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모데전서 6장에서는 종과 지도자 부자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상전에 대해서 종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또한 부패한 거짓 교사들에게 대해서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다른 복음을 전파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영적으로 부패한 자들입니다. 부자들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재물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말씀합니다. 부자는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다른 사람에게 베풀어 주어야 할 것에 대해서 권면하고 있습니다.
자족하는 생활(딤전 6:1-21)
1-2절, 종들에 대한 교훈
[1절] 무릇 멍에 아래 있는 종들은 자기 상전들을 범사에 . . . .
바울은 말한다. “무릇 멍에 아래 있는 종들은 자기 상전들을 범사에 마땅히 공경할 자로 알지니 이는 하나님의 이름과 교훈으로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사람은 자기 위치를 지켜야 한다. 종은 종으로서의 자기 위치를 지켜야 한다. 종의 위치는 ‘자기 주인에게 범사에 마땅히 공경하는 것’이다. 여기에 ‘공경한다’는 말은 주인을 돕고 그에게 순종하는 것을 포함할 것이다. 그것이 종의 위치이다. 물론 주인은 주인으로서 하인들을 공의로 다스리고 그들을 사랑하며 배려해야 한다. 믿는 성도가 된 종도 예외가 아니다. 그는 오히려 더욱 주인들에게 잘해야 한다. 만일 그가 잘못하면 하나님의 이름이 비난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더욱 주인을 존경하고 그를 도우며 그의 지시에 순종해야 할 것이다. 성경은 노예제도를 인정한다. 노예제도의 개선은 오랜 세월을 요할 것이다. 그러나 사실 제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의 마음가짐이다. 본문의 교훈은 오늘날에도 직장생활에 적용될 수 있다.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존경하며 그의 지시를 즐거움으로 순종하는 것이 옳다.
[2] 믿는 상전이 있는 자들은 그 상전을 형제라고 경히 여기지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믿는 상전이 있는 자들은 그 상전을 형제라고 경히 여기지 말고 더 잘 섬기게 하라. 이는 유익을 받는 자들이 믿는 자요 사랑을 받는 자임이니라. 너는 이것들을 가르치고 권하라.” 믿는 성도인 종은 자기 주인이 믿는 성도일 경우 그를 형제라고 가볍게 여기지 말고 더욱 잘 섬겨야 한다. 왜냐하면 유익을 받는 자들이 믿는 자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도 직장에서 윗사람과 아랫사람의 관계에서는 물론이거니와 모든 영역에서 믿는 형제들 간에 말과 행동에 있어서 서로 상대를 존중하는 것이 선하고 아름다운 일이다.
본문은 우리에게 우리의 현실에서 자기 위치를 지키라고 교훈한다. 이것은 직장생활에 적용된다. 직장에서 아랫사람은 아랫사람으로서 윗사람을 존중하고 도우며 그의 말에 순종해야 하며, 윗사람은 윗사람으로서 아랫사람을 공의로 다스리며 배려를 가지고 사랑해야 한다.
3-10절, 자족하는 마음
[3-5절]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에 착념치 아니하면 저는 교만하여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훼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너는 그런 자들로부터 떠나라](전통본문).”
본문은 ‘바른 말’과 ‘다른 교훈’을 대조시킨다. ‘바른’이라는 원어(휘기아이논)는 ‘건전한’이라는 뜻이다. 바른 말은 건전하고 유익한 말이다. ‘경건에 관한 교훈’이라는 원어(테 카트 유세베이안 디다스칼리아)는 영어성경들의 번역대로 ‘경건에 일치하는 교훈’이라는 뜻일 것이다(KJV, NASB). 바른 말은 주 예수께서 직접하신 말씀이나 경건에 이르게 하는 말씀이다. 우리의 사상은 바르고 경건한 교훈에 일치해야 한다.
