샬롬! 오늘도 복음 빵집에 오신 여러분 환영합니다. 오늘은 성경 문화 배경을 가지고 설교에 접목하거나 성경 문화를 이해할 수 있도록 알아보겠습니다. 지금 시대와 성경의 문화적 갭은 사천 년 이상 됩니다. 이 문화적 갭을 이해하지 않으면 성경이 이해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성경의 문화를 통해서 하나님의 의도를 더 잘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다윗은 왜 사울의 겉옷 자락을 찢고 마음에 찔렸을까?
삼상24:4-5 다윗의 사람들이 이르되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넘기리니 네 생각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이니이다 하니 다윗이 일어나서 사울의 겉옷 자락을 가만히 베니라 그리 한 후에 사울의 옷자락 벰으로 말미암아 다윗의 마음이 찔려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을 피해 유대 광야로 도망가면서 방랑자 신세가 되었다. 사무엘로부터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지만 다윗은 혹독한 광야 생활이 기다리고 있다. 사울은 하나님의 뜻이 다윗에게 있음을 알고 다윗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 사울 왕을 피해 다윗이 엔게디 광야의 한 동굴에서 추종자들과 함께 쉬고 있을 때 사울이 뒤를 보러 동굴 안으로 들어왔다.. 뒤를 본다는 것은 용변을 본다는 것이다.(삼상24:3)
다윗의 추종자들은 하나님께서 사울을 죽이는 좋은 기회라고 부추기기 시작했다. 만약 사울을 죽이면 광야에서의 모든 고난이 청산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윗은 사울의 겉옷 자락을 살짝 베는 것으로 만족했다. 추종자들은 사울을 죽일 줄로 알았지만, 겉옷을 잘라낸 것에 대해서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후에 다윗이 사울의 겉옷 자락을 벤 것만으로도 마음에 찔려 괴로워했다는 것이다. 다윗이 골리앗을 죽이고 수많은 전쟁터에서 많은 사람들을 죽인 그런 다윗이 사울의 겉옷을 자르고 괴로워했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럼 겉옷 자락을 베었다는 다윗의 행동 속에 숨은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성경시대에 남녀가 걸치는 다섯 가지 옷 중 겉옷은 그 네 귀에 달린 술 때문에 특별한 의미가 부여되었다. 네 귀에 달린 술은 그 사람의 종교적, 사회적 권위와 정체성을 대변했다. 술은 네 개가 한 쌍을 이루었는데, 그중 하나라도 손상을 입으면 네 개 전체를 바꾸어야 할 만큼 소중하게 여겼다.
다윗은 엔게디 동굴에 들어와 용변을 보는 사울에게 접근해 그의 겉옷 자락을 살짝 베었는데, 다름 아닌 겉옷에 달린 술이었을 것이다. 네 개의 술을 모두 자를 필요가 없다. 하나만 잘라도 이미 그 겉옷은 치명적인 손상을 입었기 때문이다. 다윗은 사울의 몸을 해치지 않았지만 술 하나를 자름으로 사울 왕의 권위에 치명적인 손상을 주었다. 다윗은 하나님이 기름 부음으로 세운 왕의 권위를 손상시킨 자신의 행위 때문에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괴로워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한 다윗은 왜 사울의 옷단 술을 자르는 행동을 했을까? 그것은 아마도 흥분한 추종자들 때문에 벌인 피치 못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당시 다윗의 추종자들은 도망자 다윗 편에 섬으로서 사울 왕의 공공의 적이 되었다. 다윗은 쉽지 않은 선택의 기로에 서 있음을 느꼈다. 자신이 직접 칼로 죽이자니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도전이고 그렇다고 뒤로 꽁무니를 빼자니 흥분한 추종자들이 직접 사울을 죽일 수도 있는 살벌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다윗은 결국 자기의 손으로 사울 왕을 죽일 수는 없지만 죽이는 것과 꼭 같은 상징적이고 충격적인 행위를 함으로써 흥분한 추종자들을 진정시켜야 했다. 바로 사울의 겉옷에 달린 옷단 술 하나를 싹둑 베어 버리는 일이었다.(삼상24:6-7)
다윗이 사울의 옷단 술을 자른 행위가 당시로서는 범상치 않은 특별한 의미가 있음은 사울의 반응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다윗은 자신이 숨어 있던 엔게디의 동굴에 들어와 용변을 보고 나간 사울에게 그의 겉옷 자락의 옷단 술 하나가 자신의 손에 있음을 알려 주었다.(삼상24:11)
사울은 자신의 겉옷에 달려 있어야 할 옷단 술 하나가 싹둑 잘려 다윗의 손에 있는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스라엘 왕의 모든 권위가 실린 옷단 술이 다윗의 손에 들려 있다는 것은 바로 다윗이 차기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임을 강력하게 암시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사울은 훗날 다윗이 왕이 되었을 때 자신과 후손들에게 선대해 줄 것을 간청했다.(삼상24:20-21)
세례 요한은 왜 예수님의 신발끈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했을까?
