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라기 3장에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십일조에 관하여 말씀합니다. 우리가 십일조라는 단어를 통해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십일조의 의미를 깨달아 보겠습니다.
십일조 מעשר(4643, 마아세르)(말 3:10)
말 3: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מעשר(4643, 마아세르) 십분의 일, 십일조
마아세르(명남)는 '십분의 일, 십일조 tithe, 십분의 일부분 tenth part'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32회 나온다.
1. 정의: '십일조'라는 말은 '십분의 일' a tenth이나 '어떤 것의 십분의 일을 받다 혹은 바치다' to take or give o tenth of something라는 의미를 지닌 히브리어 단어와 헬라어 단어를 번역한 것이다(히브리어 마아세르: 십일조 a tithe, 참조: 에세르: 십 ten: 헬라어 데카: 십 ten). 십일조는 보통 땅의 소산으로 바쳐졌으며, 하나님의 성소와 제사장들의 지원에 쓰이도록 예배자가 하나님께 마땅히 바쳐야 할 전체 소산의 일부로 간주되었다.
2. 기원: 그 분할 소산(fraction), 즉 십일조가 언제 그리고 왜 종교 "세"로 채택되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시기에 관한 한, 우리는 그 관습이 아주 오래전에 널리 유포되었다는 사실 외에는 달리 할 말이 없다. 아마도 그 관습은 이스라엘 역사 이전부터 시행되었을 것이며 셈족 사람들만이 이 관습을 따른 것이 아니라 인도 - 게르만 사람들까지도 이 관습을 좇았던 것 같다.
십분의 일이 받아들여진 이유는 분명히 고대 사람들의 수를 분류하는 방식이 십진법에 기초하였기 때문인 것 같다. 그 분류법은 보통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10개 씩의 손가락과 발가락에 의거하여 쉽게 만들어졌다. 그러나 십일조는 고대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수에 대한 관념에 의거하여 선택되었던 것 같다. 상황에 따라 다소간의 차이를 포괄하는 '십'이라는 숫자는 고대 사람들이 좋아하던 숫자들 중의 하나였을 뿐만 아니라(창 31:7) 특히 성별 된 다른 두 개의 숫자들, 즉 3 및 7과 함께 거룩한 숫자로 간주되기도 했던 것 같다. 구약성경에서 십이라는 숫자가 얼마나 자주 거룩한 사건들 속에 나타나는지에 대해 주목하라. 즉 창 1장에는 "하나님이 가라사대", "하나님이 보시기에", "하나님이 복을 주시며"라는 성구들이 서로 거의 일치되지 않고 각각 10회, 7회, 3회씩 나타난다. 노아의 홍수 이전에 살았던 열 명의 족장들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고(창 5장), 홍수 이후의 열 명의 족장들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다(창 11:10-30). '10'이라는 숫자는 노아의 방주 제도에서 사용되었으며(창 6:15) 자주 천막의 제도와 설비에서 사용되곤 하였다(출 26장; → 장막 Tent). '10'이라는 숫자는 또한 묵시 문학의 상징적 표현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나며(단; 계), 마태는 예수님의 메시아적 권능이 열 가지의 기적에 의해 입증되었다고 본다(마 8-9장).
3. 일반 세속 문헌에 나타나 있는 십일조: 비록 십일조 제도가 이스라엘 문화의 중요한 요소로 발전되었다 할지라도 그것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성경 외의 문헌들은 여러 곳에서 십일조 제도가 시행되었음을 시사해 준다. 때로 십일조 제도는 순전히 정치적인 양상을 띠기도 하였다. 즉 백성들이 왕에게 바친 세금이나 정복자가 피정복 국가에 부과한 조세라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였다(Diod. Sie, 20, 14).
