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공부자료

[기독교 교리 성경공부] 히브리어와 헬라어로 보는 십일조

체데크 2021. 6. 7.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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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기독교 교리 성경공부 중에서 히브리어와 헬라어로 보는 십일조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성경에는 십일조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신약에 와서 십일조가 끝났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율법주의 십일조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성도이니 감사합니다. 하나님께 십일조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나에게 생명까지 주셨습니다. 영원히 죽어야 할 인생을 살려주셨습니다. 그래서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 감사하는 생활을 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십일조(十一條)

 

나라의 국민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 세금을 내는 일이다. 한 나라의 국민이라면 세금을 내고 살아야 한다. 세금을 내지 않는다면 나라의 국민이 아니다. 세금을 내지 않는다는 것은 국민의 길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세금을 내야 한다. 세금을 낸다는 것은 국민으로서 기본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 세금을 바치는 것이 바로 십일조다. 성도로서 기본 권리이지만, 많은 사람들은 십일조를 쉽게 생각한다.

교회에 들어와 신앙생활을 하면서 열심히는 하고 있지만, 십일조를 바치지 않는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은 왜 그럴까? 물질이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서 물질이 아깝기 때문에 하나님께 드리지 못한다. 세상에서도 사업하는 사람이 세금을 제대로 신고하지 않으면 세금폭탄을 맞게 된다. 자신의 수입은 많은데, 세금은 적게 신고해서 세금을 탈취한 것이다. 국가는 이런 사람들에게 세금 징수를 한다. 구원받은 성도라면 우리들도 하나님께서 주신 물질의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신앙의 성숙 자가 되어야 한다.

십일조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성을 유지하게 하는 기본 권리다. 세금을 내지 않는 사람들은 항상 불안하다. 언제 세금 징수원이 자신의 재산에 가압류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텔레비전에서 이런 일들을 보게 된다. 상습적으로 세금을 체납한 자들을 따라다니면서 재산을 압류하여 세금을 징수한다. 그럼 하나님의 나라는 어떨까? 하나님도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 자에게는 축복을 주지 않는다고 했다. 십일조는 구원과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성화와 관련되어 있다. 우리가 십일조를 바치지 않는다고 해서 지옥에 가는 것은 아니다. 단지 성화적인 부분에서 하나님께 상급을 받지 못한다.

우리가 십일조를 헤브라이즘 관점에서 살펴보자. 하나님이 원하시는 십일조는 무엇일까? 생각해 보고 나의 신앙을 점검해 보자.

 

헤브라이즘 관점에서의 십일조

하나님은 구약에서 십일조를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가? 하나님은 십일조를 자발적으로 드려지기를 원하고 있다. 성경에서 십일조를 제일 먼저 드린 사람은 아브라함이다.

14:20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 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아브라함은 자신의 조카 롯을 그돌라오멜 왕의 연합군의 손에서 구출해 오고 난 후에, 살렘 왕 멜기세덱에게 십분의 일을 바쳤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의 십일조를 바쳤다. 멜기세덱은 예수그리스도의 예표다. 아브라함은 성도의 예표가 된다.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쳤다는 것은 하나님께 자신의 것을 드렸다는 성도의 신앙고백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십 분의 일’이라는 단어가 מעשר(마아세르 4643) 십일조, 십 분의 일, 이라는 뜻이다. 이 단어를 상형문자로 보면 어떤 의미가 나올까? מ()은 물이라는 상형에서 왔다. 물은 성경에서 말씀을 상징하고 있다. 또한 운명이 전환되는 것을 말한다. ע(아인)은 눈이라는 상형에서 왔다. 눈은 항상 살펴보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은 항상 통찰력 있게 관찰하시고 보신다는 의미다. ש()은 치아라는 상형에서 왔다. 우리의 치아는 음식을 씹는 역할을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씹어 올바른 길로 가야 할 것을 의미한다. ר(레이쉬)는 머리라는 상형에서 왔다. 머리는 우두머리를 상징한다. 모든 것이 머리에서 통제가 되기 때문에 사람의 인성과 지혜를 상징한다.

