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 원어 설교

[성경 문화 배경] 예수님은 왜 ‘사흘 되던 날’에 가나 혼인 잔치에 가셨을까?

체데크 2020. 5. 15.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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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 오늘도 복음 빵집에 오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오늘은 성경 문화 풍습 중에 여러 가지가 있지만 예수님이 사흘 되던 날에 가나 혼인 잔치에 가셨는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예수님은 왜 ‘사흘 되던 날’에 가나 혼인 잔치에 가셨을까?

 

사복음서 중 요한복음에만 기록되어 있는 가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킨 첫 번째 기적은 많은 사람들에게 무척 친숙한 스토리다. 그런데 이 기적이 일어난 시간적 배경이 사흘 되던 날이 언급되어 있다.

 

요2:1 사흘째 되던 날 갈릴리 가나에 혼례가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여기서 사흘 되던 날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예수님은 왜 나흘 되던 날이 아니라 굳이 사흘 되던 날에 가나 혼인 잔치에 가셨을까? 예수님은 왜 사흘 되던 날에 가나 혼인 잔치에 가셨을까? 이에 대한 정답은 사흘 되던 날이 언제부터 사흘인가에 대한 대답 속에 숨겨 있다.

 

유대인들은 요일을 말할 때 절대로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과 같은 표현을 쓰지 않는다. 이것은 우상숭배와 관련된 표현이기 때문이다. 영어의 본고장인 영국 사람들의 주류는 앵글로 색슨족인데, 이들이 섬기던 다양한 신들의 이름이 영어의 요일 이름에 모두 반영되어 있다. 예를 들어 오딘, 토르, 프레야 등의 신 이름이 각각 수요일, 목요일, 금요일 등의 단어로 바뀐 것이다.

유대인들은 요일을 나타내는 단어로 첫째 날(일요일), 둘째 날(월요일), 셋째 날(화요일), 넷째 날(수요일)등의 표현을 쓴다. 이는 창세기 1장에 나오는 7일간의 천지 창조와 관련된 성서적 표현이다.

 

가나 혼인 잔치의 시간적 배경이 된 사흘 되던 날은 히브리어 표현으로 셋째 날 즉 화요일을 나타낸다. 그래서 사흘 되던 날은 언제부터 사흘일까? 에 대한 정답은 안식일(토요일)로부터 사흘이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사흘 되던 날 즉 셋째 날에 가나 혼인 잔치에 가셔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걸까? 유대인들에게 셋째 날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창세기 1장에 나오는 천지 창조의 기사에서 셋째 날은 광야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참으로 특별하고 복된 날이다. 이는 셋째 날 바다로 덮여 있던 지구에서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육지)이 드러난 날이기 때문이다.

 

광야의 백성 이스라엘 민족에게 온통 바닷물로 덮여 있던 지구에서 뭍이 드러난 사건은 굿 뉴스 중의 최고의 뉴스에 해당한다. 그래서 셋째 날 창조 기사를 보면 다른 날과 다리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표현이 두 번 등장한다.

 

1:9-13 하나님이 이르시되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 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셋째날이니라

 

바다에서 육지가 드러난 셋째 날은 고대 이스라엘 민족에게 최고의 기쁨이 있는 축복된 날의 대명사였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오늘날에도 두 배의 축복이 있는 셋째 날, 즉 화요일에 결혼식을 많이 한다.

 

예수님이 참석하신 가나 혼인 잔치도 화요일에 시작했을 것이다. 성경 시대의 결혼식은 보통 일주일 간 지속되기 때문에 포도주가 떨어진 날은 잔치가 끝나 가는 일곱 번째 날이 되기 쉽다. 결혼식 첫날부터 포도주가 떨어졌다면 주인으로서는 대단한 수치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포도주가 동이 나 물을 포도주로 바꾼 날은 아마도 잔치가 한창 무르익은 결혼식 일곱 번째 날일 가능성이 높다.

 

물고기를 많이 잡은 베드로는 왜 갑자기 죄인이라고 고백했을까?

