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은 로마서 1장에서 이방인들의 죄를 하나님이 방치하신다고 말씀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죄를 지어도 구원받은 사람들보다 더 잘살고 높은 관직에 올라 출세하는 경향이 더 많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그들에게 일반적인 은총의 축복을 주셨습니다. 결국 그들이 깨닫지 못할 뿐입니다. 이런 자들이 죄를 지어도 하나님은 놔두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선택받은 백성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종말 때에 주님이 재림하시면 모두 심판하신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백성으로서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이방인들의 죄를 하나님이 방치함(롬 1:26-32)
26절 디아 투토 파레도켄 아우투스 호 데오스 에이스 파데 아티미아스 하이 테 가르 델레이아이 아우톤 메텔락산 텐 퓌시켄 크레신 에이스 텐 파라 퓌신
27절 호모이오스 테 카이 호 아르렌 아르렌 아피에미 호 퓌시코스 크레시스 호 델레이아스 덱세카우데산 엔 테 오렉세이 아우톤 에이스 알렐루스 아르세네스 엔 아르세신 텐 아스케모쉬넨 카테르가조메노이 카이 텐 안티미스디안 헨 에데이 테스 플라네스 아우톤 엔 헤아우토이스 아폴람바논테스
성 경: [롬1:26,27]
내어 버려 두셨으니 곧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 몸은 하나님의 성전인데(고전 6:19)., 그것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니, 하나님은 떠나시고 죄는 그 몸에서부터 세력을 얻게 되어 먼저 음행이 나타난다(고전 6:18).
성경은, 성적 죄악(性的罪惡)이 몸에게 대한 것이라고 한다. 곧,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게 죄를 범하느니라”라고 하였다(고전 6:18). 이 말씀의 의미는 그 성적 죄악이 주님의 성전 된 몸의 거룩을 범한다는 것이다. 다른 죄악은 남들에게 손해를 주는 것이다. 그러나 선적 죄악은,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에게 손해를 주는 것이다. 특히 그 손해 중에 종교적인 것이 더욱 크다. 이 죄악은 도덕 방면에 속한다고 할 것이나 역시 종교적 죄악이라고 할 수 있다.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곧,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기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창기와 합하는 자는 저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나니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고전 6:15-17)고 하였다. 그러므로 인간이 그 몸을 가지고 음행을 범하면 그것은 주님의 성전을 더럽히는 범성죄(犯聖罪)이며, 주 앞에 정절을 지키지 않는 훼절(毁節)의 죄도 된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상 숭배자들을 가리켜서도 “음란한 자들”이라고 한 것이다(시 50:18 ; 렘 3:8 , 5:7, 7:9, 9:2, 13:27, 23:14, 29:23 ; 겔 23:43 ; 호 7:4 ; 말 3:5). 이렇게 성적 죄악은 이중 죄악이다. 곧 도덕상으로 인륜을 어지럽게 하는 죄악이고 종교상으로도 하나님 앞에 범성(犯聖) 훼절(毁節)하는 죄악이다.
안셈(Anselm)은 말하기를, “다른 죄들은 대항하여 싸우므로 이길 수 있으나 성적 죄악은 피하므로야 이긴다”라고 하였다. 고전 6:18 ; 딤후 2:22 참조. 요셉이 이 죄를 이긴 방법도 이러하였다(창 39:1-18). 위에 인용한 안셈(Anselm)의 말은 물론 “음행을 피하라”는 성경의 말씀에 의거한 것이다. 죄악의 많은 종류들 가운데 매력을 가지고 유인하는 것들이 있는데, 선적 죄악이 거기 속한다. 성적 죄악은, 외모의 미를 가지고 사람을 꾀어 넘기는 독한 것이다. 그것은 마치 족사의 이빨에서 나오는 살인 독과 같다. 독사의 살인 독을 현미경으로 검사하면, 말할 수 없이 아름답다고 한다. 또 그것은, 마치 알프스산의 아름다운 잔디 언덕과도 같다. 많은 여행자들은, 그런 아름다운 잔디가 있는 땅을 든든히 믿고 발을 붙이려다가 떨어져 죽은 일이 많다고 한다. 성경은 이 죄에 끌려가는 것이 마치 “소가 포주로 가는 것 같고 미련한 자가 벌을 받으려고 쇠사슬에 매이러 가는 것과 일반이라 필경은 살이 그 간을 뚫기까지에 이를 것이라 새가 빨리 그물로 들어가되 그 생명을 잃어버릴 줄을 알지 못함과 일반이니라”(잠 7:22-23). 하였고, 그런 죄를 범하는 집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 집은 음부의 길이라 사망의 방으로 내려가느니라”라고 하였다(잠 7:27).
