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 원어 설교

[이삭 설교문] 번제로 드려진 이삭(창22:6-9)

체데크 2020. 5. 29.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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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 오늘도 복음 빵집에 오신 여러분 환영합니다. 오늘은 이삭 설교문 중에서 모리아 산에서 번제로 드려진 믿음을 가진 이삭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번제로 드려진 이삭”(창22:6-9)

 

우리는 이삭이라고 하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특히 오늘 본문의 말씀에 나오는 이 상황은 우리에게 친숙한 말씀입니다. 이삭 하면 떠오르는 것이 바로 순종입니다. 이삭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선택하셔서 나온 약속의 씨입니다. 성경의 역사를 보면 선택 자와 불 선택자가 나옵니다. 똑같은 아버지에서 나왔지만 하나님은 철저하게 약속의 씨를 선택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볼 수가 있습니다. 아담의 아들 가인과 아벨 중에서 아벨을 선택하셨습니다. 아벨이 가인에 의해서 죽자 셋을 준비시키시고 선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의 8대손으로 노아를 선택하여 방주를 준비하게 하셨습니다.

 

이 방주는 바로 영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홍수심판이 있을 때에 방주 안에 들어간 노아의 8 식구만이 목숨을 건질 수가 있었습니다. 노아는 그 당시에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고 방주를 짓게 되었고 하나님께서 홍수로 심판하신 다는 것을 계속적으로 선포했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홍수라는 개념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 시대는 비가 오지 않았기 때문에 하늘에서 비가 많이 쏟아진다는 것을 믿기가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시대는 어떠합니까? 예수님께서 구름 타고 큰 권능과 심판의 칼을 가지고 오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사람들은 믿지를 않습니다. 그 이유는 상식적으로 구름을 타고 온다는 것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구름 하면 하나의 수증기가 발생하여 하늘에서 안개와 같이 만들어진 것이 구름인데 이것을 타고 온다는 것은 인간적인 방법으로나 과학적인 증거로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노아의 때에도 이렇게 홍수를 믿기 힘들었듯이 이 시대도 인간이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중에 믿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아의 때와 같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이 도저히 불가능하여 믿을 수 없을 때에 하나님은 선택한 백성들에게 믿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철저하게 선택 자와 불 선택 자를 구별하시는 분입니다.

 

노아의 아들 3명이 있는데요. 셈과, 야벳과, 함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셈을 선택하셨습니다. 셈의 족보에서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건국하는 하나의 씨로 삼아 주시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은 하나님 스스로 인간을 선택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선택하여 선택받은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아무 힘도 없는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을 선택할 수가 있습니까? 선택의 주권은 완전히 하나님께만 있는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과, 이삭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철저하게 이삭을 선택하셨습니다. 이삭의 아들 에서와 야곱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야곱을 선택하고 계십니다. 야곱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대표지파 12명을 낳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12지파 중에서도 하나님은 유다 지파를 선택하셔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탄생하게 하시는 놀라운 계획을 세우신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은 철저하게 선택하셔서 예수님이 오실 것을 준비하시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경의 역사는 하나의 맥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맥입니다. 구원의 역사 바로 구속사적으로 성경은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선택 받은 자와 선택받지 못한 자들이 성경에 기록이 되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항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항상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세워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선택하지 않았다면 나는 절대 구원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공로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선택 하심으로 내가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우리의 힘으로 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감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삭은 하나님께 약속의 씨로 선택함을 받아 아브라함의 기쁨이 되어 아브라함은 100세에 이삭을 보게 됩니다. 아브라함의 마음에 너무나 흡족하였고 기뻤습니다. 하나님께서 진정 약속하신 아들을 낳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스마엘도 있었지만 이것은 하나님께서 진정 허락하신 씨가 아니었기에 어떻게 보면 마음에 큰 부담감이 있었던 자식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어기고 인간적인 생각으로 하갈과의 동침으로 인하여 낳은 자식이기 때문에 늘 마음에 짐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삭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나타나셔서 아브라함에게1년 전에 약속하시고 내가 너에게 아들을 주겠다고 하시면서 주신 아들이기 때문에 이삭을 바라볼 때마다 너무나 기쁘고 즐거웠던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가 하나님은 이런 이삭을 바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청천벽력 같은 말씀이 어디 있는가?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두 번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불순종의 삶을 되돌아보았을 때에 하나님은 한 번도 자신에게 하신 약속을 어기신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삭을 바치라고 한 이유도 하나님의 뜻에 맡기겠다는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누구와 상의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부인 사라와도 상의하지 않았습니다. 만약에 이런 중차대한 일을 앞두고 누군가와 의논을 하면 결국 인간적인 생각이 들어갈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독자 이삭을 데리고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산을 향하여 길을 떠나게 됩니다. 그런데 삼일 길을 갔다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살고 있는 브엘세바에서 모리아의 산까지는 약 80Km입니다. 이 길을 묵묵히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간 것입니다. 이 길은 하나님을 섬기는 시간이요, 생각하는 시간이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준비의 시간입니다.