성경시대 이스라엘 사람들이 몸에 걸치던 다섯 가지 옷 가운데 마지막은 신발이다. 신발을 옷의 분류 속에 넣는 것이 이상할지 모르지만, 신발은 발을 보호하는 옷에 속했다. 샌들은 가죽이나 나무로 발바닥 밑창을 만들고 그 위에 신발 끈 혹은 신들 메로 불리는 끈으로 묶었다. 발을 보호하기 위해 밖에서는 샌들을 신고, 집안에서는 맨발로 다녔다. 하지만 종은 밖에서도 맨발로 다녔다.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둘째 아들은 유산을 두둑이 챙겨 아버지 품을 떠나 먼 나라로 갔지만 결국 모든 것을 탕진하고 종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이것은 그가 맨발로 돌아온 것에서 알 수 있다. 아버지는 아들의 신을 바꿔 준 것이 아니라 아들의 맨발에 신을 신겨 주었다.
눅15: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집 안으로 들어오고자 신을 벗을 때는 신발 끈을 풀어야 하는데, 이것 역시 당시에는 종들이 하던 일이다. 예수님 당시에 제자들은 신발 끈 푸는 것을 제외하고 종이 하던 것처럼, 스승을 절대적 존경심을 가지고 섬겼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종이 되어 신발 끈 풀어드리는 것도 기쁨으로 하겠으며, 이것도 자신에게는 과분한 직분이라고 고백했다. 세례요한은 자신을 철저하게 낮추고 오직 예수님만을 높였다.
스스로 자원하여 신발을 벗는 것은 슬픔과 조의를 표하는 행위였다. 다윗은 자신의 아들인 압살롬이 반역하여 예루살렘으로 쳐들어오자 서둘러 요단 동편으로 피신해야 했다. 이때 감람산을 넘어가며 신발을 벗고 맨발로 울면서 갔는데, 이는 아들의 반역으로 인한 슬픔을 나타내는 행위였다.(삼하15:30)
몸에서 가장 더러운 발과 그러한 발을 보호하는 신발은 더러움의 상징인데, 이러한 신발을 벗는 행위는 상대방에 대한 지극한 존경심을 나타내는 행위였다. 모세와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사자 앞에서 신발을 벗고 경의를 표했다.
출3:5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수5:15 여호와의 군대 대장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하니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하니라
신발이 때로는 소유권을 나타내는 상징으로도 사용된다. 나오미의 기업 무를 자는 자신의 권리를 보아스에게 팔면서 자신의 신발을 건넸다. 이는 자신에게 있는 소유권을 넘긴다는 의미였다.
룻4:7-8 옛적 이스라엘 중에는 모든 것을 무르거나 교환하는 일을 확정하기 위하여 사람이 그의 신을 벗어 그의 이웃에게 주더니 이것이 이스라엘 중에 증명하는 전례가 된지라 이에 그 기업 무를 자가 보아스에게 이르되 네가 너를 위하여 사라하고 그의 신을 벗는지라
제자들은 어떤 방법으로 고기를 잡았을까?
1) 후릿그물
후릿그물은 16명이 하나의 팀을 이루어 일사불란한 팀워크를 통해 물고기를 잡는 것이 특징이다. 8명의 선원은 해안에서 힘 있게 로프를 잡고 있고 나머지 8명의 선원은 배에 그물을 싣고 깊은 바다를 향해 노를 저어 간다. 그물 선이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지점에 이르면 배의 방향을 90도 돌려 300m에 이르는 그물이 해안과 평행이 되는 방향으로 계속 노를 저어 간다. 그물이 모두 펼쳐지면 배를 다시 90도 꺾어 해안 쪽으로 노를 저어 돌아온다. 해안에 돌아오면 배에 타고 있던 8명의 선원이 내리고 반대쪽 로프를 잡는다. 이렇게 양쪽에서 8명씩 로프를 잡은 선원들은 힘 있게 로프를 끌어당긴다.
