샬롬! 오늘도 복음 빵집에 오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오늘은 창세기 3장 설교문 중에서 인간이 하나님께 저주받은 사건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인간의 저주”(창3:16-19)
오늘 말씀은 아담과 여자가 하나님께 저주를 받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면 결국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나님은 강력하게 말씀하셨는데 인간들은 그것을 먹음으로 하나님 앞에 죄를 짓게 된 것입니다. 이 죄 때문에 결국 인간들이 저주를 받게 됩니다.
창 3:16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하나님은 여자에게 저주의 내용을 말씀하십니다. 너는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여 받을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죄를 짓기 전에는 해산의 고통이 거의 없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라는 단어는 (רבה라바)입니다. 히필을 사용하고 있고 강조 문입니다. 많아지게 하다, 넘치다, 강하다, 라는 뜻입니다. 여자는 죄를 짓고 나서 임신하여 출산하는 고통을 엄청나게 많아지게 되고, 넘치게 되고, 강하게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 이 고통을 하나님이 강력하게 주고 있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너는 남편을 원하고’ 라는 문장에서 ‘원하고’라는 단어는 (תשוקה테슈카)입니다. 뒤쫓다, 원하다, 갈망하다, 라는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죄를 짓고 나서 남편을 항상 뒤쫓아 사는 인생이 되고, 남편을 원하고, 남편의 그늘에서 사는 존재가 되고, 항상 남편을 갈망하면서 살게 되는 저주를 받게 됩니다. 그러면서 남편은 아내를 다스린다고 말씀하십니다.
‘다스릴 것이니라’ 라는 단어는 (משל마샬)입니다. 통치하다, 주관하다, 다스리다, 라는 뜻입니다. 남편은 아내를 통치하고, 주관하며, 다스리는 관계가 됩니다. 원래는 동등한 위치였는데 여자가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남편의 통제를 받고, 다스림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원래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완벽한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어쩌면 동등한 위치에서 대화할 수 있는 그런 존재로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죄를 지음으로 추락하여 하나님과 멀어지고 다스림을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로 떨어진 것입니다. 성경에 예수님은 신랑으로 표현이 되고 우리는 신부로 표현이 됩니다. 이렇게 우리는 죄악에서 구원받기 전에는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보혈로 구원을 받고 나면 신랑과 신부는 동등한 입장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아담과 여자가 지은 죄를 해결하시고 우리를 주님과 동등한 입장으로 올려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존재입니다. 주인과 종의 관계가 아니라 신랑과 신부의 관계에서 함께 영원히 하나님의 나라에서 사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 관계는 하나님과 동등의 관계가 되었으니 함부로 해도 된다는 이런 말씀이 아닙니다. 부부가 서로 존중하고 말도 조심스럽게 하는 것처럼 우리가 예수님을 섬기는 것이 이와 같이 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담이 파괴시켰던 것을 예수님은 다시 회복시키신 것입니다. 인간이 죄악으로 파괴되어 도저히 하나님께 저주받은 것을 해결할 수가 없었는데 예수님은 이것을 완전히 자신이 희생함으로 파괴되었던 것을 해결해 주신 분입니다.
창 3: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다음은 아담의 저주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의 아내 말을 듣고 내가 너에게 먹지 말라고 명령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으니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을 것이다. 라는 저주를 받게 됩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아담이 저주를 받았는데 왜 땅이 저주를 받았을까요? 이것도 정말 이상한 일입니다.
‘땅은’ 이라는 단어는 (אדמה아다마)입니다. 붉어지다, 붉게 물들다, 라는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드실 때에 흙에서 아담을 만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아담과 흙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이 말은 아담의 근원은 흙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아담을 저주하게 되니 결국 땅이 저주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의 근원을 저주하여 고통을 주시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의 문장에서 ‘수고하여야’라는 단어는 (עצבון이차본)입니다. 근심하다, 슬퍼하다, 라는 뜻이 있습니다. 결국 아담은 저주를 받아 평생토록 근심하고 슬퍼할 수밖에 없는 존재로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죄로 인한 저주입니다. 육신이 힘든 것은 쉬면 풀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정신적인 고통과, 마음의 고통은 쉽게 풀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잠 15:13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
잠 17:22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
이렇게 심령의 근심은 사람의 뼈를 마르게 하여 골수가 모두 빠져나가는 것입니다. 아담은 평생토록 이렇게 고통을 당하고, 번뇌하고, 슬퍼하는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언제까지요, 육신이 사는 930세 동안 이런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열심히 수고하지 않으면 땅에서 나오는 소산을 먹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남자는 열심히 일을 해야 먹고살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만 섬기면 고통도 없고 평생 즐거운 삶을 살 수가 있었는데 한 순간 죄를 짓고 고난을 당하게 됩니다. 열심히 일을 하면서 즐거움과 낙을 찾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결국 일을 할 때에 자신의 정체성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창 3:18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땅은 저주를 받아 더 이상 아름다운 것을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낸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식으로 먹는 것들을 보면 가시가 많이 달려있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벼도 가시가 있고, 보리나 밀도, 가시가 나와 있습니다. 과일로는 복숭아도 먹으려면 겉에 가시가 나와 있습니다. 밤도 가시가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먹는 주식이 가시가 나와 있습니다. 이것은 가시를 제하고 먹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영적인 것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영적인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수고하고 애쓰면 더 은혜가 됩니다. 내가 말씀을 더 연구하고, 듣기를 사모하고, 열정을 가지고 말씀을 먹으려고 하면 꿀 송이처럼 달고 맛이 있습니다. 그러나 대충대충 하면 말씀도 은혜가 되지 않고 나에게 별로 도움도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먹는 과일이나 주식들을 보면 모두가 먹을 수 있는 알맹이는 속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별 볼일 없는 것 같지만 속에는 아주 맛있는 것들이 들어가 있습니다. 벼도 속 알맹이를 먹고, 보리나, 밀도 알맹이를 먹고, 밤도 가시를 발라내야 먹을 수 있고, 호도도 껍데기를 까야 먹을 수가 있습니다. 포도도 껍데기는 버리고 알맹이만 먹습니다. 이렇게 많은 과일들이 껍데기는 버리고 알맹이를 먹는 것처럼 영적인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예수님이 흠모할 것도 없고, 외모적으로는 별 볼일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속으로 들어가면 엄청난 비밀이 있고 영생을 줄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이렇게 영적인 진리를 깨닫기 위해서는 쉽게 되는 것이 아니라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진리를 깨닫기를 원한다면 이것은 법칙에도 어긋나는 것입니다.
