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모데후서 4장에서는 복음 말씀을 반드시 선포해야 할 것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복음을 성도에게 전파하여 올바른 진리의 길로 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바울은 죽음을 예견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디모데에게 복음을 전해야 할 것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설교자의 직무(딤후 4:1-22)
1-2절, 설교의 직무
[1-2절]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 . . .
바울은 말한다. “[그러므로 내가](전통사본)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주 예수 그리스도 곧 그의 나타나실 때에 그의 나라에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자 앞에서](전통사본)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바울은 디모데에게 설교의 직무를 엄숙히 명한다. ‘그러므로’라는 말은 앞부분에서 성경의 유익에 관하여 성경이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고 구원받은 자로 의로운 인격자가 되고 선한 일을 위해 온전히 준비되게 하기 때문에라는 뜻이다. 설교는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목사들에게 맡기신 일차적 임무이다.
바울은 하나님 앞과 주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이 일을 엄숙히 명한다. 특히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다시 오실 것이며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것이다.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사도신경의 고백대로,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실 것이다.” 주께서 심판하실 때, 복음을 믿고 구원받은 자들은 천국의 영광을 누릴 것이지만, 구원받지 못한 자들은 지옥 형벌을 당할 것이다. 디모데가 전해야 할 말씀은 일차적으로 복음 진리이며 또 ‘바른 교훈’ 곧 바른 교리와 교훈이다. 속죄의 복음은 성경적 기독교 진리의 핵심이다.
‘전파하라’는 것은 선포하라는 뜻이다. 설교는 대화나 토론이 아니고 선포적이어야 한다. 설교는 사람들이 그것을 듣든지 안 듣든지, 그것을 좋아하든지 안 좋아하든지 관계치 말고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는 것이다. 인간의 견해는 불완전하기 때문에 토론이 필요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토론할 것이 아니고 단순히 선포하면 된다. 설교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목사들이 항상 힘써야 할 일이다. ‘항상 힘쓰다’는 원어(에피스테미)는 ‘준비하다, 집중하다’는 뜻이다(Thayer, BDAG). 설교는 언제 어디서나 즉시 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도 많은 죄인들이 지옥 곧 영원한 멸망의 불못을 향해 가고 있다. 또 구원받은 영혼들도 항상 하나님의 뜻을 배워야 한다.
‘범사에[온전히] 오래 참으라’는 말은 설교가 어려운 일임을 암시한다. 영혼들의 구원과 변화는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다. 사탄은 자기 권세 아래 있는 죄인들을 쉽사리 내어주지 않는다. 또한 인간의 죄성과 인격의 결함은 매우 느리게 변화되는 것 같다. 전도의 결실이 금방 보이지 않기도 하며 믿는 자들이 연약한 모습들을 보기도 한다. 이런 일들은 설교자를 낙망케 하는 요인들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온전히 오래 참음으로 이 일을 수행해야 한다.
설교는 복음의 선포와 더불어 가르침과 경책함과 경계함과 권면함을 포함한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게 하며 또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한 책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것은 하나님의 엄숙한 명령이다. 그러나 전도와 양육은 서로 상관없는 일이 아니다. 구원의 복음의 증거와 하나님의 모든 진리들에 대한 가르침과 함께, 교리적, 윤리적 오류들에 대한 책망과 경계도 필요하고 권면도 필요하다.
목사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말씀을 전파해야 한다.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가장 중요한 의무뿐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뜻을 가르치는 일을 항상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그는 온전히 오래 참고 가르치고 경책하고 경계하고 권해야 한다. 우리는 목사들을 위해 기도하자.
3-5절, 설교자의 고충
[3절]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 . . .
바울은 또 말한다. “[이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우크 아넥손타이)[견디지 못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좇을 것임이니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 전파를 힘써야 할 이유는 어려운 때가 올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복음이 세상에 전파되고 교회가 곳곳에 세워졌다고 해서, 세상의 미래가 밝은 것은 아니다. 성경은 오히려 어려운 날이 있을 것을 예언한다. 물론, 역사상 부흥의 때도 있었으나, 교회가 영적으로 침체되고 속화되는 때가 올 것이다.