그러나 고대 사람들이 십일조라는 말을 사용할 때는 거룩한 의미와 세속적 의미를 동시에 지칭할 때가 더욱 많았다. 느부갓네살 2세가 다스리는 동안, 바벨론에서는 왕을 포함한 그 나라의 모든 사람들이 신전에 십일조를 바쳤으며, 한편으로 바벨론의 왕들은 또한 모든 수입의 십분의 일을 거둬들였다(C. H. W. Johns, Babylonian and Assyrian Laws, Contracts and Letters, 1904, Xi, 205-206). 페르샤의 총독들도 수입의 십분의 일을 요구하였다(Aristot., Oecon. 134b.; 135b). 더구나 페르샤의 고레스 왕은 휘하 장병들에게 전리품의 십분의 일을 제우스신에게 바치도록 명령하였다(Hdt., I, 89). 파우사니이스(Pausanias, A. D. 2C)는 헬라나 로마에서 신들에게 간혹 바쳤던 조세로서의 십일조세에 관한 많은 실례를 제공해 준다.
또한 일반 세속 문헌들에는 오직 거룩한 의미로만, 즉 하나님께 마땅히 바쳐야 할 희생제물이라는 의미로만 사용된 십일조 제도의 실례가 무수히 많이 기록되어 있다. 아가멤논은 미케네를 점령하고 나서 신들에게 십일조를 바쳤다(Diod. Sic., 11, 65). 에트루리아 사람들을 정복하고 나서 리파리아 사람들은 델피 신전에 전리품의 십일조를 바쳤다고 한다(ibid. 5, 9; Hdt., 7, 132; 헬라인들 사이에 유포된 더욱 풍부한 십일조 제도의 증거에 관하여 W. H. D. Rouse, "Tithes 십일조[헬라]", ERE XII 350-51을 참조).
4. 구약성경에 나타나 있는 십일조: 구약성경에 나타나 있는 십일조에 대한 개념은 시대가 흐르고 이스라엘 사회가 더욱 복잡화되어감에 따라 발전된 것 같다. 매우 초기의 기록에는 아브람이→멜기세덱에게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주었다고 기록되어 있다(창 14:20). 그러나 아브람이 바친 십분의 일은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 중에서 바친 것이지 땅의 소산 가운데서 바친 것이 아니었으며, 더구나 아브람에게 십분의 일을 바치라고 명한 법에 관한 언급도 없고 그가 그것을 준 이유에 관한 설명도 없다. 야곱도 하나님께 십일조를 바치겠다고 서원하였다(창 28:22). 게다가 야곱은 자발적으로 십일조를 드렸던 것 같다. 즉 야곱은 자신을 성공시키시고 다시 안전하게 집으로 돌아오도록 이끌어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표시하는 약속으로 십일조를 드렸다. 그러나 그가 왜 십분의 일을 드렸는지 혹은 이 십일조가 어떻게 드려졌는지, 혹은 하나님을 위해 누가 이것을 받았는지에 관하여는 전혀 언급이 없다.
출애굽기에 기록되어 있는 대 법전에 십일조 대한 언급은 없으면서, 땅의 첫 소산을 바치는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법률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상하다(출 23:16, 출 23:19, 출 34:22-26). 농작물 등의 첫 번째 소산이자 가장 잘 되었다고 생각되는 소산을 하나님께 희생제물로 바쳤던 것 같다. 이것은 모든 것이 일차적으로 하나님께 속한다고 생각하는 관념에 기인하는 것 같다(신 26:10). 게다가 아마도 첫 소산을 바치는 행위가 십일조 제도로 발전하였으며 바쳐야 할 첫 소산의 분량을 엄밀하게 규정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십일조'라는 명칭이 받아들여졌던 것 같다. 그러나 첫 소산과 십일조의 관련성에 관한 이 문제는 성경의 본문에 이것들이 동일하게도 나타나고(신 26:1-15) 그것들이 구별되기도 하기(느 12:44) 때문에 명료하게 해결될 수 없다. 또한 십일조라는 명칭을 둘러싸고 있는 역사를 정확하게 재구성한다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a) 처음부터 땅의 소산 - 열매, 과수 등 - 의 십분의 일은 어찌 되었든 주님께 속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것은 '여호와께 성물'이었다(레 27:30-32). 처음에는 사람이 직접 곡식, 포도주, 기름 등과 같은 소산의 십분의 일을 제물로 바쳤다. 해마다 사람들은 십분의 일을 지정된 어떤 장소로 가져가서 거기에서 아들, 딸, 노비와 마침 한 자리에 있는 레위인과 함께 그것을 먹게 되어 있었다(신 12:6, 신 12:11, 신 12:17). 만일 이 정해진 장소가 너무 먼 곳에 있다면 십일조를 돈으로 바꿔서 그곳에서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그 돈으로 사 먹을 수 있었다. 거기에서 제물을 바치는 사람은 가족, → 레위인 Levite들과 함께 하나님 앞에서 먹고 즐거워 하였다(신 14:22-29, 신 15:19-23). 레위인들이 매년 이 십일조 축제에 참여했지만 이 십일조 제도가 오직 그들만을 위해서 존재했다는 사실을 시사해주는 내용을 이 본문에서 찾아볼 수 없다는 점에 유의하라. 오히려 본래 십일조 축제는 땅의 주인과 그의 가족들이 기쁨을 나누는 기회를 마련해 주기 위해 존재했다고 보는 편이 더 타당성 있다.
