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9장에서는 예수님이 십자가 못 박히게 됩니다. 예수님이 고통을 당하시고 내가 살아났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하시고 운명하시게 됩니다. 예수님이 죽고 장례를 지내게 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심(요 19:1-42)
1-16절, 빌라도의 판결
[1-3절] 이에 빌라도가 예수를 데려다가 채찍질하더라. 군병들이 가시로 면류관을 엮어 그의 머리에 씌우고 자색 옷을 입히고 앞에 와서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손바닥으로 때리더라.
로마 총독 빌라도는 예수님의 사건을 재판함에 있어서 올바르지 못했다. 그는 예수님의 무죄함을 알았으나 그를 데려다가 채찍질하였다. 군병들은 가시로 면류관을 엮어 그의 머리에 씌우고 자색 옷을 입히고 앞에 와서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고 말하며 손바닥으로 때렸다. 그들은 그를 희롱하고 학대했다. 빌라도는 이 일들을 방치했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에게 학대와 조롱을 당하셨다.
[4-6절] 빌라도가 다시 밖에 나가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을 데리고 너희에게 나오나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 하더라. 이에 예수께서 가시 면류관을 쓰고 자색 옷을 입고 나오시니 빌라도가 저희에게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이로다 하매 대제사장들과 하속들(officers)[직원들]이 예수를 보고 소리질러 가로되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빌라도가 가로되 너희가 친히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박으라.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노라.
빌라도는 다시 밖에 나가 유대인들에게 자신이 예수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했음을 말했다. 예수께서 가시 면류관을 쓰고 자색 옷을 입고 나오시자, 빌라도는 그들에게 “보라, 이 사람이로다”라고 말했다. 대제사장들과 직원들은 예수를 보고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 하고 소리질렀다. 그들은 예수를 사형시키려고 이미 작정했었다. 빌라도는 “너희가 친히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박으라.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노라”고 말하였다. 그는 무책임하였다. 그의 말과 행동은 일치하지 않았다. 그가 참으로 예수님을 죄 없다고 생각했다면 그를 보호했어야 했다. 그는 정의롭고 용기 있는 재판관이 아니었다.
[7-9절]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우리에게 법이 있으니 그 법대로 하면 저가 당연히 죽을 것은 저가 자기를 하나님 아들이라 함이니이다.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더욱 두려워하여 다시 관정에 들어가서 예수께 말하되 너는 어디로서냐 하되 예수께서 대답하여 주지 아니하시는지라.
유대인들은 예수가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함으로 당연히 죽임을 당해야 한다고 말했다. 빌라도는 이 말을 듣고 더욱 두려워하였다. 그의 마음 속에는 하나님에 대한 의식이나 두려움이 있었다. 모든 사람 속에는 그런 의식이 어느 정도 있다. 그래서 빌라도는 다시 관정에 들어가서 예수께 말하였다. “너는 어디로서냐?” 그는 예수께서 정말 하늘로서 온 자인지 물은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대답하여 주지 않으셨다.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를 처형할 죄목으로 그가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한다는 것을 들었다. 그러나 그들이 정당하려면 예수의 주장이 근거 없다는 것을 증명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 근거 없이 예수님을 정죄하고 있었다.
[10-11절] 빌라도가 가로되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세도 있고 십자가에 못박을 권세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면 나를 해할 권세가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니라 하시니.
빌라도는 자신이 예수를 놓을 권세도 있고 십자가에 못박을 권세도 있다고 말하였다. 그때 예수께서는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면 나를 해할 권세가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니라”고 대답하셨다. 빌라도가 가진 재판 권세는 실상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재판관들의 재판관이시다. 그러나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겨준 유대 지도자들의 죄는 더 컸다.
