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요한복음 3장 헬라어 강해 중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라는 성경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 제사장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에게 참람하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인간이며 완전한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을 모두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요 3:31-36)
31절 호 아노덴 에르코메노스 에파노 판톤 에스틴 호 온 에크 테스 게스 에크 테스 게스 에스틴 카이 에크 테스 게스 랄레이 호 에크 투 우라누 에르코메노스 에파노 판톤 에스틴
요 3:31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3:31
위로부터 오시는 이...땅에서 난 이 - 본격적으로 예수와 세례 요한과의 대조와 세례 요한에 대한 예수의 우월성이 증거 되고 있는 31-36절까지의 본문은 니고데모와의 대화 속에서 언급된 내용과 유사한 일면이 있다(12, 13절). 본서를 기록한 요한의 근본 의도는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이신 예수의 신적 탁월성(卓越性)을 드러내는 데 있었기 때문에(20:31), 처음부터 끝까지 이 주제가 일관되게 부각되어 있다.
여기서 저가가 강조하는 바는 세례 요한에 대한 예수의 상대적 우위의 개념이 아니라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탁월성에 대해서 이다. 세례 요한이 '여자가 낳은 자 중 가장 위대한 자'임은 분명한 사실이지만(눅 7:28) 여전히 '땅에서 난 이'라는 점에서 감히 예수의 신적 존재와 비길 상대가 못 되는 것이다. 한편 '땅에서 난 이'란 직접적으로는 세례 요한을 가리키지만 일반적인 측면으로 확대해서 생각하면 아담 이후의 모든 인류를 동시에 지칭하는 말이다.
또한 '오시나 이'라는 표현은 대망의 메시아에 대한 또 다른 칭호로서 세례 요한에 의해 사용되곤 했다(1:30;마 11:3; 눅 7:19). 그리고 위로부터 오시는 이란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이며, 이 표현은 그리스도의 신적 초월성과 유일성을 포함하고 있다. 반면에 여기서 '땅'(the earth, NIV)이란 표현이 '세상'이라는 표현 속에 들어 있는 '악한 것', '속한 것'을 의미한다고 단정 지을 수 없으며 그렇다고 하나님께 향하는 어떤 요소를 지녔다고 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요한의 표현에 있어서 '땅'은 초자연적이고 신성한 것과는 대조적인 의미에서의 인간 실존의 자연 상태 즉 창조주와는 구별되는 피조물을 지칭한다. 즉 흙으로 지음을 받은 존재 말이다(창 2:7).
땅에 속한 것 - 이 구절 또한 앞에서 설명한 '땅'의 개념에 근거하여 이해되어야 한다. 직접적으로는 세례 요한의 모든 사역 즉 회개에의 권유와 회개한 자들에게 행한 물세례 등을 가리킨다. 세례 요한을 위시한 모든 선지자의 사역은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에게로 인도하는 것일 뿐 직접 영생(eternal life)을 제공하지는 못한다. 예수가 오시기 이전의 모든 선지자의 사역은 예수의 오심을 알리기 위한 '전령(傳令)'에 해당하는 것이고, 예수가 세상에 오셔서 하늘로 다시 올라가신 이후의 모든 제자들의 사역도 결코 예수에 대한 '증언'(testimony, NIV)의 범주를 넘지 못한다.
32절 카이 호 헤오라켄 카이 에쿠센 투토 마르튀레이 카이 텐 마르튀리안 아우투 우데이스 람바네이
요 3:32 그가 친히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하되 그의 증언을 받는 자가 없도다
=====3:32
보고 들은 것 - 이 표현 역시 앞서 니고데모에게 예수께서 하신 말씀과 유사하며 (11절), 헬라어 '보고'에 해당하는 동사는 현재 완료형이고, '들은'에 해당하는 동사는 부정 과거형이라고 하는 점에서 다소 문제시된다. 어떤 학자는 전자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하신 존재성과 관련시키며 후자를 공생애 동안의 사역과 관련시킨다. 그리고 이러한 시제 상의 차이로 인해 '보는 것'에 더 강조점이 있다고 하는 주장을 펴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요일 1 : 3에는 보는 것과 듣는 것이 동일하게 강조되어 있다.
보고 들은 바의 구체적 내용은 알 수 없으나 하늘로부터 난 자가 알고 있는 사실 즉 하나님 나라에서 이루어지는 신령하고 비밀스러운 일들이나 하나님이 그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목적 그리고 그가 바로 나사렛 예수라고 하는 사실, 그를 믿는 자는 이미 영생을 얻었고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정죄를 받았다고 하는 사실 등을 두루 포함한다.
받는 - '받는'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히브리어로는 라카흐라는 단어를 번역했다. '람바노'는 '능동적으로 취하다'(take), '영접하다'(receive), '깨닫다'(apprehend) 등의 뜻으로 복음에 대한 성도의 합당한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 지를 보여준다.
33절 호 라본 아우투 텐 마르튀리안 에스프라기센 호티 호 데오스 알레데스 에스틴
요 3:33 그의 증언을 받는 자는 하나님이 참되시다는 것을 인쳤느니라
=====3:33
하나님을... 인쳤느니라 - 예수는 오직 하나님의 뜻과 그 말씀을 전하러 오셨기 때문에 그의 증거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다(12:44-50; 요일 5:10). 반면에 그리스도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예수의 기원이 하늘로부터 임과 하나님의 계시가 예수를 통해 밝히 드러났다는 사실 및 하나님의 성품과 그 모든 약속이 진실되고 참되다는 사실을 모두 인정하고 증거 하게 되는 셈이라는 의미이다. 물론 하나님의 진실성은 인간의 인정이나 증거를 반드시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다. 결국 하나님의 진실하심에 대한 인침(certification)은 하나님 자신을 위함이 아니라 인간의 구원을 위한 것이라 하겠다. '인치다'로 번역된 헬라어 '스프라기조'는 본래의 뜻인 '밀봉하다'의 의미보다는 '재가(裁可)하다', '증명하다'(certify) 등으로 잘 사용되고 있는데 본절에서도 마찬가지로 사용되었다.
