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 원어 설교

[복음의 핵심:마 11장 강해설교] 거슬리는 그리스도의 교훈(마 11:2-6)

체데크 2024. 3. 24. 2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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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복음의 핵심 마태복음 11장 강해설교에서는 거슬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주면 사람들은 이것을 거부합니다. 복음은 아무나 듣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택한 백성이 알아듣고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하여 하나님이 선택한 백성들이 교회로 와서 구원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거슬리는 그리스도의 교훈(마 11:2-6)

 

복음의 핵심 중에서 거슬리는 그리스도의 교훈을 보면서 과연 나 자신은 어떤 자인가 생각해 본다. 세상의 비극의 핵심적 요인은 그리스도를 거절하는 것이다. 나는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라고 말하면서 그리스도를 받아 들이 자인가 정말 그리스도가 원하는 삶을 살고 잇는가를 다시 한번 생각하는 시간들이었다. 나 자신도 세상 사람과 같이 그리스도가 개인의 영혼과 영적인 것보다는 이 세상의 큰 문제들을 해결해 주시는 분으로 믿고 살아온 것 같다. 그런데 이 책을 보면서 주님은 한 개인의 영혼과 영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분인 것을, 세상이 어떻게 될 것이냐가 아니고 내 영혼이 어떻게 되냐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회개의 권고를 들으려 하지 않고 구원의 방법이 너무 간단하기 때문에 걸림돌이 되는 것 같다. 나의 삶을 보면 내가 남을 위해 봉사한다는 자부심을 갖고 살 때 가 얼마나 많은가 교회 안에서 교사 구역장 성가대 이런 식으로 나 자신을 드러내려 하지만 주님은 구원을 나의 행위로 받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내 자신을 드러내려는 욕망을 버리려 하니 복음이 걸림돌이 되는 것 같다. 거슬리는 그리스도의 교훈을 보면서 인간의 속성을 조금은 이해되는 것이 소득인 것 같습니다.

침노하는 사람들 (12)

예수님은 이 세상에 복음의 말씀을 선포하시고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죽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때부터 복음이 성령의 능력으로 계속 세상에 전파되었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복음에 전혀 관심이 없고 복음을 비웃습니다. 그럼에도 복음의 말씀에 처음 선포된 때부터 메시지를 믿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 자들이 있습니다.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복음을 듣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온 자들을 침노하는 자라고 서술한 뜻은 무엇인가? 요한의 메시지의 진리를 깨달은 자들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고 몸부림을 친다. 이 일의 긴급성을 자각했기 때문이다.

] 불난 집에 갇힌 사람이 본시 조용하고 얌전한 성격을 가졌음에도 자기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탈출구를 찾아 격렬한 몸짓으로 살길을 찾습니다. 이처럼 절박한 상황에서 침노하는 사람과 같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절박 상황을 깨닫지 못할까? 성경은 죄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죄는 우리 속에 냉담과 무관심을 일으킵니다. 우리 자신들이 처해 있는 매우 위험한 처지에 대해 무관심하고 우리 인생이 절박한 상태를 깨닫고 눈을 뜨기를 거절하는 무감각이 오늘날 큰 죄악입니다.

우리들의 관심은 온통 물질적입니다. 현대인들은 자기만족 속에서 영적 세계에 대한 관심을 내던지고 현재의 삶의 집중되어 삽니다. 세상을 거의 완전하게 개선한 것처럼 자신하면서 삽니다. 그럼 사람을 침노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

침노자의 특징은 첫째 복음의 진리를 깨달은 자들은 그것이 자신들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침노하는 자들의 우선권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자신들의 영혼의 구원을 첫째로 삼는 자들입니다. 두 번째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고 사력을 다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화급성을 한 처지를 깨닫고 하나님 자녀라는 것과 죄가 용서 됐다는 것을 알면 무슨 일이 생겨도 아무 걱정이 없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세 번째 그들이 받은 정보와 지식과 권면을 아주 놀랍게 받고 기뻐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침노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합니다. 하나님께 돌아가서 자신의 죄를 인정합니다. 잇는 그대로 주께 나아갑니다. 불로부터 탈출했다는 것을 확신할 때까지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불난 집안에 있는 자는 빠져나가지 못하면 타 죽는 것을 압니다. 탈출할 때까지 계속 출구를 찾습니다. 조금도 쉬지 않고 성경을 읽었고 기도하였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다 행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피할 길(11-24)