[12절] 이러하므로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유대인들이 소리 질러 가로되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필로스)[친구]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
빌라도는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다. 그는 예수의 무죄함을 알았다. 그는 심지어 예수께 대한 어떤 두려움을 가졌다. 그러나 유대 지도자들은 그가 예수를 놓아준다면 가이사에게 불충성하는 것이라고 압박하였다. 그것은 참으로 교묘한 압박이었다. 악한 자들은 악한 일에 놀라운 지혜를 발휘했고 빌라도로 하여금 잘못된 판결을 하도록 몰아대었다. 그들의 악한 계획은 승리하고 있었다. 빌라도는 이성과 양심의 판단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총독직의 안정을 구할 것인가 하는 갈림길에서 잘못된 길로 이끌리고 있었다.
[13절]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예수를 끌고 나와서 박석(히브리 말로 가바다)이란 곳에서 재판석에 앉았더라.
빌라도는 유대인들의 교묘한 압박의 말을 듣고 예수를 끌고 나와서 재판석에 앉았다. 그는 자신의 총독직의 안정을 포기하지 않으면 예수를 놓을 수 없었고 또 그렇다고 이 재판을 회피할 수도 없었다. 그는 유대인들의 말을 듣고 예수를 끌고 나와서 재판석에 앉았다.
[14-15절] 이 날은 유월절의 예비일이요 때는 제6시[제6시경](원문)라.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보라, 너희 왕이로다. 저희가 소리지르되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저를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가로되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박으랴. 대제사장들이 대답하되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하니.
‘유월절의 예비일’이라는 말은 유월절 주간의 안식일 예비일 즉 금요일이라는 뜻일 것이다. ‘제6시경’은 오전 6시경을 가리킨다고 본다. 이른 아침부터 재판이 열렸다. 그 재판은 공정한 심리와 올바른 판단과는 거리가 먼 재판이었다. 거기에는 군중의 부르짖음만 있었다. 유대 지도자들은 군중을 선동하는 지혜가 있었다(마 27:20). 사람들은 소리를 질렀다.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저를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박으랴”라고 말했으나, 대제사장들은 대답했다.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왕권, 메시아의 왕권을 포기하였다.
[16절] 이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히게 저희에게 넘겨주니라.
총독 빌라도는 마침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히게 그들에게 넘겨주었다. 그는 유대인들의 선동에 굴복하여 로마법에 어긋나고 이성에 어긋나고 양심에 어긋나게 재판관의 지위를 사용하였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가 없으셨으나 고난을 당하셨다. 그는 채찍질을 당하셨고 가시면류관을 씌우셨고 조롱과 매맞음과 학대를 당하셨다. 총독 빌라도는 그가 죄가 없음을 알았으나, 그런 고난을 당하도록 방치하였다. 예수께서는 잘못한 것이 없이 고난 당하는 모든 성도들의 본이 되셨다.
둘째로,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로서 고난을 당하셨다. 이것은 우리의 구원이 되었다. 그는 이사야의 예언대로 우리의 허물과 죄 때문에 찔림과 상함을 당하셨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다(사 53:5-6). 그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셨다(요 1:29). 그는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다(벧전 2:24). 그의 죽음은 많은 사람의 죄의 대속이 되었다.
셋째로, 예수께서는 잘못된 판결을 받으셨다. 로마 총독 빌라도는 그의 무죄함을 여러 번 거듭하여 증거하였다. 그는 심지어 그를 놓으려고 힘썼다. 그러나 유대 지도자들은 그를 궁지에 몰아넣었고 군중을 성공적으로 선동하였다. 빌라도는 마침내 로마법에 어긋하고 이성에 어긋나고 양심에 어긋나게 잘못된 판결을 내렸다. 그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되도록 내어주었다. 이것이 죄악된 세상의 현실이다(행 8:33). 이것이 우리 주님 예수께서 가신 길이며 또 우리가 가야 할 길이다.
17-30절, 십자가에 달리심
[17절] 저희가 예수를 맡으매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히브리 말로 골고다)이라 하는 곳에 나오시니.
