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4장에는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이 만나서 이야기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보통 사마리아 여인을 창녀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신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여인입니다. 창녀는 마음에서 살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6시에 나왔다고 말하면서 플러스 6을 하여 정오 12시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잘못된 시간 계산법입니다. 공관복음은 플러스 6을 하면 됩니다. 유대식 시간 법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을 로마식 시간 법으로 요한이 기록했습니다. 그래서 오후 6시를 말합니다. 뜨거운 때에 사람의 눈을 피해 우물가에 온 것이 아닙니다. 정상적인 시간에 우물가에 나온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창녀가 아닙니다. 그리고 저녁때가 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마을에 들어가서 숙박할 곳을 찾았습니다.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의 대화(요 4:1-54)
1-18절,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
[1-5절] 예수의 제자를 삼고 세례를 주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신지라. (예수께서 친히 세례를 주신 것이 아니요 제자들이 준 것이라.)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바리새인들에게는 하나님께 대한 참 경건이 없었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그들과 일찍부터 충돌하기를 원치 않으셨던 것 같다. 그는 때가 되면 그들과 충돌하게 되실 것이며 바로 그들에 의해 정죄를 당하시고 죽임을 당하실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그때가 아니었다. 예수께서는 갈릴리로 가시기 위해 사마리아를 지나야 하셨다. 사마리아는 남쪽 유대 지방에서 북쪽 갈릴리 지방으로 가는 중간에 위치한 지방이었다. 예수님 일행은 사마리아 지방에 수가라는 한 동네에 이르렀다. 수가성은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에 가까웠다. 그 땅은 세겜을 가리켰을 것이다(수 24:32).
[6-9절]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행로에 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제6시쯤 되었더라.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사마리아 여자가 가로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이러라.
제6시 즉 저녁 6시는 여인들이 물길으러 우물에 나오는 시간이었다(창 24:11). 그때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으러 나왔다. 예수께서는 하루 종일 걸으셔서 피곤하셨을 것이다. 그는 그렇게 건장한 체력을 가지신 것 같지 않다. 예수께서 여행에 피곤하신 것은 그가 참으로 사람이셨음을 증거한다. 예수께서는 하늘로부터 오신 자, 곧 하나님이시지만, 그는 또 피곤해 하시는 사람이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께서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을 가지신 독특한 인격이시라고 고백한다. 예수께서는 사마리아 여자에게 물을 좀 달라고 요청하셨다.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동네에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사마리아 여자는 의아한 마음으로 예수께 반문했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사마리아인들과 상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들이 사마리아인들을 반쯤 이방인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사람의 영혼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어떤 사람과도 대화할 수 있을 것이다.
[10-12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여자가 가로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이 생수를 얻겠삽나이까?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었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먹었으니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예수님의 참된 관심은 물을 얻어 마시는 것이 아니고 그 여자의 영혼의 구원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그에게 하나님의 선물과 생수에 대해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요 우리에게 구원과 영생을 주시는 것이다(롬 6:23). 사마리아 여자가 자기에게 물을 좀 달라는 이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안다면, 그 여자는 도리어 그에게 생명의 물을 구하였을 것이다. 이 생수는 성령께서 죄사함으로 말미암아 주시는 영원한 생명이다. 그러나 그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을 어떤 물질적 물로 생각하고 있었다.
[13-14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예수께서는 그 우물의 물과 자신이 주는 물을 대조시키셨다. 그가 주시는 물은 영적인 물이다. 물은 생명에 필수적 요소이다. 사람이 물을 마시지 못하면 갈증을 느끼듯이, 영적으로도 그러하다. 사람에게는 영혼의 갈증이 있다. 그것은 죄로 인하여 생긴 여러 가지 슬픔과 불안과 불만족이다. 죄인에게는 안식과 만족이 없다. 예수께서는 이런 슬픔과 불만을 해소하는 물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것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기쁨과 힘을 주는 영원한 생명의 물이다. 그 물은 그가 주시는 성령을 가리킨다(요 7:37-39). 성령께서는 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사함과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신다.
[15절] 여자가 가로되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사마리아 여자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관심과 흥미를 보였다. 그러나 그 여자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물을 아직도 물질적 차원의 물로 이해하였다. 그는 한번 마시면 다시 목마르지도 않고 또 이 우물에 와서 물을 길을 필요도 없는 그런 물이 있다면 자기에게도 달라고 말했다. 그는 예수께서 영적인 물에 대해 말씀하고 계심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런 영적인 물은 모든 사람에게 필요하며 그 사마리아 여자도 예외가 아니었다.
