:16도 거의 같다. ‘타인’이라는 원어(자르)는 ‘낯선 자, 모르는 자, 외인’을 가리키며, ‘외인들’이라는 원어(노크리야)는 ‘낯선 여자, 즉 음녀’를 가리킨다. 본문은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을 위해, 혹은 잘 알지 못하는 여자 혹은 음녀를 위해 보증이 되면, 그 옷을 빼앗기고 그 몸도 볼모 잡힌다, 즉 상대방의 종이 된다고 말한다.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을 위한 보증은 우리에게 육체적, 물질적 큰 손실과 낭패를 가져온다는 뜻이다. 이것도 지혜의 조언이다. 성경은 우리가 남의 빚의 보증이 되는 일을 어리석은 일이라고 말하며 금한다. 잠언 6:1-5, “내 아들아, 네가 만일 이웃을 위하여 담보하며 타인을 위하여 보증하였으면 네 입의 말로 네가 얽혔으며 네 입의 말로 인하여 잡히게 되었느니라. 내 아들아, 네가 네 이웃의 손에 빠졌은즉 이같이 하라. 너는 곧 가서 겸손히 네 이웃에게 간구하여 스스로 구원하되 네 눈으로 잠들게 하지 말며 눈꺼풀로 감기게 하지 말고 노루가 사냥꾼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같이, 새가 그물 치는 자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같이 스스로 구원하라.” 잠언 11:15, “타인을 위하여 보증이 되는 자는 손해를 당하여도 보증이 되기를 싫어하는 자는 평안하니라.” 잠언 17:18, “지혜 없는 자는 남의 손을 잡고[맹세하며] 그 이웃 앞에서 보증이 되느니라.” 잠언 22:26, “너는 사람으로 더불어 손을 잡지 말며 남의 빚에 보증이 되지 말라.” 그러므로 구제할 마음과 힘이 있지 않다면, 또 보증한 금액을 갚을 능력이 있지 않다면, 남의 보증이 되는 것은, 선한 행동일지는 모르나, 어리석은 행동이다. 그것은 어리석은 영웅심에 불과할 것이다.
[14절] 이른 아침에 큰 소리로 그 이웃을 축복하면 도리어 저주같이 여기게 되리라.
이른 아침에 혹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큰 소리로 그의 이웃 혹은 그의 친구(레아)(KJV, NASB)를 축복하는 것은 진심의 축복으로 여겨지지 않고 도리어 저주처럼 여겨진다. 참된 사랑과 축복은 무례하게 표현되지 않고 예절 있게 표현되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이 입술로는 하나님을 존경하나 그 마음은 그를 멀리 떠났다고 말씀하셨다(사 29:13). 참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으며(고전 13:5) 진심의 말과 행위로 나타날 것이다(요일 3:18). 우리는 이른 아침부터 사람을 축복하지 말고 하나님을 찬송하고 그에게 기도해 한다. 시편 5:3,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시편 119:147, “내가 새벽 전에 부르짖으며 주의 말씀을 바랐사오며.” 예수께서는 새벽 아직 어두울 때 한적한 곳에 나가셔서 하나님께 기도하셨다(막 1:35). 그러나 반대로, 다윗의 아들 압살롬은 아침 일찍 일어나 성문 길 곁에 서서 다윗 왕에게 재판을 청하러 오는 사람들을 불러 그를 붙들고 입을 맞추며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을 도적질하였다(삼하 15장). 그것은 후에 그가 아버지를 대항해 반역을 일으키려는 마음의 계획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압살롬의 최후는 비참한 죽음이었다. 창세기 17:1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말씀하셨다. 성경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그 왕들이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행했는지 아니면 악하게 행했는지 평가하며 기록하였다. 우리는 사람 앞에 살지 말고 사람의 칭찬과 영광을 크게 여기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바르고 성실하게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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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6절] 다투는 부녀는 비오는 날에 이어 떨어지는 물방울이라. 그를 제어하기가 바람을 제어하는 것 같고 오른손으로 기름을 움키는 것 같으니라.
