샬롬! 오늘도 복음 빵집에 오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오늘은 부활절 설교문 중에서 요셉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요셉의 부활”(창41:14)
● 명제 : 요셉이 감옥에서 나온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상징한다.
● 목적 : 구원받은 성도도 요셉과 같은 고통의 감옥에서 부활한다.
우리는 구약의 요셉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요셉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발견할 수 있는 인물입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을 선택하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사람입니다. 형제들에 의해 애굽으로 억울하게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같은 동족인 유대인들에 의해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해야 했습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집에 노예가 되어 가정을 책임지는 총무의 일을 감당했습니다. 그때에도 하나님은 요셉과 함께하셔서 보디발의 집에 복을 주셨습니다.
문제는 보디발의 아내가 문제였습니다. 요셉의 빼어난 용모에 넋이 나가 요셉과 동침하기를 간구했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을 항상 의식하여 하나님 앞에서 범죄 할 수 없었습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의 간청을 거절했습니다. 보디발의 아내는 앙심을 품고 거짓으로 보디발에게 요셉이 자신을 겁탈하려고 했다고 말하여 요셉을 억울하게 감옥에 들어가게 했습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도 억울하게 아무 죄가 없지만 유대인들의 농간에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하는 운명에 처해졌습니다.
요셉이 감옥에 있을 때에도 하나님은 요셉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간수장에게 은혜를 주어 간수장이 요셉에게 감옥에 있는 죄수들을 모두 맡겼습니다. 요셉은 감옥에 있어도 여호와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범사가 형통하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삶에도 요셉처럼 억울한 일을 당할 수 있습니다. 생각하지도 못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이럴 때에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나를 떠나지 않으시고 계속해서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범사가 형통하게 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요셉은 감옥에서도 자신이 맡은 일에 충성을 다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요셉이 있는 감옥에 바로의 술 관원장과 떡 관원장이 범죄 하여 감옥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요셉은 이들을 열심히 섬겼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두 관원장이 한 날에 꿈을 꾸게 됩니다. 요셉이 보니 관원장들의 낯빛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들이 꾼 꿈을 해석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자신에게 꿈을 이야기해보라고 했습니다. 술 관원장이 꿈을 꾸었는데 포도나무가 있는데 그 나무에 세 가지가 있고 싹이 나서 꽃이 피어 포도송이가 익었는데 포도를 따서 포도주로 만들어 바로의 잔에 드렸다고 했습니다. 요셉은 술 관원장의 꿈을 해석해 주었는데 당신이 다시 바로에게 돌아가 복직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때에 요셉은 억울하게 감옥에 들어왔으니 나를 기억해 달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듣던 떡 관원장도 요셉에게 꿈을 이야기했습니다. 흰 떡 세 광주리가 자신의 머리에 있는데 바로를 위하여 만든 각종 구운 음식이 있는데 새들이 내 머리의 광주리에서 그것을 먹었다고 했습니다. 요셉이 해석해 주었는데 세 광주리는 사흘인데 사흘 안에 바로가 당신의 머리를 들고 나무에 달게 되는데 새들이 와서 당신의 고기를 뜯어먹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꿈을 해석해 주고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술 관원장은 복직이 되었는데 요셉을 잊어버렸습니다.
이렇게 시간이 흘러 만 이년이 지난 후에 하나님은 애굽의 바로에게 꿈을 주셨습니다. 나일 강가에 아름답고 살진 일곱 암소가 강가에서 올라와 갈밭에서 뜯어먹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흉하고 파리한 소가 아름답고 살진 일곱 소를 먹어버렸습니다. 바로가 잠이 깨었다가 다시 잠이 들었는데 이제는 한 줄기에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이 나왔는데 그 후에 가늘고 동풍에 마른 일곱 이삭이 나와서 이삭이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을 삼켜버린 꿈을 꾸었습니다.