그러나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에 생각을 두지 않는 자는 교만하며 무지하고 싸움을 일으킨다. 그는 변론하고 언쟁하고 투기하고 분쟁하고 훼방하고 다툰다고 본문은 표현한다. 그는 생각과 마음이 부패하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이다. 결국 싸움은 사람의 욕심에서 발생한다. 야고보도 증거하기를,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라고 하였다(약 4:1-2).
전통본문은 5절 끝에 “너는 그런 자들로부터 떠나라”고 첨가하였다. 교제의 문제는 중요하다. 악은 누룩처럼 번진다. 악을 용인하며 악한 자들과 자꾸 교제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악에 물들기 쉽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른 교훈을 저버리고 불경건하고 교만하고 땅의 것을 탐하는 자들과 교제치 않는 것이 좋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자들과 가까이 하고 하나님을 멀리하는 자들과 멀리하는 것이 지혜이다. 악한 자들은 우리의 전도의 대상이지 교제의 대상이 아니다.
[6-8절] 그러나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 . . .
바울은 또 말한다. “그러나 지족(知足)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 [이는]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분명히]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못할 것임이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지족(知足)한다는 것은 욕심을 부리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신 자기의 처지와 형편에 감사하며 만족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주권적 섭리자이시며 선하신 하나님을 믿는 성도의 정상적인 마음가짐이다. 이런 마음을 가진다면, 경건은 큰 유익이 된다. 바울은 이미 4:8에서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고 증거하였었다. 경건을 물질적 이익의 재료로 삼는 것은 악하고 헛된 일이지만, 자족하는 참 경건은 큰 유익이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당신만을 바라는 경건한 성도에게 이 세상에서 의식주의 필요를 공급하시고 영생의 나라에 넉넉히 들어감을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성도가 자족하는 마음을 가져야 할 이유는 그가 출생 시 빈손으로 이 세상에 왔고 별세 시 역시 분명히 빈손으로 이 세상을 떠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무덤에 묻힐 때에 세상에서 모았던 재물을 가져갈 수 없다. 빈손으로 와서 빈손으로 가는 것이 세상의 삶이며 백년 후에 영원한 세계가 있기 때문에 더 가지고 덜 가진 것이 큰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더 가진 자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적고 덜 가진 자나 가난한 자가 믿음에 부요한 경우가 많다.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생활관이 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탐심을 품지 말고 기본적인 의식주로 만족하며 살아야 한다. 공중의 새를 먹이시고 들의 백합화를 입히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기 백성을 먹이시고 입히실 것이기 때문에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감사하며 자족하며 살아야 한다. 그것이 성도다운 생활이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성도의 생활은 경건하며 자족하는 생활로 요약된다. 경건과 자족--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생활 원리이다.
[9절]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 . . .
바울은 또 말한다. “[그러나]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욕망]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경건하고 자족하는 삶과 대조하여, 이 세상에는 부하려 하는 자들이 많다. 부하려는 마음 즉 무엇을 더 가지려는 마음이 탐심이다. 이런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며 결국 파멸에 이르게 된다. 부하려는 욕망이 사람들로 하여금 파멸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10절]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 . . .
바울은 말한다. “[이는] 돈을 사랑함이 일만[모든] 악의 뿌리가 되나니[됨이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부하려 하는 자들이 파멸케 되는 이유는 돈을 사랑함이 모든 악의 뿌리가 되기 때문이다. 탐심과 돈 사랑이 모든 악의 근원이다. 야고보서 1:15도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라고 말한다. 오늘날에도 사회의 크고 작은 죄악들이 돈 때문에 일어난다. 공직자 부정부패도, 청소년 윤락행위도, 어린 소녀의 유괴와 살해사건도 다 돈 사랑에서 비롯되었다. 돈이 무엇이기에 사람을 이렇게 추하게 만드는지!
특히 성도가 돈을 사랑하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찌르게 된다. 탐심은 우상숭배이기 때문에 참된 믿음과 함께 있을 수 없다. 예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고 하셨다(마 6:24).
