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 원어 설교

[누가복음 9장 설교문] “주님을 따르는 자의 유형”(눅9:57-62)

체데크 2020. 9. 24. 14:06
반응형

안녕하세요. 오늘은 누가복음 9장 설교문 중에서 주님을 따르는 자의 유형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자의 유형”(눅9:57-62)

 

명제 : 주님을 따르는 자들에게는 각자의 유형이 있다.

목적 : 나는 어떤 유형으로 주님을 따르는지 말씀으로 파악해야 한다.

 

교회 안에는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각자 성격도 다르고 사는 환경도 다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의 스타일도 다릅니다. 각자의 영적 환경에 맞추어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생각과 고정된 틀이 있기 때문에 각자의 스타일대로 주님을 따르면서 신앙생활을 합니다. 오늘 주님은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시고 그 사람마다 말씀을 주셨습니다. 나는 어떠한 신앙관을 가지고 주님을 따라야 할 것인지를 오늘 말씀을 통해서 깨달아야 합니다.

 

첫 번째 유형, 율법에서 복음으로 돌아서서 따르는 사람

 

눅9:57 길 가실 때에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

 

예수님이 길 가실 때 어떤 사람이 말합니다. 당신이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겠다고 고백합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어떤 사람이라고 말하는데 병행 구절을 보면 더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마8:19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말씀하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

마태는 한 서기관이라고 기록해 놓았습니다. 누가는 어떤 사람이라고 기록했습니다. 서기관이 주님을 따르겠다고 말합니다. 그 당시 서기관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율법주의 사고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복음으로 돌아온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자신의 것을 모두 포기해야 만이 주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서기관은 율법주의에서 복음주의로 돌아선 사람의 대표로 볼 수 있습니다. 많은 서기관이 있었지만 이 사람이 특별히 주님을 따르겠다고 고백합니다.

 

‘나는 따르리이다’ ακολουθεω(아콜루데오 190 동사, 직설법, 미래, 능동태, 단수, 1인칭) 따르다, 뒤따르다라는 뜻입니다. 서기관은 자신이 추종했던 율법주의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을 따르겠다고 고백합니다. 직설법은 많은 서기관이 있었지만 지금 이 사람은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른 사실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미래 시제는 지금 내가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앞으로 계속해서 따르겠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도 교회에서 서기관처럼 율법주의에 빠져 행위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복음을 듣고 난 후에는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확신을 갖고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많은 율법주의자가 있어도 나는 구원을 행위로 받지 않는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바라의 영혼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됩니다.

 

눅9:58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예수님은 서기관이 따르겠다는 고백을 듣고 난 후에 답을 주고 있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했습니다. 서기관은 지금까지 유대인으로서 많은 것을 누렸습니다. 율법주의에서 복음주의로 돌아서면 지금까지 누렸던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고대 근동에서는 공동체 생활을 했기 때문에 율법 공동체 안에서 모든 것을 누리고 살았습니다. 이런 공동체를 떠난다는 것은 죽음과 같은 일입니다. 먹고살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서기관은 야차르의 육체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공동체 안으로 들어오겠다고 말했습니다.

 

주님은 서기관에게 지금까지 누렸던 야차르의 겉 사람의 것을 채워줄 수는 없지만 바라의 신령한 몸은 신령한 것으로 채워줄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현재 주님은 머리 둘 곳이 없습니다. 야차르의 것으로는 너무나 허름합니다. 유대인들이 볼 때 남루하고 육적으로 가난한 모습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으로서 서기관의 바라의 신령한 몸을 채워주실 수 있는 분입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율법주의 사고관에서 복음적인 사고관으로 돌아서면 바라의 신령한 몸이 구원을 얻고 평안과 안식을 얻게 됩니다. 서기관 같은 자는 지금까지 안식이 없었습니다. 주님을 따르게 됨으로 영혼의 안식과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두 번째 유형, 구원받았다고 하면서 세상일에 전념하는 사람

 

눅9:59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예수님은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고 말씀합니다. 그가 이르되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해 달라고 말합니다. 병행 구절을 보면 이 사람은 제자입니다.