눅5:6-8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그들이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베드로는 왜 물고기를 잡은 기쁨을 뒤로한 채 별안간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말했을까? 물고기를 많이 잡은 것과 죄인은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을까? 내가 물고기를 너무 많이 잡아 남에게 지장을 주었기 때문일까? 성서 시대 갈릴리 호수 변에서 물고기를 잡는 어부들의 일상으로 가보자.

 

성경 시대의 어부란 무척이나 힘들고 고된 직업이었다. 어부들은 주로 밤에 고기를 잡았는데 이는 당시 고기 잡는 그물이 세마포로 만들어져서 아침에 해가 뜨고 나면 그물이 물속에서 훤히 보였기 때문이다. 물고기가 아무리 머리가 나빠도 아침에 그물을 쳐 놓으면 그물 안으로 돌진하는 자살 행위는 하지 않을 것이다.

 

어부들은 주로 밤 10시부터 새벽 4시까지 물고기를 잡았는데 성경 시대 어부들은 요즘 말로 하면 낮과 밤이 바뀐 올빼미형인간이었다. 요즘 같이 엔진이 달린 동력선이 없던 성경 시대에 어부들은 호수의 중앙까지 열심히 노를 저어서 가야 했다. 갈릴리 호수가 남북 길이가 21Km, 동서 길이가 12Km이므로 아무리 짧은 단거리로 노를 젓는다 해도 6Km를 저어야 했다.

 

우기인 겨울에 물고기가 많이 잡혔기 때문에 오늘날처럼 우비가 없던 시대에 갈릴리 어부들은 늘 상 비로 흠뻑 젖어 있었을 것이다. 또한 어부들은 물속에 던진 그물이 엉키지 않도록 수시로 물속으로 다이빙해 들어가 그물을 정리해야 했다. 낮과 밤의 온도차가 극심한 광야의 날씨에 온몸이 비에 흠뻑 젖은 것도 모자라 수시로 물속에 들어가야 했으니 어부들은 밤새 몸을 떨어야 했을 것이다.

 

밤새 중노동에 시달린 갈릴리 어부들은 낮에 깊은 잠으로 피로를 풀어야 했다. 누가복음 5장의 배경이 되는 시간은 이른 아침이다. 허다한 무리는 말씀을 사모해서 이른 아침부터 갈릴리 호숫가에 몰려들었고 예수님은 몰려드는 무리 때문에 점점 호숫가로 밀리셨다. 그러나 밤새 칠흑 같은 어둠과 혹독한 추위로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물고기는 한 마리도 잡지 못한 베드로의 귀에 예수님의 말씀이 들어올 리 만무했다. 그는 허탈한 심정으로 예수님 옆에서 그물을 씻고, 말리고 있었다. 당시 세마포로 된 그물은 바로 씻어서 말리지 않으면 금방 썩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말씀을 듣는 청중에게 관심을 가지시지 않고 특별히 베드로의 배를 호숫가에 띄워 말씀하심으로써 베드로에게 특별한 관심을 나타내셨다. 무리를 향해 말씀을 다하신 예수님은 드디어 베드로에게 명령하셨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이에 베드로는 주저 없이 순종한다.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베드로의 순종은 두 배 가득 물고기를 잡는 만선의 복을 가져왔다. 그런데 우리가 간과하는 것은 이런 복을 가져온 베드로의 순종이 얼마나 위대하고 또 얼마나 어려운 순종이었는가 하는 점이다.

 

