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 원어 설교

[성경 문화적 배경] 요셉이 입었던 채색옷의 의미가 무엇일까?

체데크 2020. 5. 6.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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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 오늘도 복음 빵집에 오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오늘은 성경의 문화적 배경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합니다. 성경과 지금 시대는 사천 년 이상의 문화적 갭이 있습니다. 이 갭을 현재 문화로 성경을 이해하려고 하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런 문화적 배경을 통해서 성경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1. 요셉은 왜 형들에게 미움을 받았을까?

 

37:3-4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므로 그를 위하여 채색 옷을 지었더니 그의 형들이 아버지가 형들보다 그를 더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편안하게 말할 수 없었더라

 

우리가 알기로는 채색 옷을 입혀 주었기 때문에 미움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채색 옷을 KJV 영어성경에는 ‘a coat of many colors’로 번역하고 있다. 이것은 히브리어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채색 옷에 대한 히브리어의 원어에는 (כתנת פסים케토네트 파씸)이다.

 

채색 옷은 여러 색깔을 가진 알록달록한 채색 옷과는 관련이 없다. 이것은 헬라어를 영어로 영어를 한국어로 옮겨지면서 생겨난 오류이다. 성서시대의 유대인들은 5가지의 옷을 입었다. 속옷, 겉옷, 허리띠, 터번(모자), 샌들(신발)이 그것이다. 5가지 옷 중에 속살에 가장 가까운 옷이 속옷인데 이를 히브리어로 כתנת פסים케토네트라고 한다. 지금의 속옷 개념과는 아주 다르다. 유대인들은 속옷을 입고 밭일을 했다. 속옷이 완벽한 외출복은 아니지만 밖에서 편하게 일을 할 수 있었다. 속옷은 발목까지 내려올 정도로 길었지만 소매가 짧은 것이 특징이다.

보통 사람들이 짧은 소매의 속옷을 입었다면 손바닥까지 덮는 긴소매의 속옷은 특별한 계층 사람들이 입었다. 당시에는 최상류층인 왕족이 입는 특별한 옷이었다.

 

야곱은 요셉에게 채색 옷을 입혔는데 이것은 바로 왕족들이 입는 소매가 긴 속옷을 입혔기 때문에 형제들에게 미움을 받았다. 요셉은 오실 예수님의 표상이다. 아마도 야곱은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 속에서 요셉에게 왕들만 입을 수 있는 소매가 긴 속옷을 입혔으리라!

 

2. 로마 군인들은 왜 예수님의 속옷을 찢지 않았을까?

 

19:23-24 군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군인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그들이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군인들은 이런 일을 하고

 

성경시대 남녀의 옷은 다섯 가지로 나누어지는데 본문은 예수님의 옷 중 네 가지는 이미 군인들이 하나씩 나눠 가졌고 마지막 남은 속옷을 차지하기 위해 제비 뽑는 장면이 나온다.

 

22:18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로마 군인들은 왜 예수님의 속옷을 찢지 않고 제비뽑기를 한 것일까? 그리고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속옷의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통으로 짠 속옷과 로마 군인들이 예수님의 속옷을 찢지 않은 것은 어떤 특별한 관계가 있는 것일까?

 

유대인의 사상에서는 옷감 짜는 기술은 그 기원이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었고 꿈과 계시를 통해 태초부터 전해 내려온 것으로 여겨진다. 성막 기술자인 브살렐과 오홀리압은 성막의 천을 짜는 기술을 포함해 성막의 기명을 다루는 기술을 하나님의 신이 충만한 가운데 받았다.(출35:30-35)

 

옷감을 짤 때에 씨줄(수직의 실)과 날줄(수평의 실)로 불리는 두 줄의 실이 만나 옷감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고대인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작업이었다. ‘날줄은 남성을 상징하고 씨줄은 여성을 상징하는데 남녀가 연합해 새 생명을 잉태하듯이 날줄과 씨줄의 실이 서로 만나 옷감을 탄생시키는 것이 고대인들의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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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인 속옷은 씨줄과 날줄로 불리는 두 줄의 실로 짠 옷감으로 만들어졌는데 두 개의 옷감을 붙여 끝에 솔기를 대어 꿰매면 완성되었다. 하지만 호지 않고’(솔기를 대지 않고) 통으로 짠 예수님의 속옷은 분명 특별한 옷이었다. 이것은 날줄로만 짜서 만든 한 개의 옷감으로 된 옷으로 실밥을 뜯어서 계속 풀다 보면 기다란 한 개의 실로 풀렸을 것이다.