 

마8:21 제자 중에 또 한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제자 중에 한 사람으로 마태는 기록했습니다. 자신이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해 달라고 말합니다. 율법에도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고대 근동의 유대인들의 장례 문화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유대인들은 그날 해지기 전에 땅에 묻어주어야 합니다. 시체를 그대로 두면 수치를 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 장례입니다. 지금 제자가 예수님께 아버지를 장사 지내게 해달라고 허락받는 것은 두 번째 장례를 말합니다. 유대인의 두 번째 장례는 첫 번째 장례가 끝나고 살이 썩으면 뼈를 추려서 2차 장례를 치르게 됩니다. 이때가 되면 율법의 짐에서 모두 벗어났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허락하옵소서’ επιτρεπω(에피트레포 2010 동사, 명령법, 과거, 능동태, 단수, 2인칭) 허락하다, 지시하다라는 뜻입니다. 제자 중에 한 사람은 자신의 육신의 문제 때문에 예수님께 허락을 구하고 있습니다. 내 아버지의 2차 장례식에 참석할 수 있도록 간청하고 있습니다. 명령법은 반드시 장례에 참석할 수 있도록 보내 달라는 강청을 말합니다. 과거 시제는 제자의 아버지는 이미 1차 장례가 끝났음을 의미합니다. 지금 가지 않아도 되는데 극구 자신의 의견을 내놓고 세상으로 가려고 합니다. 교회 안에서 이와 같이 주님을 따르는 자가 있습니다. 자신은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 세상의 일로 바쁜 사람입니다. 이미 끝난 일인데도 자신이 참석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하여 세상으로 돌아가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구원을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말로만 구원을 받은 것이지 실상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일 수 있습니다. 복음 공동체 안에 있으면서도 생각은 세상에 있는 사람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복음을 듣지 않고 자신의 생각이 우선인 사람입니다. 주님이 이 사람에게 주는 해답이 무엇입니까? 죽은 자들로 장사하게 하고 너는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고 했습니다.

 

눅9:60 이르시되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주님은 1차 장례가 끝났으니 아버지는 죽었습니다. 현재 율법 공동체 안에서 죽은 자들이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고 말씀합니다. 바라가 죽은 자들이 야차르가 죽은 자들을 장사하라고 말합니다. 바라가 살아있다고 하면서 바라가 죽은 자들과 함께 하여 야차르의 죽음에 참여한다면 결국 나도 죽은 자라는 것을 주님은 말씀합니다. 나의 바라가 살아있다면 야차르의 죽음에 크게 동요하지 않습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있기 때문입니다.

 

‘전파하라’ διαγγελλω(디앙겔로 1229 동사, 명령법, 현재, 능동태, 단수, 2인칭) 알게하다, 널리 선포하다라는 뜻입니다. 주님은 제자에게 너의 아버지 2차 장례에 갈 생각하지 말고 지금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널리 선포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바라의 신령한 몸을 구원하러 오신 분이라는 것을 전하라고 말씀합니다. 명령법은 반드시 세상으로 가서 복음을 전파해야 할 것을 의미합니다. 바라가 죽은 자들에게 가서 복음을 전파하여 살려내야 함을 말합니다. 현재 시제는 지체하지 말고 지금 당장 세상으로 나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해야 함을 말합니다. 우리도 교회 안에서 세상일에 많은 비중을 두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라의 속사람보다는 야차르의 겉 사람의 일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지금 즉시 바라의 신령한 몸을 살리는 십자가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내가 먼저 바라의 속사람이 살아나야 합니다. 주님 안에 있다고 하지만 아직도 속사람은 살지 못한 사람입니다. 주님은 이런 제자에게 너의 속사람을 먼저 살리고 그다음에 세상에 나가 십자가 복음을 선포해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유형, 구원받았다고 하면서 현실에 갇혀 있는 사람

 

눅9:61 또 다른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

 

또 다른 사람은 내가 주를 따르겠지만 먼저 내 가족과 작별하게 허락해 달라고 합니다. 율법 공동체에 있다가 복음을 듣고 주님을 따르겠다고 다짐을 했습니다. 문제는 율법 공동체에 있는 가족과 작별 인사를 하고 오겠다고 말합니다. 율법 공동체에 들어가면 다시는 나올 수 없습니다. 주님은 이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가지 말 것을 말씀합니다.

