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언서 14장에서는 지혜로운 여인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정에서 아내가 잘해야 가정이 세워집니다. 지혜로운 여인은 자기 집을 세운다고 하나님이 말씀합니다.
지혜로운 여인, 분노, 구제, 의(잠 14:1-35)
1-4절, 지혜, 정직, 미련, 소
[1절] 무릇 지혜로운 여인은 그 집을 세우되 미련한 여인은 자기 손으로 그것을 허느니라.
지혜로운 여자들은 자기의 집을 세운다. 지혜로운 여자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을 순종하여 사랑과 선함과 인내를 실천하는 자이다. ‘세운다’는 말은 가정은 저절로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고 부모가 힘써 세워야 함을 보인다. 부부 관계의 문제, 부모 자식 관계의 문제, 자녀의 문제, 건강 문제, 경제 문제 등 어려운 문제들은 누구에게나 있다. 그러나 지혜로운 여자는 그것들을 극복하고 자기 가정을 반듯하게 세울 것이다.
물론, 가정은 하나님께서 세워 주셔야 세워진다. 시편 127:1,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그러나 인간 편에서 가정 건립에는 부부의 노력도 필요하다. 본문은 가정이 남편의 수고만으로 잘 세워지지 않고 아내의 역할이 큰 것을 보인다. 심지어, 남편이 좀 부족해도 아내가 지혜롭게 행하여 남편의 부족을 보충하면 가정을 세울 수 있음을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미련한 여자는 자기의 손으로 그것을 헌다. 미련한 여자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그의 교훈대로 행치 않는 자이다. 그는 다른 사람에 대한 이해심과 너그러움이 부족하고 사랑과 선을 행하지 않고 마음에 자제력이 없고 성급하다. 그는 겸손하지 않고 교만하고 고집스럽다. 그는 게으르고 사치하고 낭비하고 절제치 않는다. 그의 언어생활도 덕스럽지 못하다. 그런 여자는 자기 손으로 자기 가정을 허물며 자기에게 오는 복을 막으며 그 복을 물리친다.
[2절] 정직하게 행하는 자는 여호와를 경외하여도 패역하게 행하는 자는 여호와를 경멸히 여기느니라.
정직하게 행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계명대로 또 양심대로 올바르게 행한다는 뜻이다. 정직하게 행하는 자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이다. 정직하게 행하는 것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증거라는 의미이다. 정직하게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거룩하시고 공의로우신 하나님, 입법자이시고 심판자이신 하나님, 죄악에 대해 심판하시고 징벌하시고 진노하시는 하나님으로 믿고 두려워하는 자이다. 그것은 이기적 생각이나 편의적 생각, 기회주의적 생각과 타협적 생각 등을 버리는 것이다. 경건과 믿음은 의롭고 선한 행위와 진실한 행위로 나타난다. 그것은 노아의 생활에서 잘 나타났다. 노아는 하나님을 경외하였고 의롭고 정직하고 크게 책망할 것이 없이 살았다. 창세기 6:9,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그러나 패역하게 행하는 자는 여호와를 경멸히 여긴다. 패역하게 행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불평하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불순종하고 완악하고 고집스럽게 행한다는 뜻이다. 패역하게 행하는 것은 하나님을 경멸히 여기는 증거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입법자요 심판자이시며 인생에게 상과 벌을 주시는 자이신데,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존중히 여기지 않고 그의 권위를 무시하고 자기 뜻대로 살기 때문이다. 유다의 악한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는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해 두루마리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고 그것을 듣는 대로 작은 칼로 그 책을 베어 화롯불에 던져서 그 모든 두루마리를 태웠다(렘 36:22-23). 그는 비참하게 죽었다.
[3절] 미련한 자는 교만하여 입으로 매를 자청하고 지혜로운 자는 입술로 스스로 보전하느니라.
미련한 자는 교만하여 입으로 매를 자청한다. ‘교만하여 매’(코테르 가아와)라는 원어는 ‘교만의 매’라는 뜻이다(KJV, BDB). 미련한 자는 하나님과 그의 뜻을 거역한다. 미련한 자의 특징은 교만함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겸손하지만, 미련한 자는 하나님을 무시하고 자기 생각과 판단을 앞세운다. 사람의 인품은 말로 표현된다. 미련한 자는 미련한 말, 교만한 말,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말을 한다. 그는 그의 말로 매를 자청한다. 그 매는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징벌과 재앙을 가리킨다. 그것은 질병이나 물질적 궁핍을 포함할 것이다. 미련한 자는 자기가 행한 일을 자기가 받는 것이다.
그러나 지혜로운 자는 입술로 자기 자신을 보전한다. 지혜로운 자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뜻을 따라 사는 자이다. 지혜로운 자의 특징은 겸손한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할 수밖에 없다. 또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는 겸손한 자는 사람들 앞에서도 겸손할 것이다. 지혜로운 자의 겸손한 인품은 그의 겸손한 말로 나타날 것이며, 그의 겸손한 말은 그를 죄로부터 또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보전할 것이다. 말의 의롭고 온전함이 의롭고 온전함이며, 하나님께서는 그런 의인들을 보호하실 것이다.
[4절] 소가 없으면 구유는 깨끗하려니와 소의 힘으로 얻는 것이 많으니라.
소가 없으면 구유가 깨끗하다는 말은 문자적으로 사실이지만, 비유적인 뜻을 가질 것이다. 구유는 소의 먹이통인데, 거기에는 음식 찌꺼기가 조금은 남아 있을 것이며 냄새도 좀 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소에 관심이 있으시다기보다 사람에 관심이 있으시다. 고린도전서 9:9-10, “모세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전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과연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밭 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이라.” 소는 목사나 전도사를 비롯하여, 교회의 여러 봉사자들을 가리킨다. 교회에 여러 봉사자들이 있으면 거기에 따른 여러 가지 필요한 일들도 있다. 그 중에는 그들이 거주할 주택들과 생활비 등 적지 않은 재정지출도 필요할 것이다. 어떤 봉사자들에게는 인격적 결함도 있어 마음 쓰이는 일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소의 힘으로 얻는 것이 많다. 소가 하는 일은 참으로 많다. 소는 논과 밭을 가는 것과 추수하기 등 농사일에는 필수적이다. 또 무거운 짐을 나르는 일에도 유용하다. 소는 참으로 충직한 가축이다. 교회에 충성된 교역자들과 직원들과 봉사자들이 많은 것은 유익한 일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각인에게 주신 은사와 직분을 따라 설교와 전도와 심방의 일을 하고, 주일학교 교사들로서 또 찬양대 지휘, 반주, 대원들로서, 사무직원으로서, 청소 담당과 건물 관리자로서, 주방봉사자로서 충성함으로써 하나님의 교회와 성도들을 위하고 또 복음 사역에 많은 유익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지혜로운 여인은 집을 세우지만, 미련한 여인은 자기 손으로 그것을 허문다. 인간의 일생은 가정을 세우는 과정이다. 남자든지 여자든지 사람은 경건과 도덕성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지혜로 가정을 잘 세워야 한다.
정직하게 행하는 자는 여호와를 경외하여도 패역하게 행하는 자는 그를 경멸한다. 우리는 이기적이게, 자기 편리한 대로 살지 말고, 오직 성경대로 바르고 정직하게 삶으로써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를 멸시치 말자.
우리는 교만한 말로 매를 자청하는 미련한 자가 되지 말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며 겸손한 말을 하는 지혜자가 되자.
소가 없으면 구유는 깨끗하겠지만, 소의 힘으로 얻는 것이 많다. 교회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곳이다. 우리는 복음의 일꾼들의 필요성과 하나님의 복음 사역에 그들의 유익을 생각하고 그들을 아끼고 사랑하자.
5-8절, 신실, 거만, 미련, 슬기
[5절] 신실한 증인은 거짓말을 아니하여도 거짓 증인은 거짓말을 뱉느니라.
