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 원어 설교

[사마리아인 비유 하나님 말씀] “나는 친자의 신앙인가? 양자의 신앙인가?”(눅10:25-37)

체데크 2020. 9. 24.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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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사마리아인 비유 하나님 말씀 중에서 나는 친자의 신앙인가? 양자의 신앙인가? 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예수님은 율법교사의 대답으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율법교사는 영생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육적인 구제도 중요하지만 영적인 구제를 하면 더 좋은 것 같습니다.

 

나는 친자의 신앙인가? 양자의 신앙인가?”(눅10:25-37)

 

명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구제가 아니라 영생에 관한 말씀이다.

목적: 나는 율법의 신앙인지 아니면 복음의 신앙인지 깨달아야 한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은 너무나 유명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신앙교육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구제에 관한 말씀으로 많이 알려져 왔습니다. 하지만 구제의 말씀보다는 영생에 초점을 맞추어 말씀을 해석하기를 원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어떤 율법 교사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질문했을 때에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고 질문하기 때문입니다. 율법 교사는 하나님의 말씀에 정통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관하여 관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셨는데 천국복음을 선포하셨기 때문에 영생에 관하여 궁금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 교사는 자신이 무슨 일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니고데모와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니고데모도 율법에 능통한 바리새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서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을 것인지에 관하여 말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의 말씀을 깨닫고 니고데모는 구원을 얻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 교사의 궁금한 것을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서 해결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난 친자의 신앙을 하고 있는지 아니면 율법에 매여 있는 양자의 신앙을 하고 있는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율법 교사는 친자의 믿음이 아니라 양자의 믿음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모두가 친자의 믿음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눅 10:25)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이름도 없는 율법 교사가 일어나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자신이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고 질문하고 있습니다. 현재 율법 교사는 자신의 영생에 관하여 궁금해하고 있지만 여기에는 이미 자신은 영생을 얻었다고 자신만만하게 예수님께 행위를 자랑하려는 마음이 가득 채워져 있는 것입니다. 이때에 예수님께서는 율법 교사에게 율법에는 어떻게 기록되었느냐고 질문하고 있습니다.

 

(눅 10: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예수님께서는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는지에 관하여 율법 교사에게 질문하면서 어떻게 읽느냐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읽느냐’ αναγινωσκω(아나기노스코 314) 읽다, 인식하다, 알다, 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반복해서 읽어서 아는 것과 연관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율법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읽어서 깨닫고 있는지를 질문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의 말씀을 자신의 생각대로 깨닫고 있는지 아니면 하나님의 방법대로 알고 있는지가 궁금하셨던 것입니다.

 

(눅 10:27)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이때에 율법사는 자랑스럽게 자신의 깨달은 말씀을 예수님께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고 율법사가 주님께 말하고 있습니다.

 

(눅 10: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예수님께서는 율법사에게 말씀하시기를 너의 대답이 정답이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네가 깨달은 대로 행동에 옮겨 네가 말한 대로 하면 영생을 얻을 것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영생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율법사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를’ שוב(슈브 7725) 돌아가다, 회복시키다, 구원하다, 소성시키다, 라는 뜻입니다. 주님께서는 율법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은 데로 행동하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먼저 주 하나님을 사랑하고 다음에는 자신의 몸과 같이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생을 얻을 수가 있게 됩니다. 여기에서 이것을 행하라고 했는데 이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를 사랑하고 믿는 것입니다. 이 일을 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6:28-9) 그들이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예수님께서 생명의 떡을 말씀하실 때에 제자들이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합니까?라고 질문했을 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하실 때에 제자들이 주님을 믿도록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입니까, 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라고 말할 때에 생명의 떡을 말씀하시면서 주님의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주리지 않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영원한 생명을 얻는 비결입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사에게 이를 행하라는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이 일을 통하여 죄인이 하나님께 돌아와서 구원을 얻고 영혼이 소생되며 죄악에서 돌아서서 의인으로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일을 행하는 자들은 자신의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깨닫게 해 주실 때에 이 일을 행동에 옮길 수 있습니다.