첫째, 베드로는 육신의 피로를 극복했다. 베드로는 밤이 새도록 수고했다. 수고에 대한 아무런 보람과 소득이 없었기 때문에 베드로의 허탈감과 피로감은 더욱 심했을 것이다. 예수님이 무리를 향해 말씀하시는 동안 베드로는 세마로 그물을 깨끗이 씻어서 다 말렸고, 이제 집으로 돌아가, 모든 실패를 잊고 쉬고 싶은 마음뿐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극도의 허탈감과 피로감으로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는 순간에 다시 깊은 곳으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명령하셨다. 명령을 하려면 차라리 그물을 씻고 말리기 전에 할 것이지, 그물을 깨끗이 씻어서 말리고 난 다음에 명령할 것은 뭐란 말인가? 게다가 베드로에게는 다시 호수 중앙의 깊은데 까지 노를 저어서 갈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호수 중앙까지 몇 시간에 걸쳐 노를 젓고 그물을 내리고 다시 호숫가로 돌아온다면 이미 해가 중천에 뜨고 하루가 지나고 말 것이다. 수십 년 동안 낮과 밤이 바뀐 올빼미형 인간으로 바이오리듬이 맞춰진 베드로에게는 극심하게 피로한 시간들이었다. 베드로는 이처럼 육신의 극한적인 피로와 내면의 허탈감을 뒤로한 채 말씀에 의지하여 순종한 것이다.

 

둘째, 베드로는 경험과 상식의 세계를 극복했다. 예수님이 다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명령한 시간은 아침이었다. 이미 해가 뜨고 나면 세마포 그물을 내려 보았자 물고기들이 멍청하게 그물 안으로 달려들 리 없었다. 이는 갈릴리에서 수십 년간 잔뼈가 굵은 베테랑 어부 베드로에게는 경험과 상식에 기초한 기본적 진리였다. 피곤한 몸을 간신히 이끌고 깊은 데까지 가 보았자 물고기가 걸려들 리 없는 시간에 예수님은 명령하고 있는 것이다.

 

셋째, 베드로는 자존심을 극복했다. 베드로는 물고기 잡는 데 이골이 난 베테랑 어부였다. 다른 분야에서라면 몰라도 물고기 잡는데서 만큼은 베드로도 전문가로서의 소신과 자존심이 있지 않았겠는가? 이런 갈릴리의 어부 베드로에게 물고기 잡는 데는 완전 비전문가인 목수 예수님께서 밤새 한 마리의 물고기도 잡지 못해 허탈해진 베드로에게 훈수를 두고 코치를 하고 있는 상황이다.

 

힘겨운 순종의 결과 베드로는 그에 상응하는 충분한 보상을 받았다.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가득 걷어 올린 물고기는 한 배로 충분하지 않아 두 배로 나누어 실어야 했다. 베드로가 두 배에 가득 실은 어획량은 성경 시대 배의 크기를 기준으로 4분의 3톤에 해당하는 양이었다. 이는 2주간의 어획량으로서 갈릴리를 주름잡던 베드로의 인생에서 처음 경험하는 최고의 대박이 나는 순간이었다.

 

베드로가 만선을 하고 와서 예수님께 고백한 말은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는 고백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부들의 생활에서 바다는 바다를 주관하는 신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각 나라와 문화마다 고유한 바다의 신이 있는데 그리스는 이를 포세이돈이라 불렀고 로마는 넵튠이라고 불렀다. 성경 시대 이스라엘에서는 바다의 신으로 이 있었다. 많은 나라에서 어부들은 출항에 앞서 바다의 신에게 제사를 드렸다. 이는 바다의 신을 기쁘게 해 주어야 고기들을 많이 몰아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베드로의 활동 무대인 갈릴리 호수는 물고기반 고기 반으로 불릴 정도로 물고기가 잘 잡히기로 유명했다. 그렇다면 본문에 나오는 밤이 새도록 수고했는데 한 마리의 물고기도 잡지 못한 상황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사실 이것은 물고기가 많은 갈릴리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밤새 그물을 내렸는데 한 마리의 물고기도 걸리지 않았다는 것은 베드로의 어부 생활에서 좀처럼 경험하지 못한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이러한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 순간 뇌리를 스치는 생각이 베드로를 소스라치며 놀라게 했다. 이것은 바다의 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닌가? 그렇다면 혹시 내 앞에 서 있던 분은 신이 아닐까? 혹시 지난밤에 한 마리도 못 잡고 허탕을 치게 한 것도 저분이 부린 마술 때문이 아닐까? 이런 모든 생각이 주마등처럼 스쳐 가자 베드로는 자신이 단순한 선생이 아닌 신적인 존재 앞에 서 있음을 인식한 것이다. 베드로는 자신에게 명령을 내린 예수님을 신과 같은 신적인 존재, 최소한 신이 보낸 대리자, 즉 신인으로 인식한 것이다.

