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서 5장에서는 혼인잔치로 초청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신혼 초기에 임한 시련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신랑이 왔는데 신부가 하던 일을 모두 마치고 신랑을 맞이하려 했는데 신랑은 이미 가버렸습니다. 신부는 놀라서 신랑을 찾지만 찾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보면서 구원받을 때가 있습니다. 신랑이신 예수님을 만날 말한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구원받을 기회를 주셨을 때 우리는 그 기회를 잡아야 합니다.
신랑의 아름다움(아 5:1-16)
[1절]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내가 내 동산에 들어와서 나의 몰약과 향 재료를 거두고 나의 꿀송이와 꿀을 먹고 내 포도주와 내 젖을 마셨으니 나의 친구들아 먹으라.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아, 마시고 많이 마시라.
본절은 신랑의 말로서 신부의 초청(4:16)에 대한 대답이다. 그는 그의 동산에 들어왔고 그의 몰약과 향 재료를 거두었고 그의 꿀송이와 꿀을 먹었고 그의 포도주와 젖을 마셨다고 말한다. 그 동산은 교회이다. 신랑되신 주께서는 성령으로 교회 속에 즉 성도들 가운데 오셨고 지금 그들 안에 계신다. 고린도후서 13:5,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몰약과 향재료’는 성도들의 선하고 덕스러운 인격과 행실을 상징하고 ‘꿀송이와 꿀’은 성도들의 입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진리들, 복음, 선한 권면의 말들을 가리킬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고 맛 있는 말씀이라고 묘사한다(시 19:10; 119:103).
‘포도주와 젖’도 생명과 영양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킬 것이다(사 55:1-3; 계 22:17). 주께서는 자신의 몸을 바쳐 이루실 속죄의 은혜를 먹고 마시는 것에 비유하셨다(요 6:53-56). 베드로도 하나님의 말씀을 젖에 비유하였다(벧전 2:1). 주께서는 성도들이 속죄의 복음 진리를 전하며 그 은혜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는 것을 기뻐하신다.
또한 신랑은 친구들, 사랑하는 자들이 와서 배불리 먹고 마시라고 말한다. 성도들의 선한 인격과 행실, 그리고 하나님의 진리의 선포와 고백은 주께 기쁨과 영광을 돌릴 뿐 아니라, 천사들과 모든 신자들이 그와 함께 크게 기뻐하고 즐거워할 일임을 나타낸다.
우리는 선을 행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힘써 전파하고 고백하자.
[2절] 내가 잘지라도 마음은 깨었는데 나의 사랑하는 자의 소리가 들리는구나. 문을 두드려 이르기를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문 열어 다고. 내 머리에는 이슬이, 내 머리털에는 밤 이슬이 가득하였다 하는구나.
본절 이하 여러 절들은 신부의 말이다. 신부는 육신적으로는 잘지라도 마음은 깨어 있고 그의 사랑하는 자 곧 신랑의 소리를 듣는다고 말한다. 그는 신랑을 얼마나 사모하였던지 잠자면서도 마음은 깨어 있었고 그의 문 두드리며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신랑이 문을 두드리는 것은 주께서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령의 감동으로, 혹은 하나님의 섭리로 깨우치시는 것을 가리킨 것 같다.
신랑은 신부를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라고 부른다. ‘나의 누이, 나의 사랑’은 친근한 사랑의 대상을 가리키고, ‘나의 비둘기’는 이상적 교회의 온유함과 순결함을 상징한다고 본다(마 10:16). ‘나의 완전한 자’는, 우리가 비록 부족투성이일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주 예수 안에서 완전한 자로 여기심을 나타낸다. 히브리서 10:10, 14,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문을 열어 달라’는 신랑의 말은 요한계시록 3:20에 있는 주의 말씀과 비슷하다. 거기에 보면, 주께서 사람의 마음문을 열어 달라고 말씀하신다. 문을 여는 것은 회개와 믿음, 사랑, 순종 등을 상징할 것이다.