[16-18절] 가라사대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실상 그 여인에게는 영적인 갈증이 있었다. 예수께서는 그 여인에게서 그것을 일깨우기를 원하셨다. “네 남편을 불러 오라”는 말씀은 그 여자의 가장 아픈 곳을 찔렀다. 그러나 병자가 자신의 병을 알아야 살 길이 있듯이, 사람은 자신이 죄인임을 알아야 구원받을 수 있다. 그 여자는 다섯 남편이 있었고 지금 여섯 번째 남자와 살고 있으나 그 남자도 그의 남편이 될 수 없는 자이었다. 그는 다른 여자의 남편을 빼앗아 살고 있었던 것 같다. 그 여자의 문제는 결혼 관계에 바르지 못한 것이었다. 그는 이혼과 재혼을 반복하였다. 그런 중에 그가 터득한 것은 인생이란 만족이 없다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는 영혼의 불만족과 갈증만 더 얻었을 것이다. 사람은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아야 구원받을 수 있다. 예수께 나오는 자는 자신의 죄를 깨닫고 그것을 인정하고 청산해야 구원을 받고 영혼의 갈증을 해소하고 참 평안을 얻고 새 삶을 시작하고 영생을 얻을 수 있다. 이것이 구원이고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신인(神人)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자. 그는 위로부터 오시는 이(요 3:31) 곧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또한 행로에 피곤하여 사마리아의 수가성 야곱의 우물곁에 앉으시는 사람이시다. 우리는 놀라우신 신적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자.
둘째로,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알자. 그것은 성령께서 주시는 은혜이다. 그것은 죄인이 자기 죄를 회개하고 죄사함을 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그 생명은 우리 속에서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샘물이 된다. 성령께서는 우리 속에 영원히 거하신다. 성령께서는 우리 속에 심어진 새 생명을 통하여 우리 속에 영원히 샘솟는 생수를 주신다. 구원받은 성도는 다 그 생수를 마신 자이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또 성령 안에서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들은 영생을 얻었다.
셋째로, 아직도 구원받지 못한 자는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 얻고 영생을 얻어야 한다. 아직도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지 못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를 거절하는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증거는 신약성경에 풍성하다. 하나님의 뜻은 모든 사람이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바르고 선하게 사는 것이다.
19-26, 참된 예배
[19-20절] 여자가 가로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그 사마리아 여자는 자신의 과거를 훤히 아시는 예수가 선지자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예배의 장소에 대해 질문하였다. 그것은 평소에 그 여자가 가졌던 관심거리이었던 것 같다. 예배에 대한 관심은 경건함의 표현이기도 하다. 그 여자의 마음 속에는 경건함이 있었던 것 같다. 그는 말하기를, 우리 조상들은 이 산 즉 세겜 서쪽에 있는 그리심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즉 성전이 있는 시온산에서 예배해야 한다고 말한다고 했다. 그것은 그 둘 중에 어느 말이 옳은가라는 질문이었다.
[21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구약시대의 예배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장소에서 또 그가 정하신 방식으로 행해져야 했다. 그러나 이제 어떤 장소나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예배드리는 때가 온다. 그것은 신약시대를 가리켰다. 신약시대의 예배는 어떤 장소나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다. 조용한 장소이면 어디나 예배의 장소가 될 수 있고 정숙한 방식이면 된다. 이방종교는 옛날부터 광란적 방식으로 그들의 신들을 섬겼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그렇게 예배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인격적이시므로 하나님께 대한 예배도 인격적이어야 한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에서 예배 형식이나 찬송이 세속화되었다고 생각된다. 예배나 찬송이나 기도는 보다 정숙하게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셨다. 23절에도 두 번 그런 호칭이 나온다. 하나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이시다. 아버지라는 명칭은 그가 만물의 근원이 되심과 그의 권위와 위엄, 또한 그의 사랑과 긍휼을 나타낸다. 하나님께서는 두려우신 아버지이신 동시에 자녀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아버지이시다.