 

이처럼 씨줄이 없이 끝없는 날줄로만 만들어진 옷은 고대의 여러 문헌에서 성스러운 것으로 인식되었다. 즉 창조주와 연결되는 족보, 연속성, 개인의 족보가 그러한 연속성 가운데 영원히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면서 만들어진 특별한 옷이었다.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대제사장의 속옷은 호지 않고 통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런 의미에서 끝없는 날실로 만들어진 옷을 강제로 찢는 것은 신에 대한 정면 도전으로 인식되었다. 그래서 로마 군인들도 함부로 이 옷을 찢을 수 없었다.

 

로마 군인들은 십자가형을 집행하면 죄수의 옷을 취할 수 있었다. 그것을 내다 팔아 돈을 받게 된다. 이미 4개의 옷을 로마 군인들이 가졌고 마지막 속옷을 제비 뽑아 가졌다. 십자가형을 당하시는 예수님은 나체의 몸으로 십자가에 매달렸을 가능성이 높다. 영화를 보면 하나의 실오라기를 걸치고 나오지만 전혀 옷을 입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3. 심판처럼 급박한 때 농부는 왜 겉옷을 가지러 집에 들어갈까?

 

마24:18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

 

성경시대 사람들은 대부분이 농부로 일했는데 농부들은 속옷만 입고 편하게 농사일을 했다. 예수님은 심판의 날에 밭에서 일하는 자들은 겉옷을 가지러 집 안으로 들어가지 말라고 주의를 주셨다. 겉옷이 무슨 귀중품이라도 된다고 그 급박한 때에 농부들은 겉옷을 가지러 집안에 들어간다는 것일까?

 

한글 성경에 겉옷으로 번역된 단어는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כסות케쑤트), (שמלה시믈라), (מעיל메일), (אדרת아데레트) 등 다양한 단어로 등장한다. 모두 몸의 가장 바깥에 걸치고, 덮는 옷이라는 뜻이 있다. 옷을 입는다고 표현하는데 겉옷의 경우는 덮는다고 표현하는 게 더 어울린다.

 

성경시대의 겉옷은 덮는 용도로 많이 사용되었다. 겉옷이 옷과 이불의 두 가지 용도로 사용되었음을 보여 준다. 집 근처에서 일을 할 때에는 속옷만 입고 다녔지만, 멀리 여행을 할 때에는 겉옷을 걸쳤다. 겉옷은 낮에는 더위를 막아주고, 밤에는 추위를 막아 주었다.

 

포도주를 마시고 나체 바람으로 잠을 자던 노아의 하체를 셈과 야벳이 옷으로 덮어 주었는데 이 옷이 겉옷인 (שמלה시믈라)이다.(창9:23)

 

시어머니 나오미의 지시대로 룻은 보아스가 덮고 있는 겉옷 속으로 들어갔다. 자다가 함께 누워 있는 룻을 발견한 보아스는 화들짝 놀랐다. 이때 룻은 나를 당신의 옷자락으로 덮으소서라고 간청했다.(룻3:9) ‘옷자락으로 덮는다는 것은 겉옷으로 덮는 것을 가리키는데 이것은 겉옷과 관련된 독특한 표현이다. 남자의 펼쳐진 겉옷 속으로 여인이 들어간다는 것은 그 남자의 보호 아래 들어감을 의미한다.