 

우리들도 율법사처럼 율법의 죄악의 자리에 있을 때에는 주님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내가 행동했던 것들이 최선이고 최고였기 때문입니다. 죄의 자리에 있을 때에 하는 행동들은 모두가 자신의 의를 나타내려고 했고 자랑하려고 했던 행동들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얻고 난 후에는 나는 죽고 예수 그리스도가 드러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다면 아직도 하나님의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사처럼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나만 자랑하는 신앙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님의 말씀을 들은 율법사가 자신을 자랑하기 위해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질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일을 행하라고 했으면 빨리 알아차려야 합니다. 영생의 주인이 바로 앞에 있는데도 자신을 자랑하기 위해 자신은 이웃을 사랑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과는 정반대의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아니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때에 주님께서는 율법사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깨달아야 합니까?

 

첫째, 강도 만난 한 사람의 모습을 보고 깨달아야 합니다.

 

(눅 10:3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던 사람이 강도를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현재의 일어나는 상황을 통해서 비유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보통 예수님 당시에는 여리고 근방의 광야에는 강도들의 출몰이 많았습니다. 가난하게 사는 자들이 먹을 것이 없거나 로마에 대항하여 싸우기 위해 무덤이나 바위의 굴이나 깊은 광야에서 숨어 살면서 자신의 동포들을 괴롭히면서 강도짓을 했던 것입니다. 이때에 한 사람이 강도를 만나 옷을 빼앗기고 얻어맞아 거의 죽은 채로 버리고 가버렸습니다.

 

‘강도를’ שדד(샤다드 7703) 멸망시키다, 파멸하다, 황폐하다, 라는 뜻입니다. 여기에 나타나고 있는 강도들은 영적으로 보면 사탄을 의미합니다. 마지막 때에 적그리스도는 영혼을 멸망시키고 파괴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여 영원한 지옥의 불 못으로 던져 넣으려고 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의 미혹에 빠지면 영혼이 황폐해져 주님을 인정하지 않고 죄악 가운데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10: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여 영혼을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오는 것이지만 예수님께서는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여 더 풍성하게 하시기 위해 오시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이와 같이 강도 만난 자처럼 나의 영혼이 죽어 있었습니다. 죄악 가운데 완전하게 망가져 죽었던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강도 만난 사람은 자신의 힘으로 절대 회복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2:1)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우리는 이미 허물과 죄로 완전하게 죽었기 때문에 내 힘으로는 절대 살아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나를 살려주셨습니다. 영원한 죽음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옮겨주신 것입니다. 오늘 강도 만난 사람처럼 옷도 빼앗기고 두들겨 맞은 것처럼 사탄에 의해 의로운 행실이라고는 찾아보지 못할 정도로 빼앗겼습니다. 그래서 내가 행동한 모든 것은 이미 죽은 상태에서 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의로울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악으로 완전하게 죽었던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는 강도 만난 자가 바로 나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둘째, 제사장과 레위인의 행동을 보고 깨달아야 합니다.

 

(눅 10:31-32)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강도 만난 사람의 앞으로 마침 제사장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그 당시에는 여리고에 살면서 자신의 반차에 따라 예루살렘으로 제사장 직분을 감당하러 올라가던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은 1주일 동안 제사장의 직분을 마치고 나면 자신의 집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이때에 강도 만난 사람을 보게 된 것입니다. 제사장과 레위 인들은 율법에 철저한 사람들입니다.