 

 우리도 예배에 나오기 전에 반드시 이런 시간이 있어야 합니다. 정신 없이 세상에서 살다가 준비 없이 오늘이 주일이네 하고 나오는 사람과 세상에서 자신의 일을 하지만 주일을 기억하면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미리 준비하는 심령, 준비하는 헌물, 준비하는 자세가 있을 때에 하나님은 만나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인과 아벨의 제사입니다. 하나님은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고 아벨의 제사는 받았습니다. 그 이유가 준비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정성이 없었습니다. 자신을 위해서 열심히 살 줄 알았지 하나님을 위해서는 살지 않았던 것이고 제사에도 전혀 정성과 헌물이 부족했던 것입니다. 이런 준비되지 않은 제사를 하나님은 받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도 준비하여 하나님께 감사의 제단이 되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미리 떠나기 전에 번제에 쓸 나무를 준비하였습니다. 산에는 번제에 쓸 나무가 없기 때문에 미리 준비한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장작을 들고 80Km을 걸어간다고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무겁고 힘이 들고 광야에서 길도 제대로 없는 땅을 갈 때에 얼마나 고생이겠습니까? 하지만 아브라함은 미리 준비했습니다. 아마도 산에 나무가 있을거야! 라는 막연한 생각만 가지고 준비하지 않고 올라갔다면 제대로 번제를 드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도 힘들지만 미리미리 나를 점검하고 인생을 준비하고 예배를 준비해야 합니다. 예배시간30분 전에는 나와서 준비하고 찬양하면서 마음을 정돈하고 예배를 드려야 은혜가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준비가 되는 것이지 이것은 시간이 다 되고 시작되어서 들어와서 무슨 은혜를 받을 수가 있습니까?

 

직장에는 출근시간보다 더 일찍 나가서 업무를 준비하고 그리고 업무를 보면서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최고의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시간적인 개념이 전혀 없습니다. 출근시간도 회사와의 약속이고 예배시간은 하나님과의 약속입니다. 그 약속시간에 하나님은 임재하시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과 약속을 잡았기 때문에 그 약속시간에 하나님은 임재하셔서 예배를 받으시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시간 전에 나와 준비하는 심령으로 예배를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22:6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가져다가 그의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여기에 보면 아브라함이 번제 나무를 가져다가 라는 말이 있습니다. ‘번제’ 라는 단어가 있는데요. 이 단어는 (עלה올라) 라는 것입니다. 이 뜻은 치솟다, 올라가다, 퍼지다, 치료받다, 넘치다, 상달하다, 승천하다, 새김질하다. 라는 단어의 뜻이 있습니다. 번제는 반드시 하나님께만 드려지는 것입니다. 우상에게 드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은 하나님이 성막을 계시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이 뜻하신 곳에서 번제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성막에는 번제단이 정해져 있습니다.

 

이 성막은 모두가 예수님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이 번제단도 바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성막 안으로 들어오면 제일 먼저 만나는 것이 바로 번제단입니다. 이 번제단에서 죄인들을 대신해서 양을 잡고, 소를 잡아 태워서 번제를 드렸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의미하고 있고 우리가 교회에 들어오면 제일 먼저 만나는 분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고백함과 동시에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번제는 제사이면서 우리에게는 예배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에 하늘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예배에는 기도가 있습니다. 이 기도도 하늘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8:3-4 또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 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와 합하여 보좌 앞 금 제단에 드리고자 함이라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