아침에 바로는 당황하여 애굽의 점술가와 지식 있는 사람들을 불러 모아 자신의 꿈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그런데 한 명도 바로의 꿈을 제대로 해석하지 못했습니다. 그때에 술 맡은 관원장이 바로에게 말합니다. 자신이 감옥에 있을 때에 자신의 꿈을 해석해주었는데 그대로 이루어졌다는 이야기입니다. 떡 관원장은 꿈대로 죽었고 자신은 꿈대로 살았다는 것을 바로에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때가 되매 술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보면서 모든 것이 하나님의 때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바로는 명령을 내려 요셉을 감옥에서 데려 오라고 합니다. 요셉이 감옥에 있다가 바로에 의하여 풀려나는 것은 성부 하나님에 의하여 부활된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라는 것을 우리가 깨달아야 합니다.
창41:14 이에 바로가 사람을 보내어 요셉을 부르매 그들이 급히 그를 옥에서 내 놓은지라 요셉이 곧 수염을 깎고 그의 옷을 갈아입고 바로에게 들어가니
바로는 즉시 요셉에게 사람을 보내 요셉을 부르고 있습니다. 감옥을 관리하던 자들이 급히 그를 옥에서 놓아주었습니다. 요셉이 곧 수염을 깎고 그의 옷을 갈아입고 바로에게 들어갔습니다.
‘그들이 급히 내 놓은지라’ (רוץ루츠 7323 와우접속사. 동사, 히필, 미완료, 남성, 3인칭, 복수. 남성, 3인칭, 단수) 서두르다, 빨리 달리다, 뛰다, 라는 뜻입니다. 요셉이 갇혀있는 감옥은 분주해졌습니다. 바로 왕이 사람을 보내 요셉을 데리고 오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감옥을 관리하던 사람들은 정신없이 분주하게 뛰어다니면서 요셉을 감옥에서 서둘러 놓아주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요셉을 붙잡고 있었던 간수들은 바로 왕의 명령에 의해서 놓아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들은 즉시로 요셉을 놓아주었습니다. 그 이유가 와우접속사와 히필, 사역능동을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자신들이 스스로 요셉을 놓아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무덤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 삼일 만에 무덤에서 부활하셨습니다.
요20:9 (그들은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안식 후 첫날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이 묻힌 무덤에 갔습니다. 무덤의 돌이 옮겨진 것을 보고 베드로에게 알렸습니다. 제자들이 이 소식을 듣고 무덤에 갔는데 예수님은 없고 세마포만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을 감쌌던 세마포와 머리를 쌌던 수건은 그대로 있고 예수님은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이것을 보고 믿었지만 그들은 성경에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했습니다.
요셉은 술 관원장의 꿈을 해석해 주고 만 이년이 지난 후에 감옥에서 나오게 됩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운명하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신 사건을 예표 해 주고 있습니다. 그럼 이것을 우리들에게 적용하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의 삶에 요셉처럼 억울하게 고통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주변에 잘 아는 사람들로부터 시기를 당하거나 괴롭힘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면 때가 되매 이런 지옥과 같은 고통에서 부활시켜 주십니다. 참고 인내했더니 하나님의 때에 길을 열어 주셔서 부활의 삶을 살게 해 주십니다. 현재 마음이 지옥과 같은 고통의 마음입니까? 괴로움과 고통의 연속이라도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면 때가 되매 고통에서 해방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생기기를 축복합니다.
‘요셉이 곧 수염을 깎고’ (גלח갈라흐 1548 와우접속사. 동사, 피엘, 미완료, 남성, 3인칭, 단수) 깎다, 면도하다, 라는 뜻입니다. 요셉은 감옥에 있으면서 몸단장을 제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바로 왕을 만나기 위해서는 수염을 깎아야 합니다. 깨끗하게 면도를 하고 왕 앞에 나가야 합니다. 요셉은 즉시로 몸단장을 위해서 수염을 깎았습니다. 하나도 남기지 않고 깨끗하게 면도하여 감옥에 있을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그 이유가 와우접속사와 피엘, 강조능동을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전에는 죄인의 신분이었지만 지금은 감옥에서 나온 해방자의 모습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도 요셉처럼 무덤에 있다가 성부 하나님께서 부활시켜 주셔서 전혀 새로운 몸으로 부활되셨습니다.