유대 지도자들은 빌라도로부터 예수를 넘겨받았다. 예수께서는 자기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라는 곳으로 나오셨다. 다른 복음서들에 보면, 군병들은 구레네인 시몬을 잡아 억지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워 그와 같이 가게 하였다(마 27:32; 막 15:21). 예수께서는 십자가를 지셨고 시몬은 그의 뒤에서 십자가를 같이 졌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체력으로 혼자서 무거운 십자가 나무 형틀을 지실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는 십자가를 지시고 사형장으로 나가셨다.
[18절] 저희가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을새 다른 두 사람도 그와 함께 좌우편에 못박으니 예수는 가운데 있더라.
예수께서는 좌우에 다른 두 죄수들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셨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극악한 죄수처럼 십자가에 처형되셨다. 십자가형은 역사상 세계 여러 곳에서 존재했고 로마 시대에는 주로 큰 죄를 지은 노예들에게 적용되었고 로마 시민들은 그런 형벌에서 제외되었다고 한다. 사형수는 땅에 있는 십자가틀 위에 누인 채로 양손과 발에 날카로운 못이 박혔고 형틀은 밧줄로 들어올려 곧바로 세워졌다고 한다. 예수께서는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고 말씀하셨다(눅 24:39). 십자가형에 의한 죽음은 오랜 시간을 끌었다. 그것은 심장에서 가장 먼 손과 발에서 피가 서서히 흘러나와 마침내 죽게 되는 형벌이었다. 36시간 전에 죽는 것은 드문 일이었고 어떤 경우는 9일 동안 끈다고 한다. 사람이신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당하신 고통은 극심했을 것이다.
[19-20절] 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 예수의 못박히신 곳이 성에서 가까운 고로 많은 유대인이 이 패를 읽는데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 말로[히브리어와 헬라어와 로마어(라틴어)로] 기록되었더라.
십자가형을 받는 죄수들은 그 십자가 위에 그의 죄패가 붙는다고 한다. 빌라도는 예수의 십자가 위에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패를 붙였다. 예수께서 못박히신 곳이 성에서 가까우므로 많은 유대인들은 이 패를 읽었는데 히브리어와 헬라어와 라틴어로 기록되었다. 나사렛에서 자라시며 어린 시절을 보내신 예수께서는 구약성경에 예언된 대로 유대인의 왕이시며, 온 세상 사람들이 알아야 할 ‘세상의 구주’이시다. 그의 이름은 단지 한 시대, 한 민족에게만 복된 이름이 아니고 모든 시대, 모든 민족에게 복된 이름이요 구원의 기쁜 소식이다. 사도 바울은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고 말하였다(딤전 1:15).
[21-22절] 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라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 하니 빌라도가 대답하되 나의 쓸 것을 썼다[나는 내가 쓴 것을 썼다] 하니라.
대제사장들은 ‘유대인들의 왕’이라는 죄패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보내신 메시아를 죽였다고 인정할 수 없었다. 그들의 양심은 평안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빌라도에게 “유대인의 왕이라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고 말했다. 그러나 빌라도는 그것을 고치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는 “나는 내가 쓴 것을 썼다”고 대답하였다. 그는 처음부터 예수가 사형받을 죄인이라고 생각지 않았고, 단지 유대인들의 교묘한 압박과 요구를 물리치지 못하고 허락했을 뿐이다. 그는 죄패의 글은 고칠 마음이 없었다.
[23-24절] 군병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군병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저희가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군병들은 이런 일을 하고.
군병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었다. 그들은 네 명이었던 것 같다. 그들은 속옷도 취하였는데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었다. 군병들이 그것을 제비 뽑아 가진 것은 시편 22:18의 예언대로 된 것이었다. 옷은 사람의 품위를 보인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겉옷과 속옷을 벗기운 채 수치스런 죽음을 죽으셨다.
