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5장 주일 강해설교 말씀은 예수님이 자신을 스스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며 메시아이며 구원자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배척당할 것도 말씀하셨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이 왔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구원자인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자기 증거(요 5:31-47)
Ⅲ. 예수의 자기 변호 5:31-47
1. 예수께서 자신에 대한 자신의 증거는 제외시키심(31)
"내가 만일 나를 위해 증거 하면 비록 그것이 틀림없는 사실일지라도 너희는 분명 그 사실을 인정치 않을 것이다."(참조 요 8:14)
2. 예수께서 다른 증거자들을 제시하심(32-47)
예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께로서 보냄을 받았음을 증거해 줄 다른 증거자들을 제시하신다.
(1)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거하셨다.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는 이가 따로 있은니(32절). 필자는 이 구절이 성부 하나님을 의미한다고 본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자기 자신의 증거와 함께 하나님의 증거도 뒤에 언급하셨기 때문이다. '내가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자가 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느니라'(요 8:18). 하나님께서 그의 위힘을 인증하셨다. 하나님께서는 하늘로부터 말씀하심으로 나에 대해 증거하셨을 뿐 아니라 그가 나와 함께 하신다는 표적들로 여전히 증거하고 계시고 그리스도께서는 이 증거에 대하여 만족하셨다.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는 그 증거가 참인 줄 아노라.
(2) 세례 요한이 그리스도를 증거했다(33절 이하). 요한은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왔다(1:7).
1)요한의 증거는 중대하며 공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너희가 요한에게 사람을 보내매 요한이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였느니라. 증거는 진실된 증거였다. 그가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였느니라.' 비록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알고 있었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요한이 내게 대하여 증거했다고 하지 않으시고 정직하게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였다고 말씀하신다.
2)요한의 증거에 대하여 두 가지 사항이 덧붙여져 있다.
①그 증거는 필요 이상의 증거였다. 나는 사람에게서 증거를 취하지 아니 하노라(34절). 그리스도는 여타의 추천장이나 증명서를 필요로 하지 않으시며 그의 탁월함과 가치를 스스로 지니고 계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는 왜 여기에서 요한의 증거를 굳이 끄집어 내셨을까? 다만 이 말을 하는 것은 너희로 구원을 하려 함이니라. 이 점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이 강론 전체에서 목표하고 있었던 점이니 곧 자신의 생명을 부지하고자 함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영혼을 구하고자 함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심지어 자신의 대적과 박해자들에 대한 구원까지도 열망하셨으며 계획하셨다.
②그것은 인간을 향한 증거였다. 세례 요한은 저들이 존경하는 인물들 중의 한 사람이었으므로 세례 요한의 증거는 저들에게 효과를 기대할 수 있었다.
첫째, 세례 요한의 성격 : 요한은 커서 비취는 등불이라(35절). 세례 요한은 빛 자체는 아니었다. 예수님께서는 그 빛 자체이셨지만 요한은 참 빛에 종속되어 있으며 일종의 그 빛에서 파생된 빛이었다. 그는 타오르는 빛이었는데 이 말은 그의 신실성을 지칭한다. 그려 좋은 불은 빛나는 것처럼 보일 수는 있으나 타오르는 불이라야 진정한 불꽃이다. 타오르는 불빛이란 말은 또한 그의 활동성, 정열, 맹렬함을 나타낸다. 불꽃이 그 자체로든 다른 무엇이든 항상 열심히 태우며 타오르듯 선한 사역자 역시 그러하다.
요한은 빛을 비추는 빛이었다. 이 말은 그의 모범적이고 설득력 있는 언어 구사난 혹은 뚜렷한 파급 효과가 있는 영향력을 나타낸다.
둘째, 민중의 요한에 대한 애정 : 너희가 일시 그 빛에 즐거이 있기를 원하였거니와. 요한이라는 인물이 나타난 것은 저들에게 큰 기쁨이었다. '너희가 그 빛에 즐거이 있고자 하였거니와' 다시 말해서 너희는 너희들 중에 그와 같은 인물이 있다는 사실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겼다는 뜻이다. "너희들은 꼬마들이 모닥불 주위에서 흥겨워하듯 이 요한이라는 빛 주위에서 춤추며 소리 지르고 흥에 겨워했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 잠깐 뿐이요 곧 끝이 온다. "너희는 어린아이가 새 것을 좋아하듯 한 시절 그를 좋아하다가 곧 싫증이 나서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고 하더니 이제는 감옥에 집어넣어 버리는구나." 성급하게 소란 법석을 떠는 고백자들이 쉽게 식어지고 떨어져 나가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여기 이 사람들은 요한의 빛을 즐거워는 하였지만 그 빛 안에 걸어 들어가지는 아니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에 대한 유대인들의 적대에 대하여 죄 있음을 말씀하시고자 세례 요한에 대한 저들의 존경을 언급하신다. 유대인들이 요한을 계속해서 존경했더라면 저들은 그리스도를 포용했을 것이다.