사람들은 바른 교훈을 견디지 못할 것이다. 바른 교훈은 역사적 기독교, 즉 모세와 선지자들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로부터 전달된 바른 교훈, 신구약 성경책에 밝히 계시된 교훈을 가리킨다. 그것이 옛신앙이다. 그 성경적 기독교는 교리와, 윤리 즉 생활교훈으로 구성된다. 바른 교리의 요점은 속죄의 복음 진리이다. 이것을 좀더 자세히 해설한 것이 신학이다. 성경적 진리는 옛부터 믿어온 역사적 기독교 신앙에 보존되어 있다. 그것이 바른 신학의 내용이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인간이 누구이며 특히 인간의 죄가 무엇인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시며 그가 왜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셨는지, 구원이 무엇인지, 교회가 무엇인지, 내세의 소망은 무엇인지 등이 그 주요 내용이다. 바른 윤리는 헛된 우상들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만 경외하며 섬기는 데서부터 시작하여 부모 거역, 살인, 간음, 도적질, 거짓말, 탐심 등의 모든 죄를 버리고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고 겸손하고 사랑하며 진실하게 사는 것이다.
그런데 때가 이르면 사람들은 이런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둘 것이다. ‘귀가 가렵다’는 말은 귀를 긁어주는 말, 곧 귀를 즐겁게 하는 말을 원한다는 뜻일 것이다. 그런 말들의 주제는 천적(天的)이거나 영적이지 않고 세상적이고 육신적이다. 그런 소원은 육신적 욕망에 불과하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런 욕망을 충족시킬 스승들을 많이 둘 것이다.
사람들은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들을 좇을 것이다.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성경적 바른 교훈을 가리킨다. 그러나 사람들은 진리 대신 헛된 이야기들을 좋아할 것이다. ‘허탄한 이야기’라는 원어(투스 뮈두스)는 ‘신화들’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사실이 아닌 지어낸 이야기들이다. 이것은 재미있을 수는 있으나 무가치한 것들이다. 사람들은 이런 쓸데없는 이야기들을 좋아할 것이다. 확실한 근거가 없는 예화들이나 과장된 간증들도 이런 유와 가깝다. 우리는 헛된 말들을 좋아해서는 안 된다.
[5절]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 . . .
바울은 말한다.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악한 시대에도 목사는 자기 직무에 충실해야 한다. 본문은 네 마디의 명령어로 되어 있다.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라. 고난을 받으라. 전도인의 일을 하라. 네 직무를 다하라.”
첫 번째 명령어는 “모든 일에 근신하라”는 것이다. 목사는 모든 일에 있어서 깨어 있어야 한다. 만일 그가 깨어 있어 조심하지 않으면 시대의 풍조에 물들고 영향을 받아 변질되기 쉬울 것이다.
두 번째 명령어는 “고난을 받으라”는 것이다. 고난을 각오하는 것, 이것이 어려운 시대에 부름을 받은 목사들의 마음가짐이어야 한다. 마귀의 종들이 세력을 얻고 악한 자들이 앞장서서 분주히 왕래하며 무지한 교인들이 그들을 지지하는 시대가 올 것이기 때문에, 그런 때에는 주의 참된 종들이 고난을 각오하고 죽을 각오도 해야 한다.
세 번째 명령어는 “전도인의 일을 하라”는 것이고, 네 번째 명령어는 “네 직무를 다하라”는 것이다. 목사의 일차적 직무는 설교이다. 또 설교의 일차적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전도는 주께서 교회에 맡기신 최대의 과제이다. 물론, 설교는 복음을 전도하는 것 뿐만 아니라, 또한 하나님의 모든 뜻을 전하며 가르치는 것이다. 목사는 성경말씀에 근거하여 가르치며 경책하며 경계하고 권면해야 한다. 이것이 목사의 직무이다. 목사는 전도와 교훈과 책망과 경계와 권면, 즉 설교의 직무를 다해야 한다.