본문은 다투는 아내에 대해 말한다. 아내는 보통 불만 때문에 다투며 불만은 욕심에서 생긴다. 욕심이 있으면 자족함이 없고 불만하고 다투게 된다. 사람은 시기, 질투, 교만, 남을 멸시함 때문에도 다투는데, 이것도 이기심이나 명예를 구하는 욕심이다. 사람이 욕심을 버리고 온유와 겸손과 사랑으로 단장되면, 서로 다툴 것이 없을 것이다. 여인의 다툼은 비오는 날에 이어 떨어지는 물방울 같다. 그 다툼은 계속적이고 쉽게 중단되지 않는다. 또 그것은 바람을 제어하기 어려운 것과 같다. 우리가 바람의 방향을 예측하기 어렵고 그것을 통제하기 어렵듯이, 여인의 다툼도 그러하다. 또 그것은 오른손으로 기름을 움키는 것과 같다. 오른손으로 기름을 움키면 다 새어나가듯이 다투는 여인을 제재하거나 막기가 매우 어렵다. 그러면 다투는 여인에 대한 대책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의 심령의 변화와, 성품과 습관의 변화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는 수밖에 없다. 사람이 불만과 욕심을 버리고 시기 질투심을 버리고 교만을 버리고 남을 멸시하는 마음을 버리고 온유와 겸손, 자족함과 사랑으로 단장하기 전에는 다툼을 극복할 수 없을 것이다. 습관은 잘 고쳐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감동과 간섭이 필요하며 하나님께 기도할 것밖에 없다. 그러나 부득이 한 경우에는, 별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잠언의 몇 구절은, 다투며 성내는 여인과 함께 큰 집에서 사는 것보다 움막이나 광야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낫다고 말했다(잠 21:9, 19; 25:24).
우리의 자녀가 지혜를 얻으면 부모의 마음은 기쁨을 얻을 것이며 비방하는 자에게 대답할 말이 있을 것이다. 우리가 어른이이든지 아이이든지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여 얻자. 하나님의 지혜는 하나님께서 그를 경외하고 그의 뜻에 순종하여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 사는 자에게 주신다. 슬기로운 자는 재앙을 보면 숨어 피하여도 어리석은 자들은 나아가다가 해를 받는다. 우리는 재앙을 피해야 할 때는 피하자. 그러나 진리와 의를 위해 싸워야 할 때는 핍박을 각오하며 순교의 정신으로 나아가자. 다른 사람을 위해 보증이 되는 자는 육신적, 경제적 큰 해를 입게 될 것이다. 우리는 남을 위해 보증을 서지 말자. 특히 잘 알지도 못하는 자를 위해 또 갚을 힘도 없으면서 보증을 서는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 말자. 이른 아침에 큰 소리로 그 이웃을 축복하면 도리어 저주같이 여기게 된다. 우리는 경박한 말이나 행동을 하지 말고 예의 있는 말과 행동으로 사랑하자. 또 사람의 칭찬을 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 앞에서 살자. 다투는 아내는 비오는 날에 이어 떨어지는 물방울이며 그를 제어하기가 바람을 제어하는 것 같고 오른손으로 기름을 움키는 것 같다. 우리는 다투는 인격이 되지 말자. 우리는 부득이 진리의 싸움을 싸울 때가 있겠으나, 평소에는 다투는 마음을 버리고 온유와 겸손으로 살아가자.
[17절]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같이 사람이 그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
본문은,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같이 사람이 그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고 말한다.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한다. 칼은 해머로 때려서 날카롭게 만든다. 이와 같이 사람은 그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혹은 날카롭게 한다. 그것은 사람이 친구와의 교제와 대화를 통해 그의 생각이나 지혜나 식견이 넓어지고 깊어지고 더 나아지며 또 그의 침체된 마음이나 둔해지고 비활동적이었던 마음이 힘을 얻고 활동적이게 될 수 있음을 뜻한다. 사람의 생각과 마음은 얼굴로 나타난다. 본문은 성도의 교제의 유익을 말하는 것이다. 성경은 성도의 교제의 유익에 대해 여러 곳에서 말씀한다. 전도서 4:10-12, “혹시 저희가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데살로니가전서 5:14,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규모 없는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안위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으라.” 히브리서 3:13,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 히브리서 10:24-25,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사도 바울은 빌레몬의 사랑으로 많은 기쁨과 위로를 얻었고(몬 7), 또 아리스다고, 마가, 유스도가 그의 위로가 되었고(골 4:11), 또 오네시보로가 그를 자주 유쾌하게 하였다고 증거하였다(딤후 1:16). 성도의 교제는 많은 유익이 있다. 물론 불평이나 하고 남을 험담하는 악한 교제도 있으나, 서로 권면하고 위로 격려하는 참 교제는 유익하다.