3절부터 10절까지의 교훈은 무엇인가? 우리는 참된 경건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주신 현실에서 자족하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 우리는 세상에 빈손으로 와서 빈손으로 돌아갈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의식주의 필요를 공급해 주실 것이며 그러므로 우리는 먹을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 알며 살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부하려 하거나 돈을 사랑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며 파멸에 이른다. 돈을 사랑함이 모든 악의 뿌리이며 우리로 참된 믿음에서 떠나게 하는 일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돈을 함께 사랑하려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섬겨야 한다.
11-16절, 네 가지 명령
[11-12절]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 . . .
바울은 또 말한다.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하였도다.”
‘하나님의 사람’은 구약시대의 선지자들처럼 하나님께서 특별히 구별하여 당신 곁에 두시고 친밀한 교제를 나누시고 당신의 일에 쓰시는 자라는 뜻일 것이다(신 33:1; 왕상 17:24; 왕하 4:7, 9, 25). 모든 성도는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의 사람들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만드셨고 당신의 특별한 소유로 삼으셨다(엡 2:10; 벧전 2:9).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 사람처럼 살지 말고 하나님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 바울은 하나님의 사람 디모데에게 네 가지의 명령어로 교훈을 준다.
첫째로, “이것들을 피하라”고 말한다. ‘이것들’이란 경건과 자족함 대신에 돈을 사랑하는 것을 말한다. 성도는 이런 마음가짐을 버려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의 믿음의 성장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둘째로,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라고 말한다. 성도는 모든 죄를 버리고 범사에 의롭게 살아야 한다. 의는 하나님의 계명에 일치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성도는 또한 경건하게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우리는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를 두려워하며 그를 섬기고 그에게만 순종해야 하며 또 하나님과 성경에 증거된 그의 모든 진리들을 믿는 자가 되어야 한다. 성도는 또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사랑은 믿음의 뿌리에서 나온 꽃이요 열매이다. 또한 참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며 온유한 것이다(고전 13:4).
셋째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말한다. 이 세상은 영적인 전쟁터와 같고, 성도의 신앙생활은 영적인 전쟁과 같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죄성과 세상의 악한 풍조와 사탄의 시험과 더불어 싸워야 한다. 무엇보다, 불신앙은 가장 큰 원수이다. 싸움은 힘들고 어려운 일이며 그 길에는 고난과 고독과 눈물과 때로는 순교의 피흘림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의 선한 싸움을 잘 싸워야 한다.
넷째로, “영생을 취하라”고 말한다. 영생은 신앙생활의 목표이다. 로마서 6:22-23,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나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우리는 영생을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다. 영생의 소망은 복음 진리의 핵심이다(요 3:16; 딛 1:1-3). 우리 모두는 믿음을 잘 지켜 약속된 영생을 취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13-14절] 만물을 살게 하신 하나님 앞과 본디오 빌라도를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만물을 살게 하신 하나님 앞과 본디오 빌라도를 향하여 선한 증거로 증거하신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내가 너를 명하노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나타나실 때까지 점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이 이 명령을 지키라.” ‘만물을 살게 하신 하나님’께서는 모든 생명체들과 생명 자체의 근원이다. 그는 만물에게 생명을 주셨고 죽은 자들도 다시 살리실 것이다. 그 안에는 생명이 있고 그 안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있다. 또 우리 주 예수께서는 로마 총독 본디오 빌라도 앞에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임을 분명하게 증거하셨다. 바울은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과 자신을 밝히 증거하신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엄숙히 명하였다. 디모데뿐 아니라, 우리 모두도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점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이’ 온전하게 위의 네 가지 명령들을 지켜야 한다. 돈을 사랑하지 말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고 영생을 취해야 한다.
[15-16절] 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 . . .
바울은 말한다. “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 하나님은 복되시고 홀로 한 분이신 능하신 자이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요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능력을 돌릴지어다. 아멘.”
하나님의 시간표에서 마지막 대사건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다. 성경에서 그의 재림은 그의 오심 혹은 그의 나타나심이라고 표현된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그때까지 계속되어야 한다. 그때 역사의 완성이 있고 죽은 자들의 부활과 의인과 악인의 심판이 있을 것이다. 그때 우리의 구원은 영광스런 구원으로 완성될 것이다. 그것이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이다.