주님은 오늘 마틴로이드 존스의 복음의 핵심을 통하여 하나님의 심판과 그 피할 길을 말씀해 주십니다. 그 예로 소돔과 고모라를 제시하셨고 주님은 오늘도 이 무서운 심판을 언급하시며 경고하고 계십니다. 고라신과 벳새다의 시민들은 예수님과의 만남과 관계가 가져오는 불가피한 결과들을 이해하지 못하였고 이것이 본문에서 예수님이 다루시는 주제이며 이 주제는 심판의 선언으로 예수님은 최후 심판의 교리를 진술하십니다. 예수님은 이 도시들에서 큰 권능을 많이 행하셨지만 회개하지 않았으므로 준엄한 질책과 그들에게 닥칠 심판을 선언하시고 최후 심판 때에 그들이 당하게 될 처지와 형편을 예고하십니다.

이 심판의 교리는 성경 전체에 흐르는 하나의 대 주제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심판의 교리를 배척하는 까닭은 예수님의 다른 말씀들과 조화시킬 수 없기 때문인데 그 예로 어린아이들과 함께 놀아주고 죄인과 세리들의 식탁에 앉으셨던 그분이 심판할 수 없다는 생각과 심판이 자기들의 신판과 맞지 않는다고 심판의 사상을 내던지려 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심판 교리를 떠나서라도 자연 속에 심판 사상이 잇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우리들이 자연법칙을 어기면 그에 따르는 고통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충분한 기회를 주시기 이전에는 결코 심판을 선언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심판 원칙을 보면 그리스도가 심판의 근원이 되며 주님이 우리를 어떻게 보시는가? 우리들이 주님께 속한 자인지 아닌지 주님과 어떤 관계인가 그리스도의 복음이 지적하는 핵심적인 요항입니다. 우리가 정죄와 심판을 피하는 길은 회개하는 것으로 이 회개의 길만이 심판의 정죄를 피하는 유일한 방책이라고 우리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종국적인 정죄를 받은 사람은 누구도 변명이나 탄원을 할 수 없습니다.

심판의 교리는 인간의 이론이 아니고 성경의 엄연한 가르침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부름에 불응한다면 우리는 멸망할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이 모두 죄를 짓고 율법의 정죄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을 때 그리스도는 우리들의 죄와 형벌과 죄책을 감당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우리들에게 필요한 조의 모든 것이 예수님 안에 준비되었습니다. 새 생활 새 능력 새 소망 죽음과 무덤을 초월하는 영원한 복의 모든 것들이 복음이 제공해 줍니다. 예수님에 대해 아는 기쁨과 세상의 모든 것들을 생각할 대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사랑하심에 감사드립니다.

모든 것을..... (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11:27)

본절에 나오는 아들은 신약 성경의 주심점이며 신약의 역사와 가르침의 핵심이므로 이 분이 누구시며 성탄절의 의미가 무엇인지, 즉 우리가 정확하게 무엇을 기념하는지를 고찰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탄생의 의미와 목적은 무엇입니까? 이것이 오늘날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과 우리 각자의 인생살이에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이 모든 질문들에 대한 해답은 나사렛 예수가 누구냐는 문제에 달려있다고 봅니다. 이 문제가 가장 중요한 열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실을 직시하고 그분이 누구인지를 아는 것은 신자의 체험으로 들어가는 관건입니다. 여기서 출발하지 않은 체험들은 우리들에게 영구적인 가치가 없습니다. 우선 예수님의 주장은 놀랍고 어마어마한 주장입니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이제 이 말씀의 전반적인 상황을 재구성해 보겠습니다. 이 예수라는 사람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났고 이 지상에서 살았습니다. 그는 나사렛에서 목수로 일했으며, 사람들에게 자신이 다른 인간들과 본질적으로 다른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 사실은 역사입니다. 예수님의 두 번째 주장은 자신이 하나님을 아는 문제에 있어서도 전혀 독특하다는 것입니다.

