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로마서 10장 헬라어 강해 중에서 믿음에 의한 의의 보편성이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공부하면서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배웠습니다. 그런데 행위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율법주의자입니다. 성경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구원을 받는 데는 차별이 없습니다. 오직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됩니다. 우리가 복음을 들음으로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복음을 모르면 예수님을 믿을 수도 없습니다. 이 시간 우리가 복음을 듣고 전파하여 많은 사람이 주님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나게 해야 하겠습니다.
믿음에 의한 의의 보편성(롬 10:11-15)
11절 레게이 가르 헤 그라페 파스 호 피스튜온 에프 아우토 우 카타이스퀸데세타이
롬 10:11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10:11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 9:33과 같이 사 28:16으로부터 인용된 구절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좀 더 강조된 형태로 인용되었다. 즉 '저를 믿는 자'란 말 앞에 '누구든지'란 말이 첨가되어 있다(Hendriksen). 이렇게 강조된 것은 앞에 언급된 4-10절의 말씀을 한 마디로 요약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바울은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하여 구원이 유대 민족에게만 독점되고 또한 이방인에게 있어서는 모세의 율법에 의하여 할례를 받은 자에게만 국한시켰던 것을 확장시켜 이제는 복음을 받아들인 모든 자에게 허락되었음을 선포하고 있다(Godet).
12절 우 가르 에스틴 디아스톨레 이우다이우 테 카이 헬레노스 호 가르 아우토스 퀴리오스 판톤 플루톤 에이스 판타스 투스 에피칼루메누스 아우톤
롬 10:12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10:12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는 이 문제는 유대인이나 헬라인 그 어떤 종족이든지 차별을 받지 않고 똑같이 적용된다. 설사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어떤 면에 있어서는 '차별'(디아스톨레)이 있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구원에 있어서는 차별이 없다(3:22). 그런데 바울은 실제로 그의 서신서에서 유대인의 우선권에 강조점을 두고 있었고(1:16; 2:9, 10), 특별히 하나님의 '언약'(Covenant) 아래서는 이스라엘이 특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언급하였다(3:1, 2:9:4, 5). 그러나 이는 구원 경륜의 순서에 있어서 이스라엘이 특권을 받은 것을 나타낼 뿐이다. 구원에 있어서는 유대인과 헬라인, 기타 이방인 사이에 어떠한 차별도 없다(Dunn).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 바울은 구원이 유대인과 헬라인 그 외 모든 이방 민족에게 차별이 없는 분명한 이유를 '한 주께서'(the same Lord) 모든 사람의 주님이시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고 있다(Lenski).
여기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모든 사람의 주'(퀴리오스 판톤, Lord of all)로 묘사하고 있는데 만일 유대인이 하나님을 주님(Lord)으로 믿고 있다면 그 하나님은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주님이 되어야만 한다(3:29, 30). 이와 마찬가지로 이것은 구세주(救世主)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도 동일하다. 그는 유대인과 헬라인 기타 이방인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의 주'가 되신다(Dunn).
더구나 주님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는 '그를 부르는 모든 자를 부요하게 하신다.' 이는 주님의 부요함을 말하는 것일 뿐 아니라 그의 보편적이고 동일한 은혜가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임한다는 의미이다(Godet). 여기서 '부요하시도다'는 헬라어로 '플루톤'인데 능동적인 개념으로 '자비하다'와 '은혜롭다'의 뜻을 가지고 있다(Calvin). 이것은 주님의 구원의 은혜와 그 능력은 무한하여 그가 부르는 모든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려는 선한 뜻은 결코 약화되거나 다함이 없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부요하신 주 하나님께(시 50:10-12; 학 2:8; 엡 3:8; 계 5:12) 속하여 항상 풍성한 삶을 누리게 됨으로 결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2:4; 9:23; 요 10:10; 고후 8:9; 엡 2:7).