우리의 기도가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천사가 우리의 기도의 향연을 가지고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는 있는 힘을 다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의 기도는 천사가 가지고 하나님 앞에 간다고 했습니다. 예배에는 우리의 기도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배를 드릴 때에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항상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릴 때에 고침을 받습니다. 영적으로 고침을, 심적으로 고침을 받고, 육 적으로 고침을 받습니다. 그리고 은혜가 넘치는 것입니다. 찬양의 은혜가 있고, 예배에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되새김질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물들을 보면 되새김질을 하지 않으면 절대 하나님께 제물로 쓰임을 받지 못합니다. 소를 보십시오. 한 번에 많이 먹어도 계속적으로 쉴 때에 혼자 되새김을 하면서 완전히 소화를 시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주일날 말씀을 들은 것으로 끝나서는 안됩니다. 이것을 계속적으로 되새김질하면서 삶에 적용도 하고 말씀을 묵상하면서 늘 주님을 생각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17:11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베뢰아 성도들은 데살로니가 성도들보다 마음이 좋아서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이 말씀을 그냥 흘려듣는 것이 아니라 이 말씀이 맞는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기억하고 되새김질을 했습니다. 우리들도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되새김질하면서 삶에 적용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번제에 들어 있는 뜻입니다.

 

여기서도 보면 나무를 ‘가져다가’ 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 단어는 (לקח라카흐) 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와우계속법으로서 즉시로 나무를 취했다는 것입니다. 칼형 능동형으로 스스로 하나님께 번제에 쓰일 나무를 준비하여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번제에 쓸 나무를 이삭에게 지우게 했습니다. 여기에서 ‘지우고’ 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 단어는 (שום숨) 이라는 단어입니다. 와우계속법으로 이삭은 즉시로 명령을 거역하지 않고 나무를 지고 모리아의 산으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것도 칼형 능동형으로서 직접 스스로 지고 가는 것입니다.

 

이 모습은2000년 전에 예수님께서 자기가 달리실 십자가를 지고 고통스럽게 올라가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삭도 자신의 바쳐질 제단에 쓰일 나무를 짊어지고 올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 소리도 없이 묵묵히 올라가는 모습이 바로 예수님께서 도살장에 끌려가는 한 마리의 양처럼 아무 소리도 내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짊어지시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시는 모습을 우리가 연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라카흐의 뜻은 메우다, 세우다, 갇히다, 정하다, 바치다, 뚫다, 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삭은 자신이 나무를 짊어지고 올라가는 것이고, 모리아의 산에 번제단이 세워지는 것이고, 이삭은 죽음이라는 것에 갇히게 되는 것이고, 이미 하나님께서 이삭을 바치라고 정해 놓으신 것이고, 결국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완전하게 이루신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완전히 모든 것을 이루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찢으셨고 두 손과 발에 대 못을 박히셔서 몸이 뚫리셨고 모든 죄를 위해서 이미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정해 놓으셨고, 십자가가 골고다의 언덕에 세워진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예수님의 공로로 구원을 얻게 된 것을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22:7 이삭이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이르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이르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 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이삭은 번제를 드리러 산으로 올라가면서 아브라함에게 묻습니다. 불과 나무는 준비하여 올라가는데 번제에 쓸 가장 중요한 양은 어디에 있습니까? 라고 묻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질문입니다. 제사를 드리는데 제물이 없다면 이것은 진정한 제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모든 것을 준비했어도 헌물이 없는 제사는 온전한 제사가 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도 예배에 항상 나의 헌물을 준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22:8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 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아브라함은 이삭에게 대답합니다. 내 아들아 번제 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하나님을 위해서 친히 준비하실 것이다. 라고 대답을 합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을 가졌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미리 준비하시고 있을 것이라는 것을 지금까지 약속을 통해서 확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양은 바로 앞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에게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시리라’ 라고 대답을 해줍니다. ‘친히 준비하시리라’ 라고 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 단어는 (ראה라아) 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이 뜻은 감찰하다, 택하다, 구하다, 주목하다, 깨닫다, 준비하다, 참여하다, 대면하다, 라는 뜻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바라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미리 준비하시는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바라본 것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자신을 위해서 준비하신 것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2절에 말씀에도 독자 이삭이라고 쓰여있습니다. 이삭은 바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골고다 언덕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셨고, 모든 사람들이 십자가를 주목하여 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그리스도가 진정 구원자 메시야라는 것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선택 받은 백성들을 미리 준비하셔서 그들을 위해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구원의 반열에 참여하게 하시고, 마지막 날에 혼인잔치에 참여하게 하시고, 대면하여 하나님을 뵐 수 있는 영광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공로이면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고백하게 되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고 영광을 돌려드리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22:9 하나님이 그에게 일러 주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우리가 이삭이 제단에서 묵묵히 결박당하여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통하여 예수님을 기억하게 합니다. 십자가에서 죽음을 맞이하시고 하나님의 처분을 기다리는 예수님을 생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삭은 현재 청년입니다. 늙은 아버지를 뿌리치고 도망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삭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합니다. 자신이 죽을 것을 알면서도 아버지의 말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묵묵히 고통을 당하시는 것을 연상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삭은 순종의 대표적인 족장이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일러 주신 곳에 이르렀습니다. 제단은 아무 곳에서나 자신이 드리고 싶은 곳에서 제단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항상 하나님이 원하시는 곳에서 드려질 때에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입니다. 예배도 사람 마음대로 자신들이 좋아하는 대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대로 원하시는 대로 예배를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예배를 받으시는 것입니다. 인본주의적으로 사람이 기뻐하는 예배는 죽은 예배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해야 합니다. 모리아의 산에도 많은 장소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장소에 아브라함을 이끌고 오셨습니다. 이 장소가 바로 솔로몬이 세우게 될 성전이 자리 잡게 되는 장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 의미 없이 장소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모두 뜻이 있기 때문에 번제 드릴 장소를 허락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이른지라’ 라고 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 단어는 (בוא보) 라는 단어입니다. 이 뜻은 이루다, 끝이 오다, 성취하다, 흘리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삭이 이 장소에서 모든 것을 이루듯이 예수님은 골고다 언덕에서 선택받은 죄인들을 위해서 모든 것을 이루셨습니다. 결국 단번에 죽으심으로 죄악의 끝이 온 것이고 사탄의 세력이 끝이 온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셨습니다. 아담이 이루지 못한 하나님의 뜻을 독생자 예수님께서 이루신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피를 흘리심으로 이루신 것입니다.

