샬롬! 오늘도 복음 빵집에 오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오늘은 요셉 설교문 중에서 감옥에 갇힌 술 관원장과 떡 관원장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술 맡은 관원장과 떡 맡은 관원장이 감옥에 갇힘”(창40:1-8)
명제 : 술 관원장과 떡 관원장은 원죄의 죄인을 상징한다.
목적 : 우리들도 하나님 앞에 원죄의 죄인임을 기억하자.
우리는 오늘 이 시간 술 관원장과 떡 관원장의 이야기를 통해서 나의 원죄를 기억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요셉은 억울하게 형제들에 의해서 애굽에 노예로 팔려가게 되었습니다. 보디발의 집에 노예로 팔려가서 보디발의 아내에 의하여 억울하게 감옥에 들어가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요셉을 통해서 아무 죄도 없고 형제에 의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요셉처럼 유대인들에게 팔렸습니다. 예수님이 직접 뽑은 가룟 유다에게 입맞춤을 당함으로 팔렸습니다. 같은 동족인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고 유월절에 큰 소리로 외치면서 빌라도에게 항변했습니다. 요셉도 억울하게 보디발의 감옥에 들어와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에 보디발의 감옥에 술 맡은 관원장과 떡 맡은 관원장이 죄를 짓고 들어오게 됩니다. 애굽의 왕인 바로에게 죄를 짓고 감옥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감옥에 들어왔다는 것은 죽을 날만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럼 우리가 오늘 말씀을 구속사적 관점에서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애굽의 왕인 바로는 하나님을 상징해 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술 맡은 관원장과 떡 맡은 관원장은 원죄의 죄인을 상징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요셉은 누구의 그림자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입니다. 이 시간 우리가 이런 관점에서 말씀을 들으면 술 관원장과 떡 관원장이 나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나도 하나님 앞에서 원죄를 짓게 됨으로 감옥에 들어와서 영원한 심판을 받아야 할 존재였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나에게 보내주셔서 구원의 은혜를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혜가 아니면 절대 나는 원죄에서 해방될 수 없습니다. 이 시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통해서 구원의 은혜가 임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말씀을 통해서 원죄에서 해방시켜 주신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를 입으로 하나님 앞에 고백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창40:1 그 후에 애굽 왕의 술 맡은 자와 떡 굽는 자가 그들의 주인 애굽 왕에게 범죄한지라
성경은 그 후에 애굽 왕의 술 맡은 자와 떡 굽는 자가 그들의 주인 애굽 왕에게 범죄 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후는 언제입니까? 요셉이 억울하게 감옥에 들어온 후를 말합니다.
‘범죄한지라’ (חטא하타 2398 동사, 칼, 완료, 공성, 3인칭, 복수) 빗나가다, 잘못 행하다, 죄를 짓다, 라는 뜻입니다. 술 관원장과 떡 관원장은 바로 앞에서 죄를 짓게 되었습니다. 바로의 뜻대로 행하지 않고 잘못된 일을 저질러서 큰 죄를 짓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어떠한 죄를 지었는지에 관하여는 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바로의 마음에 거슬리는 행동을 하여 잘못된 판단으로 바로의 뜻에서 빗나가는 행동을 했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죄를 지은 것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원죄를 지은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들도 하나님 앞에서 선악과를 따 먹는 원죄를 지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서 빗나가서 올바르게 살지 못함으로 죄를 짓게 되었습니다.
술 관원장과 떡 관원장은 다시는 회복할 수 없는 죄를 지었습니다. 그 이유가 완료 시제를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바로의 마음이 돌아서지 않는 한 이 두 사람은 꼼짝없이 죽어야 합니다. 우리들도 하나님 앞에서 원죄를 이렇게 지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시지 않으면 절대 회복할 수 없는 죄를 지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혜가 없으면 하나님은 절대 나를 용서해 주시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나의 모든 원죄를 씻겨 주시고 하나님은 나를 용서해 주셔서 죄악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창40:2 바로가 그 두 관원장 곧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에게 노하여
바로는 두 관원장에게 분노를 내고 있습니다. 자신에게 죄를 지었기 때문에 화를 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도 원죄의 죄인들에게 분노를 내시고 심판하게 됩니다.
‘노하여’ (קצף카차프 7107 와우접속사. 동사, 칼, 미완료, 남성, 3인칭, 단수) 노하다, 화내다, 격노하다, 라는 뜻입니다. 바로는 죄를 지은 두 관원장을 향하여 분노를 표출하고 있습니다. 용서가 되지 않는 죄를 지었기 때문에 바로는 화를 내면서 격분하고 있습니다. 그럼 하나님은 언제 격분하십니까?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우상을 섬길 때에 화를 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성전을 척결하실 때에 분노를 내시면서 상을 엎었습니다. 하나님은 원죄의 죄인에게 격분하셔서 심판하십니다.
