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 원어 설교

[열왕기하 13장 엘리사 설교문] “엘리사의 죽음과 그를 통한 부활”(왕하13:20-21)

체데크 2020. 6. 24. 09:21
반응형

샬롬! 오늘도 복음 빵집에 오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오늘은 엘리사가 죽었는데 시체가 엘리사의 뼈에 닿았을 때 살아난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적 의미를 알아보겠습니다.

 

“엘리사의 죽음과 그를 통한 부활”(왕하13:20-21)

 

명제: 엘리사의 시체를 통하여 살아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부활의 예표를 나타낸다.

목적: 구원받은 자들도 부활하신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영화의 몸을 소망한다.

 

엘리사는 엘리야 선지자의 뒤를 이어 북 이스라엘 땅에서 하나님의 사역을 담당했던 사람입니다. 많은 기적과 이적을 나타낸 사람이며 갑절의 영감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린 사람입니다. 그런데 엘리사도 나이가 들고 병이 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들도 때가 되매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었기 때문에 이 땅에는 미련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도 이 세상을 살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월이 흐르면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 앞에 갈 때가 있습니다. 그때에 이 세상에 미련을 갖지 않을 만큼 하나님 앞에 쓰임 받다가 하나님이 오라고 하면 우리는 육체의 옷을 미련 없이 벗어던지고 새로운 몸으로 갈아입는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는 엘리사의 죽음을 통하여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부활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죽은 자를 엘리사의 시체에 닿게 했을 때에 생명이 들어가서 살아나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도 마지막 날에 이와 같은 부활의 역사가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이 말씀을 통하여 부활에 대한 소망이 없는 자들은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오직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신앙생활하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럼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하여 깨달을 수 있는 영적 진리가 무엇일까요?

 

첫째, 엘리사가 죽고 해가 바뀌었으며 도적떼들이 왔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왕하13:20 엘리사가 죽으니 그를 장사하였고 해가 바뀌매 모압 도적 떼들이 그 땅에 온지라

 

엘리사가 죽어서 사람들은 엘리사의 장례를 치르기 위하여 묘실을 만들어 장사 지냈습니다. 이 장사가 끝나자마자 해가 바뀌었고 그때부터 모압의 도적 떼들이 이스라엘 땅에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엘리사가 살아있을 때에는 모압의 도적 떼들이 들어오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우기와 건기로 기후가 나누어집니다. 해가 바뀐 때는 우기의 막바지 3월과 4월에 해당하는 때입니다. 이때는 보리 수확이 한창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기쁨의 역사가 있을 때입니다. 그런데 모압의 도적 떼들 때문에 자신들이 수확한 곡식들을 강제로 강탈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엘리사가 있을 때에는 이런 자들이 쳐들어오지 못했는데 엘리사가 죽고 나니 이런 자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괴롭히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가 이 구절을 통하여 깨달을 수 있는 영적 의미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있을 때에는 금식할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오는데 이때에는 금식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엘리사’ (אלישע엘리샤 477) 엘리사, 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אל엘 410) 하나님, 이라는 뜻과 (קום쿰 6965) 일어나다, 세우다, 라는 뜻의 합성어입니다. 엘리사는 이미 하나님께서 죽음에서 일으킬 자로 세움을 받은 사람입니다. 엘리사는 육적인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새로운 영화의 삶을 살 것이 예언된 자입니다. 그래서 엘리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 된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끝난 것이 아니라 삼일 만에 하나님께서 죽음에서 일으켜 세워 부활시켜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엘리사의 시체에 닿은 죽은 자가 살아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죽은 자들이 부활되는 것입니다.

 

엘리사가 북이스라엘에 있을 때에는 모압의 도적 떼들이 쳐들어오지 못했기 때문에 평안의 삶을 살았고 금식할 일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엘리사가 죽고 난 후에는 도적들이 쳐들어와 먹을 것을 빼앗아 갔기 때문에 금식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마9:14-15 그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찾아와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들과 바리새인들은 오늘이 금식하는 날이기 때문에 금식을 하고 있는데 왜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을 하지 않습니까? 라는 질문입니다. 유대인들은 금식할 날을 정해놓고 금식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이 금식을 하지 않으니 궁금했던 것이며 잘못된 것이라고 따지는 것입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는 슬퍼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먹을 양식이 풍성한데 왜 금식을 하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때에 금식을 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게 되면 금식할 날이 된다는 것입니다.