28절 카이 카도스 우크 에도키마산 톤 데온 에케인 엔 에피그노세이 파레도켄 아우투스 호 데오스 에이스 아도키몬 노운 포이에인 타 메 카데콘타
성 경: [롬1:28]
죄는, 인간에게 대하여 병균과 같이 신속한 번식 성을 가지고 인간을 아주 점령해 버리고 또 살해한다. 몸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는 죄(21-13)는, 번식하여 무서운 죄의 수렁에 이르렀으니 그것을 29-32에서 볼 수 있다.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 이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을 실용적 지식으로 가질 가치가 없다고 생각함을 의미한다.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사. - 이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불필요하다는, 그들의 잘못된 나음 그대로 내버려 둠을 의미한다.
합당치 못한 일. - 곧, 인간의 본분과 책임에 부합하지 않는 행동을 의미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인간의 요점일 뿐 아니라, 그것에 있어서 전 가치(全價値)를 의미하는 것이다(전 12:13). 여기 기록된 죄악의 목록을 분류하면 다섯 가지니 ⑴ 불의, 추악, 탐욕, 악의는, 사람이 자기에게 대한 취급을 잘못하는 범죄요, ⑵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은, 사람이 남들과 경쟁하는 관계로 생기는 범죄요, ⑶ 수군수군하는 것과 비방은, 사람이 남을 언론(言論)으로 해하는 범죄요, ⑷ 하나님을 미워함과 능욕, 교만, 자랑, 악을 도모함은, 사람이 자기를 높이는 범죄요, ⑸ 부모를 거역함과 우매, 배약, 무정, 무 자비는, 의리(義理)를 반역하는 범죄이다.
29절 페플레로메누스 파세 아디키아 포르네이아 포네리아 플레오넥시아 카키아 메스투스 프도누 포누 에리도스 돌루 카코에데이아스 프시뒤리스타스
성 경: [롬1:29]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 - “불의”는 헬라어로 “아디키아”니 그 아랫말에 기록된 모든 부도덕한 일들을 개괄적으로 지명하는 듯하다. 그러나 이 명사는 하난의 죄명(罪名)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불법적으로 취하는 이기적 행위를 가리킨다고 보아진다. 불의를 행하는 자가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하겠지만, 실상은, 그것이 자기를 유익하게 못하고 도리어 해롭게 한다. 잠 21:7에 말하기를 “악인의 강포는 자기를 소멸하나니 이는 공의 행하기를 싫어함이니라”라고 하였고, 잠 10:2엔 “불의의 재물은 무익하여도 의리는 죽음에서 건지느니라”라고 하였다. “추악은 ”포네리아“인데, 도덕적 부패의 해독을 의미한다. 이것은, 내부적 패역성을 의미하는 ”악의“란 말과 달라서 악한 결과와 해독을 가리킨다. 어떤 사본에는 이 말 다음에 ”포르네이나“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정당한 결혼 생활 아닌 모든 불결한 남녀 교제를 말한다. 어떤 중요한 사본들에는 이 말이 없으므로 마이어(Meyer)는 이 말을 제외하였다. ”탐욕“이란 말은 ”플레온“이란 말(더한다는 뜻)과 ”에코“란 말(취한다는 뜻)과의 합성어(合成語)인데, 더 가진다는 뜻이다. 그러면 탐심은 다른 것이 아니고 불의한 일을 해서라도 물욕을 채우고 또 채우고자 하는 심사를 가리킨다. 탐심은 사람으로 하여금 물질에 채우고 또 채우고자 하는 심사를 가리킨다. 탐심은 사람으로 하여금 물질에 매어서 하나님의 말씀과 천국에 착심 할 수 없게 하므로(시 119:36), 우상 숭배와 같은 죄이다(골 3:5). 탐심을 품는 자는 성공하려 하지만, 결국은 실패로 돌아간다. 