13절 파스 가르 호스 안 에피칼레세타이 토 오노마 퀴리우 소데세타이
롬 10: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10: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 바울은 구약성경에서 요엘 선지자의 말을 인용하여 앞절에서 말한 내용을 더욱 강력하게 확증하고 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누구든지 구원을 얻으리라"는 이 사실은 이미 구약성경 욜 2:32에 예언되어 있었다(Godet). 요엘 선지자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예언하면서 그러나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구원을 베푸실 것을 약속하셨다고 하였다(Calvin).
요엘에 의해 약속된 하나님의 이 말씀을, 베드로는 예수님 승천 후 오순절 날 마가의 다락방에서 주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설명하면서 인용하였다(행 2:16-21). 바울도 이 말씀을 인용하면서 요엘서의 '여호와'(Jehova)를 '주'(Lord)와 동일시하여 사용하고 있는데 여기서 '주'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Alford, Harrison). 실제로 70인 역(LXX)에는 언제나 '야웨'를 관사가 없는 '퀴리오스'로 번역하였다. 그런데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퀴리오스)라는 칭호를 사용하여 구약에서의 '야웨'가 곧 그리스도 예수와 동일한 하나님이심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주의 신성을 부인하는 자들에게 강력한 증거가 되게 하며 또한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과 그리스도 안에서 이룬 구원 사이에 완전한 연속성이 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Dunn). 여기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란 주께 대한 신앙을 고백한 자 곧 주를 믿는 자를 가리킨다. 이와 같은 자는 하나님의 칭의(justification)를 받아 구원받은 자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
14절 포스 운 에피칼레손타이 에이스 혼 우크 에피스튜산 포스 데 피스튜수신 후 우크 에쿠산 포스 데 아쿠수신 코리스 케륏손토스
롬 10:14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10:14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 바울은 이제 복음을 확장하여 범세계적으로 복음을 선포해야 할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Bruce). 그래서 그는 믿음과의 관계에서 제일 먼저 그리스도를 부르는 것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 양자 간에는 밀접한 연관성이 있기 때문이다(Calvin). 주는 신뢰하고 믿을 만한 분이며 죄인들을 구원하여 주실 수 있는 분이라는 확신이 없다면 주님을 부른다는 것은 무의미할 것이다. 결국 주님을 부른다는 것은 주님을 믿는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주를 부르는 일이 믿음의 첫걸음임을 가리킨다. 여기서 '어찌 부르리요'(How then shall they call on, KJV, NIV)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포스 에피칼레손타이'로 '에피칼레손타이'는 '기도 속에서 하나님을 부르다'의 뜻을 가진 '에피칼레오'의 3인칭 복수 부정과거 중간태로서 가정법으로 쓰여졌다. 이는 '그들을 부를 수 없다'라는 의미이다.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 바울은 두번째로 그리스도를 믿는 일은 그리스도에 대하여 듣는 것으로 일어난다고 말하고 있다. 바울은 여기서도 '포스'('어떻게')를 사용하여 의문을 제기하는 표현법을 쓰고 있다. 그는 이러한 논리적인 논증을 통해 믿음은 지식에 근거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즉 인간은 복음을 받아들이든지 거부하든지 하려면 먼저 그 복음을 들어야 한다.
한편 초대 교회 당시 대부분 사람들의 복음 전수(傳受) 방법은 메시지를 '듣는 것'이었다. 비록 소수의 교회가 바울의 서신을 받기는 하였지만 신약성경이 문자와 글로 읽을 수 있는 기록으로 갖추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복음의 내용은 다른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구두(口頭)로 전달되어야 했다. 이 같은 일은 성경의 전 시대에 걸쳐 일반적으로 계속 행해져 내려왔다(Harrison). 왜냐하면 전파된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 대한 참된 지식과 신앙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말씀 전파는 하나님께서 그의 뜻을 전하기 위하여 만들어 놓으신 전형적인 방법이 되었다(Calvin).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 세 번째로 그리스도를 믿기 위해서는 복음의 메시지를 선포할 사람이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 여기서 바울은 사도나 전도자의 직책을 중요시하고 있다(Bruce).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구속의 능력을 증언함으로 그 복음의 메시지를 듣고 믿는 모든 자들에게 긍휼을 베푸시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전파자'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케륏손토스'로 '케륏소'('전파하다', '가르치다')의 현재 능동태 분사이다.