당신들은 나를 보지만 내가 누구인지를 정말 알지 못한다. 나를 참으로 아는 유일한 분은 하나님이시다. 오직 하나님만이 나를 진정으로 아신다. 그리고 오직 나만이 참으로 하나님을 안다. 당신들은 기도를 하고 하나님께 말도 하지만 하나님을 내가 아는 듯이 알지 못한다”

우리들은 아무 때고 하나님을 본 자가 없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을 보았으며, 유대인들이 이해했듯이 신이 하나님과 동등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하나님과 동격의 자리에 놓았으며, 이따금씩 베일을 벗고 아버지와 자신 사이의 영원하고 신비스러운 관계를 약간씩 들어내셨습니다.

나사렛의 목수였던 그가 자신과 하나님의 관계는 각별하기에 다른 모든 인간들은 아웃사이더들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을까요? 예수님과 동시대 사람들은 예수님의 주장을 믿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인에게 썼듯이 이 세상의 관운들은 그분을 몰랐습니다.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고전 2“8] 정말 이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왜 온 세계가 그분을 믿고 따르며 복종하지 않습니까?

우리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무슨 뜻입니까? 우리들은 여기서 성육신의 신비에 직면해 있습니다. 누구도 성육신의 신비를 간단한 것으로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들도 예수님의 동시대 유대인들의 것으로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들도 예수님의 동시대 유대인들의 틈에 있었다면 에수님의 주장을 과장됐다고 느꼈을 것입니다. 온 우주의 통제자며 자기 능력 아래 온 세상이 있다는 예수님이 죄 많은 육신의 모양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하늘 구름을 타고서 천사들의 호위를 받는 대왕으로 오시지 않았습니다.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교육도 받지 못한 종의 모습, 낮은 신분이었기에 피곤함. 굶주림. 목마름을 아셨고 또 힘없이 체포되었고 십자가에 못 박혔고 속절없이 극도의 무력함과 수치와 불명예 속에서 죽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의 주장을 믿기 어려워합니다. 그러나 신약의 전체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을 때 그는 자신의 영광을 감추고 자신을 비웠습니다. 그는 자신의 영원 무궁한 영광과 하나님 되심의 현란한 상징과 표지들을 제쳐두고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으며 자신을 더욱 낮추셨습니다. 성육신의 모든 영광은 어떤 점에서 그 신비성에 있습니다. 그는 자기 영광을 나타내시면서 감추셨습니다. 영원하신 신성을 가지신 하나님이 자신을 육신으로 가리고 인간의 본성 속에 숨어 계신다는 것은 너무도 모순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것이 이 세상이 예수님을 인정하지 못하는 한 가지 이유입니다.

또 하나의 이유는 우리가 그를 기존 사상과 편견의 눈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막강한 군사적 능력으로 원수들의 멍에세서 해방시키고 정치적 최강국을 만드실 거라는 편견을 가졌던 유대인에게 예수는 너무나 보잘것없고 미친 사람이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복음 전파자가 된 바울도 예수님을 몰랐을 때 나는 그분을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로 생각하고 그의 도를 핍박했습니다라고 간증을 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왜 이 감추는 비밀이 있습니까하나님의 아들은 이 세상에 오실 때 그런 식으로 탄생하셔야 했고 그런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 길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방책이었기 대문입니다.

예수님이 하시려고 온 일들 때문에 수치와 신비와 경이는 예수님의 인격체에 필수 요소였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들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나사렛 예수의 놀라운 성육신의 신비를 못마땅하게 여겨서 걸려 넘어지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에수님의 오심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은 이 세상을 구속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는 지상에서 우리들의 죄를 몸소 지시고 우리의 죄책과 그 형벌을 자기 몸으로 십자가에 받으셨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계셨을 때 행하신 일이었습니다. 그는 구원의 길을 만드시고 그 길을 터 놓으셨습니다. 그 길은 인간들을 하나님과 화해시키는 구원의 방패였습니다. 그럼 예수님은 지금 무엇을 하실까요?