잠 10:2에 말하기를 ”불의의 재물은 무익하다"라고 하였고, 또 잠 21:6엔 ”속이는 말로 재물을 모으는 것은 죽음을 구하는 것이라 곧 불려 다니는 안개니라“하였고, 잠 20:21엔 ”처음에 속히 잡은 산업은 마침내 복이 되지 못하느니라“ 하였고, 잠 23:5에는, ”내가 어찌 허무한 것에 주목하겠느냐 정녕히 재물은 날개를 내어 하늘에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고 하였다. ”악의“란 말은 헬라 원어로 ”카키아“인데, 이것은 마음이 구부러진 패역성을 가리키는 바, 선한 권면이나 교훈에 대하여도 까닭 없이 반역하며, 남의 자선 행위까지도 방해하는(자기 자신도 하지 않으면서) 잔인성 같은 것이다. 요컨대 이것은 선(善)에 대한 까닭 없는 반역이라 할 수 있다. 이 반역은 실로 극악한 심사인데, 그것을 고집하는 자는 더욱 현저하게 벌을 받는다. 그 이유는 이런 악한 마음은 무식, 혹은 연약에서 생긴 것이 아니고, 고의적으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기, 살인, 분쟁, 사가, 악독이 가득한 자요. - “시기”는 헬라 원어로 “프도노스”인데, 남의 잘 되는 것을 보고 스스로 통감(痛感)을 가지고 해할 수만 있으면 해하려는 악한 마음이다. 잠 14:30에 말하기를 “마음의 화평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의 썩음이니라”고 하였고, 잠 27:4에는 “투기 앞에서 누가 서리요”라고 하였다. 클락(Clarke)은, 이 잠언 말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예화를 소개했다. 곧, “두 사람이 있는데 한 사람은 탐심 있는 자요, 다른 한 사람은 시기가 있는 사람이었다. 이 두 사람에게 누가 말하기를, 너희는 무엇이든지 내게 청구하여라, 그런데 먼저 청구하는 자에게 그 청구한 것을 주고, 다음에 청구하는 자에게는 그 갑절을 주겠다”라고 하였다. 그때에 그 탐심 있는 자는 많이 받을 야심으로 먼저 청구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그 시기 있는 자는 그 탐심 있는 자의 많이 가지게 되는 것을 싫어하여 역시 잠잠하고 있다가 하는 말이, “내 눈을 하나 뽑아 주시요”라고 하였다. “시기”는 이와 같이 남과 나를 해하는 악독한 마음이니, 결국 자기도 망하고 남도 망하는 것이다. 사기를 없애는 방법은, 상대편을 시기하는 대신에 그를 모본 또는 사표(師表)로 알고 그를 기뻐함이다. 그 이유는 ⑴ 나보다 우수한 자는 나의 선생이니 그를 나의 선생으로 알 때에 기쁘지 않으랴. 선생이 없는 사람은 인도자 없는 소경이다. ⑵ 이 세상에는 할 일이 어무도 많다. 그것을 다하기 위해서는 나 자신보다 우수한 선생들이 많이 있어야 한다.
교회 역사를 보면, “시기”의 죄가 교회에 큰 손해를 끼친 사실이 있다. 크리소스톰(Chrysostom)은 교권자 데오빌로 감독의 ㄱ시기로 말미암아 마침내 억울하게 파면을 당했으며, 사막에 망명하여 거기서 종신하였고, 사무엘 루더포드(Samule Rutherford)도 교권자 사이드센프의 시기로 인하여 투옥되어 수난했던 것이다. 예수님은 대제사장들의 시기로 말미암아 잡혀서 마침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다.
“살인”은 헬라 원어로 “포노스”인데 아주 무서운 범죄이므로, 그것에 대하여는 모든 자연까지 노할 정도이다(창 4:10,23,24). 살인이 그렇게 극악 시(極惡視)되는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의 형상(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임)을 범하기 때문이다(창 9:6). 요일 3:15에 의하면, 남을 미워함이 벌써 살인이라고 하였다. 증오는 살인과 같은 고로, 증오가 있는 곳에는 생(生)의 의의(意義)가 없어진다. 그러므로 잠 15:17에 말하기를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라고 하였다.