(b)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스라엘의 사회는 발전하였으며, 사회적 문제도 점차 증가해 갔다. 이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십일조에 적용되는 법률이 수정되었다. 이제 땅의 소산 중에서 십분의 일은 새로운 방법으로 하나님께 바쳐졌다. 집을 떠나 먼 곳에 가서 봉헌자 자신이 소비해버리는 대신에 삼년에 한 번씩 십일조 예물을 각 지방의 성읍에 저장해 두었다가 그 성읍 안과 주변에 살고 있는, 물질적으로 어려운 레위인들, 우거하는 객들, 고아와 과부들을 만나면 그들을 위해 그것을 사용했다(신 14:28, 신 26:12).
(c) 점차 이스라엘의 예배가 성장해 갔다.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의 수효도 증가하였다. 이 사람들에게는 양식을 공급해 줄 땅이 배당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생활비와 성소의 유지비는 백성들의 헌납 물로 충당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성소의 설비물이 점차 많아지고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의 수효가 점차 증가함에 따라 3년에 한 번씩 바치는 십일조만 가지고는 레위인들 및 제사장들의 생활비와 성소의 유지비를 충당할 수가 없었다. 이리하여 다음과 같은 십일조의 법률이 출현하게 되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모든 십일조를 레위 자손들에게 기업으로 주셨다(민 18:21). 그 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엄격히 말해서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의 생활비를 지급하고 하나님의 집을 유지하기 위해 매년 십일조를 바쳤던 것 같다. 레위인들은 각 지방에서 거둬들인 십일조 예물을 조사하였고 아론의 자손인 제사장들의 순회 때에 레위인들을 동반하였다. 레위인들은 거둬들인 십일조 예물 중에서 십분의 일을 제사장에게 주었으며(민 18:28, 느 10:32-39) 그에 대한 보답으로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은 성소에서 봉사하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땅히 지켜야 할 십일조 의무를 게을리한 것은 단 한 번에 그친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레위인들은 밭을 경작하여 자신들의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성소를 떠날 수밖에 없었으며 이리하여 성소는 폐허가 되고 말았다. 히스기야(왕하 31:5 이하)와 느헤미야(느 13:12)와 말라기(말 3:8, 말 3:10) 시기에 개혁이 일어났다. 이리하여 백성들은 다시 그들이 바쳐야 할 십일조를 바쳤으며 성소는 복구되었고,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또다시 하나님의 율법에 전적으로 헌신할 수 있었다.
5. 헬라화된 후기 유대교에서의 십일조: 비록 구약성경에서처럼 십일조에 대한 관념이 납세자의 의식에만 남아있을 뿐, 실제로는 십일조 예물이 거의 징수되지 않았다 할지라도 유대교가 헬라화된 시기에도 여전히 십일조 예물은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의 주요 수입원이었다. 그러므로 경우에 따라서 욕심 많은 대제사장들은 악당들을 탈곡 마당에 보내어 반드시 십일조를 받아와야 한다고 다짐하였다. 소농들은 이 중요한 종교적인 의무 이행을 의심스럽게 생각하였다(Josephus, Ant. 20, 181:20, 206 이하). 기독교 형성 직전과 초대 기독교 시기에 성직자들은 성전이 유지비와 자신들의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 십일조라는 명목으로 일종의 인두세를 거둬들였으며 - 매년 반 세겔씩(마 17:24, Josephus, Ant. 18, 9, 1; 미쉬나 소책자 Shekalin; 참조: 출 30:11-16) - 그들은 팔레스틴의 유대인들에게서 뿐만 아니라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게서조차 이 세금을 거둬들였다(이처럼 세금 징수의 대상을 팔레스틴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확장시킨 것은 랍비들이 새롭게 고안해 낸 제도였다).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고 난 후에도 여전히 랍비들은 십일조 과세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그들은 그것을 세상을 창조하는데 공헌한 세 가지 요소들 중의 하나라고 간주하였으며(창 R. 1, 6) 이스라엘 사람들이 수많은 사악한 것들로부터 피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수단으로 보았다(Jewish Encyclopedia, XII, 151b).