또 신랑은 자기의 머리에 이슬이, 그의 머리털에 밤 이슬이 가득하였다고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오랫토록 범죄자의 마음 밖에서 그가 회개하기를 기다리심을 상징하는 것 같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주 예수 안에서 완전한 자로 여기신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감사하자. 또 우리의 마음 문을 두드리시는 주님을 영접하자. 회개와 믿음과 순종으로 주님을 영접하며 그를 따르자.
[3절] 내가 옷을 벗었으니 어찌 다시 입겠으며 내가 발을 씻었으니 어찌 다시 더럽히랴마는.
사람이 낮에 일할 때는 옷을 입고 주로 발로 뛰지만, 밤에 쉴 때는 옷을 벗고 발을 씻는다. 지금 신부는 밤이 되어 쉬기 위해 옷을 벗었고 발을 씻었다. 비록 사모하는 신랑이 찾아왔으나 일어나 옷을 입고 맞기에 불편함과 번거로움이 있었다. 그는 지금이 신랑을 맞을 적절한 시간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그를 위해 문을 열어주기를 주저한다. 이것은 성도가 육신적 평안이나 안일주의에 빠져 찾아오신 주님을 맞이하기를 주저하는 것을 상징하는 것 같다. 우리의 육신은 연약하고 무능하여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주님의 초청에 즉시 응답하지 않고 응답을 지연하거나 주저하기를 잘한다. 그러므로 성경은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교훈하였다(롬 12:11).
[4절] 나의 사랑하는 자가 문틈으로 손을 들이밀매 내 마음이 동하여서.
그런데 그를 사랑하는 자 곧 그의 신랑이 문틈으로 손을 들이미신다. 그것은 주께서 무디어진 우리의 심령을 찌르시듯이, 손을 들이미시듯이, 감동하시고 역사하시는 것을 나타내는 것 같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손 혹은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표현되신다. 마태복음 12:28,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누가복음 11:20,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혹은 손가락]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우리의 심령을 찌르시는 것이 주의 은혜이다. 주께서는 두아디라성의 자주 장사 루디아의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듣게 하셨다(행 16:14). 주께서 우리의 심령에 은혜를 주셔야 우리가 주를 믿고 그를 따를 수 있다.
우리는 육신적 안일주의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주님의 은혜를 받아 그의 부르심에 즐거이 응답하고 그를 따라야 한다.
[5절] 일어나서 나의 사랑하는 자 위하여 문을 열 때 몰약이 내 손에서, 몰약의 즙이 내 손가락에서 문빗장에 듣는구나.
신부는 안일한 마음으로 주저하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것은 회개의 큰 결단이다. 그것은 주께서 하신 비유에서 재산 분배를 받은 둘째 아들이 아버지를 떠나 먼 나라에 가서 허랑방탕하게 살다가 심히 빈곤하고 비참한 처지에 떨어졌으나 자신의 처지를 깨닫고 아버지 집의 풍요로움을 그리워하며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기를 굳게 결심한 것과 같다(눅 15:20).
바울도 처음 회개할 때 “이제는 왜 주저하느뇨?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는 말을 들었다(행 22:16). 또 요한계시록에 보면, 주께서는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를 향해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고 말씀하셨다(계 3:19).
신부가 문을 열 때 몰약이 그의 손에서, 몰약의 즙이 그의 손가락에서 문빗장에 떨어졌다. ‘듣는다’라는 말은 ‘떨어진다’는 뜻이다. 몰약은 맛은 쓰지만 향기가 좋은 식물이며 성경에서 관유를 만드는 재료로 쓰였고 그 외에도 진통제와 방부제로 쓰였다. 신부는 몰약 향유를 손에 풍성히 바르고 신랑을 맞이하려 하였기 때문에 그것이 손에서, 손가락에서 떨어진다는 표현일 것이다.