 

‘빼앗길 날이’ (לקח라카흐 3947) 빼앗다, 데려가다, 끌어내다, 보복하다, 라는 뜻입니다. 현재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기 때문에 보호를 받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없어질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이 날이 오면 현재 가지고 있는 모든 권세를 빼앗기고 먹을 양식도 강제로 강탈당할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도록 죄악으로 끌어내어 예수님을 부인하게 만들고 신앙을 포기하게 만드는 날이 온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날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날입니다. 이때가 되니 세상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복수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모압의 백성들이 엘리사가 죽자 복수하려고 양식을 빼앗기 위해 쳐들어 온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날은 반드시 우리에게 찾아오는데 이 날은 피할 수 없는 날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핍박을 받아야 할 날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어떠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까? 핍박의 날이 반드시 찾아오면 예수 그리스도를 버리라고 모압과 같은 탄압 자들이 우리를 괴롭힐 것입니다. 이럴 때에 우리는 끝까지 신앙과 믿음을 지키면서 예수그리스도를 따라가야 합니다. 금식은 아무 때나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핍박이 왔을 때에 금식하는 것입니다.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사라졌을 때에 금식을 통하여 믿음을 고취시키는 것입니다. 나의 세상적인 욕심이나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하나님 앞에 단식 농성하면서 이 문제를 풀어달라고 금식하는 것이 아니라 신랑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잃어버렸을 때에 금식하는 것입니다. 현재 내가 주님과 함께 있고 혼인집에 들어왔다면 열심히 먹으십시오. 왜 금식하면서 굶주리고 있습니까? 주님은 풍성한 식탁을 차려주셨습니다. 이제는 열심히 드시면서 열심히 뛰십시오. 전쟁에 나간 자들을 굶주려 놓으니 어떻게 적들과 싸울 수 있겠습니까?

 

모압의 도적들이 쳐들어온 절기를 묵상해 보면 유월절과 무교절과 초실절이 있는 계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유월절에 죽으시고 이때부터는 유교병을 먹지 못합니다. 무교병을 먹어야 합니다. 고난의 떡을 먹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초실절도 있습니다. 이 절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상징하는 절기입니다. 그렇다면 신랑을 잃은 자들이 예수그리스도의 고난의 떡을 먹으면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그리스도를 기다려야 합니다.

 

‘해가 바뀌매’ (שנה샤나 8141) 연한, 연수, 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שנה샤나 8138) 옮기다, 갈아입다, 변하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해가 바뀌었다는 것은 시간이 흘러 새로운 해가 왔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엘리사가 죽고 난 후에 해가 바뀌었습니다. 이 해가 바뀌었다는 것은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가 끝나고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바로 주님께서는 새로운 부활의 몸으로 변하신 것입니다. 새로운 옷을 갈아입은 것입니다. 육체의 몸으로는 죽음이라는 한계를 뛰어넘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영화로운 몸은 죽음이라는 한계를 뛰어넘어버린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으로 살게 되는 몸이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도 해가 바뀌었다는 것은 영원한 죽음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바뀔 것을 예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새로운 부활의 옷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고후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우리도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바뀐 것입니다. 이전의 썩어질 몸은 사라졌고 새로운 영화의 몸이 된 것입니다. 썩어질 몸으로 있으면 죽음의 한계를 넘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통하여 영화의 몸을 입었으니 죽음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직도 육체의 정욕에 매여 있는 자들은 모압의 도적떼들에게 양식을 강탈당하면서 괴로운 인생을 살게 되지만 반면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부활의 몸으로 새롭게 주님과 살면서 영원한 생수와 떡을 마시고 먹게 되는 것입니다. 영원한 영적 금식은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럼 이제부터 우리가 모압과 같은 사탄의 세력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끝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셔서 우리와 함께 계시고 영원히 떠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주님과 함께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둘째, 죽은 자가 엘리사의 시체와 만났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왕하13:21 마침 사람을 장사하는 자들이 그 도적 떼를 보고 그의 시체를 엘리사의 묘실에 들이던지매 시체가 엘리사의 뼈에 닿자 곧 회생하여 일어섰더라

 