6. 십일조의 의미: 십일조를 드리는 행위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시 24:1)라는 기본적인 관념에 기초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십일조를 드린다는 것은 땅과 그 소산이 하나님의 것임을 분명하게 인정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이 일을 소홀히 한다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이 물질 자체를 훔치는 것과 동일시되는 것이 아니라 - 이 물질은 이미 하나님께 속해 있다(시 50:10) - 이 물질이 하나님께 속하며 오직 그의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것과 동일하게 취급되었다(말 3:8, 말 3:10). 인간의 재물은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 선물로 간주되었으며, 이에 대한 응답으로 인간은 적당히 사의를 표했다. 게다가 십일조는 관용을 베풀어 주심에 대해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의 표시라는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참조: 28:20-22). 마지막으로 십일조는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의 생활비를 지원해주고 가난한 사람들의 식량을 공급해준다는 의미로 발전하게 되었다. 따라서 십일조는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 자신의 구속 활동에 동참케 하시는, 즉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지대한 관심을 갖고 계신 가난한 자와 빈궁한 자들에 대해 관심을 갖도록 이끄시는 하나님의 방식으로 간주되었다.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자신의 축복을 나눠주신 것처럼 그 축복을 받은 사람들도 자신보다 불행한 사람들에게 축복을 나눠주어야 한다. 그런 까닭에 종교 지도자들은 되풀이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십일조의 중요성을 상기시켰다. 즉, 십일조를 바치면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되지만 그것을 거부하면 하나님의 저주를 받게 될 것이다(겔 44:30 이하, 말 3:8, 말 3:10).
(참조: G. F. HOWTHRNE).
[참고 - 구약성경에서 십일조의 개념은 구약성경 신학에서 상당히 중요한 개념들 중의 하나이다. 할례(그러나 유아 할례는 이스라엘 외에서는 문헌으로 증명되지 않는 것 같다), 희생 제사, 음식물 규제, 등등과 마찬가지로 십일조 역시 고대 근동에서 이스라엘만의 독특한 것은 아니었다. 고대의 다른 나라에서도 십일조가 행해졌다. 애급뿐만 아니라 메소포타미아에서 십일조가 행해졌다(참조, 예, CAD, Ⅳ-E, 369에서 신들이나 신전에 바친 십일조에 관하여 아카드 문헌에서 인용한 것들). 십일조는 모세 율법에서 이스라엘에게 최초로 도입된 것도 아니었다. 아브람은 멜기세덱에게서 제사장의 축복을 받은 후에 그에게 전쟁 전리품 중에서 십분의 일을 바쳤다(창 14:20, 참조, 히 7장, 특히 히 7:4). 그리고 야곱도 여호와께서 계신 곳까지 이르는 사닥다리 꿈을 꾼 다음에 벧엘에서 하나님께 십분의 일을 바치겠노라고 서원했다(창 28:22).
모세 법령에는 십일조 원리에 대하여 의미와 형태가 제시되어 있다. 톰프슨(J. G. S. S. Thompson)이 관찰한 바와 같이(NBD, p. 1284) 율법서에는 십일조에 관한 다음의 3가지 기본적인 문제에 해답을 주는 3가지 교훈이 나온다.
(1) 십일조는 무엇인가? (2) 누가에게 바치는가? (3) 어디에서 바쳐야 하는가?