겉옷은 세마포로 만드는 속옷과 달리 주로 양털로 만들었다. 소매가 긴 속옷과 달리 겉옷은 소매가 없거나 있어도 무척 짧았다. 성서시대 농부들은 대부분 겉옷이 한 벌밖에 없었다. 아무리 가난한 사람도 최후의 수단으로 겉옷을 전당 잡혀 돈을 빌릴 수 있었다.

 

이것은 겉옷 자체가 특별히 비싼 옷감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 아니라 겉옷의 네 귀퉁이에 달린 때문에 생긴 풍습이다. 히브리어로 (ציצית찌찌트)라 불리는 ‘술’은 기다란 실로 번역될 수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겉옷의 옷단 귀에 술을 달아 하나님의 계명을 좇는 하나님의 백성임을 나타냈다.(민15:38-40)

 

마24:18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

 

예수님은 이렇게 급박하게 심판이 일어날 때에 전 재산과 같은 하나밖에 없는 겉옷을 가지러 집으로 가지 말라는 것이다. 마지막 심판이 이처럼 급박하게 임하기 때문이다. 우리도 마지막 심판의 때가 오면 내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에 욕심을 버리고 오직 주님을 따라야 한다.

 

4. 혈루증을 앓던 여인은 왜 예수님의 겉옷에 손을 댔을까?

 

마9:20-21 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지니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

 

유대인들에게 겉옷이 특별하고 소중한 이유는 겉옷의 네 귀에 달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겉옷을 지을 때 술을 달라고 지시하셨다. 이것은 술을 보면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계명 안에서 살아가는 계명의 아들임을 기억하게 하기 위해서였다.(민15:38-40)

 

[성경 문화 배경 설교말씀] 다윗은 왜 사울의 겉옷 자락을 찢고 마음에 찔렸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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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자신들의 종교적 열심과 경건성을 드러내는 수단으로 옷단 술을 이용했다. 술을 길게 늘어뜨림으로써 자신이 하나님께 충성하고 계명에 남다른 열심을 가지고 순종하고 있음을 보이려고 했다. ‘경문은 기도할 때 이마에 차는 성구함이다.(마23:5)

 

때로는 술을 너무 길게 늘어뜨려 땅에 질질 끌려서 뒤에 오는 사람에게 밟히는 경우도 있었다. 서기관들이 긴 옷을 입고 다닌다는 것은 바로 이 옷단 술을 길게 늘어뜨리고 다닌다는 말이다.(눅20:46)

 

예수님은 기도할 때 경문을 차고 옷단 술을 착용하는 것을 문제 삼지 않았다. 하지만 예수님이 지적하신 것은 자신의 종교적 열심을 드러내려는 수단으로 경문을 남보다 크게 하고 술을 길게 늘어뜨리는 바리새인들의 외식적인 행동을 책망하셨다.

 

예수님께서도 기도할 때 경문을 차고 술이 달려 있는 겉옷을 입으셨을 것이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을 보고 바로 유대인인 줄 알아보았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복장이 유대인의 복장과 같았기 때문이다.(요4:9)

 

열 두해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은 왜 예수님의 겉옷에 손을 댔을까? 여인은 예수님의 겉옷을 아무렇게나 만진 것이 아니다. 바로 겉옷의 네 귀퉁이에 달린 옷단 술을 만진 것이다. 예수님 당시 1세기의 랍비 문헌에 이런 말이 있다. “온전하지 않은 자가 온전한 자의 옷단 술에 손을 대면 온전해진다.” 이러한 1세기 유대인들의 믿음은 혈루증 여인뿐 아니라, 다른 무리의 행동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막6:56)

 

옷자락에서 능력이 나온다는 것은 유대인에게만 있는 독특한 문화다. 이 문화를 푸는 가장 결정적인 성경말씀은 말라기 4:2절이다.