증인은 보거나 들은 것을 증거하는 자이다. 신실한 증인은 거짓말을 하지 않고 진실만을 말하는 믿을 만한 증인이다. 우리는 왜 진실한 증거를 말해야 하는가? 첫째로,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옳은 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진실한 말과 증거를 말하는 것이다. 십계명의 제9계명은 “거짓 증거하지 말라”고 하였다. 둘째로, 그것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때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 셋째로, 그것은 교회와 사회에 유익이 되기 때문이다. 거짓말은 사람을 범죄케 하고 인간 관계를 파괴시키지만, 진실한 증거는 사람을 구원하고 의와 참된 사랑을 건립한다. 잠언 14:25, “진실한 증인은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여도 거짓말을 뱉는 사람은 속이느니라.” 주의 사도들은 핍박 중에도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고 말하였다(행 4:20).
그러나 거짓 증인은 거짓말을 뱉는다. 거짓 증인은 거짓말을 하는 자이다. 사람은 왜 거짓말을 하는가?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다(잠 8:13). 또 사람은 자기 이익을 위하고 상대방을 해치기 위해 거짓말을 한다. 이세벨은 나봇의 포도원을 탐하여 나봇이 하나님과 왕을 저주했다고 말하는 거짓 증인을 세워 그를 죽게 했다(왕상 21:10). 대제사장들과 장로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정죄하기 위해 거짓 증인들을 동원하였었다(마 26:59). 그러나 거짓 증거는 하나님 앞에서 큰 죄이다.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은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큰 악이다(잠 6:16-19). 거짓말하는 자는 반드시 지옥에 던지울 것이다(계 21:8).
[6절] 거만한 자는 지혜를 구하여도 얻지 못하거니와 명철한 자는 지식 얻기가 쉬우니라.
‘거만한 자’라는 원어(레츠)는 ‘경멸하는 자, 조롱하는 자’라는 뜻이다. 그는 자신을 크게 여기고 남을 경멸하고 조롱하는 거만한 자이다. 그런 사람도 남들이 지혜를 구하니까 자기도 지혜를 구하며 또 때때로 지혜의 가치를 느끼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거만한 자는 지혜를 구하여도 얻지 못한다. 하나님께서는 지혜를 구하는 자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않으시지만(약 1:5), 거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그에게 지혜를 주지 않으신다. 잠언 3:34, “진실로 그는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나니.” 베드로전서 5:5,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그러나 명철한 자는 지식 얻기가 쉽다. 명철한 자는 자신의 부족을 깨닫고 겸손히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사모하는 자이다. 명철한 자가 얻는 지식은 세상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 인간에 대한 지식, 삶에 대한 지식, 즉 영적 도덕적 지식을 가리킨다. 세상 지식도 유익이 있지만, 영적 지식은 근원적인 지식이며 인간이 마땅히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지식이다. 인생의 참 지혜와 지식은 하나님을 경외함에서 시작된다. 잠언 1: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잠언 9:10,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참 지혜와 지식은 하나님을 경외함에서 온다.
[7절] 너는 미련한 자의 앞을 떠나라. 그 입술에 지식 있음을 보지 못함이니라.
미련한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경외치 않고 그의 계명에 순종치 않는 자이다.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하나는 하나님을 알고 경외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지혜 있는 자들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경외치 않고 그의 계명을 무시하는 미련한 자들이다. 우리는 미련한 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 미련한 자의 입술에는 지식이 없다. 잠언 1: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여기서 지식이란 하나님을 알고 그의 뜻을 아는 영적 도덕적 지식을 가리킨다.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함, 예배와 찬송과 기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의지함, 인간의 행위의 법칙인 의와 거룩과 선과 진실, 인간의 의미와 목적과 가치 등을 아는 것이다. 그러나 미련한 자는 그런 지식이 없다. 또 그의 지식 없음은 그의 미련한 말로 드러난다.
미련한 자의 입술에 지식이 없으므로, 우리는 그 앞을 떠나야 한다. 우리가 왜 떠나야 하는가? 그것은 무지 때문에 해를 받지 않기 위해서이다. 잠언 13:20,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면 지혜를 얻고 미련한 자와 사귀면 해를 받느니라.” 하나님과 그의 뜻을 알지 못하고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알지 못하는 자는 불경건과 죄악에 빠지며 그와 교제하는 자도 죄악된 영향을 받는다. 그것은 곧 멸망으로 가는 길이다.
[8절] 슬기로운 자의 지혜는 자기의 길을 아는 것이라도 미련한 자의 어리석음은 속이는 것이니라.
슬기로운 자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교훈대로 사는 자를 말한다. 슬기로운 자의 지혜는 자기의 길을 아는 것이다. 그는 자기의 길을 아는 지혜를 가지고 있다. ‘자기의 길’이란 인생이 무엇이며 어디서 와서 무엇을 위해 살며 죽어 어디로 가는가 하는 것이다. 그 답은 성경에 있다. 인생은 하나님께로부터 와서 그의 영광을 위하고 그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살다가 그에게로 가서 선악간에 심판을 받는다. 그러므로 인간의 삶의 가치는 경건성과 도덕성에 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에게 예배드리는 것이 우리의 삶에 있어서 매우 가치 있는 일이며, 그의 뜻대로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 사는 것이 또한 매우 가치 있는 일이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라고 말씀하셨다(마 16:24-26). 또 사도 바울은,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고 고백하였고(고후 5:9), 또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 우리로 하여금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했다(딛 2:14).
그러나 미련한 자의 어리석음은 속이는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치 않고 그의 교훈대로 살지 않는 미련한 자들은, 자신들이 의미와 가치를 두고 한 일들, 곧 돈과 명예와 권세와 육신의 쾌락 등이 실상 허무한 일이기 때문에(전 1:2, 14; 요일 2:15-17), 결국 속은 것과 같다. 그의 어리석음이 그를 속였다. 그의 불경건과 부도덕, 그의 물질주의, 쾌락주의, 세상 사랑은 결국 그를 속인 헛된 것들이었다.
신실한 증인은 거짓말을 아니하여도 거짓 증인은 거짓말을 뱉는다. 우리는 결코 지옥 갈 죄악인 거짓말하는 죄를 범하지 말아야 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이웃에게 유익을 주는 진실한 증인이 되어야 한다.
거만한 자는 지혜를 구하여도 얻지 못하지만 명철한 자는 지식 얻기가 쉽다. 우리는 남을 경멸하지 말고 겸손히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하나님과 인생에 대한 풍성한 지식을 얻어 바르고 복된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참된 지식을 사모하고 미련한 자의 앞을 떠나야 한다. 사람들이 자기 사랑, 돈 사랑, 교만, 쾌락 사랑 등에 빠지는 고통하는 말세지말에 우리는 그런 자들에게서 돌아서자(딤후 3:1-5).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지혜를 받아 인생의 정로(正路)를 바로 깨닫자. 우리는 인생의 의미와 목적과 가치를 바로 알고 참되게 살자.
9-12절, 죄, 마음, 집, 길
[9절] 미련한 자는 죄를 심상히 여겨도 정직한 자 중에는 은혜가 있느니라.
‘심상(尋常)히’라는 말은 ‘대수롭지 않게, 예사로’라는 뜻이다. ‘심상히 여긴다’는 원어(리츠)는 ‘경멸하다, 조소하다, 무시하다’는 뜻이다(BDB, KJV, NASB, NIV). ‘은혜’라는 원어(라촌)는 ‘선의(善意)’ 즉 ‘착한 마음’이라는 뜻이다(NASB, NIV).
미련한 자 곧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그의 뜻을 알지 못하는 자는 죄를 무시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그는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것을 큰 죄로 여기지 않는다. 구약의 사사 시대 말의 엘리 제사장과 그의 아들들이 그러하였다. 그들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멸시하였고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러므로 사무엘상 2:17은 이 소년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 심히 켰다고 말한다. 엘리와 그 아들들은 하나님의 징벌로 다 불행하게 죽고 말았다. 미련한 자는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것뿐 아니라, 또한 부모를 거역하고 이웃을 미워하고 음란하고 거짓말하고 탐심을 품는 것을 큰 죄악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정직한 자 중에는 선의(善意) 즉 선한 마음이 있다. 정직한 자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계명대로 올바르게 사는 자를 가리킨다. 그는 하나님의 계명 어기는 것을 큰 죄로 여기고 그 죄를 미워하고 그것을 멀리한다. 사람이 정직하게 살면 하나님의 더 큰 은혜를 받는다(KJV와 한글개역의 뜻). 정직한 자에게는 선한 마음이 있다. 하나님의 계명은 이웃에게 선과 사랑을 베풀라는 것이다. 정직한 자는 이웃에 대한 참된 사랑을 가지고 이웃에 대해 선을 베푼다.
