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 원어 설교

[요한복음 부활 주일설교] 비어있는 예수님의 무덤(요 20:1-19)

체데크 2024. 3. 21. 2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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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0장 부활 주일설교 말씀은 비어있는 예수님의 무덤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고 무덤에 들어가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은 비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부활시켜 주셨고 예수님은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믿으면서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비어있는 예수님의 무덤(요 20:1-19)

 

. 부활하신 그리스도 20:1-19

다음과 같은 이유들로 말미암아 사도들은 주님의 부활에 대한 실질적인 증거를 제시하는 일에 큰 관심을 가졌다. 첫 번째 이유는 예수 자신이 부활을 그의 메시아 됨의 결정적이고도 가장 유력한 증거로 호소하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의 적들은 그의 부활이 알려지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두 번째 이유는 우리의 구속과 구원을 위한 그의 과업의 성취가 이 부활에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세 번째 이유는, 그가 부활하신 후 자신의 산 모습을 모든 사람들에게 드러내시지는 않으셨기 때문이다(10:40-41). 그러나 그의 부활에 관한 증거들은 그의 절친한 동료들을 위한 하나의 은혜로 예비되었다. 그리하여 그 증거들은 보지 않고도 믿는 자들의 축복이 되기 위해 그들에 의해 세상에 공표되어야만 했다. 우리는 위의 본문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의 첫 단계, 즉 무덤이 비어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1) 무덤에 온 막달라 마리아는 돌이 옮겨진 것을 발견한다. 이 복음서 기자는 막달라 마리아와 함께 갔던 다른 여인들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다만 그녀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있다. 그녀는 그리스도로부터 많은 용서를 받았으므로 그리스도를 극진히 사랑하였다. 그녀는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신 동안 그에게 애정을 쏟았다. 그녀는 그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였으며 자기 재산을 바쳐 그를 섬겼다(눅 8:2,3). 그리스도의 임종 때와 그의 사후에 그녀가 보인 그에 대한 지속적인 경의의 실례들은 그녀의 사랑의 신실성을 입증한다. 만약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이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이라면 그 사랑은 변함이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그녀의 사랑은 죽음 곧 십자가의 죽음만큼이나 강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녀의 그 사랑이 십자가를 지켰기 때문이다.

1)그녀는 자신의 눈물로 그리스도의 시신을 씻어 드리기 위해 무덤에 왔다. 왜냐하면 그녀는 그곳에서 곡하였고 준비한 향료를 시신에 붓기 위해 무덤으로 갔기 때문이다.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무덤을 사랑하게 하는 사람은 특별한 애정의 소유자임이 분명하다. 연약하고 겁 많은 여성이 그런 애정을 지녔다는 것은 특이할만하다.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은 죽음과 무덤의 공포를 제거할 것이다. 우리가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하지 않고서는 그리스도에게로 올 수 없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그를 사랑한다면 그러한 곳에서조차 결코 해 받음을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이다.

2)그녀는 가능한 한 빨리 왔다. 그녀는 안식일 직후인 그 주간의 첫날에 무덤으로 왔다. 이 날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의 첫 번째 안식일이 되었다. 이처럼 안식일은 그리스도를 방문한 한 여인 마리아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녀는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에' 무덤에 당도하였다. 그리스도를 뵙기 위하여 그를 찾는 사람들은 이른 시간에 그를 방문해야만 한다. 그를 놓치지나 않을까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그를 찾도록 하자. 부지런히 그를 찾도록 하자. 늦기 전에 그를 찾도록 하자. 한 날을 이렇게 시작한다면 그날은 보다 아름답게 끝맺을 수 있으리라. 아직 어두울 때에도 그를 부지런히 찾는 사람들은 그에 관한 더 빛나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3)그녀는 옮겨진 돌을 발견하였다. 그녀는 그 돌이 무덤의 입구에서 굴러가 있는 것을 목격하였다. 이제 이 사실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그녀의 놀라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는 생명의 원천이시다. 그의 무덤은 구원의 샘들 중의 하나이다. 만약 우리가 신앙으로 이 무덤에 온다면, 우리는 무덤의 돌이 굴러가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며 자유로이 그곳으로 다가가서 그 구원의 무덤으로부터 위로를 얻게 될 것이다. 일찍부터 그를 찾았던 자들은 종종 놀라운 위로로써 격려받곤 한다. 최초의 영광스러운 발견: 비록 그녀가 처음에는 그 사실을 납득지 못했다 할지라도 주님은 부활하셨다. 가장 충실하게 주님을 따르는 자들은 흔히 하나님의 은총을 최초로 그리고 가장 감미롭게 깨닫게 된다. 치욕 중에 계신 그리스도를 끝까지 뒤따른 막달라 마리아는, 그가 높임을 받으실 때 그를 최초로 만나 보게 되었던 것이다.