행10:40-41 하나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살리사 나타내시되 모든 백성에게 하신 것이 아니요 오직 미리 택하신 증인 곧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후 그를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에게 하신 것이라
예수 그리스도는 사흘 만에 하나님이 다시 살리셨습니다. 또한 부활하신 주님을 나타내셨는데 모든 백성에게 하지 않으시고 미리 택하신 증인 곧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후 그를 모시고 음식을 먹은 자들에게 나타내셨습니다. 이것을 볼 때에 부활의 주님은 아무나 보는 것이 아니며 믿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주님의 부활을 통해서 우리들도 마지막 날에 부활의 모습을 소망해 볼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썩을 겉 사람이 아니라 영원히 썩지 않을 속 사람이 부활되어 영원히 주님과 함께 살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생활의 부활이 있어야 합니다. 나의 마음이 주님 안에서 평안함을 찾는 부활이 있어야 합니다.
‘갈아입고’ (חלף할라프 2498 와우접속사. 동사, 피엘, 미완료, 남성, 3인칭, 단수) 변화시키다, 바꾸다, 갈아입다, 라는 뜻입니다. 요셉은 감옥에서 입었던 옷을 모두 던져버리고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었습니다. 요셉은 더 이상 죄인의 신분이 아닌 의인의 신분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전에는 요셉이 감옥에서 고통의 삶을 살았지만 지금은 옷을 갈아입는 순간 인생이 의인의 삶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요셉은 자신이 입고 있었던 더럽고 추악한 옷을 완전하게 벗어버렸습니다. 하나도 남지 않고 모조리 벗어버리고 준비된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게 됨으로 전과는 전혀 몰라보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가 피엘, 강조 능동을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은 어떤 모습을 의미할까요?
막9:2-3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더라
예수님이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변화 산에 올라가셨을 때에 제자들 앞에서 예수님의 몸이 변형되셨습니다. 그 옷이 광채가 나고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희게 변하셨습니다. 요셉이 옷을 갈아입은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변화 산에서 자신의 몸이 변형된 것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야차르의 몸을 가지고 있었지만 변화 산에서는 바라의 몸으로 부활될 것을 제자들에게 미리 보여주셨습니다. 이것을 보면서 우리들도 예수님과 같이 야차르의 몸이 썩고 바라의 몸이 부활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고전15:44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 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우리는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게 됩니다. 육의 몸이 있으니 또한 영의 몸도 있습니다. 야차르의 육의 몸은 언젠가는 썩게 됩니다. 하지만 바라의 신령한 몸은 썩지 않습니다. 나의 신령한 몸인 영의 몸은 주님과 영원히 살게 됩니다. 우리는 요셉이 억울하게 감옥에 들어갔다가 고통을 당하는 시간이 있었지만 하나님의 때가 되매 다시 회복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요셉의 삶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도 알았습니다. 또한 우리들의 삶에도 요셉과 같은 부활의 생활이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날에 영화의 부활이 있지만 내가 이 세상에서 주님을 믿고 구원을 받으면 추악하고 더러운 원죄의 옷을 벗어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깨끗한 십자가의 의의 옷을 입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전에는 죄인의 신분이었지만 부활됨으로 이제는 의인의 신분이 되었습니다. 요셉은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어 애굽을 통치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주님과 함께 부활되어 천년 동안 왕 노릇하면서 통치하게 됩니다. 이 시간 주님이 나의 삶에 개입하심으로 부활의 삶이 되었으니 이제부터 누리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구약성경 원어 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요셉 설교문] “술 맡은 관원장과 떡 맡은 관원장이 감옥에 갇힘”(창40:1-8) (0) | 2020.07.06 |
---|---|
[여호와의 이름] “엘 로이(אל ראי)”(창16:13) (0) | 2020.07.06 |
[여호와의 이름] “엘 샤다이(אל שדי)”(창17:1) (0) | 2020.07.06 |
[여호와의 이름] 여호와 이레(יהוה יראה)(창22:13-14) (0) | 2020.07.06 |
[부활절 설교문] “에녹의 부활”(창5:21-24) (0) | 2020.07.05 |
[창세기 1장 축복 설교문] “샤라츠와 라바의 축복”(창1:20; 28) (0) | 2020.07.05 |
[소돔과 고모라 설교문] 의인 10명이 없는 시대(창 18:22-33) (0) | 2020.07.04 |
[벧엘 설교문] “첫 언약에서 새 언약으로”(창35:9-15) (0) | 2020.07.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