[18절] 무화과나무를 지키는 자는 그 과실을 먹고 자기 주인을 시종하는 자는 영화를 얻느니라.
본문은, “무화과나무를 지키는 자는 그 과실을 먹고 자기 주인을 시종하는 자는 영화를 얻느니라”고 말한다. 무화과나무를 지킨다는 것은 영양공급을 잘 받도록 물과 비료를 주고 잔가지를 적절히 쳐주고 또 병충해에 걸리지 않도록 벌레를 잡고 필요하면 농약을 치고 또 도적이나 개구쟁이 아이들이 접근치 못하도록 감시하는 것을 말할 것이다. 무화과나무를 지키는 자는 그 과실을 먹을 것이다. 농부의 수고는 헛되지 않다. 그는 수고의 대가를 얻을 것이다. 이와 같이, 자기 주인을 시종하는 자는 영화를 얻으리라고 본문은 말한다. ‘시종한다’는 말은 ‘시중들다, 수종들다, 수행하다’는 뜻이다. 주인 곁에서 그를 보호하고 충실히, 지혜롭게, 부지런하게 그를 돕고 섬기는 것을 말한다. 그러면 그는 영화를 얻을 것이다. 주인은 그를 사랑하고 신임하고 그를 존중하고 그에게 좋은 상을 주고 또 중요한 일을 맡길 것이다. 세상에서나 천국에서나 이치가 같다.
우리의 주인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우리가 우리의 주인을 수종드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기도함으로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며, 노아처럼(창 6:22), 아브라함처럼(창 22:12), 모세처럼(출 40:16), 여호수아와 갈렙처럼(민 14:24) 하나님의 명령과 뜻을 온전히 순종하는 것이다. 그러면 주께서 우리를 더욱 사랑하시고 존중하시고 귀한 직분을 주시고 지혜와 능력을 더욱 많이 내려주실 것이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후서 2:21에서,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이단과 불의]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고 증거하였다. 우리는 주 하나님을 충성되이 섬기자. 성경을 읽고 기도함으로 하나님과 교통하며 동행하고 그의 모든 명령과 교훈을 힘써 순종하자.
[19절] 물에 비취이면 얼굴이 서로 같은 것같이 사람의 마음도 서로 비취느니라.
본문은, “물에 비취이면 얼굴이 서로 같은 것같이 사람의 마음도 서로 비취느니라”고 말한다. 원문을 직역하면, 아마 다음과 같을 것이다. “물에서 그 얼굴은 그 얼굴에 속하듯이, 사람의 마음은 그 사람에게 속하느니라.” 영어성경들은 ‘속한다’는 전치사(라)를 ‘반영한다’ (reflect)라고 번역했다(NASB, NIV). 물이나 거울에 비친 얼굴은 내 얼굴이지 남의 얼굴이 아니다. 이와 같이, 사람의 마음은 자기의 마음이다.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사람의 됨됨이, 곧 사람의 인격은 그 마음에 있다. 그의 마음이 그의 인격을 드러내며 증거한다. 그러므로 잠언 23:7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爲人, 사람 됨됨이)도 그러하다”고 말한다. 악인은 악한 마음을 가진 자요 선인은 선한 마음을 가진 자이다. 예수께서는 사람이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하며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낸다고 말씀하셨다(마 12:34-35).
첫 사람 아담의 타락으로 온 인류는 죄성을 가진 죄인으로 출생한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인간의 마음이다(렘 17:9). 마음에서 온갖 죄악들이 나온다(마 15:19). 그러므로 심령의 변화가 필요하다. 구원은 심령의 변화이다. 중생(重生)은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는 것이다(엡 4:22-24). 성화는 심령의 계속적 변화이다. 우리는 세상을 본받지 말고 날마다 마음을 새롭게 함을 얻어야 한다(롬 12:2). 또 우리는 경건하고 거룩하고 선한 마음을 잘 지켜야 한다(잠 4:23). 마음은 곧 우리의 인격이다. 우리는 본래 죄악된 마음을 가지고 태어났으나 구원을 받았다. 이제 우리는 거룩하고 선한 마음을 잘 지키자.