(3) 그리스도 자신의 역사가 자신을 증거했다.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36절).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증거를 받을진대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크도다'(요일 5:9). 그리스도께서는 보다 영향력이 덜한 것이지만 요한의 증거를 기꺼이 이용하셨다. 이와 같이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확증하는 증거들에 대하여 비록 그 증거들이 불충분한 것들이라 할지라도 그것들을 제시할 기회를 가질 때 기쁘게 제시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 구절에서 나타난 더 큰 증거란 성부께서 성자께 성취하도록 맡기신 사역들의 증거를 가리킨다. 그것은 (1) 일반적으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역의 전 과정을 말하며, 십자가 상에서 죽으시면서 다 이루었도다 말씀하셨던 처음부터 끝까지의 모든 사역을 말한다.
그가 말씀하시며 행하셨던 이 모든 것은 거룩하며 하늘의 것이요, 신적인 순결과 권능, 그리고 은혜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부내셨다는 사실을 만족스럽게 제공하면서 그 안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2) 범위를 국한시켜서 말하자면 보다 더 큰 증거란 그리스도의 신적 사명을 입증해 주는 그리스도께서 역사하신 기적들을 가리킨다. 이 이적에 대하여 여기에서는 다음 세 가지 사실을 찾아볼 수 있다. 첫째, 이러한 사역들은 성부께서 그리스도에게 주사 이루게 한 역사들로서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역사를 이루도록 임명받았으며 힘을 부여받았는 사실이다. 둘째, 그 사역들은 그리스도께서 미치도록 그리스도께 당부된 일들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그 일들을 성취하신 사실은 그리스도의 신적인 권능을 입증해주고 있다. 셋째, 이 사역들도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거해 주었으니 곧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보냄을 받으신 분이시라는 사실을 증명해 주었던 것이다. 성부 하나님께서는 그를 보내시되 주인이 종에게 심부름 보내듯 보내지 않으시고 아비가 그 자식에게 그 몫을 차지하도록 보내듯이 아버지로서 그리스도를 보내셨다.
(4)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이전보다 더욱 충분하게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증거를 제시하신다. 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거하셨느니라(37절).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로부터의 음성으로 자기의 아들을 증거하시길 기뻐하셨다(마3:17). 이와 같이 성부께서는 자신이 파견한 자들에 대해서 증거하실 것이며, 반드시 그 위임한 자리에서 인봉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그리스도께 관하여 증거하셨듯이 믿기를 요구하는 곳에 명백한 증거를 분명히 주신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까지 그리스도께 대하여 증거하셨는데 어찌하여 유대 나라와 그 지도자들은 그분을 영접 못했는가?
이에 대하여 그리스도께서는 두 가지 이유를 들어 대답하셨다. (1) 그들이 하나님과 그의 뜻에 대한 특별한 계시를 잘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용을 보지 못하였으며(37절). 그들은, 우리가 결코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사람에게 대하여 무지한 것과 같이 그렇게 하나님께 대하여 무지했음을 스스로 보여 주었다. 하나님께 대한 무지란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에 관하여 주신 기록을 사람이 배척하게 되는 참된 이유이다. (2) 그들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일반적인 방법으로 계시하셨던 것처럼 감화받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38절). 첫째,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 속에 없었다. 즉 말씀이 저들 사이에는 있었으나 저들 속에, 저들의 심정 속에는 거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저들의 심정을 지배하지 않고 오직 저들의 눈에 비쳤을 따름이요 저들의 귓속을 울렸을 따름이었다.
하나님의 계시가 그들 속에서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데 하나님의 계시를 맡았다는 사실이 도대체 저들에게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롬3:2) 만일 그들이 하나님의 계시를 맡았다면 그들은 곧 그리스도를 맞아들여야 했을 것이다. 둘째, 하나님의 말씀이 거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많은 사람들에게는 자기들에게 다가오고 잠시 동안 어떤 인상을 주었던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으나 그 말씀이 저들 안에 거하지는 아니했다. 그들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꾸준히 지속되지 않았으며 마치 가족이 아닌 나그네와 같았다. 그러나 어찌하여 이와 같이 저들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거하지 못하게 되었는가? 이는 '그의 보내신 자를 믿지 아니하므로'그렇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성령이, 하나님의 은혜가 거하는 것은 각별히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를 영접하므로써 가장 잘 유지된 수 있다.