[10절] 마음의 고통은 자기가 알고 마음의 즐거움도 타인이 참여하지 못하느니라.
사람이 마음으로 느끼는 고통은 자신만 아는 것이다. 어떤 때는 친구도, 심지어 가족도 전혀 모른다. 사람은 자존심 때문에 친구나 가족에게 그의 마음의 고통을 표현하지 않는 일이 있고, 어떤 때는 자신의 마음의 고통을 털어놓을 친구나 가족이나 이웃이 없는 경우도 있다. 또 말하여 알게 한다 하더라도 자신이 느끼는 고통과 이웃이 느끼는 고통의 정도는 많이 다를 것이다.
사람이 마음으로 느끼는 즐거움도 비슷하다. 그가 느끼는 즐거움을 누가 다 알겠는가? 그가 너무 기뻐서 그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어서 가족들이나 친구들에게 알려주지만 그들은 그의 즐거움을 다 느끼지 못하며 조금 알고 나눌 뿐이다.
사람은 이처럼 서로를 다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고통과 기쁨을 다 아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좋은 친구이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벗이라고 불리었다(사 41:8).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친구라고 부르셨다(요 15:15). 우리는 이제 주님의 마음으로 서로 사랑하며 상대방의 마음을 이해하고 그의 기쁨과 슬픔을 이해하려고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참 사랑이다. 성경은 우리가 서로 마음을 같이하라고 교훈한다. 로마서 12:15-16,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 베드로전서 3:8,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체휼(體恤)하며[같은 감정을 가지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라.”
[11절] 악한 자의 집은 망하겠고 정직한 자의 장막은 흥하리라.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 하나는 경건한 자이다. 그는 하나님을 인정하고 경외하며 감사하고 의지하며 섬기며 예배드린다. 다른 하나는 불경건한 자이다. 그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경외치 않고 감사하지 않고 의지하지 않고 섬기거나 예배드리지 않는다. 또 사람의 경건과 불경건은 그의 도덕성을 좌우한다. 불경건한 자는 부도덕한 데로 나아간다.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악에서 떠나게 된다(잠 16:6). 악한 자는 하나님의 계명을 거역하여 부모를 공경치 않고 이웃을 미워하며 살인하고 간음하고 도적질하고 거짓말하고 남의 것을 탐낸다. 그러나 정직한 자는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는 도덕성이 있다. 그는 부모를 공경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살인하지 않고 간음하지 않고 도적질하지 않고 거짓말하지 않고 남의 것을 탐내지 않는다.
개인의 경건과 도덕성은 그의 흥망과 생사(生死)를 결정할 뿐 아니라, 가정과 사회의 흥망도 결정한다. 하나님께서 공의로 세상을 심판하신다는 것은 성경 전체의 기본 진리이다.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에서 그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시며 그를 사랑하고 그의 계명과 규례를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신다고 말씀하셨다(출 20:5-6). 또 신명기 28장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면 건강, 자녀, 재물의 복과 사회적인 복도 얻을 것이라고 약속하였다(2-6절). 그러나 반대로 우리가 그 말씀을 거역하면 온갖 재앙을 당할 것이다(15-19절). 시편 1:6,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12절]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사람의 생각은 도덕 기준이 되지 못한다. 사람의 도덕 기준은 매우 낮고 또 환경이나 기분이나 이해 관계에 따라 변화한다. 사람의 도덕 판단은 주관적이고 자기 중심적이기 쉽고 선입견과 편견에 영향을 받기도 쉽다. 그러므로 사람의 보기에 바른 것이 항상 바른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단지 사람 기준에 맞을 뿐이다.
구약의 사사 시대에는 사람들이 각기 자기 소견대로 살았다. 사사기 17:6, “그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그러므로 사사 시대는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우상숭배가 많았고 음란 풍조도 많았고 심지어 동성애도 있었다. 오늘 시대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의 유일한 길이 아니며 타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는 소위 종교다원주의가 교회 안에 깊이 들어와 있고, 세속 사회에 음란 풍조가 가득하며 심지어 교회들 안에도 동성애를 인정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교회는 사회의 양심이며 도덕성의 최후 보루인데, 교회까지 부패하면 세상이 어떻게 되겠는가?
사람의 보기에 바르게 보여도 필경 사망의 길인 것이 있다. 그것은 사람 보기에 바르게 보여도 하나님 보시기에 죄니까 그렇다. 결혼한 부부가 다른 이성 친구를 사귀는 음란 풍조, 거짓말에 능숙한 풍조, 육신적 향락에의 도취 등이 다 그러하다. 하나님께서는 의와 도덕의 기준이시며 또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말씀이 그러하다. 그러므로 주 예수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고 말씀하셨다(마 7:13-14).
우리는 죄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미련한 자가 되지 말고, 그것을 심각한 문제로 여기자. 하나님 앞에서 죄는 이 세상의 그 어떤 일보다도 중요한 문제이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망하는 줄 알고 죄를 심각한 문제로 알아야 한다. 우리는 오직 경건하고 정직하고 선하게만 살자.
마음의 고통은 자기가 알고 마음의 즐거움도 타인이 참여하지 못한다. 하나님께서만 우리의 마음의 기쁨과 슬픔을 아신다. 우리는 참 사랑으로 이웃의 마음의 기쁨과 슬픔을 이해하고 함께 나누려고 애쓰자.
악한 자의 집은 망할 것이나 정직한 자의 장막은 흥할 것이다. 사람들의 경건과 도덕성은 그 자신의 흥망과 생사(生死)뿐 아니라, 그의 가정과 그의 사회의 흥망을 결정한다. 우리는 경건하고 정직하게만 살자.
어떤 길은 사람들의 보기에 바르지만, 필경은 사망의 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망의 길과 영생의 길을 분별하고 영생의 길에 굳게 서자. 우리는 사람을 표준으로 삼지 말고 하나님과 성경만 표준으로 삼자.
13-16절, 슬픔, 보응, 어리석음, 지혜
[13절] 웃을 때에도 마음에 슬픔이 있고 즐거움의 끝에도 근심이 있느니라.
사람은 웃고 즐거워할 때가 있다. 사람들이 웃고 즐거워하는 것은 세상의 여러 가지 좋은 일 때문에 그러하며, 그것은 대개 육신적인, 물질적인 일이다. 사람은 좋은 음식, 좋은 옷, 좋은 집, 좋은 차, 직장에서의 승진, 세상 권세와 명예 등을 기뻐한다. 또 사람은 이성간의 사랑이나 친구간의 우정을 기뻐하고, 또 가족이나 친구가 잘 된 때나 자기가 행하거나 이룬 좋은 일 때문에 기뻐한다.
그러나 사람은 웃을 때에도 마음에 슬픔이 있고 즐거움의 끝에도 근심이 있다. 이것은 사람이 흔히 경험하는 바이다. 왜 그런가? 그것은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공허함, 고독, 불만족, 불안 때문이다. 또 그것은 사람에게 좋은 일이 있는 반면, 근심과 걱정거리들도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안에 거하기 전까지는 마음의 참 평안과 안정을 얻지 못하는 것 같다. 이 세상에는 완전한 기쁨과 평안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는 참된 기쁨과 평안이 있다. 우리는 천국에서 그것을 충만히 맛보며 누릴 것이다. 선지자 이사야는 여호와의 속량함을 얻은 자들이 돌아올 때 시온에서 영영한 희락을 누리리라고 말했다(사 35:10). 요한계시록은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 즉 천국에서는 모든 눈물과 애통하는 것과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계 21:4). 그러나 성도는 이 세상에서도 참된 기쁨과 평안을 누린다. 주께서는 참된 평안을 우리에게 이미 주셨고(요 14:27) 또 성령의 열매는 희락을 포함한다(갈 5:22).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항상 기뻐하라고 교훈하였다(빌 4:4; 살전 5:16).