예수님은 하늘로 승천하여 한 백성을 자신에게 부르고 계십니다. 역사는 나사렛 예수의 장중에 잡혀 잇습니다. 시간. 역사는 종착점이 있습니다. 나사렛 예수는 만인의 눈이 볼 수 있는 왕으로 오실 것입니다. 모든 악을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창조로부터 제거하신 후 다시 그 왕국을 그의 아버지께 돌려드릴 것입니다. 그리고 이 새 왕국에 소속된 모든 사람들은 주님의 영광스러운 임재 속에서 하늘 아버지와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들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하고 판정하는 것은 예수와 우리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과 그 모든 일들을 그리스도께 맡기셨습니다. 그것은 고난과 수치와 조롱을 의미합니다. 골로다로 가는 것이며 그분의 거룩한 육신 속에 못들이 박히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모든 수난 후에 승리를 외칠 수 있었습니다. 이 사실을 믿는 모든 사람들은 영원한 구원을 받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일(27)

주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에서 이 땅에 오셔서 그분이 세상에서 사시다가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은 우리들에게 하나님을 알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주 예수를 떠나서는 얻어질 수 없습니다. 이것이 본 문제의 핵심입니다.

이 세상은 죄의 결과로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지금까지 안 적이 없다고 주님은 선언을 하십니다. 이 모든 문제의 근원은 이 세상이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그분을 인격체로 하는 것입니다. 내가 그분과 매우 가깝게 알고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스스로 알 수 없는 하나님을 알게 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는데 예수님의 삶은 우리들과 달랐습니다.

그분의 생애는 유일 무이한 완전하셨고 자신의 삶과 인격으로 하나님을 계시하셨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사역과 기적들을 통해서 죽은 자를 살리시고 병든 자를 고치시며 또 자신의 가르침을 통하여 하나님을 계시하셨습니다. 이런 것들은 육신의 모양으로 오신 하나님의 활동들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아버지가 절대적으로 거룩하시며 죄를 미워하셔서 완전히 파괴하시겠다는 약속의 말씀과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이 사상에 오셔서 하나님의 거룩함과 사랑과 자비를 나타내셨는데 이 모든 것들이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가장 귀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시고 인간들을 위해 어떤 사역을 행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히 순종해야 했고 주님은 죄의 형벌도 받으셔야 했는데 율법이 죄를 정죄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죄책과 형벌을 받기 위해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에수님에게 십자가의 형벌을 내리심으로써 우리들을 용서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하나님의 거룩함과 사랑이 함께 화해되며 서로 입 맞추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의와 화평이 만났고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만나 서로 화해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나는 하나님의 얼굴을 들어야 봅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얼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멍에(28-30)

어거스틴. 마틴 루터. 존 칼빈. 존 웨슬리와 그 형제 챨스 등은 모두 안식과 평안을 찾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들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다녔습니다. 그러던 중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안식을 찾았습니다. 선물을 받음으로써 영혼의 안식을 찾았습니다. 복음은 선물입니다. 우리의 노력이 아닙니다. 참된 안식은 그리스도께로 간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멍에를 메는 것입니다.

1. 그리스도의 멍에의 의미

우리들이 구분을 우리의 스승으로 섬기면서 가깝게 지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들이 주님의 평안을 알고 싶으면 우선 주님의 말씀을 의도적으로 듣고 그분의 가르침을 배우기로 결정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만족과 평안을 찾아 준다고 선전하는 가르침들- 바리새인. 서기관. 사두개인들이 있었으며 헬라 철학도 침투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의 고대세계에는 순회 철학자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제각기 인생문제의 해결사들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당신이 진정으로 안식과 평안을 알고 싶습니까?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겠다고 작정하십시오.