[22절]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갈라진 이후 북방 이스라엘 나라에는 하나님께 대한 바른 지식과 믿음이 없어지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역대하 15:3은 “[북방] 이스라엘에는 참 신이 없고 가르치는 제사장도 없고 율법도 없는 지가 이제 오래였다”고 말했다. 그들이 앗수르에 멸망하여 온 세계로 흩어진 이후에는 더욱 그러하였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렇지만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께 대한 참된 경건이 남아 있었다.
또 이사야 2:2-3 같은 성경은 구원이 유대 땅에서 나올 것을 암시하였다: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 . .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
[23-24절]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참된 예배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예수께서 참된 예배자들에 대해 말씀하실 때, 그는 형식적 혹은 위선적 예배자들도 있음을 암시하신다. 우리는 참된 예배자가 되어야 한다. 참된 예배 방식은 ‘신령과 진정으로’ 하는 예배이다. ‘신령’이라는 원어(프뉴마)는 ‘영’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이나 인간의 영을 다 가리킬 수 있다. ‘신령으로’라는 말은 ‘성령 안에서, 성령의 도우심으로’라는 뜻도 되고 ‘심령으로’라는 뜻도 된다. 또 ‘진정’이라는 원어(알레데이아)는 ‘진리, 진실’을 다 가리킬 수 있다. ‘진정으로’라는 말은 ‘진리의 말씀 안에서’라는 뜻도 되고 ‘진실하게’라는 뜻도 된다. 둘 다 좋은 뜻이다. 하나님께 대한 예배는 성령 안에서, 진리 안에서 드려져야 하고, 또 심령으로, 진실하게 드려져야 한다. 형식적, 가식적, 위선적 예배는 예배가 아니다.
참된 예배가 시행될 시기는 ‘이때’ 곧 메시아의 오심으로 시작된 신약시대이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서 상징적 형식들이 많았다. 그것들은 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예표하였다. 그러나 때가 되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고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속죄사역을 완수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의 안에서 기쁨과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섬긴다. 이제 우리의 예배는 단순히 외형적, 형식적 예배가 아니다. 예배에 있어서 장소나 의복의 단장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위해서는 깨끗하고 조용한 장소이면 족하고 단정한 복장이면 족하다.
하나님께서는 참된 예배자들을 찾으신다. 참된 예배는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며 소원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救贖)함을 얻은 하나님의 백성된 우리는 성령 안에서, 진리로, 또 심령으로, 진실하게 하나님께 예배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영이시다. 영은 물질이 아니므로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없으나 지정의를 가진 인격적 실체이다. 영은 기운이나 에너지 같은 비인격적 실체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배의 장소 치장이나 의식 단장에 힘쓸 것이 아니다. 우리는 예배 드릴 때 성령의 감동을 구하며 진리의 말씀에 입각해서 드려야 하며 또 심령으로, 진실하게 드려야 할 것이다. 또 그리심산이나 예루살렘 성 같은 장소가 중요하지 않고, 우리는 어디서든지, 언제든지, 자유로이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의 십자가 공로를 힘 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며 그에게 참된 예배를 드려야 할 것이다.
[25-26절] 여자가 가로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 하시니라.
사마리아 여자에게 메시아에 대한 지식과 소망이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무지와 고난의 긴 과정 속에서도 이런 깨달음과 소원을 주셨다. 과연, 메시아께서 오셔서 속죄사역을 이루심으로 예배의 참된 방식이 드러날 것이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바로 그 메시아임을 그 여자에게 증거하셨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참된 예배는 예배의 장소나 시간이나 형식보다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 진리 안에서, 또 심령으로, 진실하게 하나님께 예배드려야 한다. 참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십자가 공로와 그의 완전한 의 안에서,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드리는 것이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참된 예배자들을 찾으신다. 오늘날도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참된 예배를 드리는 자들을 찾으신다. 하나님의 은혜와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받은 자들은 누구든지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 드릴 것이다. 우리는 다 참된 예배자들이 되자.
셋째로, 예수께서는 그리스도이시다. 수가성 여자에게는 구약성경에 예언된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과 갈망이 있었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그 그리스도임을 그 여자에게 분명하게 증거하셨다. 신약성경, 특히 복음서들의 첫 번째 목적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한 것이다(요 20:30-31). 또 신약성경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신 증거들을 충분하게 전하고 있다. 우리는 신약성경의 증거들에 근거해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었다. 우리는 이제 이 소식을 다른 이들에게도 전해야 한다.