[25절]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모친과 이모와[이모 즉]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 모친과 이모 즉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 등 세 사람이 서 있었다. 원문에는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사이에 ‘와’라는 말이 없으므로 그 두 사람은 같은 인물로 보인다(KJV, NASB). 다른 복음서들은 많은 여인들이 멀리서 예수님을 보았다고 말한다(마 27:55; 막 15:41). 그들은 남자들보다 용감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였고 하나님의 뜻과 진리를 위하여 열심이 있었다. 다른 복음서에 나오는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는 그의 모친 마리아를 가리킨 것 같고(마 13:55),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 즉 사도 요한의 모친은 본문의 ‘이모’나 마가복음 15:40의 살로메와 같은 인물일지도 모른다.
[26-27절]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예수께서는 그 모친과 그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셨다. “여자여, 보소서. [당신의] 아들이니이다.” 그는 또 그 제자에게 “보라, 네 어머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때부터 그 제자는 그를 자기 집에 모셨다.
‘그 사랑하시는 제자’라는 표현은 요한복음의 다른 곳에서 네 번이나 나온다(요 13:23; 20:2; 21:7, 20). 그는 요한복음의 저자인 사도 요한임이 분명하다. ‘여자여’라는 호칭은 당시에 존경심을 가진 말로 쓰인 말이라고 한다. “[당신의] 아들이니이다”라는 말씀이 자신을 가리키는지, 그 사랑하시는 제자를 가리키는지 분명치 않으나,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후자로 이해하며 문맥도 그것을 지지하는 것 같다.
주의 말씀이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을 증거한다. 예수님과 모친과의 인간적 관계는 깨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는 마리아의 아들이셨다. 십자가에 달린 아들 예수를 보는 모친 마리아는 인간적으로 그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을 것이다. 30여년 전, 그가 아기 예수를 성전에 데려갔을 때 시므온이라는 선지자가 마리아에게 칼이 네 마음을 찌를 것이라고 예언하였었다(눅 2:35). 지금 그 예언은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주의 말씀이 그 사랑하는 제자 요한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그것은 그가 모친을 그의 사랑하는 제자에게 부탁하려는 뜻이 있어 보인다. 그는 육신의 모친에 대한 사랑과 공경심을 끝까지 가지셨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낳은 후 다른 여러 자녀들을 낳았음이 확실하다. 왜냐하면 성경은 예수님을 ‘맏아들’이라고 표현하며(마 1:25 전통사본; 눅 2:7) 또 성경에는 ‘그의 모친과 동생들(혹은 형제들)’이라는 표현이 여러 번 나오며(마 12:46; 13:55, 56; 요 2:12; 행 1:14) ‘주의 형제 야고보’라는 표현도 나오기 때문이다(갈 1:19). 요셉은 여러 해 전에 세상을 떠난 것 같다. 주께서 모친을 왜 동생들에게 부탁하지 않으셨는지는 불명확하지만 그의 동생들은 다 결혼하였거나 믿음이 부족했고(요 7:5) 사도 요한은 누구보다 예수님의 모친을 돌볼 만한 인물이었던 것 같다. 영적 관계는 육신적 관계보다 더 낫다.
[28-30절] 이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룬 줄 아시고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 하사 가라사대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거기 신 포도주[혹은 식초]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머금은 해융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그 영]이 돌아가시니라.
“내가 목마르다”는 말씀은 그의 고통이 매우 컸음을 보인다. 그는 인간으로서 견딜 수 없는 육신의 고통을 십자가 위에서 당하셨다. 많은 피를 흘리신 그는 목마르셨다. 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었다. 사람들은 신 포도주를 머금은 해융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었다. 그는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사명 곧 택자들을 위한 속죄사역을 다 이루셨다(히 9:12). 그런 후 그는 머리를 숙이시고 그 영이 돌아가셨다. 그는 그의 영을 하나님께 맡기셨다(원문).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못박히셨다. 그는 행악자들과 함께 십자가에 달리셨고 겉옷과 속옷까지 벗기운 채로 수치스럽게 달리셨고 심한 갈증을 느끼실 정도로 고통스럽게 죽으셨다. 우리는 그의 고난을 잊지 말고 그를 진실히 믿고 사랑하자.