사람들이 바른 교훈을 견디지 못하고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는 어려운 시대를 당하였을지라도, 목사들은 이 설교의 직무를 충실하게 감당해야 한다. 특히,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내용을 변질시키거나 사람들의 기호나 취향에 맞추어 절충시키려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가감 없이, 타협 없이 충실히 선포해야 한다.
오늘 시대는 어떤 시대인가? 사람들이 바른 교훈을 견디지 못하고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는 시대는 아닌가? 오늘 시대는 교회와 교인들이 성경의 바른 교훈을 사모하기보다 흥미와 재미를 추구하는 것 같다. 교회가 세상과 가까워지는 것 같다. 청년들은 바른 교리와 거룩한 삶에 관심이 적은 것 같다. 그러나 참된 목사들은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그 직무를 다해야 한다. 합정동교회의 현 위치는 어떠하며 또 앞으로의 진행 방향은 어떠한가? 오늘날은 배교와 타협과 혼돈의 시대이다. 우리 교회는 하나님의 긍휼 가운데 시대의 흐름을 거슬러 행하여 성경의 바른 교훈만을 충실히 계속 선포하고 가르치고 믿고 실천하는 교회가 되기를 원한다.
6-8절, 사명의 길
[6절]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 . . .
바울은 말한다.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디모데후서는 바울의 유언적 서신이다. 바울은 로마 옥에 갇혀서 순교의 시간이 가까움을 느끼면서 이 마지막 편지를 썼다. ‘관제’(灌祭, drink offering)는 포도주나 기름을 붓는 제사 방식을 말한다. ‘부음이 된다’는 말은 ‘부어지고 있다’는 뜻인데, 자신이 순교의 제물이 될 것을 암시한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자신을 붓고 있었다. 그것이 전도자의 길이다. 전도자는 진리를 위해 살다가 진리를 위해 죽기까지도 하는 것이다. 바울의 순교의 죽음은 그가 전파했던 복음을 확증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와 같이 기독교 복음은 순교자들의 피로 인쳐진 복음이다.
‘떠날 기약’이라는 말은 죽을 때를 가리킨다. 바울은 지금 자신의 죽음의 시간이 가까움을 느끼고 있다. 죽음은 떠나는 것이다. 그것은 이 세상을 떠나 하나님께로 가는 것, 즉 천국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성도의 영혼은 거기서 임시로 거하다가 주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 함께 와서 몸과 결합하여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하여 영생하게 될 것이다. 우리의 영원한 거주지는 새 하늘과 새 땅이다.
[7절]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그는 그의 사명의 생애를 세 마디로 표현하였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웠다. 나는 나의 달려갈 길을 마쳤다. 나는 믿음을 지켰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웠다”는 말은 성도의 생애가 싸움의 생애임을 보인다. 그러나 그 싸움은 선한 싸움이다. 신앙생활은 영적 싸움이다. 성도는 날마다 자신의 죄악성과 싸우며 세상의 악한 풍조와 싸우며 그 배후에 활동하는 사탄과 악령들과 싸운다(엡 6:12). 전도와 설교는 큰 싸움이다. 바른 말씀의 전파는 마귀가 가장 싫어하는 일이다. 사명의 길은 싸움의 길이다. 진리를 전파하는 것도, 진리를 보수하는 것도 싸움 없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무슨 싸움이든지 싸움은 언제나 힘들고 피곤해지고 지치기 쉽다. 영적 싸움도 그러하다. 그러나 성도의 싸움과 목사의 싸움은 반드시 이겨야 할 싸움이다.
“내가 나의 달려갈 길을 마쳤다”는 말은 바울이 어떻게 사명의 길에 충성했는지를 증거한다. 바울의 ‘달려갈 길’이란 전도자의 길이었다. 그는 그 사명의 일, 곧 전도를 위하여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고 충성하였다. 사도행전 20:24에 보면, 그는 고백하기를,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했다. 그의 사명의 길에는 많은 고난이 있었지만, 그는 그 모든 것을 참고 견디면서 그의 일을 다 마쳤다. 사명자는 중간에 주저앉거나 포기하지 말고 사명의 목적지를 향해 끝까지 달려야 한다.