(5) 다음으로 그리스도께서는 구약 성경을 언급하심으로서 구약에 호소하신다. 성경을 상고하거니와(39절)
1)이 구정은 다음 두 가지의 의미로 생각할 수 있다. 첫째, 너희는 성경을 조사한다. 그렇게 하는 것은 현명한 처사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실제로 저들이 성경을 잘 상고하고 있다는 점은 인정하고 계시다. 그러나 그 조사는 자신들의 영광을 위한 것이었다. 어떤 사람은 성경의 문자를 매우 학술적으로 부지런히 영구하면서도 성경의 능력과 힘에 대해서는 문외한이 되는 경우가 있다. 둘째, 그 구절은 성경을 조사해 보라라고 볼 수 있다. 즉 예수께서는 성경에 호소하고자 할 때 성경을 찾아보는 것은 당연한 의무이다. 성경을 철저히 조사해 보아라. 이 구절과 저 구절을 비교해 보고, 저 구절에 의해 다른 구절을 설명해 보라.
이와 같이 우리는 성경을 밑바닥에서부터 또한 각 구절마다 조사해 보아야 할 뿐 아니라 그 구절들이 말하는 것처럼 보이는 내용이 아닌 진정 그 구절이 의미하는 내용을 보아야 한다. 이는 우리에게 대하여 일종의 충고의 형식을 띄고 있다. 그리스도를 찾고자 하는 자는 누구나 성경을 조사해 보아야 하며, 이 말은 찾는데 부지런할 것과 마음에 친숙하게 적용할 것 및 마음의 소원과 계획을 지닐 것을 나타내고 있다. 우리는 항상 "내가 지금 무엇을 조사하고 있는가?" 되물어 보도록 해야 한다. 그러면서 금이나 은을 구하거나 진주를 구하러 광맥을 캐며 바닷속에 자맥질해 들어가듯 성경 속에 깊이 침잠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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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성경을 조사하는 데 있어서 주목해야 할 두 가지 사실은 우리의 목표인 천국과 우리의 길인 그리스도이다. ①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은 우리에게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영원한 상에 대하여 확신을 주며 그 상태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을 제공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성경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고 생각하고 있다고만 말씀하셨다. 그들이 단순히 성경을 읽고 연구함으로써 그 생명을 찾았다. 그러나 율법의 말씀을 지닌 자는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다라는 말이 유대인들 사이에 일상으로 통용되었지만 실제로 그것은 그릇된 말이었다.
②우리는 성경에서 이러한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새로운 길이요, 생명의 길인 그리스도를 찾아야 한다. 이 성경이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거하는 위대하며 주요한 증거이다. 구약 성경도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언하고 있으며 하나님께서 구약을 사용하여 그리스도를 증거하셨다. 유대인들은 구약이 메시아를 증언하고 있다는 사실을 매우 잘 알고 있었으며 그 길을 보이고 있던 구절들을 언급함에 있어서 비평적인 안목이 있었다. 그러나 그 구절들을 적용하는데 있어서는 부주의하였으며 한심할 정도로 무관심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탐구해야 한다. 왜냐하면 성경이 그리스도를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며 그를 아는 것이 곧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성경이라는 밭에 감추인 보화요, 성경이라는 깊은 샘 속에 있는 샘물이다.
3)이러한 증거에 덧붙여서 네 가지 사실에 대하여 견책하신다.
①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대한 그들의 소홀함 :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40절). 이러한 유대인들의 그리스도께 대한 무관심은 이해 부족 탓이라기보다는 의도적이었다는 점에서 잘못이 크다. 그리스도께서는 생명을 제공하셨으나 그 생명은 받아들여지지 아니했다. 가난한 심령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지고 오신 생명이 있다. 생명은 우리 존재의 완성이며 모든 행복을 포함하고 있으며, 그리스도는 우리의 생명이 되신다. 이 생명을 소유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그 생명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 나와야만 한다. 그 생명을 위해 나아옴으로써 우리는 그 생명을 소유하게 되는 것이다. 죄인들이 멸망하는 유일한 이유는 그리스도께 저들이 나아오고자 하지 않기 때문이다.