둘째로, 예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도 그의 모친을 배려하셨다. 그는 고통스런 십자가 위에서도 그의 모친을 그의 사랑하는 제자에게 부탁하셨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본받아야 할 부모 공경의 실천이다.
셋째로, 예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으로 인류의 대속 사역을 다 이루셨다. 그는 우리가 죽어야 할 죽음을 대신하셨다. 이것이 십자가의 참 뜻이다. 그의 대속 사역으로 우리는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넷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소식은 온 세상에 알려져야 할 복음이다. 이 복음은 온 세상의 모든 나라의 언어들로 번역되어야 할 소식이다.
31-42절, 예수님의 장례식
[31-33절] 이 날은 예비일이라.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 그 안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아니하려 하여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 하니 군병들이 가서 예수와 함께 못박힌 첫째 사람과 또 그 다른 사람의 다리를 꺾고 예수께 이르러는 이미 죽은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날은 예비일이었다(막 15:42; 눅 23: 54). 그것은 무교절 주간의 안식일의 예비일 즉 금요일을 가리켰다.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 그 날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않으려고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들을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고 했다. 사형수들의 다리를 꺾는 것은 그들이 도망치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군병들은 가서 예수와 함께 못박힌 첫째 사람과 또 그 다른 사람의 다리를 꺾었다. 좌우의 죄수들의 다리를 꺾은 군병들은 예수께 와서 그가 이미 죽은 것을 보고 그의 다리는 꺾지 않았다.
[34-35절] 그 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이를 본 자가 증거하였으니 그 증거가 참이라. 저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 줄 알고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라.
다리를 꺾는 대신 그 중 한 군병이 창으로 그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곧 피와 물이 나왔다. 이것을 본 사람이 증거하였으므로 이 증거는 참되었다. 그는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 줄 알고 사람들로 믿게 하려고 증거했다. 성경은 목격자들의 진실한 증거들을 기록한 책이다. 주 예수의 제자들은 거짓 증인이 아니고 진실한 증인들이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고 옆구리가 찔려 물과 피까지 흘리셨다. 가시 면류관을 쓴 머리에도 피가 흘렀고 못이 박힌 그의 손과 발에도 피가 계속 흘렀을 것이고 또 옆구리도 창에 찔려 물과 피를 흘렸다. 그는 확실히 죽으셨다. 이성적으로 생각할 때 그는 회생할 가능성이 전혀 없으셨다.
[36-37절] 이 일이 이룬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우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또 다른 성경에 저희가 그 찌른 자를 보리라 하였느니라.
그의 뼈가 꺾이우지 않은 것과 그의 손과 발과 옆구리가 찔린 것은 구약성경의 예언의 성취이었다. 출애굽기 12:46에 보면, 유월절 어린양에 대해 “뼈를 꺾지 말라”고 명령되어 있다. 예수께서는 유월절 어린양으로 희생되셨다(고전 5:7). 또 스가랴 12:10에 보면,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리라”고 예언되어 있다. 메시아에 대한 이러한 예언들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38절]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의 제자나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은휘하더니[은밀히 하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더러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님의 제자이지만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은밀히 행하였다. 그는 빌라도더러 예수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였고 빌라도는 허락하였다. 그는 가서 예수님의 시체를 가져왔다. 다른 복음서들에 의하면, 그는 부자요(마 27:57) 존귀한 공회원이었고(막 15:43; 눅 23:50) 선하고 의로운 자이며 예수님을 정죄한 유대인들의 결의와 행사에 찬성하지 않았던 자이었고(눅 23:50, 51)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이었다(막 15:43; 눅 23:51). 마가복음 15:43에 보면, 그는 빌라도에게 용감히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고 요청했고 그것을 받아 세마포를 사서(막 15:46) 그것으로 쌌다.