[14절] 마음이 패려한 자는 자기 행위로 보응이 만족하겠고 선한 사람도 자기의 행위로 그러하리라.
‘패려하다’는 원어(수그)는 ‘뒤로 물러나다, 타락하다, 배교하다’는 뜻이다. 마음이 패려한 자라는 말은 마음이 하나님에게서 물러난 자, 경건과 도덕성을 잃어버린 자, 배교자라는 뜻이다. ‘행위로 보응이 만족하다’는 말은 ‘행위의 보응을 충분히 받는다’는 뜻이다. 마음이 패려하면 행위도 불경건하고 부도덕하게 될 것이다. 마음은 말과 행위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마음이 패려한 자, 곧 불경건하고 부도덕한 자는 자기 행위의 보응을 충분히 받을 것이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는 것은 자연의 이치이다. 이와 같이, 선한 사람은 하나님의 평강과 형통의 복을 받을 것이지만, 악한 사람은 하나님의 재앙을 당할 것이다. 성경은 악인에게 평안이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사 48:22; 57:21).
선한 사람도 자기의 행위로 그러할 것이다. 선한 사람은 그 선한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보응을 받는다는 뜻이다. 잠언 12:14, “사람은 입의 열매로 인하여 복록에 족하며 그 손의 행하는 대로 자기가 받느니라.” 이사야 3:10-11, “너희는 의인에게 복이 있으리라 말하라. 그들은 그 행위의 열매를 먹을 것임이요 악인에게는 화가 있으리니 화가 있을 것은 그 손으로 행한 대로 보응을 받을 것임이니라.” 갈라디아서 6:7-8,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복받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선을 행해야 한다.
[15절] 어리석은 자는 온갖 말을 믿으나 슬기로운 자는 그 행동을 삼가느니라.
어리석은 자는 온갖 말을 믿는다. 사람이 아무 말이나 믿는 것은 잘못이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거짓된 말이 많고 특히 마귀의 속이는 말, 곧 이단들과 잘못된 사상들이 많기 때문이다. 하와는 뱀의 말을 믿고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음으로 범죄하였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이제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고 말하였다(요일 4:1-3).
물론, 무슨 말이든지 안 믿어도 문제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와 진실한 증언들은 믿어야 한다. 예수님의 제자 도마는 다른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를 보았다는 말을 믿지 않고,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고 말했다. 그러나 여드레 후에 주께서는 다시 나타나셔서 도마에게 그의 손을 내밀어 자신의 상처를 만져보라고 하시면서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셨다(요 20:25-27). 우리는 믿어야 할 것들은 다 믿어야 한다.
그러므로 슬기로운 자는 바른 말을 분별하여 믿고 자신의 행동을 삼간다. 사도 바울은 젊은 종 디모데에게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고 권면하였다(딤후 2:15).
[16절] 지혜로운 자는 두려워하여 악을 떠나나 어리석은 자는 방자하여 스스로 믿느니라.
지혜로운 자는 두려워하여 악을 떠난다. 두려워한다는 말은 두려워하여 악을 떠난다고 하였으니 사람이나 육신의 죽음이나 환경여건을 가리키기보다 하나님을 가리킨다고 본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은 악을 떠난다(잠 16:6). 지혜로운 자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악을 떠나는 까닭은 악이 하나님의 진노를 가져옴을 알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악을 징벌하신다. 잠언 13:21, “재앙은 죄인을 따르고 선한 보응은 의인에게 이르느니라.”
그러나 어리석은 자는 방자하여 스스로 믿는다. ‘방자하다’는 원어(밋압베르)는 ‘거만하다’는 뜻이다. ‘스스로 믿는다’는 원어(보테아크)는 ‘자신만만하다’는 뜻이다. 영어성경들은 ‘부주의하다’(NASB), ‘무모하다’(NIV)라고 번역하기도 했다. 어리석은 자는 거만하며 자신만만하게 산다. 그러나 하나님을 무시하고 그의 계명을 무시하고 죄를 용감히 짓되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사는 것은 멸망의 길로 가는 것이며 결국 멸망에 이를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만 의지해야 하고 자신이 아무것도 아님을 인식해야 한다. 성경은 인생을 그림자 같고 허사뿐이라고 말하며(시 39:5-6) 또 안개와 같다고 말한다(약 4:14). 성경은 또, 그러므로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라고 말한다(사 2:22). 그러므로 주께서는 우리에게 자기를 부정하고 그를 따르라고 교훈하셨던 것이다(마 16:24).
사람은 웃을 때에도 마음에 슬픔이 있고 즐거움의 끝에도 근심이 있다. 우리는 일시적인 세상적 기쁨을 추구하지 말고, 천국에서 누릴 영원한 기쁨을 바라고 확신하며 주 안에서 항상 기쁨과 평안을 누리자.
사람은 심은 대로 거둔다. 선한 자는 선한 보응을 받고 악한 자는 악한 보응을 받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한 일만 하는 선한 자가 되자.
우리는 아무 말이나 믿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바른 말을 분별하고 그 말만 믿고 그 말대로 행동을 조심하며 바르게 사는 자가 되자.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을 떠나자. 그것이 지혜이다. 또 우리는 거만한 마음과 자신만만한 마음을 버리고 겸손히 하나님만 의지하자.
17-20절, 분노, 어리석음, 악인, 가난
[17절] 노하기를 속히 하는 자는 어리석은 일을 행하고 악한 계교를 꾀하는 자는 미움을 받느니라.
사람은 불의한 일을 보거나 고의적인 큰 악을 볼 때, 게다가 상대가 그 악을 뉘우치지 않고 변명하고 합리화시킬 때 노하기도 하지만, 자기의 자존심이 상하게 되었다든지 자신에게 큰 손해가 되는 일이 있을 때 흔히 노한다. 그런데 노하기를 속히 하는 자는 어리석은 일을 행한다. 왜 그런가? 그것은 그의 생각과 이해와 판단의 부족 때문에 실수하여 상대방에 대한 잘못된 감정, 특히 미움의 감정을 가지고 상대방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말과 행동을 하기 쉽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사람이 전혀 노하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노하더라도 신중히 판단해서 천천히 노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잠언 14:29,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크게 명철하여도.” 잠언 16:32,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야고보서 1:19,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또 악한 계교를 꾀하는 자는 미움을 받는다. 악한 계교를 꾀하는 것은 속히 노하는 것보다 더 나쁜 일이다. 그것은 실수나 연약이 아니고 고의적인 악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이런 고의적인 악을 행한다면 그는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미움을 받을 것이며 또 진실한 성도들이나 일반 사람들의 미움도 받을 것이다. 악한 계교를 꾀하는 것은 자신에게 복이 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고의적인 악을 매우 미워하시고 반드시 공의로 보복하실 것이다.
[18절] 어리석은 자는 어리석음으로 기업을 삼아도 슬기로운 자는 지식으로 면류관을 삼느니라.
어리석은 자는 어리석음으로 기업을 삼는다. ‘어리석음으로 기업을 삼는다’는 표현은 ‘어리석음을 이어받는다’는 뜻이다. 그것은 부모나 선배에게서 어리석음을 물려받는다는 뜻일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치 않고 그의 계명을 무시하며 자기의 생각대로 사는 어리석은 자의 어리석음은 그가 부모나 선배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이다. 그의 어리석음은 그의 재산이 되었다. 그는 어리석은 유산을 받아 어리석은 말과 행동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슬기로운 자는 지식으로 면류관을 삼는다. 세상에서도 지식은 사람의 면류관과 같다. 학자나 기술자의 그의 전문분야 혹은 전공분야에서의 전문적 지식은 그의 영광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의 계명을 순종하는 슬기로운 자도 그러하다. 그의 참된 지식 곧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계명과 뜻을 알고 인생의 정로를 알고 죄의 심각성을 알고 구원과 영생과 천국을 아는 지식은 그의 면류관이다. 잠언 1:7-9,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 이는 네 머리의 아름다운 관이요 네 목의 금사슬이니라.” 잠언 4:6-9, “지혜를 버리지 말라. 그가 너를 보호하리라. 그를 사랑하라. 그가 너를 지키리라. 지혜가 제일이니 지혜를 얻으라. 무릇 너의 얻은 것을 가져 명철을 얻을지니라. 그를 높이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높이 들리라. 만일 그를 품으면 그가 너를 영화롭게 하리라. 그가 아름다운 관을 네 머리에 두겠고 영화로운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하였느니라.” 참 지혜와 지식은 성도의 영광이다.