“분쟁”은 헬라 원어로 “에리도스”인데 이것은, 단체 생활의 생명을 끊어 버리는 죄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잠 17:1에 말하기를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신에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언제나 미연에 방지함이 지혜롭다. 그 이유는, 그것은 확대될 위험성이 있고, 확대되면 수습하기 곤란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잠 25:8에는 말하기를 “너는 급거히 나가서 다투지 말라”라고 하였고, 잠 17:14에는 “다투는 시작은 방축에서 물이 새는 것 같은즉 싸움이 일어나기 전에 시비를 그칠 것이니라”라고 하였고, 잠 18:19에는, “노엽게 한 형제와 화목하기가 견고한 성을 취하기보다 어려운즉 이러한 다툼은 산성 문빗장 같으니라”라고 하였다.
그런데 다툼이란 어떻게 일어나게 되는가? ⑴ 서로 시비를 지혜 없이 말하다가 일어남. ⑵ 범죄를 좋아하는 자들 측에서 일어남. “다툼을 좋아하는 자는 죄과를 좋아하는 자요”라고 하였다(잠 17:19). ⑶ 과격한 말로 인하여 일어남.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라고 하였다(잠 15:1). ⑷ 미련함으로 인하여 일어남. “다툼을 멀리하는 것이 사람에게 영광이어늘 미련한 자마다 다툼을 일으키느니라”라고 하였다(잠 20:3). ⑸ 교만함으로 인하여 일어남. “거만한 자를 쫓아내면 다툼이 쉬고 싸움과 수욕이 그치느니라”라고 하였다(잠 22:10). ⑹ 말장이로 인하여 일어남. “나무가 다하면 불이 꺼지고 말장이가 없어지면 다툼이 쉬느니라”라고 하였다(잠 26:20). ⑺ 탐심으로 인하여 일어남. “마음이 탐하는 자는 다툼을 일으키나”라고 하였다(잠 28:25).
“사기”란 말은 헬라 원어로 “돌로스”인데, 거짓은 모든 죄악의 인도자요, 또 엄호자(掩護者)의 역할을 한다. 마귀가 아담 하와를 죄로 인도할 적에도 “거짓”을 사용했다(창 3:1-7). 죄는 거짓을 쓰고야 활동할 수 있다. 누가 악을 행하면서 그것을 악이라고 광고하면서 행하는 자 있으랴? 언필칭 선을 행하노라고 하면서 악을 행한다(잠 12:20). “사기”는, 우리 마음에 깊이 뿌리박고 있어서 많이 속인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남을 속여 가면서 죄를 범하게 하고, 또 자신을 속여 자멸의 길을 밟게 한다. 그러므로 렘 17:9에,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니”라고 하였다. 남도 속이고 자기도 속이는 것은 사람의 마음이니 거짓되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기 제 마음을 잘 지켜서 남을 속이지 말고 또 자기 스스로도 속지 말아야 한다. 남을 속이는 그것도 벌써 자기를 속임이니, 그 이유는 남을 속여 유익을 도모함은 결국 자기를 해함이 되기 때문이다.
“악독”은 헬라 원어로 “카코에데이아”인데 그 뜻은 “간악”을 가리킨다. 퀴일(Kuhl)은 해석하기를, 이는 간책(奸策)과 궤계를 가지고 남을 해하려고 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이런 사람은, 구밀복검식(口密腹劒式)으로 외모로는 최선을 다하여 남을 도와주는 체 하지만, 이면과 실제에 있어서는 남을 해하는데 최선을 다한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은 노골적으로 직접 남을 해하는 자 이상의 중벌을 받을 것이다.
수군수군하는 자. - 이런 자들은 공중이 모르게 은밀히 남을 훼방하는 자니, 이는 독사보다 악독한 자이다. 독사는 접근하는 사람만을 물어서 해할 수 있지만, 이런 사람(수군수군하는 자)은 몇 만리밖에 있는 자들을 해할 수 있다.