“내가 믿음을 지켰다”는 말은 믿음의 귀중함을 증거한다. 지킬 것 중에 지킬 것은 믿음이다. 주 예수께 대한 믿음은 생명이며 보화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있으면 죄씻음받고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그러나 그 믿음이 없으면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그러므로 믿음이 파선되고 변질되는 것은 가장 슬픈 일이다. 그러나 바울은 온갖 고난 중에서도 이 믿음을 지켰다. 오늘날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 순수한 성경적 믿음을 끝까지 잘 지켜야 한다.
[8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 . . .
바울은 또 말한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의의 면류관’은 천국에서 누릴 완전한 의(義)를 가리킨다고 본다. 성경 다른 곳에서 ‘생명의 면류관’(약 1:12; 계 2:10)과 ‘영광의 면류관’(벧전 5:4)이라는 표현들은 영원한 생명과 천국의 영광을 가리킨다고 본다. 주께서는 다시 오셔서 온 세상을 심판하실 때 바울에게 의롭다고 선언하실 것이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이미 의롭다 하심을 받았지만, 장차 심판대 앞에서 최종적으로 다시 의롭다고 선언될 것이다. 마지막 심판에서 인류가 의인과 악인 두 부류로 나뉠 때, 바울은 의인으로 인정을 받고 영광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받을 의는 인간의 행위에 근거한 의가 아니다. 의는 하나님의 뜻을 다 행한 것을 말한다. 성도의 의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셨고(롬 10:4) 우리는 그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롬 3:21-22). 이 의는 바울에게만 주실 복이 아니고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신자들에게 주실 복이다. 성도는 예수님 믿고 그의 재림과 천국과 부활을 사모하는 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천국과 부활에 대한 소망과 사모함이 없는 자는 참 신자가 아닐 것이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그리스도인의 필수적 덕목이다. 모든 믿는 자는 마지막 심판날에 의를 얻을 것이다.
6절부터 8절까지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선한 싸움을 잘 싸우자. 우리의 신앙생활은 우리 속의 죄성과, 세상의 악의 풍조와, 마귀의 시험과 싸우는 싸움이다. 우리는 이 싸움을 잘 싸우자. 둘째로, 우리는 달려갈 길을 잘 마치자. 우리 각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신 직분과 사명이 있다. 우리는 그 직분과 사명을 잘 마치자. 셋째로, 우리는 믿음을 잘 지키자. 믿음은 구원과 생명이다. 우리는 믿음을 끝까지 잘 지키자. 넷째로, 우리는 마지막 심판날에 주실 의를 사모하자. 우리는 이미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나, 마지막 날에 그 의를 확인받을 것이다.
9-22절, 복음 사역의 어려움들
[9-10절]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데마는 이 세상을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이는]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갔음이며].” 바울은 디모데가 속히 자기에게로 오기를 요청하였다. 그 이유는 동역자가 부족하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일에는 많은 일꾼들이 필요하다. 복음 사역의 어려움 중에 가장 큰 것은 복음 사역자들의 부족일 것이다.
데마는 골로새서 4:14에 보면 바울의 동역자로서 골로새 교인들에게 문안하였다. 그러나 지금 그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을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떠나갔다. 아마 그에게는 옥에 갇힌 바울의 모습이 초라하게 보였을 것이다. 그는 바울에게서 세상적 소망이나 영광을 찾아볼 수 없었던 것 같다. 그의 생각에, 바울은 속이는 자요 그가 전하는 복음은 속임수에 불과했을지도 모르겠다. 요한일서 2:15는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않다”고 말하였다. 바울은 또 말하기를,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다고 했다. 우리는 그들이 그곳으로 간 이유를 모른다. 그들은 데마처럼 세상을 사랑해 바울을 배신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지금 바울 곁에 있지 않다. 옥에 갇혀 몸이 부자유스럽고 나이 많은 사도 바울 곁에 그를 도울 수종자가 없었다.