[19절] 악인은 선인 앞에 엎드리고 불의자는 의인의 문에 엎드리느니라.
언제 그렇게 되는가? 하나님의 정하신 때에 그렇다. 의인과 선인이 고통을 당하고 핍박을 당하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정하신 때에 악인은 의인 앞에 굴복될 것이다. 어디에서 그렇게 되는가? 내세에서가 아니고 이 세상에서 그렇게 될 것이다. 왜 그렇게 되는가? 하나님의 심판 때문에 그렇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공의를 드러내실 것이다. 그는 의인을 변호하시고 악인의 악을 징벌할 것이다.
성경에는 여러 가지 예들이 나온다. 요셉과 그 형들의 경우가 그러하였다. 요셉의 형들은 동생 요셉을 시기하고 미워하여 죽이려 하다가 애굽으로 가는 이스마엘 상인에게 팔아넘겼다. 그것은 사형을 받을 만한 큰 죄악이다. 출애굽기 21:16, “사람을 후린[납치한] 자가 그 사람을 팔았든지 자기 수하에 두었든지 그를 반드시 죽일지니라.” 그러나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된 후 그의 형들은 애굽에 와서 양식을 얻기 위하여 총리 요셉 앞에 꿇어 엎드렸다(창 42:6).
다윗과 블레셋 장수 골리앗의 경우도 그러했다. 골리앗은 이방신을 믿는 장수로서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그 백성을 모욕하였었다. 그러나 경건한 소년 다윗은 믿음으로 나아가 그를 이겼다. 악한 이방인 장수 골리앗은 경건한 다윗 앞에 거꾸러져 죽임을 당했다(삼상 17:49).
모르드개와 악한 신하 하만의 경우도 그러했다. 파사 왕 아하수에로의 가장 높은 신하 하만은 모르드개와 그 민족인 유다 민족을 미워하여 죽이려 했다. 그러나 경건한 왕후 에스더의 일사각오의 정신으로 왕께 나아감으로 말미암아 하만과 그 가족들과 동료들은 다 모르드개 앞에 굴복되고 죽임을 당하였다(에 7:10; 9:24-25).
[20절] 가난한 자는 그 이웃에게도 미움을 받게 되나 부요한 자는 친구가 많으니라.
가난한 자는 그 이웃에게도 미움을 받게 된다. 사람이 가난해지는 것은 게을렀거나 낭비가 많았거나 하나님께서 복을 거두셨기 때문일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보통 가난한 자를 미워하고 무시하고 학대한다. 그러나 성경은,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존경하는 자니라”(잠 14:31)고 말하고, 또 “가난한 자를 조롱하는 자는 이를 지으신 주를 멸시하는 자요 사람의 재앙을 기뻐하는 자는 형벌을 면치 못할 자니라”(잠 17:5)고 말한다.
성도는 가난한 자를 미워하거나 무시하지 말고 불쌍히 여겨야 한다. 실상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미련한 것들, 천한 것들, 멸시받는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과 존귀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셨다(고전 1:26-29). 야고보는,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고 말했다(약 2:5).
본문은 “부요한 자는 친구가 많다”고 말한다. 원문은 “부요한 자를 사랑하는 자들은 많으니라”(NASB)는 뜻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복 주심과 근면함과 검소함으로 물질적 소득을 얻고 저축하게 되고 부요케 된다. 불의한 방법으로 돈을 버는 것은 자신에게 복이 되지 않는다(잠 16:8). 사람은 부요하면 친구가 많다. 왜냐하면 그는 남을 대접하며 선행과 구제를 위해 돈을 쓰기 때문일 것이다. 성도는 믿음 안의 형제들과 이웃들을 잘 대접해야 한다. 디모데전서 3:2, “[장로의 자격은] 나그네를 대접하며.” 6:18, “선한 일을 하며,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는 자가 되라.”
노하기를 속히 하는 자는 어리석은 일을 행하고 악한 계교를 꾀하는 자는 미움을 받는다. 우리는 노하기를 더디 하며 무슨 일이든지 충분히 이해하고 기도하며 신중히 판단한 후 하며, 결코 악한 일을 꾀하지 말자.
어리석은 자는 어리석음으로 기업을 삼아도 지혜자는 지식으로 면류관을 삼는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을 지킴으로써 지혜와 지식을 가진 자가 되고, 지식 있는 자로서 지식 있는 말과 행동을 하자.
악인은 선인 앞에 굴복하고 불의자는 의인의 문에 굴복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경건하고 의롭고 선하게만 살자. 우리는 결코 악을 행치 말자.
세상에서 가난한 자는 이웃에게 미움을 받게 되고 부요한 자는 친구가 많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물질적 복을 누릴 때에도 가난한 자를 무시하거나 미워하거나 학대하지 말고, 항상 선행과 구제를 힘쓰자.
21-24절, 긍휼, 선, 말, 재물
[21절] 그 이웃을 업신여기는 자는 죄를 범하는 자요 빈곤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는 자니라.
그 이웃을 업신여기는 자는 죄를 범하는 자이다. 그것은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법을 어긴 것이다. 또 그것은 그의 교만에서 나오며 주로 사람의 외적 조건을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가치는 돈이나 외모나 세상적 조건에 있지 않고, 그의 인격과 경건성과 도덕성에 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며 남을 존중해야 한다. 로마서 12:10,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라.”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고 그들 중의 다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셔서 피흘려 사신 자들이다. 또 무엇보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과 명령이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새 계명의 정신이다.
또 빈곤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는 자이다. 세상 사람들이 무시하는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자들을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고 이해하고 동정하고 배려하고 도와주는 것은 하나님을 본받는 일이다. 시편 10:14, “주는 벌써부터 고아를 도우시는 자니이다.” 시편 68:5, “그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 빈곤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자는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는 자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행위를 기뻐하시고 복주실 것이다. 시편 41:1은, “빈약한 자를 권고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재앙의 날에 여호와께서 저를 건지시리로다”고 말했다.
[22절] 악을 도모하는 자는 그릇 가는 것이 아니냐? 선을 도모하는 자에게는 인자와 진리가 있으리라.
‘악을 도모하는 것’은 순간적인 실수로 악을 행하는 것이 아니고 악을 계획하고 행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명하신 인생의 정로(正路)를 벗어나서 그릇 가는 것, 즉 잘못된 길로 가는 것이다. 그 길은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가는 넓은 길이며 사망과 멸망의 길이다. 그것은 결코 복된 길이 아니고 평강과 형통의 길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과 명령, 그리고 구원의 목표는 우리가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레위기 19:18,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아모스 5:14, “너희는 살기 위하여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지어다.” 주께서도 율법 중에 큰 두 가지 계명은 첫째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과 둘째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 22:36-40). 디도서 2: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선을 도모하는 자에게는 인자와 진리가 있다. ‘선을 도모하는 것’은 즉흥적 선행이 아니고 선을 행하려고 계획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는 것이다. ‘인자’는 긍휼, 자비, 은혜와 거의 같은 뜻으로 ‘하나님의 인자, 자비, 은혜’를 가리킬 것이다.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과 그의 진실하심을 가리킬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선을 행하면 하나님께서는 더욱 우리를 사랑하시고 진리의 말씀을 주시고 모든 약속을 이행하실 것이다. 그의 약속 안에는 기도의 응답과 필요한 것의 공급과 보호의 약속이 포함된다.
[23절] 모든 수고에는 이익이 있어도 입술의 말은 궁핍을 이룰 뿐이니라.