30절 카탈랄루스 데오스튀게이스 휘브리스타스 휘페레파누스 알라조나스 에퓨레타스 카콘 고뉴신 아페이데이스
31절 아쉬네투스 아쉰데투스 아스토르구스 아스폰두스 아넬레에모나스
성 경: [롬1:30,31]
비방하는 자. - 이것은 공적으로 남을 악평하는 자이다. 레 19:16에 말하기를, “너는 네 백성 중으로 돌아다니며 사람을 논단하지 말며 네 이웃을 대적하여 죽을 지경에 이르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라고 하였으니, 남을 말로 매장함은 잔인한 일 가운데 하나이다. 이런 죄를 범하는 자는 벌을 받나니 그것은 그 자신이 역시 악평을 받음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라고 하셨다(마 7:1).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 - 이 죄들은, 사람이 자기를 과중 시(過重視)하여 남들을 무시함이다.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는 헬라 원어로 “데오스튀게이스”인데,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라고 번역할 수 있는 것이다. “능욕하는 자”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멸시하는 자들을 가리킨다. “교만한 자.” 이 말은 헬라 원어로 “훼페레파노스”인데 “높이 나타나는 자”란 뜻이다. 실제적 내용은 없이 높은 사람인 체 하고 자기를 나타내는 자도 있고, 혹은 실제적 내용이 있고서 그리하는 자도 있다. 실 내용이 없이 그리하는 자는 외식하는 죄까지 범하는 자이다. 잠 16:18에 말하기를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라고 하였다. 개인이나 단체나 교만하면 반드시 하나님의 벌을 받는 법이다. 잠 19:29에 말하기를, “심판은 거만한 자를 위하여 예비된 것이요 채찍은 어리석은 자의 등을 위하여 예비된 것이니라”라고 하였으니, 오만한 자(거만한 자)의 죄가 어떻게 큰 줄을 우리가 알 수 있다. “자랑하는 자”는 자기 자신을 자랑하는 자니, 예수님으로 자랑하는 자와 반대되는 자이다. 진실로 주 예수로 자랑하는 자는 전적으로 자기를 분토와 같이 천히 보아야 할 것이다(빌 3:7-9). 그 이유는, 자기를 의뢰하는 것은, 예수님을 믿음에 대한 적성 요소(敵性要素)이기 때문이다.
악을 도모하는 자. - 이것은, “악한 일을 지어내는 자”를 말함이다. 이런 사람은, 자기 한 사람만이 악을 행하지 않고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악행의 길을 개척하여 주는 셈이다. 이 얼마나 악한가? 수리아의 안디오코 에피파네스는 유대인을 괴롭게 한 자니, 그는 “모든 악을 도모하는 자”라는 칭호를 받았다.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 - 이 죄목들은 애정과 의리(義理)를 배반하는 종류에 속한다. 애정은 사람이 가장 좋아하는 것인데, 그것을 배반하는 자야말로 극도로 악한 자이다. 그러므로 “부모를 거역하는 자”는 큰 죄인이다. 구약 시대에는, 불효자는 재판을 받게 하고 돌로 쳐 죽이도록 한 것이다(신 21:18-21). 신약 시대에는 그렇게 하지 않지만, 불효가 여전히 큰 죄악인 것은 틀림없다(딤전 5:8). “우매한 자.” 이것은 사람이 자기가 받은 사랑이나 긍휼에 대하여 지각(知覺)이 없고 그것을 감사하지도 않으며 기억지도 않음을 말함이다(사 1:2-3). 도탄 중에 빠진 자가 남의 동정을 구하다가 배척을 당할 때 그 마음이 아프다. 그러나 남에게 은혜를 베푼 자가, 그 은혜를 입은 자의 배은망덕의 태도를 볼 때에 느끼는 비통(悲痛)은 그 이상이다. “배약하는 자” 성경은,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치 아니”해야 한다고 한다(시 15:4). “무정한 자.” 어떤 학자는 말하기를, 여기 무정하다 함은,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대하여 무정함을 가리킨다고 하나, 그렇게 제한을 두어 생각할 필요는 없다. 인정이란 것은 인간에게 위로와 용기와 소망을 주는 것이다. 인정이 활동하면 눈물의 골짜기도 변하여 희열의 낙원이 되는 것이다. “무자비한 자.” 어떤 사람이 불쌍하게 된 원인이 그 자신의 저지른 죄악이었다고 해서 그 사람을 돌보지 않는다면, 그것도 혹시 무자비일 수 있다. 크리스천의 자비는, 조난자(遭難者)의 육신 정형뿐 아니라, 정황까지 불쌍히 여김이다.
32절 호이티네스 토 디카이오마 투 데우 에피그논테스 호티 호이 타 토이아우타 프랏손테스 악시오이 다나투 에이신 우 모논 아우타 포이우신 알라 카이 쉬뉴도쿠신 토이스 프랏수신
성 경: [롬1:32]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 - 죄를 범하고 그것을 부끄러워하는 자는, 고침 받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죄를 옳게 여기는 자는 고칠 소망이 없다.
[마태복음 18장 예수님 말씀]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의 비유 (마 18:2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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