해안을 따라 평행으로 펼쳐진 그물은 가운데 부위가 8m, 양쪽 끝은 4m 높이로 벽을 형성하면서 물고기를 해안 쪽으로 몰아오게 된다. 그물의 밑쪽은 돌 무게 추들을 달아 가라앉게 하고 위쪽은 코르크로 만든 부레를 달아 뜨게 해 자연스럽게 벽이 형성된다.
후릿그물은 물고기가 위험에 처하면 깊은 바다 쪽으로 향하는 성질을 이용해 300m의 그물 벽으로 물고기를 해안 쪽으로 쓸어오는 방법이다. 주전 3000년 전 이집트 묘비의 벽화에도 후릿그물이 그려져 있다. 후릿그물은 가장 오래된 형태의 그물로서 한 때 갈릴리 어부들에게 가장 중요한 도구였다. 비교적 큰 배를 이용하며 한 번 작업할 때 한 시간 정도 걸리므로 하루에 8번 정도 반복해서 하루 동안 상당한 양의 고기를 잡았다. 잡은 고기의 40퍼센트는 배와 그물 주인에게 돌아가고 나머지를 16명의 선원이 나눠 가졌다.
♣ 후릿그물이 등장하는 말씀
마13:47-48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그물에 가득하매 물 가로 끌어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버리느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 나라를 그물로 고기 잡는 것에 비유한다. 이 말씀에 나오는 그물은 헬라어로 ‘사게네’인데, 후릿그물을 가리킨다. 바다에 던지고, 해변으로 끌어오고, 그물 속에 각종 물고기가 잡히고, 어부들이 해변에 앉아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구별하는 모습 등은 전형적인 후릿그물 고기잡이와 정확하게 맞아떨어진다..
2) 투망 그물
직경 6~8m인 원형의 투망 그물은 어부가 혼자 해안가에서 물고기를 잡을 때 사용된다. 주전 2000년경 이집트 묘비의 벽화에 투망 그물이 그려진 것을 볼 때, 투망 그물은 후릿그물과 함께 고대부터 즐겨 사용되던 도구인 것 같다. 해안의 얕은 물가나 배 위에서 힘 있게 그물을 던지면 낙하산처럼 퍼지면서 물에 가라앉는데, 그물 끝에 무게추로 납을 달아 잘 가라앉도록 했다. 투망 그물을 사용할 때는 물고기 근처로 조용히 접근해서 던져야 한다. 그런 다음 힘껏 로프를 잡아당기면 가운데 열린 부분이 닫히면서 물고기가 그물 안에 갇히게 된다.
♣ 투망 그물이 등장하는 말씀
막1:16-18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곧 그물을 버려두고 따르니라
예수님은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들 중에서 초기 제자들을 부르셨다. 어부들의 도시인 가버나움에서 서쪽으로 2Km 떨어진 지점에 현지 지명으로 ‘타브하’로 알려진 지역이 있다.
‘타브하’는 7개의 샘을 뜻하는 아랍어인데 이 샘들에서 주변의 갈릴리 호수보다 따뜻한 물이 뿜어져 나오기 때문에 많은 물고기들이 몰려들었다. 가버나움의 어부들은 주로 ‘타브하’라 불리는 이곳에서 그물을 던지고 그물을 말리기도 했다. 예수님께 부름 받을 때 시몬과 안드레는 이곳에서 투망 그물을 던지며 물고기를 잡고 있었을 것이다.
현재 이곳에는 요한복음 21장의 배경이 되는 베드로 수위권 기념교회가 있는데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을 다시 만나 첫사랑을 회복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사19:8 어부들은 탄식하며 나일 강에 낚시를 던지는 자마다 슬퍼하며 물 위에 그물을 치는 자는 피곤할 것이며
3) 삼중자망
삼중자망은 고대부터 지금까지 사용되는 그물이다. 한 개의 그물 벽만 있는 다른 그물들과 달리 삼중자망은 3개의 그물 벽으로 이루어져 있다. 양쪽 바깥에 있는 그물은 간격이 12.5cm로 구멍이 큰 망사를 가지며 중간에 있는 그물은 그 간격이 3,5cm로 촘촘한 망사를 가지고 있다. 중간에 있는 그물은 바깥층의 그물보다 느슨하게 걸려 있어서 자유롭게 미끄러져 나가고 들어올 수 있다.