(2) 치워진 돌을 발견한 그녀는 급히 베드로와 요한에게로 되돌아갔다. 사람이 주를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2). 그녀는 그 앞의 돌이 옮겨진 무덤 안을 들여다보고는 그 무덤이 비었음을 알았다. 우리는 최초로 이 광경을 목격한 사람들이 확실히 주께서 부활하셨구나라고 생각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것에 대해 제자들에게 말씀하실 때마다 그 말씀에 이어서 '내가 다시 사흘 만에 부활하리라'는 말씀을 덧붙이셨기 때문이다. 왜 그녀는 빈 무덤을 보고도 그가 부활하셨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우리가 불행한 시기에 처했을 때의 자신의 행동을 회고해 볼 때 우리는 그 당시에 우리 자신이 범했던 어리석음과 부주의에 대해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후에 명백하게 드러날 것에 대해서도 처음에는 미처 상상도 하지 못할 때가 있다. 그녀는 사람들이 주를 가져간 것으로 생각했다. 그녀의 의혹이 어떠한 것이었건 간에 시신이 없어졌다는 사실은 그녀에게 커다란 고민과 당혹 감을 안겨 주었다. 그러나 만약 그녀가 그 사실을 올바르게 이해했더라면, 그보다 더 기쁜 일은 없었을 것이다. 믿음이 약한 신자들은 실제로 소망의 근거가 되며 기쁨이 되는 일을 자못 불평스러운 것으로 여기게 된다. 그녀는 홀로 이 슬픔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이 사실을 그녀의 친구들에게 알렸다.

슬픔을 서로 고하는 것은 성도들의 교제를 증진시키려는 훌륭한 방편이다. 베드로는 비록 주를 부인했지만 주님의 친구들을 버리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이 사실을 볼 때 그의 회개가 진실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제자들이 이전처럼 그와 계속적으로 교제한 것은 우리가 결점을 가졌던 자들과도 다시 교제를 회복해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하나님께서 그들이 회개할 때 그들을 용납하셨는데 어찌 우리가 그들을 용납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3) 베드로와 요한은 무덤을 향해 급히 달려갔다(3,4). 혹자는 이 소식이 전해졌을 때 다른 제자들도 베드로와 요한과 함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그 근거로써 누가복음 24:9절의 '저희가 이 모든 것을 열 한 사도들에게 고하였다'는 말씀을 들고 있다. 그러나 무덤으로 간 사람들은 베드로와 요한뿐이었다. 이들은 간혹 다른 제자들과는 달리 그리스도의 특별하신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제자들의 특권에 있어서 남보다 더 영예를 누리는 자들이 제자 됨이 의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남보다 더욱 능동적이며, 고난과 역경을 보다 잘 감당한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본문에서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경험을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가를 살펴보자. 마리아가 자신이 본 것을 그들에게 전했을 때, 그들은 직접 가서 자신들의 눈으로 확인하려고 했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위로가 되고 유익을 주는 말씀을 전해 주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그들의 말을 직접 시험해 보도록 하자. 우리는 친구들의 염려와 두려움에 동참할 준비가 얼마나 되어 있는지 살펴보자. 베드로와 요한은 무덤으로 황급히 달려갔다. 우리가 선한 일을 할 때 얼마나 서둘러야 하는가를 살펴보자. 베드로와 요한은 자신들의 안전이나 위험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곧장 무덤으로 갈려갔다. 선한 일을 할 때 선한 동료가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좋은 일인지 살펴보자. 제자들이 선한 일을 행함에 있어서 서로 뛰어나고자 노력한 사실이 얼마나 칭찬받을 만한 경쟁의식인가를 살펴보기로 하자.