[10-11절]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두기고는 에베소로 보내었노라.” 누가는 골로새서 4:14에 ‘사랑을 받는 의원 누가’라고 표현되어 있다. 그는 의사로서 바울과 더불어 전도 활동에 참여했고 지금도 바울 곁에 있고 아마 의술로도 그를 도왔을 것이다.
두기고는 에베소로 보내어졌고, 누가만 바울과 함께 있었다. ‘누가만’이라는 표현은 사도 바울의 곁에 필요한 동역자들이 부족했다는 것을 나타낸다. 본문 20절 이하에도 몇 명의 인물들의 이름이 언급되지만, 복음 사역을 위해 중요한 일꾼들이었던 것 같지는 않다.
마가는 바울의 처음 전도 여행시에 바울과 함께 있었으나 밤빌리아의 버가에서 돌아갔기 때문에, 바울은 그와 함께 일하기를 강하게 거절하였었다. 이런 신념 때문에 바울은 바나바와 심히 다투었고 마침내 서로 헤어지기까지 했었다(행 15:36-41). 그러나 이제 바울은 마가가 그의 일에 유익하므로 데려오라고 말한다. 이전에는 마음이 약했던 마가가 이제는 바울에게 유익한 일꾼이 되었다.
복음 사역에는 사람이 필요하다. 충성된 일꾼이 필요하다. 그러나 교인들은 많으나, 참으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충성된 일꾼은 많지 않은 것 같다. 대사도 바울에게 동역자가 부족하였다. 그러나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에게는 아직 디모데 같은 동역자가 있었고 누가도 있었다. 또 마가도 이제 그에게 유익한 동역자의 한 사람이었다. 그들은 어서 속히 바울에게 와야 하였다.
[13절] 네가 올 때에 내가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둔 겉옷을 . . . .
바울은 말한다. “네가 올 때에 내가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둔 겉옷을 가지고 오고 또 책은 특별히 가죽 종이에 쓴 것을 가져오라.” 바울에게 있어서 복음 사역의 어려움은 동역자의 부족뿐이 아니었다. 그는 지금 로마 감옥에 갇혀 있다. 감옥은 춥고 배고프며 기타 육신적 고통이 있는 곳이다. 더군다나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다(21절). “내가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둔 겉옷을 가지고 오라”는 말 속에서 우리는 감옥에 갇혀 있는 노 사도가 밤의 추위에 떠는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다. 추위는 복음 사역의 어려움의 한 면이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런 상황에서도 주의 일에 힘썼고 성경말씀을 읽는 일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디모데에게 가죽 종이에 쓴 책을 가져오라고 부탁하였다. 그 책은 물론 성경책이다. 원문에는 복수명사로 되어 있다. 그것은 여러 권의 책들, 즉 여러 개의 두루마리들을 의미한다. ‘가죽 종이’라는 원어(멤브라나)는 양피지 즉 양의 가죽을 말려서 만든 종이를 가리킨다. 바울은 배고픔과 추위가 있는 옥 중에서도 하나님의 일을 쉬지 않았고 성경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연구하는 일을 쉬지 않았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평안할 때, 건강할 때, 경제적 여유가 있을 때 얼마나 더 하나님의 일에 힘쓰고 더 성경 말씀을 읽고 연구하고 배우는 일에 힘써야 하겠는가?
[14-15절] 구리 장색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보였으매 . . . .
바울은 또 말한다. “구리장색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보였으매 주께서 그 행한 대로 저에게 갚으시리니, 너도 저를 주의하라. 저가 우리 말을 심히 대적하였느니라.”
복음 사역의 또 하나의 어려움은 대적자가 있는 것이다. 구리장색 알렉산더는 디모데전서 1:20에 언급된 인물 즉 착한 양심을 버리고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한 자들 중에 한 사람인 그 알렉산더일 것이다. 그는 처음에 교인이었던 것 같다. 직분자 중에 한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옛날 모세를 대적했던 고라처럼, 또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하나이었던 가룟 유다처럼, 그는 하나님과 진리를 배반한 자가 되었다. 그는 바울에게 해를 많이 보였다. ‘해를 많이 보였다’는 말은 ‘악한 일을 많이 행했다’는 뜻이다.