모든 수고에 이익이 있다는 것은 우리의 생활 속에서 늘 경험하는 바이다. 학생이 열심히 공부하면 상도 받고 졸업하여 원하는 직장에 취직도 잘할 수 있을 것고, 농부가 땀 흘려 수고하면 추수 때에 풍성한 수확을 얻을 것이다. 노동자가 무슨 일이든지 열심히 일하면 돈을 많이 벌고 물질적으로 유여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입술의 말은 궁핍을 이룰 뿐이다. 영어성경들은 “말만 하는 것(mere talk)은 궁핍을 이룰 뿐이라”고 번역하였다(NASB, NIV). 말은 힘과 시간을 소모하고 또 사람이 말만 많이 하면 자기의 생활, 즉 자기의 일에 충실치 못할 것이다. 그런 자는 물질적으로도 궁핍할 것이다. 자기 일을 열심히 하는 자는 말을 많이 할 틈이 없고 그럴 이유도, 그럴 시간도 없을 것이다. 공부 잘하는 학생과 일 잘하는 직장인은 말을 많이 하지 않고 자기 일에 전심전력하는 자들이다. 그런 자들이 자기 분야에서 전문가가 되고 달인이 된다.
성경은 성도가 말을 많이 하는 것을 경계하였다. 잠언 10:19,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키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 잠언 13:3, “입을 지키는 자는 그 생명을 보전하나 입술을 크게 벌리는 자에게는 멸망이 오느니라.” 야고보서 1:19,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또 성경은 성도가 말만 하지 말고 선한 일을 실천하라고 교훈한다. 실행이 없는 말은 허풍이요 위선이다. 주 예수께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말만 하고 행치 않는다고 지적하셨다(마 23:3).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말하였고(약 2:17), 요한은,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고 교훈하였다(요일 3:18).
[24절] 지혜로운 자의 재물은 그의 면류관이요[지혜로운 자의 면류관은 그의 재물이요](원문, KJV, NASB) 미련한 자의 소유는 다만 그 미련한 것이니라[미련한 자의 어리석음은 어리석음을 내느니라](NIV).
지혜로운 자에게 재물은 하나님의 복의 증거이다. 잠언 3:16, “그 우편 손에는 장수(長壽)가 있고 그 좌편 손에는 부귀(富貴)가 있나니.” 경건한 아브라함과 이삭과 욥은 물질적 부요를 누렸다. 창세기 24:35. “여호와께서 나의 주인[아브라함]에게 크게 복을 주어 창성케 하시되 우양(牛羊)과 은금과 노비와 약대와 나귀를 그에게 주셨고.” 창세기 26:12-13,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 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巨富)가 되어.” 욥기 1:3, “그 소유물은 양이 7천이요 약대가 3천이요 소가 5백 겨리요 암나귀가 5백이며 종도 많이 있었으니 이 사람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큰 자라.”
지혜로운 자는 그 재물로 하나님의 일을 할 기회를 얻을 것이다. 그는 그 재물을 전도와 구제를 위해 쓸 것이다. 누가복음 12:33,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적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 구제는 하늘에 저축하는 것이다.
그러나 미련한 자는 항상 어리석음만 드러내는 자이다. 미련한 자의 어리석음은 치료되지 않는 어리석음이며 시간이 갈수록 더 악화되는 어리석음이다. 잠언 27:22, “미련한 자를 곡물과 함께 절구에 넣고 공이로 찧을지라도 그의 미련은 벗어지지 아니하느니라.”
그 이웃을 업신여기는 자는 죄를 범하는 자요 빈곤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다. 우리는 이웃을 업신여기지 말고 하나님의 명령과 교훈을 따라 남을 존중하고 서로 사랑해야 하고, 특히 가난하고 어려움 당한 자들을 돌아보고 이해하고 동정하고 도와주는 자가 되어야 한다.
악을 도모하는 자는 그릇 가는 것이다. 그러나 선을 도모하는 자에게는 인자(仁慈)와 진리가 있다. 우리는 악을 버리고 항상 선을 행하자.
모든 수고에는 이익이 있어도 입술의 말은 궁핍을 이룰 뿐이다. 우리는 각자 자기 일에 전념하여 물질적 유여함을 누리고, 또 실수하지 않도록 가급적 말수를 줄이고, 말보다 사랑과 선행의 실천을 힘쓰자.
지혜로운 자의 재물은 그의 면류관이요 미련한 자의 소유는 그 미련한 것뿐이다. 우리는 미련한 자가 되지 말고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지혜로운 자가 되고, 또 하나님께서 주신 물질은 전도와 구제를 위해 선하게 쓰자.
25-28절, 진실한 증인, 여호와를 경외함
[25절] 진실한 증인은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여도 거짓말을 뱉는 사람은 속이느니라.
진실한 증인은 사람의 생명을 구원한다.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에서 거짓 증거하지 말라고 우리에게 명하셨다. 신약의 사도들은 다 증인들 곧 진실한 증인들이었다. 사도행전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사도행전 4:19-20,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 . .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은 하나님의 복음을 증거하다가 많은 고난과 핍박을 받았고 심지어 죽기까지 하였다.
주의 사도들의 진실한 증거를 통해 구원의 복음이 온 땅에 전파되었고 많은 영혼들이 구원을 받았다. 요한복음 20:30-31,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실들을 전했고 사람들은 그들의 증거의 말씀을 믿었고 구원을 얻었다. 그들이 거짓말을 전했다면 영혼들을 구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순교의 피로 인쳐진 그들의 진실한 증언들은 많은 영혼들을 주께로 돌아오게 하였다.
그러나 거짓말을 뱉는 사람은 속인다. 거짓말은 진리의 세계에서 합당치 않다. 거짓말은 에덴 동산에서 뱀이 하와를 미혹할 때 사용한 도구이며 사탄의 주특기이다(요 8:44). 거짓말은 그 자체가 죄악이며 인류를 멸망시켰고 사람들에게 구원과 영생을 주지 못한다. 거짓말로는 사람의 영혼들을 결코 구원하지 못할 것이다.
[26절]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견고한 의뢰가 있나니 그 자녀들에게 피난처가 있으리라.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견고한 의뢰가 있다. 여호와를 경외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알고 그를 믿고 그를 두려워하고 그를 섬기는 것을 가리킨다. ‘견고한 의뢰’라는 원어(미브타크-오즈)는 ‘강한 확신’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은 확실히 안전함과 보호, 힘과 위로, 도우심과 공급하심과 구원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확실히 안전과 보호, 힘과 위로, 도우심과 공급하심과 구원이 되실 것이다.
시편 33:18-19, “여호와는 그 경외하는 자 곧 그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를 살피사 저희 영혼을 사망에서 건지시며 저희를 기근 시에 살게 하시는도다.” 시편 34:7-10, “여호와의 사자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치고 저희를 건지시는도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성도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확신할 수 있다.
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그 자녀들에게 피난처가 있다. ‘피난처’는 환난 날에 피할 곳, 의지할 대상을 말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그 자신이 복 될 뿐 아니라, 자기 자녀들도 복되다. 사람들은 의료보험, 교육보험, 생명보험 등 여러 가지 보험을 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보증이시며 보호자시요 공급자이시며 또 우리 자녀들에게도 그러하시다. 시편 37:25-26,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저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주니 그 자손이 복을 받는도다.”
[27절]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생명의 샘이라. 사망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느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란 하나님을 알고 인정하고 두려워하고 그를 의지하고 섬기며 순종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생명의 샘이다. 하나님께서는 생명의 근원이시다. 바다의 물고기들, 공중의 새들, 땅 위의 생물들은 다 하나님의 창조물들이다. 시편 36:9,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예레미야 2:13,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 또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생명이 있다. 요한복음 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요한복음 11:2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요한복음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하나님께서는 생명의 근원이시므로 생명수가 흘러나오는 생명의 샘과 같다. 사람이 그 물을 마시면 살고 생명의 강건함을 얻을 것이다. 또 하나님 안에는 영원한 생명 곧 영생이 있다. 인생은 지금 사망의 그물에 걸린 자들과 같다. 죄의 결과는 사망이다. 그러나 인생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영생을 얻게 되며(요 3:16) 모든 불경건과 부도덕을 떠나게 된다. 사람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악에서 떠나고 의를 행하게 된다(잠 16:6). 여호와를 경외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악에서 떠나고 의를 행하는 자는 사망의 그물에서 벗어나고 영생을 얻게 된다.
[28절] 백성이 많은 것은 왕의 영광이요 백성이 적은 것은 주권자의 패망이니라.