[20절] 음부와 유명은 만족함이 없고 사람의 눈도 만족함이 없느니라.
본문은, “음부(陰府, 스올)와 유명(幽冥, destruction)은 만족함이 없고 사람의 눈도 만족함이 없느니라”고 말한다. ‘음부’(陰府)라는 원어(스올)는 ‘무덤’ 혹은 ‘지옥’을 가리킨다. ‘유명’(幽冥)이라는 원어(아밧도)는 ‘아밧돈’과 같은 말로서 ‘멸망’ 혹은 ‘멸망의 장소’라는 뜻이다(BDB). 무덤과 지옥은 만족함이 없다. 아담 이후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죽고 묻혔지만, 무덤은 여전히 넉넉하고 지옥도 그러하다. 그것들의 수용량은 끝이 없는 것 같다.
이와 같이 사람의 눈은 만족이 없다. 사람의 눈은 마음의 욕심을 반영한다. 전도서 1:8은, “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 할 수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하는도다”라고 말한다. 요한일서 2:16은,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즉 눈으로 보는 욕심]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고 말한다. 돈이 그러하고, 옷이나 악세서리 즉 반지, 목걸이, 귀걸이 등과, 골동품, 또는 여색(女色) 등이 그러하다.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과, 육신의 눈을 만족시키려는 욕심은 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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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우리에게 절제가 필요하다. 고린도전서 9:25는,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한다”고 말한다. 성령의 열매는 절제를 포함한다(갈 5:23). 또 우리에게 자족함이 필요하다. 잠언 5:18-19는, “네가 젊어서 취한 아내를 즐거워하라,” “너는 그 품을 항상 족하게 여기라”고 말한다. 디모데전서 6:8은,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고 말한다. 사도 바울은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라”고 증거하였다(빌 4:11). 사람의 눈과 마음의 욕심, 즉 육신의 욕심은 만족함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열매인 절제가 필요하며, 또 자족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21절] 도가니로 은을, 풀무로 금을, 칭찬으로 사람을 시련하느니라.
본문은, “도가니로 은을, 풀무로 금을, 칭찬으로 사람을 시련하느니라”고 말한다. 도가니(crucible)와 풀무(furnace)는 원석을 제련하는 도구이다. 그것은 금과 은을 찌끼와 분리시켜 깨끗한 금은을 만든다. 이와 같이, 칭찬으로 사람을 시련한다고 본문은 말한다. 어떤 사람은 칭찬받기를 좋아하고 칭찬받을 때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자신을 높인다. 그는 하나님께 돌릴 감사와 영광을 가로채는 자라고 말할 수 있다. 사도행전에 보면, 헤롯은 사람들이 그의 연설을 신의 소리라고 추켜세울 때 그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으므로 주의 사자가 곧 쳐서 벌레가 먹어 죽었다고 증거되었다(행 12:22 -23). 그러나 어떤 사람은 칭찬받을 때 자신의 부족과 연약한 점들을 먼저 생각하고 또 모든 영광과 감사를 하나님께만 돌리고 그 칭찬을 사양한다. 우리는 그러한 자가 되어야 한다. 바울은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고 고백했고(고전 15:10), 자신을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라고 증거하였다(엡 3:8).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을 시련하신다. 잠언 17:3은,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하거니와 여호와는 마음을 연단하시느니라”고 말한다. 일반적으로, 평안은 사람을 해이하고 탈선하게 만들고, 고난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겸손히 순종하게 만든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이룬다(롬 5:3-4). 하나님께서는 특히 주의 종들에게 많은 고난을 주셔서 그들을 단련시키고 사용하신다. 사도 바울은 여러 번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매맞고 정처 없이 다니고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고생을 당하였고(고전 4:11-13), 또 ‘육체의 가시’를 갖고 있었다(고후 12:7). 이와 같이 칭찬도 사람을 단련시킨다. 우리는 남을 칭찬하는 것을 매우 조심하고, 또 우리 자신도 칭찬받기를 좋아하지 말고, 또 칭찬받을 때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자.
[22절] 미련한 자를 곡물과 함께 절구에 넣고 공이로 찧을지라도 그의 미련은 벗어지지 아니하느니라.