또 그는 바울의 말을 심히 대적하였다.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 당시에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고 무시했고 그와 변론했고 그의 말씀을 심히 대적했었다. 이런 자들이 구약교회 안에도, 신약교회 안에도 있었다. 진리의 말씀을 바로 전파하였던 예수님에게도, 바울에게도 있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목회 사역에 때때로 대적자들이 있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다. 복음 사역에는 항상 그런 어려움이 있기 마련이다.
요한삼서에 보면, 더 기가 막힌 일이 있었다. 9-11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내가 두어 자를 교회에게 썼으나 저희 중에 으뜸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가 우리를 접대[영접]하지 아니하니 이러므로 내가 가면 그 행한 일을 잊지 아니하리라. 저가 악한 말로 우리를 망령되이 폄론하고도[부당하게 비난하고도] 유위부족하여[오히려 부족하여] 형제들을 접대[영접]치도 아니하고 접대[영접]하고자 하는 자를 금하여 교회에서 내어쫓는도다. 사랑하는 자여,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라.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느니라.” 교회 안에는 구리장색 알렉산더 같고, 디오드레베 같은 사람들이 종종 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너도 저를 주의하라”고 말한다. 진실한 성도는 이런 자를 주의해야 한다. 이런 자가 있다고 해서 낙심할 것은 없다. 주의하면 된다. 우리는 이런 자들과 동류가 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런 자들과 사귀면 시험에 들기 쉽고 신앙에 유익 대신에 큰 손해를 입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주께서 그 행한 대로 저에게 갚으시리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심판 때에 악인들을 심판하실 것이지만, 현세에서도 그들의 악을 보응하신다. 그것은 악인들이 회개하고 구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며, 또 하나님의 일이 너무 방해를 받지 않고 성취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16절]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저희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 복음 사역의 어려움은 대적자가 있는 것뿐 아니라, 또한 때때로 외로이 홀로 싸워야 하는 것이다. 바울이 처음 복음을 변명할 때 그의 편에 선 자가 아무도 없었다. 얼마나 외로운 사역의 걸음인가! 이것이 진실한 주의 종들과 성도들이 때때로 가야 했던 길이다. 노아가 이 길을 갔고 엘리야도 갔고 다니엘도 갔고 바울도 갔다. 우리도 가야 한다. 그러나 바울은 그를 버렸던 자들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았다. 바울은 저 무지하고 깨달음이 없었던 사람들을 긍휼과 사랑으로 감싸고 있었다. 이것이 주님이 보여주셨던 긍휼과 사랑이다. 주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고 말씀하셨다(눅 23:34).
[17절]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를 강건케 하심은 나로 . . . .
바울은 또 말한다. “[그러나]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를 강건케 하심은 나로 말미암아 전도의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모든] 이방인으로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지웠느니라.”
바울의 복음 사역에는 대적자가 있었고, 또 사람들의 지지나 격려는 커녕 오히려 모든 사람이 그를 버림으로 홀로 외로이 싸워야 하였다. 그러나 주께서는 그와 함께 하셨고 그를 강건케 하셨다. 복음 사역자의 용기와 힘은 주께서 함께 하신다는 그 한가지 사실에 있다. 실상 그것으로 충분하다. 주께서 바울을 강건케 하신 목적은 그를 통해 전도의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모든 이방인들이 듣게 하기 위해서이었다. 복음은 영혼들을 구원하는 말씀이다. 주께서 설교자들을 강건케 하시는 것은 이 말씀이 전파되어 택한 백성이 다 구원 얻게 하기 위해서이다. 극심한 반대와 비난, 그리고 위협과 고난이 바울에게 있었지만, 그는 사자의 입에서 건지웠다. ‘사자의 입’이라는 말은 그를 죽이려는 무서운 악의 세력을 비유한 말일 것이다.
[18절]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 . . .
바울은 또 말한다.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구원하신다’는 원어(소죠)는 ‘구원한다’는 뜻 외에 ‘지킨다’는 뜻도 있다. 이 경우는 영어성경의 번역대로 ‘지킨다’는 뜻이 적합해 보인다. 주께서는 바울을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셨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기까지 지키실 것이다. 바울뿐 아니라, 주의 신실한 모든 종들과 자녀들에게도 그러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만 의지하고 주님 앞에서만 신실해야 한다.