예수님은 왜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부탁했을까?

 

사마리아 지방의 수가 성의 우물은 도시에서 800m 떨어진 곳에 있었다. 일반적으로 도시는 방어를 위해 높은 언덕 위에 세워졌고, 우물은 낮은 지대에 있었다. 수가 성 우물의 깊이는 150m에 이를 정도로 무척 깊었고 마을 사람들은 각자 160m 길이의 로프를 가지고 와서 물을 길었다. 우물이 도시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만 특별히 관리하지 않아도 지나가는 행인들은 쉽게 물을 마실 수 없었던 것이다.

 

예수님이 수가 성 우물가에 도착하신 시간은 낮 12시였고, 행로에 곤하신 예수님은 우물 옆에 털썩 주저앉으셨다. 갈증이 났지만 예수님은 로프가 없어서 우물을 마실 수 없었다. 마침 그 시간에 우물물을 길어 온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좀 달라고 부탁하신 것이다. 예수님이 왜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말을 걸었을까 물으면 보통 전도하기 위해서라고 대답을 하겠지만 이것은 신학적인 해석이다.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해석으로 푼다면 로프가 없어서이다.

 

사마리아 여인은 창녀일까? 여인들은 보통 해가 뜨겁지 않은 오전과 저녁 시간에 삼삼오오 짝을 지어 우물가에 물을 길러 왔다. 그러나 사마리아 여인은 아무도 찾지 않는 정오의 뙤약볕에서 혼자 물 길러 우물가에 온 사마리아 여인, 이러한 배경 설정은 유대인들에게 이미 우물로 상징되는 인생의 고난과 수고를 암시해 주고 있다.

 

사마리아 여인은 창녀가 아니었다. 마을에 창녀가 함께 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남편 다섯을 둘 정도로 쉬지 않고 재혼을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당시 창녀들은 마을 밖에 살았고 정상적인 가정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면 여인에게 있는 다섯 명의 남편은 어디서 온 것일까? 이는 수혼 법이라고 하는 당시의 결혼 제도에서 나온 것이 분명하다.

 

수혼 법은 남자가 상속자 없이 죽을 경우 그 남자의 가장 가까운 남자 친척이 과부가 된 여인의 침소에 들어가 후사를 잇게 하던 풍습이다.(신25:5~10) 창세기 38장에도 유다의 며느리인 다말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수혼 법의 실례를 잘 보여 주는 본문이다. 이러한 수혼 제도는 예수님 당시에도 무척 보편적으로 행해졌던 것 같다. 부활을 부인하는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찾아와 수혼제와 관련된 예를 들어 부활을 부정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막12:18-23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예수께 와서 물어 이르되 선생님이여 모세가 우리에게 써 주기를 어떤 사람의 형이 자식이 없이 아내를 두고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를 취하여 형을 위하여 상속자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아내를 취하였다가 상속자가 없이 죽고 둘째도 그 여자를 취하였다가 상속자가 없이 죽고 셋째도 그렇게 하여 일곱이 다 상속자가 없었고 최후에 여자도 죽었나이다 일곱 사람이 다 그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 때 곧 그들이 살아날 때에 그 중의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

 

사마리아 여인은 왜 홀로 우물가에 물 길러 왔을까? 중동 지방에서 뙤약볕이 내리쬐는 정오에는 사람들이 바깥출입을 삼간다. 그런데 일부러 그 시간을 선택해 혼자 우물가에 나타난 여인의 기구하고 한 많은 삶을 알아야 한다. 여인과 동침한 모든 남자들이 비명에 횡사했다. 그렇다고 그들을 통해서 후사를 이을 아들을 얻은 것도 아니다. 마을의 여인들은 이 여인과 어울리기를 꺼려했을 것이고 여인의 등 뒤에서 온갖 비난과 유언비어를 퍼뜨렸을 것이다.