신부의 손과 손가락에서 떨어지는 몰약은 주를 사모하는 성도들이 하는 참된 회개를 가리키는 것 같다. 회개는 회개하는 자에게는 심령에 큰 고통을 동반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향기로운 행위이다. 회개하지 않는 것은 추한 모습이나, 회개하는 것은 향기로운 일이다. 회개는 주를 맞기 위한 성도들의 합당한 마음과 행위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며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진다(행 11:18).
우리는 안일하고 나태한 마음을 회개하고 일어나 신랑되신 주 예수를 영접하자. 참된 회개로 주를 맞을 준비를 하자.
[6절]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 위하여 문을 열었으나 그가 벌써 물러갔네. 그가 말할 때에 내 혼이 나갔구나. 내가 그를 찾아도 못 만났고 불러도 응답이 없었구나.
신부가 비록 뒤늦게나마 깨달음을 가지고 회개하는 마음으로 문을 열었으나 신랑은 이미 물러갔고 떠난 후이었다. 때가 늦었다. 그는 문 앞에서 신랑을 볼 수 없었다. 이것은 신부의 더디 응답함과 주저함, 즉 그의 안일주의에 대한 징계와 같았다.
사람이 하나님의 초청을 거절하면 하나님께서 그를 완전히 버려두시는 경우도 있다. 잠언 1:24-26, “내가 부를지라도 너희가 듣기 싫어하였고 내가 손을 펼지라도 돌아보는 자가 없었고 도리어 나의 모든 교훈을 멸시하며 나의 책망을 받지 아니하였은즉 너희가 재앙을 만날 때에 내가 웃을 것이며 너희에게 두려움이 임할 때에 내가 비웃으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만한 때에 그를 부르고 찾아야 한다. 시편 32:6, “이로 인하여 무릇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타서 주께 기도할지라.” 이사야 55:6,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그가 말할 때에 내 혼이 나갔구나”라는 말은 2절에서 신랑이 문을 두드리며 문을 열어달라고 요청할 때 그가 정신이 나가서, 바른 정신이 없어서 즉시 응답하여 문을 열어드리지 못했다는 신부의 자책의 말이라고 본다. 신부는 정신이 없어서 좋은 기회를 놓쳤다. 바른 정신이 있었다면 문을 열고 그를 영접하였을 것이나, 기회를 잃었다.
신랑이 이미 떠난 후이었기 때문에 신부는 그를 찾아도 못 만났고 그를 불러도 응답이 없었다. 그것은 분명히 그의 게으름에 대한 징계이었다. 마지막 날 천국문이 닫힌 후에도 늦게 와 문을 두드리는 자들은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을 것이다(눅 13:24-25).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만한 때에 그를 부르자.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거나 회개할 수 있는 기회가 항상 있는 것이 아님을 기억하자.
[7절] 성중에서 행순하는 자들이 나를 만나매 나를 쳐서 상하게 하였고 성벽을 파수하는 자들이 나의 웃옷을 벗겨 취하였구나.
신부는 신랑을 찾으러 문밖에 나갔고 성중에서 성을 돌며 지키는 자들을 만났는데 그들은 그를 상하게 하였다. 성벽을 지키는 자들도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인데 그들은 그의 웃옷을 벗겨 취하기까지 하였다. ‘행순하는 자들’이나 ‘성벽을 파수하는 자들’은 교회의 직분자들을 상징하는 것 같다. 그런데 교회의 직분자들이 주를 사모하는 진지한 신자를 돕고 위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해치고 핍박한 것이다.
이런 일은 교회역사상 구약 시대나 신약 시대나 많이 있었다. 땅 위에 이상적 교회가 없었다. 지상 교회들은 항상 많은 연약을 보였고 때때로 심히 부패하였다. 선한 직분자들은 경건하여 연약한 자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배려하며 돌아보지만, 악한 직분자들은 경건하고 진지하기보다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것들을 구하고 그런 방식으로 행동하곤 하였다. 그들은 오히려 경건한 교인들을 멸시하고 비방하고 중상모략하였으며 그들을 낙심시키고 핍박하였다.