삼중자망을 사용하는 어부들은 저녁을 먹고 그물을 정리해서 천천히 노를 저어 깊은 바다로 갔다. 이때 배는 그물과 해안 사이에 위치하도록 잡는다. 어부들은 그물을 내린 뒤 노로 물을 튀기고 갑판에서 마구 뛰어 물고기들을 최대한 놀라게 만든다. 놀란 물고기들은 본능적으로 깊은 바다를 행해 질주하기 때문에 어부가 쳐놓은 삼중자망에 걸려들고 만다.
보통 5개의 묶음으로 이루어진 삼중자망은 밤새 그물을 내려놓고 50~100Kg의 어획고를 올렸다. 어부들은 밤새 깊은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아 갑판에 실어 새벽녘에 해안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해안에서 그물에 엉켜 있는 물고기들을 하나씩 떼어 내고 그물을 깨끗이 씻어 말렸다. 세마포로 만들어진 당시의 그물은 곧바로 씻어서 말리지 않으면 금방 부패했기 때문이다. 성경시대에는 세마포로 엮은 삼중자망을 사용했기 때문에 물고기가 어두워서 그물을 볼 수 없는 밤에만 사용할 수 있었다.
♣ 삼중자망이 등장하는 말씀
막1:19-20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그들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곧 부르시니 그 아버지 세베대를 품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
예수님이 베드로를 사람 낚는 어부로 부르신 사건을 다룬 누가복음의 본문도 삼중자망과 관련된 말씀이다. 베드로는 밤새 삼중자망을 쳐 놓고 고기를 잡으려 했지만, 그날따라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새벽부터 말씀을 들으러 나온 무리와 달리 베드로는 자신의 배를 예수님께 빌려 주었을 뿐 말씀 듣는 데는 관심이 없어 열심히 그물을 씻고 있었다.
눅5:2-3 호숫가에 배 두 척이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부활하신 예수님과 제자들이 다시 첫사랑을 회복하는 감동적인 장면인 요한복음 21장의 본문도 삼중자망과 관련된 말씀이다. 허탈한 심정으로 다시 갈릴리로 돌아와 어부 생활로 복귀한 제자들은 밤새 삼중자망을 쳐 놓았지만 역시 물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요21:3-4)
바울은 왜 믿음이 들음에서 나온다고 했을까?
롬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는 로마서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바울은 왜 믿음이 보는 것이 아니라 들음에서 난다고 했을까? ‘믿음이 들음에서 난다’는 로마서 말씀은 지금과는 다른 성경시대의 독특한 교육 방법에서 나온 표현이다. 성경 시대의 교육은 들음에서 시작되었는데 두 가지의 이유가 있었다.
첫째, 두루마리 성경은 아무나 소유할 수 없을 정도로 값이 비쌌다. 이스라엘은 지금처럼 마음만 먹으면 쉽게 성경을 구입해서 소유할 수 있는 세상이 아니었다. 양피지에 적힌 두루마리 성경은 11년 치 봉급을 모아야 간신히 살 수 있는 귀한 물건이었다. 두루마리 성경은 마을 회당에 있었고, 부자들 중에 말씀을 사모하는 사람들만 예외적으로 소유할 수 있었다. 이들이 하나님 말씀을 공부할 수 있는 길은 오로지 회당에 가서 말씀을 듣는 것뿐이었다.
둘째, 히브리어 된 두루마리 성경을 읽고 통역해 주는 서기관의 도움이 필요했다.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다가 페르시아 제국 때 고국으로 돌아온 귀환 민들은 이미 히브리어를 잊어버리고 페르시아 제국의 공용어인 아람어를 사용했다. 이 귀환 민들을 모아 놓고 히브리어 성경의 본문을 읽은 다음 백성들이 이해할 수 있는 아람어로 통역해 준 사람이 에스라다. 그런 의미에서 에스라는 최초의 서기관으로 불린다. 예수님 당시에 서기관은 두루마리 성경을 직접 필사하고 성경을 가장 권위 있게 해석할 수 있는 사람으로 인정되었다. 성경시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말씀을 들으려면 회당에 가서 서기관이 읽고 통역해 주는 말씀을 들어야 했다.