그것은 처음부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는 인격체를 인정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분께로 가서 그분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그것은 당신이 어린아이가 되기를 작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눅 18:17]

대다수의 사람들의 문제는 우리들은 심판자들입니다. 우리들은 자신들의 온갖 이론들과 아이디어를 가지고 나옵니다. 우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잘 납득할 수 없다.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들의 노리로 조사해서 설명해 보아야 한다. 그러니까 그리스도는 우리들의 심사를 받아야 하는 일종의 학생과 같은 셈입니다. 오직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이 무릎을 꿇고 아들이신 하나님 제게 말씀해 주십시오!”라고 외칠 때에만 그들에게 안식이 주어집니다. 당신은 탄원하는 자로서 와야 합니다.

2. 그리스도를 배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멍에 아래 들어온다는 것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가르침을 배우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들의 죄 많음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마 15:11]

바리새인들을 향하신 주님의 책망은 컵과 대접의 겉을 닦으라고 가르치십니다. 640개의 수칙 사항들, 바리새인들의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는 외식기도,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면서 짐 위에 짐을 더 얹어 놓는다. 현대 철학자들은 모든 문제가 자신의 탓이 아니고 다른 사람의 탓이라고 가르칩니다.

우리들은 너무도 죄에 젖어서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심으로써만 죄로부터 구원될 수 있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세리기도는 자신이 하나님의 눈에 형편없는 죄인임을 깨닫고 자신을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맡김[눅 18:13-14]

3.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피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

죄의 형벌은 죽음입니다. 그래서 내가 죄의 벌을 받으면 난 죽고 하나님의 생명 밖에 놓이게 됩니다. 그리고 나는 안식이 없는 영원한 비참함 속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나의 죄를 지시기 위해 내 대신 죽어 주기 위해 나를 하나님과 화해시키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의 십자가 아래 들어가는 것입니다.

4. 거듭나야 한다.

5. 자신을 부인하라.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라는 초청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심지어 바보 취급을 당할 것까지 각오한 사람입니다.

6. 내가 주님의 가르침을 믿는다고 주님께 말씀드리는 것이다.

하나님께 당신이 죄인이며 따라서 당연히 하나님의 진노와 정죄를 받아야 마땅한 자라는 것을 하나님 앞에서 인정하십시오. 당신이 그리스도의 이 메시지를 듣고 그것을 받는다고 하나님께 말씀하십시오.

참된 안식[11:28-30]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은 병들고 지친 곳입니다. 우리를 위로하거나 격려해 주거나 희망을 주는 것들을 찾지 못합니다. 주님은 초청의 말씀을 주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네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우리에게 이런 말씀이 있는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십시다.

참된 안식의 메시지를 요약해 보면

1. 오늘날의 세상문제들은 대개가 분명한 것들은 제대로 보지 않는데서 기인되고 있습니다. 인간의 삶의 현장에서는 문제들이 항상 일어납니다. 현대인들의 광적인 향응주의, 환락에 광분한 세대, 음주 판매량과 도박과 기타 접대용으로 쓰이는 막대한 금액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그런 향응이 없으면 인생을 직시하고 살아갈 수 없습니다. 현대 사회의 가장 큰 특지의 하나는 이 같은 비극적이고 한심스러운 불안정과 안식의 부재입니다. 양심의 불안정, 정신과 사고에도 불안정 지적 불안정 마음과 갈망의 영역에도 불안정이 짙게 드리워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자명하고 분명한 것을 다시 보는 일입니다.

2. 안식은 하나님의 지식 속에서만 찾을 수 있습니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 이니이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주님은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다음의 초대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네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내가 홀로 가지고 있는 아버지를 아는 이 지식이 곧 안식의 비결이다.

거짓된 안식을 찾으려고 하는 자들: 마약 중독자, 환락, 기호나 환상의 세계를 만든 자들은 현실을 직면해야 합니다. 이런 것들은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합니다. 목음은 안식이 하나님을 아는 데 있다고 선언합니다. 그 까닭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분을 떠나서는 결코 안식할 수 없는 존재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3. 우리 주님만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주실 수 있습니다.

아들과 또 아들이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다시 말해서 주님만이 우리들에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주실 수 있고 다른 사람은 그 누구도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을 알게 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찾으려고 애썼습니다.