 

인생의 모든 수고와 짐을 지고 저주를 상징하는 정오의 태양 빛 아래 물 길러 온 여인에게 예수님은 자신을 어떻게 소개하셨는가? 예수님은 우물물을 길러 온 여인에게 자신을 생수로 소개하셨다. 유대인들에게는 너무도 익숙한 문화적 상징을 통해 메시아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드라마틱하게 드러내신 것이다.

 

요4: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왜 ‘반석’ 위에 집을 지을까?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 가운데 우리에게 무척 친숙한 말씀인 본문은 두 종류의 집을 통해 어리석은 사람과 지혜로운 사람을 대조적으로 보여 준다.

 

마7:24-27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사실 자주 인용되는 본문 속의 비유는 이스라엘의 지형을 이해하지 않으면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 이스라엘 백성은 지중해변에 있는 서부 해안 평야에 정착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중앙에 위치한 산지와 골짜기에 정착했다. 이스라엘 백성이 정착해 산 지역들의 지형을 이해해야 비유의 의미를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이스라엘 민족이 정착한 중앙 산지는 거대한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바위산이다. 약간의 흙이 덮고 있지만 조금만 파 들어가면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암반이 나타난다. 이러한 지역에 정착한 이스라엘 백성은 매장을 위한 무덤을 미리 준비해 두어야 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죽은 당일에 시체를 매장하는데, 바위로 이루어진 지형으로 인해 금방 매장지를 파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유대인들에게는 죽기 전에 미리 석회암 바위를 파서 매장지를 준비해 두는 풍습이 있었고, 이러한 무덤은 가족이 대대로 사용하는 가족묘로 사용되었다. 아리마대 요셉은 자신의 장례를 위해 미리 파둔 무덤에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매장해 주었다.

 

마27:59-60 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깨끗한 세마포로 싸서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넣어 두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가니

 

이스라엘 백성이 정착한 중앙 산지는 산과 골짜기로 이루어져 있다. 비가 오면 산지의 빗물은 땅에 흡수되지 않고 대부분 골짜기로 흘러 내려간다. 이는 중앙 산지가 흙이 아닌 석회암의 바위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비록 많은 양의 비는 오지 않는다 할지라도 골짜기에는 여러 갈래에서 흘러내리는 빗물이 한 곳에 모여 순식간에 창수가 나게 된다.

 

비가 오지 않는 건기 동안 골짜기에는 우기 때 흘러내린 토사들이 모여 두터운 모래층을 형성한다. 6개월간 지속되는 건기의 태양빛으로 인해 이러한 토사 층은 단단해지지만, 이것만 믿고 이곳에 집을 지었다가는 큰 낭패를 당하기 십상이다. 왜냐하면 우기 동안에 갑자기 산에서 흘러내리는 빗물이 창수로 변해 골짜기의 집들을 순식간에 휩쓸어 버리기 때문이다.

 

골짜기와 산 위 중에 어느 곳이 집을 짓기에 수월할까? 물론 골짜기다. 산 위에 집을 짓기 위해서는 모든 건축재를 산 위에까지 힘들게 운반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에서는 어디에 집을 지어야 할까? 바로 산 위에 집을 지어야 우기 때 갑자기 흘러내리는 창수로부터 안전할 수 있다. 산 위는 석회암의 바위로 이루어진 곳이고 골짜기는 우기 때 흘러내린 토사 층으로 이루어진 곳이다. 즉 반석 위에 지은 집은 산 위에 지은 집이고, 모래 위에 지은 집은 골짜기에 지은 집인 것이다. 이런 이유로 성경 시대부터 이스라엘의 집들과 마을이 산 위에 형성되었다. 산 위에 형성된 성경 시대 마을을 머릿속에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읽으면 전혀 새롭게 다가올 것이다.

 

마5:14-15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창세기 1장 1절의 비밀”(창1:1)

오늘도 복음 빵집을 찾아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오늘은 창세기 1장 1절에 숨어있는 하나님의 의도를 발견하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창세기 1장 1절의 비밀”(창1:1) ♣명제: 창세기 1장 1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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