[39-42절] 일찍 예수께 밤에 나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근쯤 가지고 온지라. 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 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 예수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곳에 동산이 있고 동산 안에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이 있는지라. 이 날은 유대인의 예비일이요 또 무덤이 가까운 고로 예수를 거기 두니라.
예수님의 장례를 받든 다른 한 사람은 니고데모이었다. 그는 수년 전에 밤에 예수님을 찾아와 거듭남에 대한 말씀을 들었던 자이었다(요 3장). 니고데모는 몰약과 침향(aloe, 알로에) 섞은 것을 백 근(100리트라)[약 34킬로그램]쯤 가지고 왔다. 그들은 예수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법대로 그 향품들과 함께 세마포로 쌌다.
예수 그리스도의 장례식은, 평소에 드러나 있지 않았던 두 사람, 즉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에 의해 이렇게 특이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하나님께서는 비상한 때에는 비상한 방식으로 그의 일을 행하신다. 그는 예수님의 장례를 위해 그 두 사람을 사용하셨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곳에 동산이 있고 동산 안에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바위 속에 판(마 27:60; 막 15:46; 눅 23:53) 새 무덤이 있었다. 그것은 아리마대 요셉의 새 무덤이었다(마 27:60).
이 날은 유대인의 예비일이요 무덤이 가까웠기 때문에 예수님을 거기 두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장례는 이렇게 조촐하게 이루어졌다. 장례식을 호화스럽게 하는 것은 필요 없는 일이다. 성도의 장례식은 믿음과 소망 가운데서 검소하게 행해져야 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기억하자. 우리 주 예수께서는 가시면류관을 쓰셨고 손과 발에 큰 못이 박히셨고 옆구리에 창을 찔리셨다. 머리에서도, 양손과 발에서도, 또 옆구리에서도 피가 계속 흘러나왔을 것이다. 그는 십자가 위에서 여러 시간 많은 고통을 느끼셨을 것이다. 그는 물과 피를 다 흘리셨다. 우리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잊지 말아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 믿자. 성경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행하신 일들을 기록한 책이다. 성경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께서는 특히 메시아의 오심과 그의 하실 일들에 대해 예언하시고 그 일들을 이루셨다. 예수님의 뼈가 꺾이우지 않으신 것과 그의 손과 발과 옆구리가 찔리신 것은 구약성경의 예언의 성취이었다. 그것이 다 구약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그 외에도 이사야 53:9는 그가 부자와 함께 묻히겠다고 예언했고 그 예언도 그대로 성취되었다. 그는 부자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묻히셨다. 주께서는 부활하신 후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셨다(눅 24:27). 또 그는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고 하셨다(눅 24:44). 또 그는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라고 말씀하셨었다(요 5:39). 이와 같이 성경은 어떤 사건을 예언하였고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되면 그것이 성취되었다. 성경의 이러한 성격, 즉 예언의 성취라는 성격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한 증거이다. 우리는 성경의 이 놀라운 내용과 성격을 깨닫고 성경을 다 믿자.
셋째로, 우리는 인간의 의식(儀式)들을 중요하게 여기지 말자. 세상의 장례식들은 거창하다. 왕의 장례식이나 대통령의 장례식은 화려하고 거창하다. 그러나 그런 거창한 장례식들을 포함하여 세상의 모든 일들은 실상 다 헛되고 큰 가치가 없다. 전도서 1:2,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이사야 40:6, 8, “말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가로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하라.” 그런 의식과 형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용이 중요하다. 사람에게 중요한 내용은 구원과 부활과 천국과 영생이다. 그것을 소유한 자는 그런 거창한 장례식이 없어도 복된 자이지만, 그것을 소유하지 못한 자는 아무리 거창한 장례식을 한다 해도 아무 가치가 없고 그의 영혼의 죽은 후 상태는 지극히 불행스러울 뿐이다.
[누가복음 22장 예수님 말씀] 예수님이 잡히심(눅 22: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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