요한이 베드로를 앞질러 달려간 것을 좋지 못한 태도로 비난해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는 나보다 잘하는 사람에 대해서 시기해서도 안되며, 좀 못하는 사람이라도 최선을 다한다면 결코 경멸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단지 우리는 최선을 다해야만 한다. 이 경주에서 선두 주자는 '예수께서 사랑하신 제자였다.'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인식하고 그것을 다시 우리 속에서 그에 대한 사랑으로 불태우는 것은 우리의 덕성을 탁월하게 만들 것이다. 뒤에 처진 주자는 베드로였다. 그는 주님을 부인하였고 그 때문에 슬픔과 치욕에 잠겨 있었다.

[4] 무덤에 당도한 베드로와 요한은 조사 작업에 착수한다.

1)요한은 막달라 마리아가 조사한 것 이상의 진전을 보지 못하였다. 그는 조심스럽게 무덤 속을 살피고 그 무덤이 비어 있음을 알았다. 그는 '몸을 구부려 들여다보았다.'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을 알고자 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몸을 구부리고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러나 그는 무덤 속에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가장 온화한 사랑을 지닌 자라고 해서 언제나 가장 용감한 결단성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다.

2)베드로는 최초로 무덤에 들어가 요한이 발견한 것보다 더 정확히 사태를 파악할 수 있었다.(6,7). 요한이 매우 조심스럽게 무덤 안을 들여다보고 있는 동안, 베드로는 그곳에 당도하여 용기를 내어 '무덤 안으로 들어갔다.' 여기서 베드로의 담대함과 하나님께서 그의 은사를 얼마나 다양하게 베풀어주시는가를 살펴보자. 경주에서는 요한이 베드로를 앞질렀지만 담대함에 있어서는 베드로가 요한을 능가하였다. 날렵한 제자들이 있는 반면, 담대한 제자들도 있다. 전자는 느린 사람들을 고무하는 데 유용하며, 후자는 소심한 사람들을 담대하게 하는 데 유용하다.

열심히 그리스도를 추구하는 자들은 근거 없는 걱정이나 어리석은 환상 때문에 스스로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훌륭한 그리스도인들은 무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곳은 그리스도께서 누워 계셨던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체를 보거나 무덤 가운데 홀로 있을 때 느끼기 쉬운 두려움에 빠져들지 말고 그것을 정복해야 한다. 우리는 담대히 무덤을 통과하여 그리스도께 나아가야만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길을 통해 영광에 이르셨으며 우리도 반드시 그 길을 통과해 영광에 이르셨으며 우리도 반드시 그 길을 통과해야만 한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과 사심을 보지 못한다면 그것을 보지 못하느니 오히려 죽는 편이 훨씬 낫다. 베드로가 무덤 속에서 발견한 물건들의 상태: 그리스도께서는 거기에 자신의 수의를 남겨두셨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다시는 죽으시지 않을 것이므로 그 수의들을 무덤 한쪽 곁에 놓아두시었다. 나사로는 수의를 걸친 채 무덤에서 나왔다. 왜냐하면 그는 그 수의를 다시 사용해야 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죄의 사망으로부터의 생명으로 부활할 때, 우리는 우리의 수의를 남겨 놓아야만 하며 우리의 모든 부패함도 벗어버려야만 한다. 그리스도는 우리로 하여금 수의를 쓸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무덤 속에 남겨 놓으셨다. 그는 그 무덤이 성도들을 위한 침대로 가정하시고 미리 그들을 위해 예비하신 이부자리를 깔아 놓으셨다.

수의는 잘 정돈된 상태로 발견되었다. 이것은 사람들이 잠들어 있는 동안 누군가 그의 시체를 훔쳐가지 않았다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베드로의 담대함은 요한을 고무하였다. 이제 그도 무덤에 들어갈 마음이 생겨 과감하게 무덤 속으로 들어갔다. 보고 믿더라(8). 요한은 예수께서 다시 사셨다는 사실을 믿기 시작했다.