27-42절, 수가성 사람들의 구원
[27-29절] 이때에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께서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겼으나 무엇을 구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저와 말씀하시나이까 묻는 이가 없더라.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제자들이 예수께 묻지 않은 것은 그를 신뢰하고 경외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 사마리아 여자는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갔다. 그는 물 긷는 것보다 더 큰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메시아를 발견한 것이었다. 그는 그 놀라운 사실을 동네 사람들에게 알리러 달려갔다. 그것은 그가 평소에 하나님을 사모하고 구원과 메시아를 기다렸다는 것을 잘 나타낸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가 메시아의 발견을 그렇게 크게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가서 사람들에게 말했다.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그가 하나님의 보내신 그리스도, 즉 신적 구주가 아니고서는 한 사람의 과거를 그렇게 정확히 알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30절] 저희가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수가성에 살고 있던 사마리아 사람들도 평소에 하나님을 경외했고 메시아에 대해 관심을 가졌고 사모하고 기다렸던 것 같다. 그들이 그렇게 준비되지 않고서는 그 여자의 말에 그렇게 반응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준비된 자들에게 만나주신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준비시키시고 구원하신다. 사람의 준비란 자신의 죄악 됨과 허무함을 깨닫고 하나님의 긍휼과 구원을 갈망하는 마음을 가리킨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하고 온유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다(마 5:3-6). 하나님의 구원을 위해 준비된 자들은 예수님을 믿게 될 것이다.
[31-34절] 그 사이에 제자들이 청하여 가로되 랍비여, 잡수소서. 가라사대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한대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예수를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과 그의 일은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다.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요 6:29). 요한복음 6:39에 보면, 예수께서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영혼 구원을 위한 전도와 세계 복음화는 하나님의 뜻이다. 그것을 행하며 그것을 완수하는 것이 예수님의 양식이요, 그것은 우리의 양식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그것을 이루면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지만, 그것을 이루지 못하면 밥을 먹어도 배가 고프고 만족이 없어야 할 것이다.
[35절] 너희가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이미](전통본문)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유대 땅에서 추수는 4월 초에 보리 추수가 시작되고 5월 말에는 밀 추수가 시작된다. 추수 시기는 산지나 들판에 따라 조금씩 다를 것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추수는 보통 8월 말까지 계속된다. 그러므로 추수하기 넉 달 전은 12월이나 1월쯤 되었을 것이다. 그러면 이 사건은 요한복음 2:13에 언급된 첫 번째 유월절 이후 상당한 시간이 지난 때에 있었다. 왜냐하면 유월절은 4월 초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요한복음 3:22에 “이 후에[이런 일들 후에]”라는 표현에서 암시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또 이 말은 요한복음 5:1에 나오는 ‘유대인의 명절’을 또 다른 하나의 유월절로 볼 수 있게 만들며 예수님의 전도사역의 기간을 3년 이상으로 만든다. 물론 그 명절을 오순절이나 초막절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렇다 해도 유월절이 하나 생략된 것이어서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이 3년 이상이 된다. “이미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다”는 말은 영적인 의미이다. 곡식 추수는 넉 달이 지나야 하지만, 영적인 추수는 이미 때가 되었다는 말씀이다. 이것은 사람들이 구원받을 때가 되었다는 뜻이다.
[36절]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니라.
뿌리는 자는 모세와 선지자들과 세례 요한을 가리켰다. 그들은 다 씨를 뿌리는 자들이었다. 거두는 자는 예수님과 제자들을 가리켰다. 씨를 뿌리는 일도 있고 곡식을 거두는 일도 있다. 물론 그 둘은 다 수고로운 일이다. 그러나 일꾼들은 그 일한 대로 상을 받을 것이다. 바울은 “심는 이와 물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고 말했다(고전 3:8). 거두는 것은 영생에 이르는 열매들이다.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는 함께 즐거워할 것이다.
[37-38절]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내가 너희로 노력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의 노력한 것에 참여하였느니라.