사람들이 죽은 자를 장사하기 위하여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모압의 도적 떼들이 들이닥치자 이 사람들은 너무나 놀라서 죽은 사람의 시체를 엘리사의 묘실에 들이 던지고 있습니다. 그랬더니 죽은 시체가 엘리사의 뼈에 닿으니 곧 회생하여 일어섰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통하여 영적인 진리를 깨달아야 합니다. 엘리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 되는 인물입니다. 그런데 죽었던 자가 엘리사의 뼈에 닿으니 살아났다는 것은 부활을 상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무나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엘리사의 뼈에 닿은 자가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죽었다는 것을 고백하는 자가 부활되어 살아났다는 것을 보여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지도 않는데 무조건 살아나는 것은 없습니다.

 

‘데려가다’ (ילך얄라크 3212) 따르다, 행하다, 끌어가다, 동행하다, 라는 뜻입니다. 우리 성경은 죽은 자들을 장사하기 위하여 갔던 자들이 갑자기 나타난 모압의 도적 떼들을 보고 놀라서 시체를 던져버리고 도망간 것처럼 보여 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성경에는 번역이 되어 있지 않은 단어인 (ילך얄라크)라는 단어를 보면 단서를 찾을 수가 있습니다. 이 단어는 목적을 향해 갈 때에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창12:4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가나안 땅으로 가라고 명령하셨을 때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습니다. 이때에 말씀을 따라갔다는 단어가 (ילך얄라크)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들은 목적도 없이 시체를 장사 지내려고 온 것이 아니라 엘리사의 묘에 목적을 가지고 시체를 가지고 온 것입니다. 엘리사의 기적을 이미 보았고 알고 있기 때문에 죽은 시체도 살아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온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장례 문화는 땅에 묻지만 관에 넣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땅에 묻어 두었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썩으면 뼈가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엘리사의 뼈에 의도적으로 시체를 둔 것입니다. 이것은 부활할 것을 소망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것을 통하여 깨달을 수 있는 것은 부활은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와 접촉이 있어야 합니다. 엘리사의 뼈에 닿았을 때에 살아난 것처럼 우리들도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고백하고 그분의 뜻대로 순종하여 나갈 때에 부활의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현재 주님이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을 믿음으로 고백하고 있습니까? 이런 고백이 없다면 나는 절대 부활되지 않습니다.

 

고전15:42-44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죽은 자의 부활은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욕된 육체로 심고 영광스러운 몸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약한 질병의 몸으로 심고 육체의 질병으로부터 해방되는 몸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썩어질 육체의 몸으로 심었다면 영원히 사는 신령한 몸으로 부활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구세주라는 것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죽은 시체가 엘리사의 뼈에 닿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면 아무리 영원히 죽었던 자라고 하더라도 주님의 생명이 들어가서 영원히 사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부활은 힘들거나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나의 힘으로 살아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역사이기 때문에 쉬운 것입니다. 내가 주님 안에서 살아난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라는 것을 깨달으면 됩니다. 내가 잘나서 살아난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죽은 시체는 자신 스스로 엘리사의 묘실에 오지 못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현재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고 죽어 있습니다. 이런 자들은 스스로 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자들에게 생명을 불어넣어주기 위해서는 먼저 살아난 우리가 주님께로 인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전도입니다. 전도를 통하여 예수그리스도 앞에 오게 한 자들은 그다음에 하나님의 역사 가운데 주님의 생명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2020년도에는 죽었던 가정이 살아나고 죽었던 영혼이 살아나고 가정의 경제가 살아나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역사가 우리 안에 있기를 소망해야 합니다.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부활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주님을 떠나려고 하니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엘리사의 뼈에 접촉되어 있어야 하는 것처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 안에 있어야 만이 생명의 부활도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의 죽음을 가져가셨기 때문입니다. 그럼 2020년도에는 오직 부활하신 주님의 생명이 저와 여러분들과 가정과 사업 위에 함께 하시는 축복이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엘리사 설교] “쇠도끼를 물에서 떠오르게 한 기적”(왕하6:1-7)

샬롬! 오늘도 복음 빵집에 오신 여러분 환영합니다. 오늘은 엘리사의 기적 중에서 쇠도끼를 물에서 떠오르게 한 기적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적인 의미를 깨달아 보겠습니다. “쇠도끼를 물�

cdk153.tistory.com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