우리가 십일조를 상형문자로 종합해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구원받은 자는 통찰력 있는 삶을 통해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 말씀대로 곱씹어,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드려지는 삶을 살아간다는 의미가 있다. 우리가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는 이유는 창조주 되시는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다. 내가 아무리 열심히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말해도,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 신앙생활을 하면, 나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 결국 구원받은 자가 아니다.

예수님께 찾아온 부자 청년은 자신은 어려서부터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율법의 말씀을 다 지켰다고 당당하게 말했다. 이때에 예수님께서 네가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말씀하시면서 네가 가지고 있는 재물을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했다. 그때에 부자 청년은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재물에 대한 욕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재물이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니, 도저히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줄 수가 없었다. 부자 청년은 얼굴이 어두워서 예수님을 떠나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이런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할 수 있는가? 율법에 빠져 열심히 신앙생활은 했지만 영생은 없다. 하나님 앞에 십일조를 드리지도 않았다.

반면 삭개오는 어떤가? 예수님을 만난 후에 자신의 절반의 재물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주겠다고 했다. 또한 다른 사람의 재물을 억지로 빼앗은 일이 있으면 4배로 갚겠다고 했다. 부자 청년과는 정반대의 현상이 나타났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제대로 만난 것이다. 영생의 주인을 제대로 만나니 변화가 일어났다. 그렇다면 성도의 기본은 무엇인가? 십일조다. 내가 아무리 구원받았다고 떠들어 대도 나의 삶에 십일조 생활이 없다면, 이것은 온전하게 변화된 것이 아니다. 내가 영원한 생명을 얻었는데, 하나님께 드리는 십일조가 아까워 드리지 못하고 있다면, 이것이 온전한 생명을 얻은 것인가? 생각해 보아야 한다. 부자 청년의 신앙을 하고 있는 것이지, 삭개오의 신앙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십일조로 신앙고백을 하는 자에게 어떻게 하시는가?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영생의 복을 받은 자들이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림으로 육적인 복도 받는다.

3: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하나님은 말씀하고 있다.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라고 했다. 성도는 먼저 하나님의 집을 채워야 한다. 하나님은 자신을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않는가? 보라고 했다.

그럼 온전한 십일조는 무엇인가? 여기에서 ‘온전한’이라는 단어가 כל(3605) 모든, 전체, 완전함, 이라는 뜻이다. 온전한 십일조는 전체를 드리는 것을 말한다. 나의 수입에서 십일조의 전체를 드리는 것을 말한다. 내가 받은 월급에서 이것, 저것, 빼고 난 후에 드리는 십일조가 아니라, 먼저 하나님의 것을 빼고 난 후에 나의 것을 쓰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온전한 십일조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쓸 것 모두 다 쓴 후에, 나머지에서 십일조를 드리는 사람이 있다. 이것은 온전한 십일조가 아니다. 하나님은 십일조를 도둑질하지 말라고 했다.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면 하나님께 복을 받을 수가 없다. 세상에서도 세금을 내지 않으면 용서받지 않고, 자신의 재산에 압류를 걸어 세금을 징수한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구원받은 자라고 확신한다면 십일조 생활을 해야 한다. 마음속으로 아무리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행동으로는 전혀 십일조 생활을 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아니고 주님을 믿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주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내가 가지고 있는 재물의 십일조는 아깝지 않다. 현재 내가 이 말씀을 공부하면서 마음에 찔림이 있고, 시험이 든다면 회개해야 한다. 십일조는 하나님이 나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가장 기본적으로 하는 신앙의 고백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우리가 십일조를 헬레니즘 관점에서 공부해 보자. 구약의 관점에서 십일조를 배웠다면 신약의 관점에서도 배워야 한다. 어떤 사람은 십일조는 구약에만 있는 것이지 지금 시대는 십일조는 해당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심지어 목사도 십일조는 구약에서 끝난 것이기 때문에 더 이상드리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치는 자가 있다. 이 사람은 무지를 드러내는 사람이다. 성도와 하나님의 관계를 끊으려고 하는 목사다. 과연 신약에 십일조가 없을까? 이런 자들은 신약에는 십일조가 없다고 가르치고, 십일조를 내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친다. 이제 헬레니즘 관점에서 십일조를 보자.