 

‘피하여’ מקרה(메케라 4747) 서늘함, 차가움, 이라는 뜻입니다. 제사장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하는 사람이며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이웃을 도와주어야 할 사람입니다. 그런데 죽어있는 사람을 보고 그의 마음은 서늘함과 동시에 차가울 정도로 매정하게 피하여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제사장들은 율법의 말씀에 죽은 자들을 만지면 부정해지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고방식이 제사장의 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었기 때문에 죽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여 그 사람 때문에 자신이 부정해져서 하나님 앞에 죄를 짓지 않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자신의 생각에는 잘한 것이지만 하나님의 생각에는 잘못한 것입니다. 율법에 빠져있기 때문입니다.

 

‘피하여 지나가되’ αντιπαρερχομι(안티파레르코마이 492) 반대편으로 지나가다, 라는 뜻입니다. 제사장 다음으로 온 사람은 레위 사람입니다. 레위 사람도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면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도 죽어가는 생명을 보고 반대편으로 지나가고 있습니다. 자신이 부정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생명을 경홀히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주의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죽어가는 생명을 살려주셨습니다. 이것을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주님이 일을 했다고 몰아세웠던 것입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자신만 깨끗하고 부정해지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자들입니다. 남의 생명에는 관심이 없는 자들입니다. 이렇게 레위 인이 죽어가는 생명을 버리고 다른 반대편으로 지나간 사실이 실제로 있고 이 사람은 이미 이렇게 할 것이 정해져 있었으며 현재 시간에 실제로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 돌아섰던 것입니다.

 

셋째, 사마리아인의 행동을 보고 깨달아야 합니다.

 

(눅 10:33-36)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이제 사마리아인이 여행을 하다가 강도 만난 사람을 보게 됩니다. 이 사람은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부어주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게 됩니다. 이때 당시에 기름과 포도주는 고가의 제품들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불쌍한 자에게 베풀어주고 있습니다. 아까워하지 않고 자신의 것을 나누어주고 있습니다.

 

그때 당시에 사마리아인은 유대인들에게 멸시를 받던 사람들입니다. 북이스라엘이 멸망당하면서 앗수르의 혼혈 정책에 의해 피가 이방인들과 섞였다고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정통 유대인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정통성을 가지고 있었던 유대인의 대표인 제사장과 레위인은 생명을 잃어가는 자들을 보고 못 본척하고 도망치듯이 갔지만 비정통 유대인이라고 멸시했던 사마리아인은 생명을 보고 기름과 포도주를 부어 살려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율법사는 영생에 관하여 예수님께 질문을 했고 예수님은 그에 대하여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이 비유를 마치시고 예수님은 율법사에게 질문하시기를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랬더니 율법사가 자비를 베푼 자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난 후에 예수님께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현재 사마리아인처럼 강도 만난 자의 생명을 살려주고 있는 분이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을 율법사에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사두개인들은 율법주의에 빠져 예수님을 인정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마리아인처럼 취급하고 잘못된 것만 찾아내어 올무에 걸려 넘어지게 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잃어버린 양을 위해 자신의 몸을 헌신하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이것을 행하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주님께서 행하신 일을 너희도 하라는 말씀입니다. 율법에 빠져서 자신의 의로 부정해지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선택한 백성들이 죄악으로 죽어가고 있는 모습을 보고 주님의 마음을 품고 가서 포도주와 기름을 발라주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나누어 주어 그들의 영혼을 살려내라는 말씀입니다. 육체의 구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여 죄로 죽었던 자들이 십자가 생명으로 살아나게 하라는 지상 명령입니다. 우리도 주님의 십자가 복음으로 살아난 것입니다. 이제 주님의 말씀으로 살아났다면 강도 만난 자들에게 십자가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그래서 나와 같이 죽어있었던 자들을 주님께로 돌아오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율법에 빠져 있으면 주님의 명령을 깨닫지 못합니다. 영적인 하나님의 말씀 안에 깨어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나는 율법에 빠져있는 양자의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의 말씀으로 거듭난 친자의 믿음 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친자의 신앙은 아버지의 뜻을 깨닫고 알기 때문에 그분의 뜻대로 행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하나님 아버지의 친아들로서 신앙생활을 하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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