바로는 두 관원장에게 즉시로 화를 내고 격분하여 자신 앞에서 쫓아버리라고 했습니다. 다시는 자신 앞에 나타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그 이유가 와우접속사를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바로의 마음이 너무 흥분되어 다시는 두 관원장을 보기 싫다는 의미입니다. 믿었던 자들이 죄를 지으니 화가 났습니다. 하나님께서도 믿었던 인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 먹으니 마음이 격분하여 에덴동산에서 쫓아내버렸습니다.
창40:3 그들을 친위대장의 집 안에 있는 옥에 가두니 곧 요셉이 갇힌 곳이라
바로는 두 관원장을 자신 앞에서 쫓아내고 감옥에 집어넣으라고 했습니다. 이곳은 요셉이 있는 보디발의 집 안에 있는 감옥입니다. 원죄의 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살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죄를 지은 술 관원장과 떡 관원장이 요셉이 있는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원죄의 죄인인 나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살 수 있습니다. 요셉은 이미 보디발의 감옥에 갇혀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럼 우리는 이것을 통해서 무엇을 영적으로 깨달을 수 있을까요?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옥에 갇힌 영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러 가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벧전3:19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어떤 사람들은 이 부분을 예수 그리스도가 지옥에 가셔서 영들에게 복음을 선포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해석입니다. 지옥에 가면 더 이상 구원받을 기회가 없습니다. 그럼 ‘옥에’ 있는 이라는 이 부분을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옥에’ 라는 단어가 히브리어로 (משמר미쉐마르 4929) 감옥, 감금, 감시, 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보디발의 ‘집 안에’ 있는 단어와 같은 단어입니다. 이것은 지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노아 당시에 원죄의 죄악에 갇혀 죽어 있는 자들에게 주님이 이 땅에 성육신 하기 전에 복음을 선포했다는 의미입니다. 요셉도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로서 옥에 있는 원죄의 죄인인 두 관원장에게 복음을 선포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똑같이 꿈을 해석해 주었지만 한 명은 살고 한 명은 죽게 됩니다. 복음은 모두에게 선포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원죄에서 해방되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 시간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듣고 원죄에서 해방되어 살아났음을 믿어야 합니다.
창40:4 친위대장이 요셉에게 그들을 수종들게 하매 요셉이 그들을 섬겼더라 그들이 갇힌 지 여러 날이라
친위대장 보디발이 요셉에게 두 관원장을 수종들게 했습니다. 요셉은 술 관원장과 떡 관원장을 섬겼습니다. 이들이 갇힌 지 수 일이 흘렀습니다.
‘요셉이 섬겼더라’ (שרת샤라트 8334 와우접속사. 동사, 피엘, 미완료, 남성, 3인칭, 단수) 섬기다, 봉사하다, 라는 뜻입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명령에 의하여 두 관원장을 극진히 섬기면서 감옥 생활하는데 전혀 불편함이 없도록 봉사하고 있습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말에 즉시 순종하여 자신의 힘을 다해 술 관원장과 떡 관원장을 섬기고 있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다해서 이들에게 봉사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피엘형, 강조능동을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요셉이 힘을 다해 섬기면서 자신이 더 이상 하지 못할 정도의 노력을 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럼 요셉은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원죄의 죄인을 위해서 자신이 섬기러 왔다고 했습니다.