하나의 진리를 깨닫기 위해서 많은 기도와, 수양과, 말씀을 읽게 됩니다. 이런 과정 속에서 어느 순간 깨닫게 되고 예수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깨달음이 하늘에서 순간 떨어진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해를 한 것입니다. 깨달음은 그렇게 오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기초적인 말씀의 기본이 있어야 하고 이것을 토대로 하나님도 깨달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창 3:19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아담은 땅에서 열심히 일을 해서 먹고사는 존재가 됩니다. 일을 하지 않고는 쉽게 먹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서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담은 흙에서 취함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흙으로 돌아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라는 문장에서 ‘취함을’이라는 단어는 (לקח라카흐)입니다. 푸알, 완료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탈취하다, 강권하다, 잡혀가다, 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 단어는 푸알로 강조수동입니다. 흙에서 취함을 받은 것이 엄청난 탈취와 강권함으로 잡혀 가듯이 아담은 흙에서 지음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쉽게 아담을 창조하신 것이 아닙니다. 엄청난 고뇌 속에서 어떻게 인간을 창조해야 할까? 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하나님의 최고의 걸작품으로 탄생된 것입니다.
도자기를 만드는 도공들도 평생 하나의 걸작품을 만들기 위해서 많은 시행착오와 열정을 가진 후에 만들어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도 우리를 만들기 위해서 고민하시고 최고로 만들기 위해서 힘을 썼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탄생된 사람들이 바로 저와 여러분입니다. 우리는 수억만의 경쟁을 뚫고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난 자체가 엄청난 축복입니다. 수억만 마리의 정자들과 싸워서 이 세상에 태어난 존재입니다. 지금도 수억만 마리는 난자를 만나지 못하고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난자를 만나 생명을 만들어 탄생시킨 하나님의 놀라운 걸작품입니다.
이렇게 우리도 생명으로 지음을 받기 위하여 강조수동으로 정자들끼리 싸우고 경쟁하여 하나의 난자를 만나기 위해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뱃속에서 10달 동안 열심히 먹고 자라나야 하고 이 세상에 나올 때는 얼마나 큰 고생이 있었습니까? 이렇게 하나의 생명을 잉태하여 자라게 하고 태어나게 하는 것이 고통입니다. 그러면 엄마는 한 생명을 탄생시키기 위하여 많은 고통을 인내한 후에 아이를 출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한 영혼을 잉태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엄청난 고통과 고난을 받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생명을 잉태할 때에 얼마나 큰 고통과 어려움이 있었겠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은 놀라운 기적입니다. 수억만 마리의 정자들과 경쟁하여 승리한 것과 같은 확률입니다. 이 세상에 60억 인구가 있는데 그곳에서 내가 선택받았다는 것은 정자가 난자의 선택을 받아 생명을 잉태하듯이 예수님을 만났다는 사실은 엄청난 기적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생명을 잉태하여 영원한 세상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아이가 엄마의 뱃속에 있을 때는 이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밖의 세상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10달의 인생을 살고 나면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되는 것처럼 우리가 이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영원한 세상을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이가 생각하듯이 엄마 뱃속이 전부다. 라고 살았지만 우리는 이 세상을 알고 있기 때문에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압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계속해서 말씀으로 알려주시고 있습니다. 우리는 언젠가 세상에서 흙으로 돌아가는 존재가 됩니다. 그리고 나면 우리는 예수님으로 생명이 잉태되었기 때문에 영원한 세계로 부활되어 다시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아담은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다시 돌아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장사하여 불에 태우면 남는 것은 한 줌의 흙 밖에 남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성분을 조사하면 흙과 똑같은 성분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생명을 잉태해야 합니다. 어쩌면 아이가 엄마 뱃속에서 짧은 10달을 살면서 이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우리가 이 세상의 짧은 인생을 살면서 전부라고 생각하면서 살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엄마 뱃속이 전부가 아니라 이 세상이 있는 것처럼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 영원한 세상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곳은 거듭나지 않으면 갈 수가 없는 곳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생명이 잉태되어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영원한 세계에 다시 태어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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