‘내가 따르겠나이다마는’ ακολουθεω(아콜루데오 190 동사, 직설법, 미래, 능동태, 단수, 1인칭) 따르다, 뒤따르다라는 뜻입니다. 세 번째 사람도 주님을 따르겠다고 말합니다. 미래 시제는 내가 반드시 가족과 작별을 하고 난 후에 주님을 따르겠다는 의미입니다. 능동태는 내가 직접 주님을 따르겠으니 안심하시고 자신을 가족에게 보내 달라는 의미입니다. 인간의 내일은 아무도 모릅니다. 지금은 주님을 따르겠다고 호언장담하지만 막상 가족을 만나면 붙잡혀서 주님께 오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교회에 이와 같은 사람은 현실의 문제에 부딪혀 주님을 제대로 따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현재 내가 하고 있는 사업이 잘 되면 주님을 따르겠다고 말하고 내 가정의 문제가 해결되면 따르겠다고 말하고 자녀 문제가 해결되면 따르겠다고 말하고 부동산 문제가 해결되면 따르겠다고 말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 치고 교회에 나와서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주님은 이런 자에게 해답을 주십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하십니다.

 

눅9:62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주님은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농부가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면 밭을 제대로 갈 수 없습니다. 복음을 가진 사람은 현실에 안주해서는 안 됩니다. 복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해야 합니다.

 

‘잡고’ επιβαλλω(에피발로 1911 동사, 분사, 현재, 능동태, 주격, 남성, 단수) 위에 던지다, 두다라는 뜻입니다. 농부가 손에 쟁기를 잡았다는 것은 현실의 문제를 버리고 하나님의 일에 초점을 둔다는 의미입니다. 분사는 복음을 가진 자는 어느 곳에 있든지 십자가 복음을 잡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현재 시제는 율법 공동체로 다시 돌아가서는 안 되고 복음 공동체 안에서 복음을 선포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주님을 따르는 자를 세 유형으로 나누어 보았습니다. 서기관과 같은 율법주의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구원을 행위로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다가 복음을 깨닫고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의 신앙은 온전히 회개한 신앙입니다. 두 번째는 제자이지만 아직도 죽어있는 사람들과 함께 하려는 사람입니다. 몸은 교회에 있지만 정신은 세상의 죽어있는 자와 함께 하는 사람입니다. 바라의 몸이 죽어 있기 때문에 복음 공동체를 떠나 세상에 죽어있는 곳으로 가려는 사람입니다.

 

야차르의 몸이 교회에 나오는 것도 중요하지만 바라의 신령한 몸이 구원을 얻고 육체가 나온 것이 더 중요합니다. 세 번째는 복음을 잡고 있으면서도 현실의 문제 때문에 안주하는 사람입니다. 신앙과 믿음이 성장하지 못합니다. 이런 자도 십자가 복음을 확실히 붙잡고 세상의 뒤를 돌아봐서는 안 됩니다. 복음의 쟁기를 잡았다면 하나님의 나라만 바라보고 앞으로 나가야 합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십자가 복음을 깨달았으니 세상과 현실의 문제 때문에 고민하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탕자 비유 설교문] “큰 아들의 반란”(눅15:25-32)

안녕하세요. 오늘은 누가복음 15장의 탕자 비유 설교문 중에서 큰 아들의 반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큰 아들의 반란”(눅15:25-32) ● 명제 : 큰 아들은 자신에게 잔치를 베풀어 주지 않자 ��

cdk153.tistory.com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