백성이 많고 적은 것은 여러 여건에 관계될 것이다. 영토가 넓든지, 경제적 여건이 좋든지, 사회 제도나 통치자들의 인격과 덕이 좋아야 할 것이다. 또, 사회질서가 안정된 가운데 자녀 출산도 많고 들어오는 이민자들도 많아야 할 것이다. 특히 사회 제도는 인간의 자유와 인권을 존중하고 도덕성과 질서가 확립되어야 할 것이다. 강제성이 많은 사회는 그렇게 평안치 못할 것이다. 경제나 교육이나 사회생활 전반에 있어서 자유로운 경쟁은 성경적이며 사회 발전을 가져온다. 지난 50년 이상 옛 소련이나 중국에서 시험되었던 중앙통제적 공산주의 제도는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으로 실패하였다.
미국 같은 나라는 1753년에 인구 130만명이었지만, 2013년 즉 불과 260년 만에 인구 3억 1,600만명 이상의 큰 나라가 되었는데, 그것은 위에서 말한 여러 조건들에 맞기 때문일 것이다. 반대로 구 소련은 연방이 해체되고 축소되었고 지금도 일부는 분리독립을 원하고 있으며 중국의 티베트도 독립을 원하고 있다. 또 한반도의 북한은 많은 사람들이 살기 싫어 탈출하기를 원하는 참으로 불행한 곳이 되었다.
물론, 그리스도의 교회는 세속 국가와 다르다. 주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고 말씀하셨다(마 7:13-14). 진리 운동은 좁은 길 가는 운동이며 참된 교회는 단순히 교인수로 판단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참된 교회에 구원받는 자들의 수가 날마다 늘어나기를 기도해야 하며, 그것이 주님께 영광이 될 것이다.
우리는 남을 속이는 모든 종류의 거짓말을 멀리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뭇 영혼들을 구원할 만한 진리만 말하는 진실한 증인이 되자.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우리 자녀의 피난처이시다. 그는 우리 가족의 보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만 경외하고 섬기며 순종하며 따르자.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 경외하고, 하나님 중심, 믿음 중심으로만 살자. 또 우리는 죄를 짓지 말고 의만 행하며 또 영생을 확신하자(롬 6:22).
우리는 우리나라가 사람들이 이민 오기를 원하는 살기 좋은 나라가 되도록 기도하자. 또 주님의 참된 교회들의 성장을 위해서도 기도하자.
29-31절, 분노, 평안, 자비
[29절]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크게 명철하여도 마음이 조급한 자는 어리석음을 나타내느니라.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화를 낼 만한 상황에서도 좀더 생각하고 참고 지나친 감정을 가지지 않으려 애쓰는 자이다. 그는 명철한 자이다. 잠언 16:32,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잠언 19:11, “노하기를 더디 하는 것이 사람의 슬기요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이니라.” 그런 사람은 과격한 말과 행동을 피하며 실수하거나 범죄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조급한 자는 어리석음을 나타낸다. 마음이 조급한 자는 인내심이 없고 성질이 급해서 분노를 참지 못하고 쉽게 나타낸다. 그런 자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드러낼 뿐이다. 그는 정당한 이유가 없이 성급히 화를 내는 실수를 하기 쉽다. 모세는 온유한 사람이었지만, 가데스 므리바에서 물이 없어 그를 공박하는 무리 앞에서 지나친 말과 행동으로 실수하며 범죄하였다(민 20:10-11). 그는 그 일 때문에 그렇게도 기다리며 사모했던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였다.
잠언 12:16, “미련한 자는 분노를 당장에 나타내거니와 슬기로운 자는 수욕을 참느니라.” 잠언 14:17, “노하기를 속히 하는 자는 어리석은 일을 행하고 악한 계교를 꾀하는 자는 미움을 받느니라.” 잠언 15:18, “분을 쉽게 내는 자는 다툼을 일으켜도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시비를 그치게 하느니라.” 조급하게 분노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30절] 마음의 화평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의 썩음이니라.
마음의 화평은 육신의 생명이다. ‘마음의 화평’이라는 원어(레브 마르페)는 ‘건강한 마음’(BDB, KJV)이라는 뜻이며 ‘평온한 마음’(NASB, NIV)이라고 번역되기도 한다. 육신의 건강에는 심리적 요인도 중요하다. 잠언 17:22,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 잠언 18:14, “사람의 심령은 그 병을 능히 이기려니와 심령이 상하면 그것을 누가 일으키겠느냐?”
본문은 시기(猜忌)가 뼈의 썩음이라고 말한다. ‘시기’라는 원어(키느아)는 ‘시기, 질투’(KJV, NIV)라는 의미뿐 아니라, 또한 ‘격노’ (passion)(NASB)라는 뜻을 가진다. 시기, 질투나 격노의 감정은 건강에 매우 좋지 않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그런 정도의 건강 상식은 가지고 있다. 특히 시기와 질투는 겉보기에는 큰 문제처럼 안 보일지 모르나, 거기에서 미움과 살인의 감정이 나온다. 그런 감정들은 ‘뼈의 썩음’같이 건강에 큰 해가 되는 것이다.
야고보서 3:13-17은, 세상에 두 가지 종류의 지혜가 있다고 말한다. 하나는 위로부터 난 지혜요 또 하나는 세상적인 지혜이다.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뇨?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슬러 거짓하지 말라.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니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요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니라.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위로부터 난 지혜는 건강에 유익하나 세상적 지혜는 해가 된다.
[31절]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존경하는 자니라.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이다. 잠언 17:5도, “가난한 자를 조롱하는 자는 이를 지으신 주를 멸시하는 자요”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사람의 영혼의 가치, 즉 그의 인격성과 도덕성의 가치를 모르고 단지 재산의 많고 적음에 의해 사람을 평가하고 가난한 자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세상에 가난한 자와 부자가 섞여 살고 있으나 그들을 다 창조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며(잠 22:2)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자기의 형상대로 창조하셨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이 된다. 사람의 가치는 돈보다 심히 크다. 인간의 가치가 100이라면 돈이나 집이나 차나 옷의 가치는 20이나 30도 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존경하는 자이다. 궁핍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자는 사람의 영혼의 가치, 즉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격적, 도덕적 존재임을 아는 자이다. 그는 결국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을 존경하는 자이며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존중하는 자이다. 그는 사람의 가치와 돈의 가치의 경중(輕重)을 바로 아는 자이다. 그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의 모습이다. 그러므로 욥은 부르짖는 빈민과 도와줄 자 없는 고아를 건졌고 소경의 눈이 되고 절뚝발이의 발이 되었고(욥 29:12, 15) 고아를 먹였고 헐벗은 자를 입혔고 나그네로 거리에서 자지 않게 하였다(욥 31:17, 19-20, 32). 잠언 30:20에는 현숙한 여인은 가난한 자들에게 손을 펴며 궁핍한 자를 위해 손을 내민다고 묘사되었다. 사도 바울은 자신도 가난한 자들을 돌아보는 일을 본래 힘썼다고 말하였다(갈 2:10).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크게 명철하여도 마음이 조급한 자는 어리석음을 나타낸다. 우리는 조급한 마음으로 쉽게 성내지 말고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고 노하기를 더디 하도록 하나님께 기도하며 자신을 다스리자.
마음의 화평은 육신의 생명이지만, 시가는 뼈의 썩음이다. 우리는 우리의 거룩과 건강을 위해서라도 남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마음이나 격노하는 감정을 품지 말고, 어떤 상황에서도 선하고 평안한 마음을 가지자.
가난한 자를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자를 주를 존경하는 자이다.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을 공경하며, 가난한 자를 학대하지 말고 불쌍히 여기는 자가 되자.
32-35절, 의와 지혜
[32절] 악인은 그 환난에 엎드러져도 의인은 그 죽음에도 소망이 있느니라.