 

말4:2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본문에 치료하는 광선으로 번역된 단어가 히브리어 원문에는 (כנף카나프)로 되어 있다. 이 뜻은 광선이 아니라 옷자락또는 날개인데 예수님 당시에는 위대한 랍비와 메시아의 옷자락에서는 치료하는 능력이 나온다고 믿었다. 그래서 많은 병자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만 대어도 모든 병이 낫을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겉옷에 달린 옷단 술은 그 사람이 하나님과 맺고 있는 관계성을 의미하는 영적 상징물이다. 마치 오늘날 십자가가 마귀를 쫓는다고 믿는 것처럼, 성경시대 유대인들은 겉옷의 옷단 술이 영적인 에너지와 힘이 있다고 믿었다. 랍비 문헌에서 말하는 온전한 자는 하나님과 특별하고도 친밀한 영적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이다. 즉 하나님과 직접 통하는 사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아무런 장애가 없는 의인을 가리킨다. 이분이 바로 예수님이다.

 

하지만 여인이 예수님께 나아오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장애가 몇 가지 있었다.

 

첫째, 자신을 부정한 자로 보는 뭇사람들의 시선이었다. 율법은 여인이 생리 기간 동안 쏟아내는 피를 부정한 것으로 선언하고 있다.(레15:19) 혈루증 여인과 같이 정상적인 생리 기간이 아닌데도 피의 유출이 있으면 유출 기간 내내 부정하게 인식되었다. 혈루증 여인은 완치되기까지는 사람들과 접촉을 피해 격리된 상태로 살아야 한다.(레15:25)

 

둘째, 자신만 부정한 것이 아니라 자신과 접촉하는 모든 사람을 부정하게 만들 수 있다는 죄의식이었다. 피의 유출이 있는 여인은 자신과 닿는 물건과 사람을 모두 부정하게 만들었다.(레15:26-27)

 

혈루증 여인이 무리에 둘러싸인 예수님의 겉옷에 손을 대기 위해서는 먼저 무리를 뚫고 나와야 했고 그렇게 되면 어쩔 수 없이 많은 사람을 부정하게 해야 했다. 만약에 무리를 밀치고 몰래 예수님의 겉옷에 손을 댔다고 해도 온전하신 예수님도 여인 때문에 부정해질 수 있었다. 여인은 이런 장애물들을 믿음으로 극복하고 예수님 한 분만 바라보고 나왔다. 이 믿음으로 여인은 혈루의 근원이 마른 것을 체험했다. 문제는 조용히 몰래 현장을 빠져나가려던 여인은 무리에 둘러싸여 이리 밀치고 저리 밀침을 당하시던 예수님이 아신 것이다.(막5:30)

 

혈루증 여인은 결국 무리 앞에 자신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부정한 여인이라는 수치심과 많은 사람을 부정하게 했다는 죄의식을 가지고 군중 앞에 노출되어야 할 순간이 온 것이다. 여인이 자신을 드러내는 순간 모든 군중의 눈길이 예수님의 입에 쏠렸다. 예수님은 과연 여인을 어떻게 벌할 것인가?

 

여인은 허락도 없이 함부로 옷단 술을 만짐으로써 예수님의 권위를 손상시켰다. 1세기 당시의 랍비 문헌은 남의 옷단 술을 함부로 만질 경우 합당한 처벌을 받도록 명시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옷단 술을 만지고도 처벌을 면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옷단 술의 소유자의 자녀들이었다.

 

 

자녀들은 아버지의 옷단 술을 만져도 아무런 법적인 저촉을 받지 않았다. 군중의 관심이 예수님께 쏠려 있을 때 예수님은 여인에게 놀라운 선포를 하셨다. 예수님이 여인을 딸이라고 부른 것이다.

 

막5: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예수님이 군중 앞에서 여인을 자신의 딸로 선포한 순간 여인은 더 이상 죄의식으로 고통스러워할 필요가 없었다. 옷단 술의 주인인 예수님이 여인을 자신의 딸로 선포함으로써 처벌의 대상에서 면제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여인의 혈루증을 치료한 데서 만족하지 않고 여인의 마음 가운데 있는 수치심과 죄의식까지 씻어 주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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