저들이 나아올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나아오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고침받지 못하는 사람들은 처방책을 준수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사람에게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41절). 이 말은 하나의 삽입구로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마치 모든 사람을 자신에게 나아오게 의무 지움으로써 자신의 영광을 추구했다는 반론을 미리 제거하기 위해 하신 말씀이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의 박수갈채에 갈급해하시지도 추구하시지도 않으셨다.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인기를 취하지 않으셨다. 사람들에게서 영광을 얻는 대신에 예수께서는 오히려 극심한 모욕과 수치를 당하셨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의 칭찬을 필요로 하지도 않으셨으며 그러한 칭찬이 그분의 영광에 조금도 보탬이 못 되었다.
②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결핍 :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42절).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경시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앞서(37절) 하나님께 대한 저들의 무지를 책하셨으며 여기에서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결핍을 책망하셨다. 그들은 하나님께 대하여 알고자 하지 않았으므로 하나님께 대한 사랑도 가질 수 없었던 것이다. 유대인들에게 붙여진 죄목은 너희 속에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없다는 것이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대하여 대단한 사랑이 있는 듯이 가장했으며 자신들의 율법에 대한 열심이 이를 증명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실은 저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없었다. 세상에는 종교에 대해서는 위대한 전문가이지만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태만하므로써 하나님께 대한 애정을 결여하고 있는 자들이 대단히 많다. 그러한 사람드은 그분의 거룩하심을 증오하며 그분의 선하심을 평가절하한다. 사랑이 마음 중심에 자리 잡았을 때 이것이 곧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거하는 것이요,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사랑인 것이다. 사랑은 마음 중심에서 퍼져 나가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각 사람의 마음을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내가 너희를 아는데,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아무리 속이려 해도 꿰뚫어 보신다. 그뿐 아니라 우리들 모두에 대하여 "내가 너를 알고 있다"고 말씀하실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웃 사람들끼리 이웃 친구들을 서로 아는 것보다 더 깊이 사람들을 알고 계셨다. 더 나아가 사람들 자신이 자신을 아는 것보다도 더 깊이 사람들을 아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속일 수 있을는지는 모르지만 그분을 속일 수는 없는 것이다.
③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를 곧잘 받아 들이는 태도에 대한 책망 :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43절). 유대인들은 성부의 이름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영접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각각 자기 이름을 내세우며 나타나는 사람들의 말을 경청하는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영접지 않음으로서 생수의 근원을 내동댕이쳤을 뿐만 아니라 자비조차 내던져 버렸다.
이러한 그들의 행위는 참으로 악한 것이었으며 더욱이 허망한 것을 위해서 그랬다는 사실은 더 나쁜 것이었다. 거짓 선지자들은 자기 자신의 이름으로 오는 자들이다. 진리를 받지 아니하고 거짓 선지자들에게 속임이나 당하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고난당하게 버려두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참 빛에 대하여 눈을 감는 자들은 허황된 빛에 끊임없이 방황하도록, 그리고 어리석은 예언의 불꽃이나 헛되이 뒤쫓아 다니도록 버림받는다. 그들은 만나를 싫어했으며 오히려 재를 먹은 것이다.
①자랑과 헛된 영광 그리고 불신앙에 대한 견책과 이 헛된 것들의 결과에 대한 비난 :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44절). 유대인들은 자찬에 빠지고 스스로를 과대 평가하므로써 그리스도를 경홀히 대했으며 과소 평가하였다.
첫째, 세상 명예에 대한 그들의 열망 :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명예 따위는 안중에도 없으셨다(41절). 그러나 유대인들은 세상 명예에 그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다. "너희는 서로 영광을 취한다. 너희는 세상 영광을 받고 싶어하며 너희가 하는 모든 일의 목적은 거기에 있다. 너희가 타인에게 명예를 주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아끼지 않지만 그것은 오직 그들이 그 명예를 너희에게 되돌려주고 너희를 칭찬하게 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너희는 너희에게 온 칭찬과 존경을 스스로 취하고 하나님께 돌리지는 않는다."
둘째, 신령한 영예 곧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에 대한 그들의 무시 : 모든 성도는 이 영광을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을 받는다.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이 영광, 이 영예이다. 바리새인들이 사람의 칭찬을 얻고자 했지만 우리는 그 영광을 구해야 하며 우리의 상으로 여겨야 할 것이다.