예수님과 제자들은 거두는 일을 할 것이다. 이미 앞서간 자들은 심는 일을 많이 하였다. 세례 요한도 심는 일을 했다. 제자들은 다른 사람들이 노력한 것을 거두러 보냄을 받았다. 물론 거두는 일도 수고로운 일이다. 그러나 그들은 다른 이들이 심느라고 노력한 그것들을 이제 거두게 될 것이다. 심는 자도, 거두는 자도 다 주의 일을 하는 것이다. 전도사역은 심는 일과 거두는 일을 다 포함한다. 심어야 거둘 것이 있다. 그러나 심는다고 금방 거둘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은 다 때가 있다.
[39-42절] 여자의 말이 그가 나의 행한 모든 것을 내게 말하였다 증거하므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기를 청하니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매 예수의 말씀을 인하여 믿는 자가 더욱 많아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 [그리스도](전통본문)신 줄 앎이니라 하였더라.
수가성에는 낫만 대면 추수할 곡식이 많이 있었다. 많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그 여자의 간증을 통해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었다. 예수께서는 사마리아인들이 그에게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기를 청하므로 거기서 이틀을 유하셨고 그 말씀을 인하여 믿는 자가 더욱 많았다. 많은 사마리아인들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준비된 마음이 있었고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믿고 구원을 받았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도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완수하는 것을 양식으로 삼자. 예수님의 양식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었다. 주께서는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전도의 임무를 부탁하셨다. 신약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을 계승한다. 그것은 전도와 참 교회의 건립이다. 그러므로 전도와 참 교회의 건립이 오늘 우리의 양식이 되어야 하고 우리의 삶의 첫 번째 목표가 되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우리가 믿게 된 과정을 간증함으로 우리의 이웃을 구원하자. 개인의 간증은 구원의 가교 역할을 한다. 간증은 좋은 전도 방법이다. 우리는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을 알게 되었고 믿게 되었는지 사실 그대로 우리의 이웃과 친지들에게 말해줄 수 있어야 하겠다.
셋째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만나게 해야 한다. 그것은 성경책을 통해 가능하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성경을 읽게 하고 성경적 설교를 듣게 함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만나게 할 수 있다. 성경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오늘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고 사람들과 만나시고 그들을 구원하신다.
43-54절,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쳐주심
[43-45절] 이틀이 지나매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며 친히 증거하시기를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 하시고 갈릴리에 이르시매 갈릴리인들이 그를 영접하니 이는 자기들도 명절에 갔다가 예수께서 명절 중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음이더라.
예수께서는 수가성에 이틀을 유하셨고 그 후에 거기를 떠나 갈릴리로 가셨다. 원문에는 44절에 ‘왜냐하면’이라는 말(가르)이 있는데, 그것은 그가 전에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신 바가 있었고 그래서 유대 땅에서 뿐만 아니라 또한 갈릴리에서도 자신을 증거하실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뜻일 것이다.
예수께서 갈릴리에 이르시자 갈릴리인들이 그를 영접하였다. 이는 자기들도 명절에 갔다가 예수께서 명절 중에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명절은 요한복음 2:13, 23에 언급된 유월절을 가리킬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계시며 여러 가지 표적들을 행하셨다(요 2:23). 그는 그 후 유대 땅에서 약 8개월 가량 지체하신 것 같다. 마태복음 4장에 나오는 그의 갈릴리 전도사역은 그 후에 시작된 것 같다.
[46절] 예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이르시니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라. 왕의 신하가 있어 그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
예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오셨다. 그곳은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었다. 사도 요한은 포도주 기적의 확실함을 다시 한번 더 증거한다. 왕의 신하인 한 사람이 있었다. ‘왕의 신하’라는 헬라어(바실리코스)는 ‘왕에게 속한 높은 관리’를 가리킨다. 그는 사회적 신분이 있었고 아마 부유한 자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의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어 있었다. 갈릴리 가나와 가버나움은 나사렛을 경유하여 약 40킬로미터 정도 되는 거리이었다. 그의 집무실은 가나에 있었으나 그의 집은 가버나움에 있었던 것 같다. 49, 51절에 ‘아이’라는 말(파이디온)[어린아이]을 사용한 것을 보면, 그의 아들은 아직 나이가 어렸던 것 같다.