사도는 하나님에 대해 증거한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복되시고 홀로 한 분이신 능하신 자이시다. ‘능하신 자’라는 원어(뒤나스테스)는 ‘주권자’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온 우주에 유일하신 주권자이시다. 그는 지혜와 능력이 무한하신 주권자이시다. 그는 실로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이시다.
둘째로, 오직 하나님께만 죽지 아니함이 있다. 세상의 모든 생명체들은 다 죽는 존재 혹은 죽을 수 있는 존재이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죽지 아니함이 있다. 그는 생명의 근원이시고 생명 자체이시다. 그는 누구에 의하여 생명을 얻으신 분이 아니시고 스스로 계신 분이시다. 여호와라는 그의 이름은 그가 스스로 계심을 나타내는 명칭이다. 우주의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다. 그는 살아계시고 영원히 살아계시는 하나님이시다.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인생들이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신다. 그것이 그의 거룩이며 그의 영광이다. 그는 이 세상에 거하는 인생들과 질적으로 다르시다. 그는 이 피조세계를 초월하여 저 높이 빛 가운데 계신 하나님이시다. 그의 빛은 그의 완전성을 나타낸다. 이 세상은 유한적(有限的)이고 불완전하지만, 그는 무한하시고 완전하신 하나님이시다. 그의 빛은 또한 그의 도덕성을 나타낼 것이다. 그는 도덕적으로도 무한히 거룩하시고 의로우시며 선하시며 진실하신 하나님, 곧 도덕적으로 완전하신 분이시다. 그의 초월하시고 완전하신 영광 앞으로 인생들은 아무도 감히 가까이 나아가지 못한다.
넷째로, 하나님께서는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으신 자이시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께서는 영이시다(요 4:24). 이 세상에서 물질들은 대체로 볼 수 있다. 물론, 공기나 전기나 전파같이 볼 수 없는 것도 있기는 하다. 영은 우리가 볼 수 없다. 그러나 영은 전기나 전파같이 비인격적인 것이 아니다. 영은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가지고 있는 인격적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격적인 영이시다. 그러나 그는 무한하시고 완전한 영이시다. 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 인생들에게 참된 복이요 영원한 생명이다.
11절부터 16절까지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성도에게 합당치 않은 돈 사랑을 피하고 그것을 다 버려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오직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아 성도다운 인격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마귀의 시험과 대적이 많은 이 세상에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잘 싸워야 한다. 이 싸움에 지는 자가 되지 말고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넷째로, 우리는 신앙생활의 목표요 우리의 소망인 영생을 반드시 취해야 한다. 영원하신 주권자 하나님께서는 이 복을 주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로 우리를 부르셨고 구원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 생활을 바르게 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단번 속죄로 주신 영광스런 천국과 영생을 다 받아 누려야 한다. 이것이 성도의 신앙생활의 목표요 소망이다.
17-21절, 정함이 없는 재물
[17-18절]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 . . .
바울은 말한다.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살아계신](전통본문) 하나님께 두며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본문은 부자들에게 몇 가지 교훈을 준다. 첫째로, 마음을 높이지 말라고 말한다. 사람이 재물이 많으면 마음이 높아지기 쉽다. 신명기 8:12-14, “네가 먹어 배불리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하게 되며 또 네 우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 가난은 사람을 겸비케 만드는 유익이 있고 부요는 사람을 교만케 할 위험성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요를 구하지 말고 일용할 양식으로 만족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둘째로,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라고 말한다. ‘정함이 없는’이라는 원어(아델로테스)는 ‘불확실함’이라는 뜻이다. 세상의 재물은 불확실하다. 그러므로 잠언 23:5는 “부자 되기에 애쓰지 말고 네 사사로운 지혜를 버릴지어다. 네가 어찌 허무한 것에 주목하겠느냐? 정녕히 재물은 날개를 내어 하늘에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고 말한다. 화재나 붕괴의 대형사고나 암이나 뇌졸증 같은 중병에 걸리면 수천만원, 수억원을 하루아침에 날릴 수 있다. 재물은 참으로 불확실하다.