요한은 용기를 내서 베드로를 뒤쫓아 들어갔다. 만약 베드로가 먼저 무덤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요한은 결코 무덤에 들어갈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선한 일을 할 때 타인의 담대함으로 담대함을 얻는 것은 좋은 일이다. 난관과 위험에 대한 공포는 다른 사람의 결단과 용기를 봄으로써 제거할 수 있다. 아마도 요한의 민첩성이 베드로로 하여금 더 빨리 달리도록 만들었다면 이제 베드로의 담대함이 요한을 더 용감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요한은 베드로와 보조를 같이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뒤를 따르는 것을 수치로 생각하지도 않았다.

요한은 베드로보다 앞서 믿었다. 베드로는 보고 놀랐으나(눅 24:12), 요한은 보고 믿었다. 사고형의 인간이 행동형의 인간보다 하나님의 진리의 증거를 더 빨리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그토록 더디 믿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이었겠는가? 복음서 기자는 다음과 같이 전해 주고 있다(9). 저희는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9). 다음의 사실들을 고찰해 보자. 첫째로 제자들 자신이 처음에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기를 얼마나 주저하였는가 하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의심은 후에 그들로 하여금 확신을 갖고 그의 부활을 증거 하도록 하는 데 도움을 주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부활 신앙을 갖는 것을 주저하였다는 사실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그들의 믿음이 경솔하게 결정된 것도 아니며 또한 맹목적인 신앙도 아님을 보여준다. 그들에게 있어서 이 사건은 어떤 기이한 일, 즉 그들이 전혀 생각지 못했던 그러나 일들 중의 하나로 간주되었다. 처음에 베드로와 요한은 이 사건을 믿는 데에 너무도 소심했다. 그러나 후에 이 사건은 그들이 엄청난 확신을 갖고 증거 할 수 있는 가장 유력한 증거로 채택되었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그들은 다른 사람들일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도 속일 줄 모르는 사려 깊은 사람들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둘째로 그들이 더디 믿게 된 데에는 보다 명백한 이유가 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성경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이 성경을 알지 못하였더라'는 말씀은 나머지 제자들 중에서 본 복음서의 기자가 자신의 과오를 인정한 것으로 풀이된다.

3)베드로와 요한은 신앙과 불신 사이에서 망설이다가 그들의 탐구를 더 이상 진척시키지

못하였다. 두 제자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10). 그 들이 돌아간 이유는 시체를 훔쳐갈 계획으로 와다는 혐의를 받을까 두려워했기 때문이며, 또한 시체가 행방불명된 지금 그 혐의로 고소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기도 했다. 험난하고 위험스러운 시대에는 훌륭한 사람들일지라도 결단력 있게 자신의 사명을 계속 수행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들이 당황하여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할지, 또한 그들이 본 것에 대해 무슨 방도를 취해야 할지를 몰랐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들이 아직도 연약하다는 증거이다.

아마도 나머지 제자들은 함께 모여 있었던 것 같다. 그리하여 두 제자는 그들이 발견한 사실을 보고하기 위해 그들에게로 돌아갔다. 베드로와 요한이 무덤에 당도하기 전에 한 천사가 나타나 돌을 굴려 버리고, 무덤을 지키는 경비병을 두려움에 떨게 했으며 여인들을 위로했다는 사실은 주목할만한 일이다. 본문에 의하면 제자들이 무덤을 떠나가자마자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에서 두 천사를 보게 된다(12).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은 무덤에 가서 그 속까지 들어가 보았으나 그 천사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지시에 따라 임의로 나타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한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 있으며 실제로 그러한 곳에 있다. 천사들을 볼 수 있는 이러한 은혜는 일찍이 그리고 항상 그리스도를 찾는 자들에게 주어졌다. 그리고 이것은 맨 처음에 와서 끝까지 남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보상이었다. 그러나 잠시 들렀다 가는 삶들에게는 이러한 은혜가 주어지지 않았다.

[마태복음 고난주간 설교] 예수님이 조롱과 핍박을 받음(마 27:2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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