셋째, 이것이 저들의 불신앙에 끼친 영향 : 그들은 그렇게 오염되어 있었다. 너희가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세상 영광에 대한 야망과 욕망은 그리스도를 믿는데 큰 장애물이 된다. 진지한 신앙 고백과 신앙 실천이 시대 감각에 뒤떨어진 것으로 어디서나 배척당하고, 그리스도와 그 제자들은 단지 경이의 대상이요, 크리스찬이 된다는 사실이 단지 무명 씨가 된다는(보통의 경우 그러하다) 말과 같은데 그 야망의 정상이 육신의 출세인 사람이 어찌 신앙을 가질 수 있겠는가?
(6) 마지막 증거는 모세이다(45절). 유대인들은 모세를 대단히 흠모하였고 스스로 모세의 제자가 된다는 사실에 큰 가치를 두었으며 그리스도에 대한 저희들의 반대가 모세에 근거해 있는 듯이 가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저들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제시하신다.
1)모세는 불신앙 하는 유대인들에 대한 반대 증인이다 : 너희를 고소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의 바라는 자 모세니라(45절). 이 구절은 두 가지 내용으로 이해될 수 있다. ①율법과 복음의 차이점을 보여 준다. 모세 즉 율법은 너희를 고소한다. 율법으로 죄를 알게 되기 때문이다. 율법은 너희를 죄 있다고 선고한다. 그러나 복음의 계획은 우리를 고소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할까 생각지 말라. 예수께서는 고소인으로서가 아니라 변호사로서 오시었다. 즉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화목시키시기 위해서 오셨던 것이다. ②유대인들의 불신앙의 명백한 비합리성을 보여 준다.
"너희는 내가 너희 법정과 하나님의 법정에 탄원하거나 손해입은 결백한 사람이 항상 하듯이, 너희가 나에게 행한 처사에 대하여 답변을 요구하리라 생각지 말라. 천만에, 나는 그럴 필요도 없다. 너희는 이미 고발당하여 하늘의 법정에서 쫓겨난 자들이다. 바로 모세가 너희의 불신앙에 대하여 너희의 유죄를 인정하고 선고를 내리기에 충분할 만큼 얘기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께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을 고소하는 대신에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라고 기도하였다.
여기에서도 그리스도께서는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일에 자기들과 한 편인 듯이 모세를 잘못 취급하지 않도록 하셨다. "너희를 고소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의 신뢰하는 자 모세니라." 유대인들은 모세를 신뢰하여 모세의 율법과 규례를 그들이 지킴으로써 자기들은 구원받으리라 생각했다. 이와 같이 자기들의 특권을 의지하는 사람들은 바로 그 특권들이 자신들에 대하여 반대 증언하는 증거들이 될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2)모세는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대한 증인이었다(46,47절).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46절). 모세 율법 중 의식법은 장치 임하실 그리스도에 대한 모형이었다. 여기에서 그리스도께서는 모세의 기록이 그리스도를 반대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며 오히려 그리스도를 위해서, 그리스도에 대해서 썼다는 사실을 보여 주신다. 그리고 또 여기에서 유대인들이 모세를 믿지 않았음을 지적하신다. 앞에서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이 모세를 믿고 있다고 말씀하셨다(45절).
그러나 그들은 모세의 이름에 기대를 걸었지 모세가 가르친 교훈의 진의를 받아들이지는 아니하였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자신에 대한 불신앙이 이를 증명한다고 말씀하신다. 모세를 믿었더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많은 사람들이 믿는다고 말하지만 그 행동은 그 말이 거짓임을 보여 주고 있다. 성경의 한 부분이라도 바르게 믿는 사람은 그 전체를 받아들일 수 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모세에 대한 저들의 이러한 불신앙으로부터 저들이 자신을 배척하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님을 끄집어내신다.
그러나 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나(47절). "만일 너희가 가장 확실한 전달 방법인 문서에 기록된 하나님의 뜻 곧 거룩한 문서를 믿지 못한다면 어떻게 내 말, 항상 너희가 무시해 왔던 내 말을 믿을 수 있겠느냐? 만일 너희가 내게 대하여 모세가 말하고 기록한 사실을 믿지 않을진대 어떻게 나를 믿고, 내 사역을 믿겠느냐?" 우리는 항상 어떤 전제를 인정해야 그 전제에서 도출되는 결론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와 같이 우리가 그러한 기록의 거룩한 영감을 믿지 못한다면 어떻게 그리스도에 대한 교리를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이와 같이하여 그리스도의 자신에 대한 변론은 끝을 맺는다. 예수님의 변론으로 유대인들의 입은 굳게 닫혔지만, 그들의 심정은 돌과 같이 단단하게 굳어져 갔다.
[신약 히브리어 마가복음 강해] 금식과 안식일 논쟁(막 2: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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