마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인자인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것은 섬김을 받으려 오신 것이 아니라 원죄의 죄인인 나를 위해서 섬기려고 왔습니다. 그럼 이 섬김이 무엇입니까? 자신의 목숨을 십자가에서 대속물로 주시고 원죄를 씻겨 주신 일입니다. 요셉이 두 관원장을 섬겼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원죄의 죄인들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섬기는 것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창40:5 옥에 갇힌 애굽 왕의 술 맡은 자와 떡 굽는 자 두 사람이 하룻밤에 꿈을 꾸니 각기 그 내용이 다르더라
술 관원장과 떡 관원장이 감옥에 있을 때에 하룻밤에 꿈을 꾸게 됩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의 꿈이 각기 그 내용이 달랐습니다. 그럼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꿈을 꾸었다는 것은 말씀을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자신들이 꾼 꿈이 무엇인지 알지를 못합니다. 우리들도 교회에 나오면 똑같이 성경 말씀을 듣게 됩니다. 아니면 성경을 읽게 됩니다. 하지만 그 뜻을 풀어줄 사람이 없으면 해석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목사가 필요합니다. 십자가 복음의 말씀을 선포해 주고 해석해 줄 때에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의 의도를 파악하여 믿을 수 있습니다. 두 관원장이 꿈을 꾸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창40:6 아침에 요셉이 들어가 보니 그들에게 근심의 빛이 있는지라
아침이 되어 요셉이 두 관원장에게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얼굴에 근심이 가득했습니다. 얼굴에 근심의 빛이 가득했다는 것은 기분이 언짢아 있었고 슬퍼하면서 마음이 초조해하고 한편으로는 분노를 내고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그 이유가 자신들이 꾼 꿈이 어떤 내용인지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도 성경을 읽거나 말씀을 들을 때에 그 말씀이 깨달아지지 않거나 이해가 되지 않으면 짜증을 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음에 믿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머리로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화를 내고 말씀 앞에서 짜증을 내게 됩니다. 이때에 하나님은 복음을 풀어줄 수 있는 사람을 보내주셔서 십자가 복음을 해석해 주게 하십니다. 복음은 내가 깨닫고 싶다고 해서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원죄의 죄인은 반드시 십자가 복음을 해석하여 들을 때에 구원의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행8:26-31 주의 사자가 빌립에게 말하여 이르되 일어나서 남쪽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라 일어나 가서 보니 에디오피아 사람 곧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관리인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가는데 수레를 타고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더라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수레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 빌립이 달려가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 읽는 것을 듣고 말하되 읽는 것을 깨닫느냐 대답하되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냐 하고 빌립을 청하여 수레에 올라 같이 앉으라 하니라
주의 성령이 빌립에게 말씀하여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내시에게 가라고 했습니다. 이 내시는 이사야 53장을 읽고 있었습니다. 성령께서 빌립에게 이 내시에게 가서 말씀을 해석해 주라고 했습니다. 내시는 말하기를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는데 내가 어찌 깨달을 수 있느냐고 빌립에게 말합니다. 복음은 스스로 깨닫는 것이 아니라 주의 감동을 받은 자들이 제대로 해석해 줄 때에 깨달을 수 있습니다. 술 관원장과 떡 관원장도 요셉이 꿈을 해석해 주지 않으면 그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들도 성경 속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의 보화를 해석해 주지 않으면 알지 못합니다.
창40:7 요셉이 그 주인의 집에 자기와 함께 갇힌 바로의 신하들에게 묻되 어찌하여 오늘 당신들의 얼굴에 근심의 빛이 있나이까
요셉이 두 관원장에게 물었습니다. 어찌하여 오늘 당신들의 얼굴에 근심이 가득 차 있습니까? 관원장들은 꿈을 꾸고 해석하지 못하여 고민에 빠져 있습니다. 원죄의 죄인들도 죄악 가운데 빠져 있으면 말씀을 들어도 복음을 깨닫지 못합니다. 복음을 알지 못하면 구원받을 길이 없기 때문에 근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요14: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믿으니 또한 나를 믿으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원죄 가운데 있을 때에는 근심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심판받을 일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경 말씀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깨닫고는 근심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들어야 합니다.
창40:8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꿈을 꾸었으나 이를 해석할 자가 없도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 청하건대 내게 이르소서
술 관원장과 떡 관원장은 자신이 꾼 꿈을 해석할 자가 없다고 요셉에게 고백합니다. 요셉이 그들에게 말하는데 해석은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에게 꾼 꿈을 이야기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원죄의 죄인은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고백해야 합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고백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는 진리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요셉은 두 관원장의 꿈을 듣고 해석해 주게 됩니다. 우리들도 원죄의 죄인이기 때문에 주님께 믿음으로 신앙고백을 해야 합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고백할 때에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깨달아지고 주님을 구원자로 믿게 됩니다.
우리는 바로에게 죄를 지었던 술 관원장과 떡 관원장을 보면서 나도 원죄의 죄인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원죄의 감옥에서 평생 고통당하면서 인생을 살았는데 그곳에 이미 요셉이 있었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전혀 복음을 깨닫지 못하면서 신앙생활을 했는데 두 관원장이 요셉을 만나 소망이 생긴 것처럼 나에게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복음을 깨달을 수 있는 소망이 생겼습니다.
이제 우리는 두 관원장이 꿈을 꾼 것처럼 나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나의 힘으로 깨우치려고 하면 절대 깨달음이 없습니다. 하지만 요셉에게 두 관원장이 꿈을 고백한 것처럼 내가 원죄의 죄인이라는 사실을 주님께 고백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원죄를 가져가시고 주님의 의로움이 나에게 옮겨져서 의로운 자가 됩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원죄에서 해방된 자라는 것을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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