[47절]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에 오심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주소서 하니 저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
그가 예수님께 와서 그렇게 청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께서 유대 땅에서 기적 행하셨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소문에 의해 예수께 대한 약간의 믿음이 생겼다. 물론 그 믿음은 아직 매우 약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아들이 거의 죽게 되었고 아들을 위한 다른 방도가 없었다. 다행히 그는 갈릴리 가나에 오신 예수께 그 일을 청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48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예수께서는 탄식 어린 말투로 사람들 속에 믿음이 없음을 지적하셨다. 사실,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들을 보고도 그를 믿지 않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기적들을 통해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신다. 기적들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믿음의 수단이다. 그 왕의 신하의 마음도 비슷했을 것이다. 그에게도 굳건한 믿음이 있었던 것은 아니나 아마 예수께서 내 아들을 고쳐주시면 그를 믿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을지 모른다.
[49절] 신하가 가로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그 신하는 자기 아이가 죽을까봐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는 예수께서 자기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와서 고쳐주시기를 구하였다. 그는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확신한 것 같지는 않다. 만일 그가 예수님을 신적 구주로 확신하였다면, 아마 한 백부장처럼 “주여, 말씀으로만 하소서. 그러면 내 아이가 낫겠나이다”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는 예수께서 수고스럽게 그의 집까지 내려오시기를 요청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그런 굳센 믿음을 가지지는 못했던 것 같다.
[50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 하신대 그 사람이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믿음은 말씀을 들을 때 생긴다(롬 10:17). 믿음은 말씀을 믿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야 사람이 믿을 수 있다. 하나님께서 은혜 주지 않으시면 말씀을 들어도 믿지 못할 것이다. 그는 말씀을 믿고 갔다. 그가 갔다는 것은 말씀을 믿었다는 증거이기도 하였다. 그가 믿지 못했다면 가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믿었기 때문에 가버나움으로 갔다.
[51-52절]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았다 하거늘 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즉 어제 제7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하는지라.
제7시는 오후 7시를 가리킬 것이다. 그러면 ‘어제 제7시’라는 말은 그가 밤을 지나서 아침에 집으로 돌아오다가 종들을 만났음을 의미할 것이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확인하였고 그가 과연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확인하였다.
[53-54절] 아비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았다 말씀하신 그때인 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이 다 믿으니라. 이것은 예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후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이니라.
그 신하는 예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직접 체험하였고 그와 그 온 가족이 믿었다. 이것은 예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후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이었다. 예수님의 갈릴리 전도사역은 이런 일들 후에 시작되었을 것이다. 오늘날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하여 사람들로 예수님을 믿게 하신다(요 20:30-31).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확신할 수 있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세상에는 구원이 필요한 사람들이 많다. 세상에서 고상하고 부유한 생활을 한다 할지라도 심한 열병으로 거의 죽게 된 아들처럼, 세상에는 죄로 인해 지옥에 던지울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죽기 전에, 지옥에 던지우기 전에 구원이 필요한 자들이다.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그 무엇보다 자신의 죄인 됨을 깨닫고 예수님 믿고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구원을 얻는 것이다.
둘째로, 예수께서는 구주로 세상에 오셨다. 그의 병고치시는 일은 그 왕의 신하와 그 온 가족들이 그를 믿는 계기가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단순히 육신적으로 죽을 병자들을 고쳐주실 수 있는 구주가 아니고, 마귀의 종이 되어 죄만 짓던 자들, 영원히 지옥의 형벌을 받을 죄인들을 구원하여 하나님의 자녀를 만드시고 영생할 의인을 만드시는 구주이시다. 그는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다.
셋째로,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왕의 신하는 단지 아들의 병고침을 받은 것뿐 아니라, 그와 그 온 가족이 예수님을 믿었다. 믿음에는 세 단계가 있어 보인다. 첫째는 예수님에 관해 듣고 믿는 것이다. 왕의 신하는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듣고 예수께 나아와 간청하였다. 그의 믿음은 비록 약해도 예수께 나아와 무엇을 간구하는 믿음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에 관한 소식을 널리 전해야 한다. 둘째는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듣고 믿는 것이다. 왕의 신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믿고 갔다.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들을 직접 읽고 듣고 묵상함으로써 믿을 수 있다. 셋째는 예수님의 능력을 체험함으로 그를 믿는 것이다. 왕의 신하는 예수님의 능력을 체험했고 그와 그의 온 가족들이 다 예수님을 믿었다. 오늘날 우리는 성경을 통해 예수님의 능력을 확인하고 그를 확신할 수 있다.
[마태복음 14장 예수님 말씀] 오병이어의 기적(마 14: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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