성경에서 ‘주’는 대부분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주께서 바울을 강건케 하시고 모든 악에서 구원하시고 끝까지 보존하신다는 것, 그리고 “그에게 영광을 세세 무궁토록 돌린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심을 증거한다. 그는 신적 능력을 가지시고 일하시며 신적 영광을 받으시는 참된 하나님이시다.
[19-22절] 브리스가와 아굴라와 및 오네시보로의 집에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브리스가와 아굴라와 및 오네시보로의 집에 문안하라. 에라스도는 고린도에 머물렀고 드로비모는 병듦으로 밀레도에 두었노니 겨울 전에 너는 어서 오라. 으불로와 부데와 리노와 글라우디아와 모든 형제가 다 네게 문안하느니라. 나는 주께서 네 심령에 함께 계시기를 바라노니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 브리스가[브리스길라]와 아굴라, 오네시보로의 집[가족] 등은 바울에게 큰 위로가 되는 동역자들이었다(롬 16:3-4; 딤후 1:16-18). 또 바울은 에라스도, 드로비모, 으불로, 부데, 리노, 글라우디아, 그리고 그 외의 모든 형제들을 언급한다. 그들은 다 교회들의 모범적인 봉사자들이었던 것 같다. 특히 “드로비모는 병듦으로 밀레도에 두었다”는 원어(트로피몬 데 아펠리폰 엔 밀레토 아스데눈타)는 “드로비모를 병든 채 밀레도에 두었다”는 뜻이다. 바울은 병고치는 은사를 받은 자이었다. 사도들이 다 그러하였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복음 사역 말기에 그는 드로비모를 병든 채 밀레도에 두었다. 이것은 사도시대의 말기에 주께서 병고침의 은사를 점차 거두어 가신 증거인 것 같다. 분명히 하나님의 뜻은 기적이 사도시대 이후 모든 시대에 계속되는 것이 아니었다. 기적들은 모세와 엘리야와 다니엘의 시대와 같이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의 말씀들을 확증하는 목적을 가졌으며, 그 목적이 이루어졌을 때 그것들이 거두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
말씀을 정리해본다. 복음 사역에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다. 동역자의 부족이 그 첫째의 어려움이다. 본문에서 ‘추위’로 표현된 육체적 고난, 감옥에 갇힘, 의식주의 궁핍 등이 또 다른 하나의 어려움이다. 그리고 대적자가 있고 교인들이 참된 사역자를 이해하지 못하고 버리는 것이 또 하나의 어려움이다. 복음 사역에만 이런 어려움이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신앙생활 전반에서 때때로 이런 유의 어려움이 있다. 참된 교제를 나눌 대상이 없음, 의식주의 궁핍, 홀로 외로이 싸워야 함 등의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바울에게는 디모데, 누가, 마가 같은 몇 명의 동역자가 있었다. 또 바울은 어려움 속에서도 낙심치 않고 하나님의 일에 힘썼고 성경 읽기에 힘쓰고자 하였다. 더욱이, 사람들은 그를 버렸을지라도, 주께서는 그를 도우셨고 구원하셨고 또 앞으로도 끝날까지 그를 지키실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데마처럼 이 세상을 사랑하여 변절하지 말고, 바울과 디모데처럼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충성된 일꾼이 되고 충성된 동역자가 되자. 또 마가처럼 처음에는 연약했을지라도, 나중에 복음 사역에 유익한 일꾼이 되자. 우리는 구리장색 알렉산더같이 참된 사역자를 대적하지 말고 또 그런 자를 동조하지도 말자. 우리는 어떤 어렵고 힘든 환경 속에서도 낙망하지 말고 하나님의 일에 힘쓰고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전하고 가르치기를 힘쓰자. 또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시고 지키심을 잊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만 바라자.
[디모데전서 6장 은혜로운 말씀] 자족하는 생활(딤전 6: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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