34절 혼 가르 아페스테일렌 호 데오스 타 레마타 투 데우 랄레이 우 가르 에크 메트루 디도신 호 데오스 토 프뉴마
요 3:34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
=====3:34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 - 이 구절에 대해서는 세 가지 해석이 있다. (1) 하나님이 메시아의 증거자인 세례 요한에게 성령을 충만히 부어주셨다고 보는 견해(R. C. H. Lenski). 렌스키에 의하면 '주심이니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도신'은 '계속적인 수여'를 뜻하는 현재 시제로 사용되었으므로 예수께 적용하기에 적절치 않다고 한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게 생각해야 할 근거는 없다. (2) 하나님이 성도들에게 성령을 주심을 뜻한다고 보는 견해. 성도들이 성령 충만한 은사를 받을 수 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엡 4:7)라는 말씀이 있듯이, 성도들에게 무제한적으로 성령을 부어주신다기 보기는 어렵다. (3) 하나님이 예수께 성령을 한없이 (without limit, NIV) 부어주셨음을 뜻한다고 보는 견해. 전후의 문맥으로나 사용된 어휘의 용례 등으로 볼 때 이 세 번째 견해가 가장 무난하리라 생각된다. 예수는 곧 성자(聖子) 하나님이시므로 하나님의 모든 신성(神性)을 지니셨고 성령과도 하나이셨던 것이다.
35절 호 파테르 아가파 톤 휘온 카이 판타 데도켄 엔 테 케이리 아우투
요 3:35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의 손에 주셨으니
=====3:35
만물을 다 그 손에 주셨으니 - 이 말씀에는 두 가지 사실이 강조되어 있다. (1) 사랑으로 연합된 아버지와 아들 간의 상호 관계이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마 28:18; 고전 15:27; 계 1:18)의 표현과 유사한 본 구절은 예수께서 아버지의 이름과 그 권세로써, 만물 즉 모든 피조물들을 그의 뜻대로 지배하시고 명령하실 수 있는 완전한 권위를 부여받으신 분임을 의미한다.
따라서 모든 만물은 각각 예수와의 관계에 절대적으로 의존되어 있다. (2) 인간 예수께서 성부 하나님께 의존하시는 모습이다. 전능성(全能性)은 삼위(三位) 하나님 모두에게 속한 것이며 어느 쯤에서 다른 쪽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예수는 하나님의 신성과 아울러 진정한 한 인간으로서 이 땅에 오셨고 바로 이런 차원에서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모든 권세를 수여받으셨던 것이다. 이 사실에서 우리는 예수의 '낮아지심'과 인생의 완전한 모범을 보게 된다.
36절 호 피스튜온 에이스 톤 휘온 에케이 조엔 아이오니온 호 데 아페이돈 토 휘오 우크 옵세타이 조엔 알르 헤 오르게 투 데우 메네이 에프 아우톤
요 3:36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3:36
본절은 사람들에게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양자택일을 권고한다. 예수를 구세주로 믿고 영생에 이를 것인지 아니면 불순종 가운데서 멸망에 처하든지 둘 중 하나가 앞에 놓여 있을 뿐 그 중간 지대는 없다는 것이다.
영생이 있고 - 아버지가 그 아들이신 예수를 사랑하고 만물의 지배권을 주셨다는 앞절의 말씀이 결코 이론적이거나 추상적이지 않음을 보여준다. 이 영생이야말로 성도들에게 가장 직접적으로 그리고 가장 근본적으로 적용되고 주어질 하나님의 가장 귀한 선물인 것이다. 특히 우리는 여기서 영생이 현재적 소유의 측면에서 언급되고 있음을 주시해야 한다. 성도들 또한 시간의 경과와 더불어 육체적 죽음을 경험해야 하지만 영원한 생명으로 거듭나는 결정적 사건은 예수를 구주로 영접할 때 이미 발생하였으므로 그는 영원한 삶에로 들어간 것이다.
영생을 보지 못하고 - 요한에게 있어서 '영생'과 '하나님 나라'는 매우 유사한 단어이다. 본절에서 영생은 하나님 나라를 보는 것 또는 영원한 평화와 사랑의 나눔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의 삶을 이미 경험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진노...머물러 있느니라 -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또 다른 표현이다. 구약 성경에서 즐겨 사용되고 있는(출 22:24; 32:11; 신 13:17; 스 10:14) 이 표현은 인간의 일시적인 성냄이나 분노를 의미하는 헬라어 '뒤모스'와는 달리,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있어서 패역한 세대에게 내리시는 일관된 '심판', '벌' 등의 뜻인 '오르게'를 의미한다.
'머물러 있느니라'로 번역된 '메노'를 직역하면 '남아 있다'(remain)의 의미가 된다. 따라서 이는 하나님의 진노가 새롭게 부여된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원래 하나님의 진노(God's wrath, NIV) 아래서 살아가던 그대로 내버려 둔다고 하는 것을 의미한다(롬 1:24). 예수의 증거를 용납하지 않는 자는 죄와 사망과 악의 권세에서 결코 해방되지 못한다. 하나님은 그들을 악의 세력 속에 그대로 방치(放置)하신다. 그리고 그러한 처벌은 이미 시작되었고 장래에 끝마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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