악인은 하나님을 무시하고 거역하며 그의 계명들을 어기고 죄만 짓고 회개할 줄 모르는 자이며, 그가 당하는 환난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징벌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공의의 영광을 나타내시고 사람들로 그를 경외케 하시기 위해 환난을 주신다고 본다. 시편 11:6, “악인에게 그물을 내려치시리니 불과 유황과 태우는 바람이 저희 잔의 소득이 되리로다.” 잠언 13:21, “재앙은 죄인을 따르고 선한 보응은 의인에게 이르느니라.” 악인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환난으로 인해 엎드러질 것이다. 잠언 10:24-25, “악인에게는 그의 두려워하는 것이 임하거니와,” “회리바람이 지나가면 악인은 없어져도.”
그러나 의인은 그 죽음에도 소망이 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에 순종하는 의인은 이 세상에서 환난도 잘 통과하지만, 죽을 때도 소망이 있다. 그것은 천국과 영생의 소망이다. 시편 116:15,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 또 죽음은 성도에게 많은 유익도 준다. 성도는 죽음 때문에 항상 깨어 있을 수 있고, 또 죽음을 알 때 세상이 허무하고 일시적임을 깨닫고 세상을 사랑치 않을 수 있고, 또 하나님과 천국만 더욱 바라며 살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소망이시며 그가 약속하신 천국과 영생도 그러하다. 고린도후서 4:18,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고린도후서 5:1,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몸]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33절] 지혜는 명철한 자의 마음에 머물거니와 미련한 자의 속에 있는 것은 나타나느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덕인 지혜는 하나님을 경외함 즉 경건과 의와 거룩의 길에서 얻으며, 그것은 사람을 평강의 길로 이끈다. 이 지혜는 명철한 자의 마음에 머문다. 그것은 평소에 명철한 자의 마음 속에 있고 드러나지 않는다. 지혜자는 꼭 필요한 경우에 말하고 행하지만, 평소에 말이 많지 않다. 성령께서는 지혜의 영으로서 신자 속에 계신다. 그는 우리나 다른 이들의 눈에 보이지 않으시지만, 우리 속에서 감화 감동하시고 일하신다. 그는 우리에게 교훈하시고 우리를 깨우치시며 우리가 범죄할 때 근심하시며 또 책망하신다. 또 그는 우리에게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격려를 주신다.
그러나 미련한 자의 속에 있는 것은 나타난다(KJV). 미련한 자는 하나님을 무시하고 그의 뜻과 계명을 거스르는 자이며, ‘미련한 자의 속에 있는 것’은 미련함을 가리킬 것이다. 본문은 지혜가 명철한 자의 마음 속에 있어서 평소에 보이지 않지만, 미련한 자의 미련함은 시시때때로 말과 행위로 나타난다는 뜻일 것이다. 사람의 마음 속에 있는 것은 조만간 밖으로 드러난다. 주께서는 사람이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한다고 말씀하셨다(마 12:34). 지혜자의 지혜도, 미련한 자의 미련함도 그러할 것이다.
[34절] 의는 나라로 영화롭게 하고 죄는 백성을 욕되게 하느니라.
의는 하나님의 뜻과 계명대로 사는 것이며, 그것은 경건과 도덕성이다. 즉 다른 신이나 우상을 섬기지 않고 하나님만 섬기며 부모를 공경하며 사람의 생명과 순결성과 재산과 명예를 존중하는 것이다. 세속사회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도덕성이 존중되는 사회, 사람의 인권이 존중되고 신앙과 경제생활과 교육의 자유가 보장되는 사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의는 나라를 영화롭게, 즉 평안하고 부강하게 만들 것이다. 레위기 26:7-9, “너희가 [의로우면] 대적을 쫓으리니 그들이 너희 앞에서 칼에 엎드러질 것이라. 너희 다섯이 백을 쫓고 너희 백이 만을 쫓으리니 너희 대적들이 너희 앞에서 칼에 엎드러질 것이며 내가 너희를 권고하여 나의 너희와 세운 언약을 이행하여 너희로 번성케 하고 너희로 창대케 할 것이며.” 잠언 29:4, “왕은 공의로 나라를 견고케 하나.”
천국은 의의 나라이다. 베드로후서 3: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우리는 그 의의 나라를 사모하며 고대한다. 또 우리는 우리나라도 경건과 의가 있는 나라가 되도록 나라와 위정자들과 이웃들을 위해 기도하고 전도하고 모범된 삶을 살아야 한다. 그것이 세상의 빛이 되라고 하신 뜻이다(마 5:16).
그러나 죄는 백성을 욕되게 한다. 백성을 욕되게 하는 것은 사회적 재난과 무질서, 전쟁, 흉년이나 경제 공황, 대형사고, 전염병 등을 가리킬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레위기 26장에서 이스라엘이 그의 계명을 거역하면 흉년이 들고 전쟁이 일어나고 전쟁에서 패하고 전염병과 기근이 찾아올 것이라고 경고하셨고, 신명기 28장에서는 그 재앙들 중에 폐병, 열병, 학질, 종기, 옴 등 각종 질병들을 언급케 하셨다.
[35절] 슬기롭게 행하는 신하는 왕의 은총을 입고 욕을 끼치는 신하는 그의 진노를 당하느니라.
슬기롭게 행하는 신하는 왕의 은총을 입는다. 슬기롭게 행하는 것은 지혜롭게, 정직하고 의롭게, 진실하게, 또 충성되게 행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런 신하는 왕의 사랑을 더욱 받는다. 잠언 16:13, “의로운 입술은 왕들의 기뻐하는 것이요 정직히 말하는 자는 그들의 사랑을 입느니라.” 잠언 22:11, “마음의 정결을 사모하는 자의 입술에는 덕이 있으므로 임금이 그의 친구가 되느니라.” 시편 101:6, “내 눈이 이 땅의 충성된 자를 살펴 나와 함께 거하게 하리니 완전한 길에 행하는 자가 나를 수종하리로다.”
그러나 욕을 끼치는 신하는 왕의 진노를 당한다. 욕[수치]을 끼치는 것은 교만하고 권력을 남용 혹은 악용하고 뇌물을 받거나 불의의 이익을 구하고 가난한 자를 학대하는 등의 불법을 행하는 것을 가리킨다. 다윗 왕은, “나는 비루한 것을 내 눈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이요 배도자들의 행위를 미워하니 이것이 내게 붙접지 아니하리이다. . . . 그 이웃을 그윽히 허는 자를 내가 멸할 것이요 눈이 높고 마음이 교만한 자를 내가 용납지 아니하리로다”고 말했다(시 101:3-5).
본문의 말씀은 어떤 단체나 직장에서도 적용된다. 슬기롭게 행하는 사람은 윗사람의 총애를 받을 것이나, 어리석고 부덕하게 행하는 자는 그의 노를 당할 것이다. 특히 하나님 앞에서도 그렇다.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야 할 것을 교훈하셨고(마 24:45-47), 또 열 처녀 비유와 달란트 비유와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그것을 강조하셨다(마 25장). 지혜롭고 충성된 종들은 하나님의 칭찬을 받을 것이나, 악하고 게으른 종들은 그의 진노를 받을 것이다.
악인은 그 환난에 엎드러져도 의인은 그 죽음에도 소망이 있다. 우리는 환난과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바르고 선하게만 살자. 또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 바라며 의지하고 천국의 소망을 든든히 가지자.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을 행함으로써 지혜를 얻어서 꼭 필요할 때 지혜의 말과 지혜의 행동을 할 수 있는 성도가 되자.
의(義)는 나라로 영화롭게 하고 죄는 백성을 욕되게 한다. 사회의 평안은 백성의 경건과 도덕성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나라와 우리 사회가 경건하고 도덕적인 나라와 사회가 되도록 기도하고 노력하자.
우리는 이 세상에서도 좋은 국민, 좋은 공무원, 좋은 직장인이 되자. 우리는 특히 하나님 앞에서 좋은 성도와 좋은 직분자가 되자.
[욥기 강해설교말씀] 빌닷--사람은 하나님 앞에 의롭지 않다(욥 25:1-6)
[욥기 강해설교말씀] 빌닷--사람은 하나님 앞에 의롭지 않다(욥 25:1-6)
욥기 25장에서는 빌닷의 욥의 주장에 대해서 정죄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욥의 친구들은 율법주의 신앙을 하면서도 욥을 질책하고 있습니다. 자기들도 하나님 앞에서 의롭지 못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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