여기서 '전파자'라는 말 앞에 관사가 없는데 이는 어떤 특별한 직책에 있는 사도들이나 전도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전파하는 모든 자'(someone preaching, NIV)를 의미한다(Lenski). 헬라어 '케륏소'는 '전파하다', '알리다'의 뜻인데 이것은 왕이나 사령관의 메시지를 공개하여 알리는 전령의 행위로써 전령은 왕이 명령한 이외의 말을 가감할 수 없었으며 단지 왕의 명령을 자신의 음성으로 대언(代言)하는 역할만 하였다. 이 단어는 70인 역에서(LXX) 많이 사용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선지자들이나 사도들 역시 이 말이 깊은 의미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특별히 메시아에 대한 전파나 종말론적인 언급(사 61:1; 막 1:4, 7, 14, 38, 39; 눅 4:18, 19; 행 20:25; 28:31) 외에는 사용하지 않았다. 바울은 이 단어를 이방에 대한 복음 전파의 견지에서 사용하였다(갈 2:2; 골 1:23).
15절 포스 데 케뤽수신 에안 메 아포스탈로신 카도스 게그랍타이 호스 호라이오이 호이 포데스 톤 유앙겔리조메논 에이레넨 톤 유앙겔리조메논 타 아가다
롬 10:15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10:15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 바울은 전도자가 복음을 전한 것은 이미 그 이전에 누군가가 그 전도자에게 '보내심'의 권위를 주었기 때문이라고 역설하고 있다(Hendriksen). 즉 전도자가 선포하는 메시지의 권위는 그 선포가 그리스도의 직접적인 명령과 위임이라는 점에 있다(Bruce). 여기서 '보내심'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아포스탈로신'은 '아포스텔로'('보내다')의 부정과거 수동태 가정법으로 '사도'(아포스톨로스)란 단어가 이 동사에서 파생되었다(Robertson).
'보내심'을 받았다는 것은 최소한 두 가지 사실을 암시한다. (1) 인간은 보다 높은 권위 아래 존재하며 (2) 보내심을 받은 자의 메시지는 그 자신이 아니라 보내는 자에 의해서 주어진다. 이러한 두 가지면에서 예언자들은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었고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도 마찬가지였다(요 3:34; 7:16). 이것은 동시에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똑같이 적용된다. 모든 성도는 세상으로 보냄을 받은 자들이다. 결국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 가운데서 그가 세우시지 않은 복음 전파자란 있을 수 없다. 바울은 궁극적으로 모든 성도들이 예수의 복음 전도자로서 전 세계에 복음의 기쁜 소식을 전파하며 그 결과로 전파된 말씀을 듣고 열방들이 기뻐하는 것을 바라보고 있다(Godet).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 바울은 다시 한번 바벨론 포로 생활 동안 황폐되어 있었던 예루살렘 도성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를 선포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로써 그 자신의 이야기를 확증하고 있다. 이 말씀은 사 52:7의 인용 구절로서 원래는 이스라엘의 회복이 가까웠다는 기쁨과 평화의 선포였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복음의 전달로 해석한다. 이스라엘이 바벨론 왕 고레스 치하(治下)에서부터 구출을 받은 것은 모세에 의하여 애굽 왕 바로의 치하에서 구출을 받은 것처럼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출받는, 즉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이루어질 보다 완전하고 큰 구원을 예표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 당시 유대 민족이 바벨론의 포로에서 이스라엘로 돌아가리라는 메시지가 기쁜 소식이었다면 하나님의 아들 안에 영원한 구원의 약속이 있다는 메시지는 그보다 훨씬 더 기쁜 소식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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