첫째로 '십일조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레위기 27장의 후반부(레 27:30-34)에 해답이 주어져 있다. 율법서에 부수적으로 삽입되어 있는 듯한 이 중요한 구절들에서 십일조의 범위가 가장 광범위한 가능한 조건들로, 그리고 농경 사회에 완전히 합당한 방식으로 제시되어 있다. 그 땅의 모든 십분의 일은 여호와의 것이다. 십일조에는 예외 없이 동물의 생명뿐만 아니라 식물도 포함된다. 더욱이 십일조는 첫 열매의 제물과 혼동되어서는 안 되며(출 22:29-30[H28-29], 참조, Eichrodt, Theology of the Old Testament, Ⅰ, p. 153), (자기 자신을 위해 더 나은 것을 떼어 놓고) 일부분에 근거하여서도 안된다. 예를 들어 동물을 십일조로 바치는 경우 목자는 단순히 우리에 남아 있는 그대로의 상태에서 십분의 일을 헤아려 그 동물들을 하나님의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 농부는 그의 농산물의 십일조를(운반하기 쉽도록) 현금으로 환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어떠한 금전적 이익을 취하지 못하도록 그것에 오분지 일을 더 추가해야 했다. 동물을 십일조로 바치는 경우에는 그러한 교환은 할 수 없었다. 모든 십일조는 '여호와께 거룩한 것'이었으며(qodesh를 보라) 여호와께만 오로지 사용되도록 따로 구별되었다.
'누구에게 십일조를 바쳐야 하는가?'라는 두 번째 질문의 해답은 민 18:21-32에 주어져 있다. 레위인은 가나안에서 토지 유업을 받지 못하게끔 되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 섬기는 그들에게 주어지는 보답은 '이스라엘의 모든 십일조'였다(민 18:21). 레위인도 마찬가지로 자기들의 수입의 십분의 일을('십일조의 십일조', 민 18:26)을 바쳐야 했는데, 여호와께서는 이것도 농부들이 곡물을 바치는 것과 같은 것으로 취급하셨다. 레위인이 바치는 이 십일조는 제사장에게 주어졌다.
'어느 곳에서 십일조를 드려야 하는가?'라는 세 번째 질문의 해답은 신 12:1-14과 신 14:22-29에 주어져 있다. 십일조와 희생 제사는 '네게 보이는 아무 곳'(신 12:13)에서 바쳐서는 안 되고 '오직 너희의 한 지파 중에 여호와의 택하실 그곳'(신 12:14)에서 드려야 했다. 이 중심 성역은 후에 이어서 예루살렘으로 결정되었으며, 새로운 땅에서는 이 인정된 장소에서만 십일조와 예물을 바치도록 하였다(신 12:6). 이러한 십일조와 예물을 바칠 때 거룩한 식사가 거행되었으며, 여기에 레위인이 참여하여 즐거움으로 먹으며 하나님의 굉장한 축복을 찬양하였다(신 12:7, 참조, 신 14:23). 만일 그 택하신 곳까지 거리가 너무 멀 것 같으면 소산물을 그에 상당하는 화폐로 바꿀 수 있었다. 신 14:28-29에는 매 3년마다 자신들의 지역 내에서 십일조의 분배에 대한 규정이 제시되어 있다. 이 십일조의 경우에는 가난한 자와 방어할 수 없는 자의 필요를 강조한다(참조, 신 26:12-15).