1] 회심 이전의 마틴루터 2] 철학서의 짐 3] 신비사상 4] 도덕적인 짐- 성경을 읽고 십계명, 산상보훈을 묵상하며 새로운 각오 밑에 제대로 살아보려고 힘씁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알 수 없다. 5] 613가지의 율법들을 가진 바리새인과 종교지도자들

주님은 이러한 종교지도자들을 향해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들에게 지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해 주고 진정한 안식을 제공해 주십니다.

그분은 우리들에게 가장 은혜로운 초대를 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몸으로 나의 모든 죄들을 감당하셨습니다. 그래서 내가 갈보리 십자가를 바라볼 대에 내 양식이 안식합니다. 나는 내 죄의 빚이 십자가에서 갚아진 것을 압니다. 나의 죄 값은 지불되었고 내 조는 씻어졌습니다. 내가 십자가를 바라볼 때에 나는 하나님이 내 죄를 용서해 주셨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환경과 상관없는 온전한 안식이 폭풍 속에서도 평정을 누리게 합니다.

거저 주는 선물[11:28-30]

그릇된 인식으로 복음에 접근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모세. 이사야. 예수. 바울. 플라톤. 소크라테스. 간디 등등의 인물들이 인생을 논하는 많은 철학자들의 이론 중의 하나로 복음을 취급합니다. 우리들이 복음을 대할 때 여기서 제일 먼저 알아야 할 것은 복음이란 다른 가르침과 전혀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철학 강연이나 정치 연설을 들으려면 지적 이해력이 있어야 합니다. 미술. 음악. 문학의 영역에서도 우리들의 인식능력과 분야별의 감상 능력을 요구합니다. 그렇지만 복음을 대면할 때는 전혀 다릅니다.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18:3]

복음은 기적적이고 초자연적인 출발이 있어야 합니다. 복음은 철학이나 교훈이 아닙니다. 복음은 인간이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인간을 찾는 것입니다. 복음은 비 이성적인 것이 아니면서도 우리들의 이성을 초월합니다.

1. 복음의 본질은 무엇인가?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고 인간이시며 두 개의 본성이 동시에 공존하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자신을 높이시면서 또한 낮추십니다. 주님은 우리들이 그를 따를 때에 평안과 안식을 가질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복음의 기적입니다.

2.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무엇일까요?

그분은 우리를 위해 다른 누구도 할 수 없었던 구원의 길을 열기 위해 오셨습니다. 이 목적을 위해 예수님은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의 죄와 죄책들의 문제를 떠맡기 위해서 인간의 본성을 지니고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로 가셨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죽으셨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은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제공해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핵심은 본문의 준다는 말에 집약되었습니다. 당신과 내가 해야 하는 일은 우리의 필요를 인식하는 것뿐입니다. 단지 받으라는 요청뿐입니다.

3.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은 이 안식을 어떻게 우리에게 주십니까? 우리들에게 제일 먼저 필요한 것은 죄의 용서입니다. 주님은 안식이 없는 나를 바라보시면서 내게로 오라 내가 네게 안식을 주리라' 주님은 용서의 안식, 하나님과의 화평의 안식을 주신다고 하십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새 생명과 새 본성을 주십니다.

복음을 이해할 수 있기 전에 새 본성을 주십니다.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실 것이라[갈 2:20] 이것이 복음입니다. 주님은 우리들에게 성령도 주십니다.

우리들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점지하신 삶을 살 수 있는 능력과 힘을 성령으로부터 받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멍에는 쉽고 그의 짐은 가볍다는 그 놀라운 역설 같은 진술의 궁극적인 설명입니다. 우리는 먼저 새 생명을 선물로 받고 그다음에 주님의 능력과 힘으로써 새 삶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 히브리어 강해] 용서받은 간음한 여인(요 8:1-11)

 

[요한복음 8장 히브리어 강해] 용서받은 간음한 여인(요 8:1-11)

요한복음 8장 히브리어 강해 말씀은 용서받은 간음한 여인에 대해서 예수님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왔습니다. 사람들은 모세의 율법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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