셋째로, 오직 소망을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께’ 두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살아계시며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시고 누리게 하신다. ‘모든 것’은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을 포함된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의 목자이시며 우리에게는 부족함이 없다(시 23:1). 땅의 모든 것은 일시적이며 다 시들지만, 하나님은 영원하시다. 우리는 그에게만 소망을 두어야 한다.
넷째로,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라고 말한다. 선행은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이며(엡 2:10; 딛 2:14) 구원받은 모든 성도에게 마땅한 일이다. 선한 일은 전도와 구제의 일이다. 성도들은 이런 일에 부요한 자가 되어야 한다. 잠언 21:26은 의인은 아끼지 않고 구제한다고 말한다. ‘동정하는’이라는 말(코이노니코스)는 ‘후한, 관대한’이라는 뜻이다(BDAG). 초대 예루살렘 교인들의 모습처럼, 성도는 선한 일에 부요하고 서로 나누며 어려운 사람을 향해 관대해야 한다.
[19절]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 . . .
바울은 또 말한다.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영원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성도의 선한 행실은 장래의 영원한 생명을 보장하는 것과 같다. 예수께서도 말씀을 행하는 자는 기초를 반석 위에 세운 자와 같아서 홍수가 나도 무너지지 않겠다고 말씀하셨다(마 7:24-25). 반면에 성경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말한다(약 2:17, 26). 믿음이 선행을 동반하면 확실한 미래가 보장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과 영생을 얻지만, 선행을 통해 그 사실이 확실해지는 것이다(벧후 1:10-11).
[20절] 디모데야, 네게 부탁한 것을 지키고 거짓되이 일컫는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디모데야, 네게 부탁한 것을 지키고 거짓되이 일컫는 지식의 망령되고 허한 말과 변론을 피하라.” 바울이 디모데에게 부탁한 것은 그의 서신들 속에 기록된 교훈들이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이 성경책에 기록된 모든 말씀을 지키기를 원하신다. 이것이 보수 신앙이다. 보수 신앙이란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그대로 지키는 것이다. 이것이 옳은 길이다. 우리는 이 패역한 세대에 보수 신앙을 가진 자들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세상에는, 심지어 교회 안에도, ‘거짓되이 일컫는 지식’이 있다. 그것은 참된 지식이 아니다. 참 지식은 하나님과 그를 뜻을 알고 하나님의 아들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모든 죄를 멀리하는 것이다. 그러나 거짓된 지식은 망령되고 헛된 말과 변론을 일으킨다. 우리는 그러한 말과 변론을 피해야 한다. 우리는 오직 우리의 신앙과 생활을 유익케 하는 바른 지식, 곧 성경적 교훈을 붙잡아야 한다.
[21절] 이것을 좇는 사람들이 있어 믿음에서 벗어났느니라. . . .
바울은 또 말한다. “이것을 좇는 사람들이 있어 믿음에서 벗어났느니라.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너와 함께 있을지어다. 아멘].” 교회 안에는 잘못된 지식 곧 이단사설을 좇는 자들이 있고 가라지들과 쭉정이들이 있다. 우리가 사탄의 존재와 활동을 생각하면, 그런 자들이 있다는 사실은 그렇게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아니고 사탄의 사람들이다. 그들은 참된 믿음에서 이탈된 자들이다. 우리는 이런 자들이 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성경대로 믿고 행하는 보수 신앙을 가진 자들이 되어야 한다.
17절부터 21절까지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부자들은 마음을 높이지 말라. 둘째로,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라. 셋째로, 오직 소망을 하나님께 두라. 넷째로,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고 후한 자가 되라. 우리는 이러한 교훈을 힘써 지켜야 한다.
[시편 37편 강해 설교말씀] 악인과 의인의 보응(시 37: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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