 

이삭은 이렇게 순종함으로 모리아의 산에 제물로 바쳐진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 적인 것이고 죽음 앞에서도 순종하는 모습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종으로 오신 모습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이삭이 순종하면서 종의 모습을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종으로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종의 모습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10: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그래서 마가복음은 종으로 섬기러 오신 예수님을 많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병든 자들을 섬기시고 귀신에 들린 자들을 섬기시면서 고쳐주신 사건들이 많이 마가복음에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완전하신 하나님이 죄인 된 우리 인간들을 섬기시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가복음을 황소 복음이라고도 합니다. 소가 열심히 주인을 위해서 일을 하듯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일을 하시는 모습을 많이 마가복음에서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홍색으로 의미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막을 보면 홍색이 많이 들어가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 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죄인 된 인간들을 위해서 고난 받고 피를 흘려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보혈이 아니면 절대 구원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구원받을 길은 오직 예수님의 보혈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삭이 제물로 드려짐을 받을 때에 순종한 것처럼 우리의 삶에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힘들어도 고난이 있어도, 핍박이 있다 할지라도 우리는 나의 구원자 되시는 예수님을 끝까지 섬기면서 주님이 오실 날을 고대하면서 의의 예복을 입고 신랑을 맞이해야 합니다. 신부가 예복을 준비하지 않고 있다면 결국 그것은 진노받을 것이며, 심판의 날에 불 못에 떨어지는 일이 생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슬기로운 5 처녀들처럼 기름을 준비해야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항상 준비하고 구원의 확신을 갖고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이 언제 오실지 정확하게 알 수가 없지만 때가 되면 모든 세상의 환경과 말세의 징조들을 보면서 알 수가 있다고 말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지금 이 시대입니다. 이 시대의 말세 징조들을 보면서 알아야 합니다. 지금은 복음을 듣지 않습니다. 모든 영적인 귀가 닫힌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신다고 해도 그들은 이곳에 관심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가 있다고 말을 해도 세상의 사람들은 자신이 속해 있는 곳에 살기 바쁘고 즐기기 바쁘고 놀리 바빠서 주님 안에 들어오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성경에 나오는 말세의 징조들입니다. 우리는 지금 말씀 앞에 서야 합니다. 성경으로 돌아가 성경이 나에게 말씀하시는 올바른 뜻을 깨닫고 주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구원받은 백성들은 이제 의의 옷을 입었으니 더러운 곳에서 옷을 더럽히면 안 됩니다. 이제 주님의 보혈을 더 의지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바라봄으로 끝까지 주님을 섬기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제 항상 깨어 준비하는 신앙을 가지고 주님을 만날 것을 기대하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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