본문은, “미련한 자를 곡물과 함께 절구에 넣고 공이로 찧을지라도 그의 미련은 벗어지지 아니하느니라”고 말한다. 성경에서 미련한 자는 불경건하고 부도덕한 자를 가리킨다. 곡물은 절구에 넣고 공이로 찧으면 껍데기인 겨와 알갱이가 분리된다. 그러나 미련한 자는 절구에 찧듯이 고난을 당해도 잘 깨닫지 못하고 변화받지 못한다. 미련한 자의 미련함은 잘 벗겨지지 않는다. 인간 본성은 심히 부패되어 있어서 그 죄성은 잘 제거되지 않는다. 인류 역사는 범죄와 실패의 역사이며 선민(選民) 이스라엘의 역사도 그러하였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반복해서 실패하였다(시 78:17, 40-41).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하나님의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그의 기적을 보고도 열 번이나 그를 시험하고 그의 목소리를 듣지 않았다고 말씀하셨다(민 14:22). 사사기는 이스라엘의 반복된 실패를 증거한다. 그 책에는 “또” “다시”라는 표현이 여러 번 나온다(3:12; 4:1; 6:1; 10:6; 13:1).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인간의 마음이며(렘 17:9),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없듯이, 악에 익숙한 인생은 선을 행할 수 없다(렘 13:23).
미련한 자의 미련을 벗기는 방법은 하나님의 은혜밖에 없다. 구원은 하나님께 달려 있다. 하나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못하실 것이 없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과 성령의 중생시키시는 역사로 죄인들을 구원하신다. 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을 믿음으로 그의 피로 죄씻음을 받고 단번에 법적으로 의인이 되고, 우리 속에 오신 성령의 도우심, 즉 그의 감동과 격려, 책망과 위로를 통해 조금씩 거룩해지며 죄성을 극복한다. 우리는 인간의 죄성과 미련이 얼마나 뿌리깊은 것인가를 깨닫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 구하며 그를 알고 그의 뜻을 행함으로 지혜를 얻자.
[23-27절] 네 양떼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피며 네 소떼에 마음을 두라. 대저 재물은 영영히 있지 못하나니 면류관이 어찌 대대에 . . . .
본문은, “네 양떼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피며 네 소떼에 마음을 두라”고 말한다. 양떼와 소떼를 치는 목축은 이스라엘 백성의 대표적 생업이었다. 야곱과 그 아들들은 요셉의 초청으로 애굽에 내려갔을 때 바로에게 자기들의 생업이 목축이라고 소개하였다(창 46:32). 네 양떼를 부지런히 살피며 네 소떼에 마음을 두라는 말씀은 각자 자신의 생업과 직업에 충실하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창 3:19). 사람이 땀 흘려 일하며 자기의 생업에 충실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20년 동안 외삼촌의 양과 염소를 칠 때 낮에는 더위를 무릅쓰고 밤에는 추위를 당하며 눈붙일 겨를도 없이 지냈던 야곱의 삶(창 31:38-40)은 우리 모두에게 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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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또 “대저 재물은 영영히 있지 못하나니 면류관이 어찌 대대에 있으랴”고 말한다. 재물은 영원하지 않다. 세상의 영광도 그러하다. 그러므로 놀고 먹기나 하고 게으르고 불성실하면 재물은 줄어들고 머잖아 가난과 궁핍이 찾아오며 수치와 욕을 당하게 될 것이다. 본문은 또 “풀을 벤 후에는 새로 움이 돋나니 산에서 꼴을 거둘 것이니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준비해주시고 공급해주시기 때문에 사람은 조금만 부지런하면 소와 양의 먹이를 준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게으르면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있을 것이다. 본문은 또 “어린양의 털은 네 옷이 되며 염소는 밭을 사는 값이 되며 염소의 젖은 넉넉하여 너와 네 집 사람의 식물이 되며 네 여종의 먹을 것이 되느니라”고 말한다. 생업은 각자에게 유익이 된다. 그것은 먹을 양식이 되고 옷이 되고 밭을 사는 값이 될 것이다. 우리는 각자의 생업에 마음을 두고 게으르게 먹으려 하지 말고 근면, 성실하고, 또 하나님의 일에도 열심으로 충성하자(롬 12:11; 고전 4:2).
[시편 78편 성경말씀] 감사하지 않은 죄와 우상숭배 죄(시 78:34-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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