이러한 것들은 '모세 오경에서 십일조에 관한 비교적 단순한 율법들'이다(Thompson). 그러나 이러한 단순한 율법들에 대한 복잡한 점이 몇몇 있다. 그 복잡한 점 가운데 하나는 이스라엘이 지불해야 하는 십일조의 수에 관한 것이다. 혹자는 하나 이상의 십일조가 논의 하에 있었으리라는 어떠한 생각이나 의심도 하지 않고 율법서에 있는 규정을 살펴본다. 그러나 란스델(Landsdell)과 몇몇 다른 학자들은 특히 신 14:22-29을 레위기, 민수기와 비교한 것을 근거로 하여 3가지의 십일조를 주장한다. (1) 레위인들에게 주어진 십일조(신 14:27, 민 18장),
(2) 거룩한 절기를 위한 십일조(신 14:22-26), 그리고 (3) 가난한 자를 위하여 지방에서 3년마다 바치는 십일조(신 14:28-29). 란스델(Landsdell)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따라서 모세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들의 종교와 관련해서 매년 십분의 이를 바치도록 명하여 3년째의 연말에는 수입의 십분의 삼을 바치도록 명하는 것 같다'(The Tithe and Scripture, p.36; for contra, see S. R. Driver, Deuteronomy, ICC, pp. 166-73; M. G. Kline, Treaty of the Great King, Eerdmans, 1963, pp. 87-88에서는 주장하기를 한 번의 십일조의 적은 부분만이 공공 식사를 위해 소용되었으며 가난한 자를 위한 십일조는 3년마다 드리는 십일조와 6년마다 드리는 십일조를 교대로 이용했다고 한다). 데니스 레트린드(Dennis Wretlind)는 두 종류의 십일조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하나는 기본적인 십일조(레위기 27장과 민수기 18장)였고 다른 하나는 부차적인 십일조들(신 12, 14, 16장)이었는데, 부차적인 십일조들의 목적은 우리 주님께서 마 23:23("의와 인과 신") 말씀하신 '정의, 자비, 신실'-레위인들에 대한 정의, 하나님에 대한 신실, 가난한 자에 대한 자비-과 관련된다(미 출판된 석사학위 논문 'Financial Stewardship in the New Testament Church', Western Baptist Seminary, 1975).
십일조에 관한 모세 오경에서의 규정의 두 번째 복잡성은 그 십일조 규정의 오용과 관련이 있다. 이스라엘과 후기 유대교는 두 가지 방법들 중의 한 방법에서 오류를 저지르기 일쑤였다. 그들은 율법을 너무나 엄격하게 지킴으로써 그 의도된 목적을 상실하였으며, 따라서 십일조는 신구약 중간기와 신약성경 시대에 하나님으로부터 자비를 얻는 수단으로 간주되기에 이르렀으며(참조, 눅 11:42), 아니면 이스라엘 백성은 십일조를 무시하고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 하는 범죄를 저지르게 되었다(말 3:8-10).
구약성경에서 십일조에 대한 관점은 두 가지 방향, 즉 하나님을 향한 면과 인간을 향한 면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전자에 관하여 십일조는 결코 부담이 따르는 짐이 되도록 의도된 것이 아니었다. 즉 사람은 자신이 벌어들인 수입의 십분의 일을 드려야 한다. 오히려 십일조는 기쁨이 넘치는 자발적인 예배의 행위였다(에, 신 12:12, 참조, 고후 9:7의 "즐겨내는 자"). 사람이 가진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다(이점에 대해 J. B. Payne, The Theology of the Older Testament, p. 434를 보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맡고 있는 것의 적은 부분을 하나님의 사용을 위해 드리는 것은 복종과 신뢰를 하는 감사하는 행동이다. 둘째로 인간을 향한 측면, 혹은 공동체적 의미를 지닌다. 십일조는 하나님의 백성(암)의 내적 관계(inter-relatedness)의 일부이다. 레위인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하고 상업적인 활동을 하지 않기 때문에 십일조로부터 직접적인 이익을 얻는 사람들이다(민 18:21). 그러므로 레위인들의 직무와 비 레위인들의 일상의 노동 사이에 내적 관계가 존재했다. 이러한 신인 협력적(synergistic) 유대에서 서로에 대한 그들의 필요를 정규적으로 기억하게 된다. 게다가 가난한 자들, 과부들, 그리고 고아들(일반적으로 무시당하는 자들)은 3년마다 드리는 십일조로 먹여 살리도록 했다(신 14:29). 비록 적나라한 처지이긴 하지만 저들 역시 공동체(암)의 일원이다. 십일조는 그들의 복지를 보장해주며(참조, 참된 종교에 대한 되풀이된 시금석, 과부와 고아에 대한 관심, 예, 사 1:23, 약 1:27), 건강한 사회를 향한 주요한 디딤돌이 되었다. - R. B. Allen.] (p 1133-1134*).
[사무엘상 20장 구약 강해설교] 요나단이 다윗과 언약함(삼상 20: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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