책과 필기도구가 없던 성경시대의 학생들이 공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스승이 들려주는 말씀을 통째로 암기하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스승의 입장에서 최고의 덕목은 인내심을 가지고 반복 수업을 하는 것이었다.
말씀을 묵상한다는 것은 현대 우리의 생각과 다르다. 혼자서 중얼거리며 암기하는 성경시대의 독특한 학습법을 이해해 묵상의 개념을 알 수 있다.
시1: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시19:14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시편 말씀에 나오는 ‘묵상한다’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הגה(하가)이고 묵상은 הגיון(히가욘)이다. 이것은 ‘중얼거리다’는 뜻인데 침묵 가운데 명상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주야로 중얼거리면서 말씀을 통째로 암기하는 사람이 시편 기자가 말하는 ‘복 있는 자’이다.
당시에는 이런 식으로 말씀 묵상을 했기 때문에 말씀 묵상을 하는 사람에게 가까이 가면 그가 어떤 말씀을 묵상하는지 알 수 있었다. 말씀을 소리 내어서 반복적으로 중얼거리는 것이 말씀 묵상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울지 말라고 위로하신 ‘예루살렘의 딸들’은 누구일까?
눅23:27-28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예수님이 인류의 죄를 구속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시는 장면은 복음서에서 가장 감명 깊다.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예수님을 수많은 무리가 가슴을 치고 슬피 울면서 뒤따랐다. 그런데 이때 예수님은 무리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예수님이 북쪽 갈릴리 지방에서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예루살렘을 향해 내려오실 때 육신의 어머니인 마리아를 비롯해 많은 갈릴리 출신의 여인들이 그 뒤를 따랐다.(막15:40-41) 그렇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예루살렘의 딸들”은 갈릴리에서부터 함께 내려온 여인들을 가리키는 것일까?
예수님이 골고다를 향하는 최후의 순간까지 자신을 따르던 사람들을 가리켜 말씀하신 “예루살렘의 딸들”과 관련된 독특한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벽 도시와 그 도시에 딸린 마을들’의 관계를 이해해야 한다.
성경시대의 마을은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와 그 주변에 불규칙적으로 늘어선 마을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를 히브리어로 ער(이르)라고 하고, 그 주변의 마을들, 즉 성벽 바깥에 불규칙적으로 늘어선 마을들을 כפר(카파르)라고 한다. 중앙에 있는 성벽 도시 ער(이르)를 모체로 해서 주변의 마을 כפר(카파르)들은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공동체로 묶인 하나의 단위였다. 성벽으로 둘러싸인 중앙의 도시와 그 주변에 불규칙하게 늘어선 성벽이 없는 시골마을들의 관계는 ‘어머니와 딸’의 관계와 같다. 그런 의미에서 중앙의 성벽 도시는 ‘마더 시티’라고 불렸는데 어머니로서 주변에 늘어선 시골마을들, 즉 딸들을 돌보는 역할을 수행했다.
중앙의 성벽 도시인 마더 시티에는 전체 주민의 10퍼센트에 해당하는 엘리트 계층만이 살았다. 성 안에 살던 엘리트들은 성주와 성주를 지키는 호위대, 성에 막대한 세금을 내는 부자 상인들, 성을 지키는 군인들, 성의 안위를 축복해 주는 제사장 그룹들이 속했다. 90퍼센트에 해당하는 대다수의 가난한 사람들은 마더 시티의 딸들로 불리는 성 밖에 살았다. 성 밖에 사는 가난한 사람들은 평상시에 마더 시티에 세금을 내고 전쟁이 일어나면 성 안으로 들어가 마더 시티의 보호를 받았다.
슥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메시아가 나귀를 타고 입성하실 것을 예언한 스가랴서도 새롭게 이해할 수 있다. 스가랴 선지자가 말하는 ‘시온의 딸’ 역시 시온으로 불리는 예루살렘 주변에 사는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예수님 당시에도 이스라엘의 수도로서 견고한 성벽으로 둘러싸인 예루살렘 주변에 위치한 가난한 마을들, 즉 벳바게와 베다니 등지의 가난한 마을 출신 사람들을 가리킨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슬퍼하는 이들을 향해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후 곧 예루살렘 성이 로마군의 포위 공격을 받아 멸망당할 것을 간접적으로 예언하신 것이다. 예루살렘 성 밖에 살고 있는 가난한 사람들, 즉 “예루살렘의 딸들”에게 재앙의 날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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