 

헬레니즘 관점에서의 십일조

성경은 구약과 신약이 일맥상통하고 있다. 저자가 한 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주관하셔서 성경을 기록한 저자이기 때문에 구약에서 말씀하시는 것과 신약에서 말씀하시는 것이 똑같다.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이 다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하나님이 구약에서 십일조를 말씀하셨는데, 신약에서는 십일조가 없어졌다고 한다면 어불성설이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을 따로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다.

23:2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예수님께서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말씀하고 있다.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요한 믿음은 저버렸다고 말씀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더 중요한 말씀을 하고 있다. 십일조를 드리는 정확한 정의가 무엇인지를 깨닫고,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외식하는 자들은 십일조의 정의는 사라진 채, 율법의 형식에 빠져 있었다. 하지만 예수님은 율법의 형식과 십일조의 정의 모두를 지키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에서 십일조를 드리되’ αποδεκατοω(아포데카토오 586) 십 분의 일을 바치다, 십일조를 징수하다, 라는 뜻이다. 이 단어는 απο(아포 575) ~로부터, 라는 뜻과 δεκατοω(테카토오 1183) 십 분의 일을 취하다, 라는 뜻의 합성어다. 헬레니즘의 관점에서 십일조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재물을 하나님께 십 분의 일로 돌려드리는 것이다. 재물은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인식이 중요하다. 신약에는 십일조를 드리지 않았다고 주장하는데 절대 그렇지 않다. 외식하는 자들은 현재 열심히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고 있었다. 직설법, 현재 시제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십일조를 드리는 열정은 뜨거웠지만, 왜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려야 하는지가 아니라, 자신의 의를 나타내는데 급급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책망하셨다.

우리가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나의 의를 나타내기 위해서가 아니다. 성도가 드려야 할 기본 책임을 다하는 것이며, 감사의 행동이다. 율법주의자들은 자신의 의를 나타내기 위해서 열심히 십일조를 드렸던 것이다. 이런 자들은 십일조는 열심히 드리고 있지만, 구원의 은혜를 받지 못한 사람이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신의 의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이런 자들이 누구인가?

눅 18: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바리새인과 세리가 기도할 때에 바리새인의 기도다. 자신은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소득의 십일조를 열심히 드렸다고 기도한다. 신약에서도 열심히 십일조를 드렸다. 이런 사람들이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지 않았다고 말하는 곳이 신약 어디에 있는가? 바리새인은 열심히 소득의 십일조를 드렸다. 중요한 것은 구원의 은혜를 받지 못하고 드렸기 때문에 문제다.

그럼 우리는 어떠한 십일조의 관념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가? 먼저는 헤브라이즘 관점을 가져야 한다. 구원받은 백성은 하나님께 감사하여 고백하는 관점으로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 나의 의가 아니라, 영생을 얻었으니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는 것이다. 다음은 헬레니즘 관점에서 십일조를 깨달아야 한다. 모든 재물은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 재물은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셨기 때문에 내가 소유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께 십일조를 바쳐야 한다. 율법의 의를 나타내기 위해서 교회에서 십일조를 많이 내는 것이 아니다.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 액수를 부풀리는 이런 십일조는 안 된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 십일조는 나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드러내는 것이다. 나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 십일조다. 내가 십일조 생활을 함으로 믿지 않는 자들이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을 칭송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십일조다. 이런 십일조 생활을 할 때에 온전한 십일조가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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