에스겔 선지자 당시의 이스라엘 지도자들이 그러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자기만 먹이는 자들이요 약한 자들을 강포로 다스리는 자들이라고 책망하셨다(겔 34:2, 4). 구약 교회의 지도자들인 왕이나 제사장들은 참된 선지자들을 핍박하고 죽이기도 하였다. 예수님 당시 교회 지도자들인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게 하였다. 사도 바울은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많은 핍박을 받았다. 교회의 부패는 그 지도자들, 그 직분자들의 부패에서 잘 드러났다.
성도는 때때로 교회 안에서 비방을 당하고 핍박을 당한다. 디모데후서 3:12,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우리는 모범적 교회를 세우기 위해 힘써야 하지만, 또한 교회의 불완전함 속에서도 낙심치 말고 주님을 찾고 따라야 한다.
[8절] 예루살렘 여자들아 너희에게 내가 부탁한다. 너희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만나거든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다고 하려무나.
신부는 예루살렘 여자들에게 그의 사랑하는 자를 만나거든 그가 그를 사랑하기 때문에 병이 났다고 말해달라고 부탁한다. 아가 2:5에서도 그는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음이니라”고 말했다. 이 말씀의 요지는 신부가 신랑을 너무 사랑하고 사모한 나머지 병이 났다는 것이다. 성도는 하나님을 사랑하며 사모하지만, 때때로 여러 가지 이유로 하나님의 함께하심이나 그의 도우심과 응답하심을 보지 못하여 병이 날 때도 있다. 시편 41편 저자는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하나님을 갈급하게 찾았으며 살아계신 하나님을 갈망하였고 그의 도우심과 응답하심을 받지 못한다는 주위의 조롱 때문에 주야로 눈물까지 흘렸고 그의 영혼은 낙망하고 불안해 하였다(시 41:1-3, 5). 시편 119편 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항상 사모함으로 그의 마음이 상한다고 고백하였다(시 119:20).
그러나 이런 때에도 성도는 낙심치 말고 주를 찾는 일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다면 마침내 그를 만나게 될 것이다. 예레미야 29:12-13,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며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다가 갑자기 멸망당한 노아의 때나 롯의 때와 같이 주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도 비슷한 현상이 있을 것이며 어떤 사람들은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해져 덫과 같이 그 날을 맞이할 것이다(눅 17:27-28; 21:34). 그러나 참된 성도는 어떤 상황에서도 낙심치 말고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눅 18:1; 마 24:42-43).
우리는 주님의 도우심과 응답하심을 금방 보지 못한다고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반성하면서 전심으로 주를 찾고 찾아야 하며 그러면 그를 만나고 그의 함께하심을 체험할 것이다.
[9절] 여자 중 극히 어여쁜 자야, 너의 사랑하는 자가 남의 사랑하는 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인가. 너의 사랑하는 자가 남의 사랑하는 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기에 이같이 우리에게 부탁하는가.
신부는 ‘여자 중 극히 어여쁜 자’라고 불리운다. 이 표현은 이상적 교회와 신자들을 묘사하는 것이라고 본다. 이상적 교회와 신자들은 극히 아름답다. 그것은 영적, 도덕적, 인격적인 면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상적 신자들은 경건하고 성결하며 선하고 진실하다. 그들은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형제들과 이웃을 진심으로 사랑한다.
예루살렘 여자들은 “너의 사랑하는 자가 남의 사랑하는 자보다 더 나은 것이 무엇인가”라는 뜻으로 두 번이나 반복하여 말한다. 예루살렘 여자들은 아직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일반 교인들을 상징하는 것 같다. 그들은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구주의 뛰어나심에 대해 알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두 번이나 반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십계명에서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고 말씀하셨다(출 20:3). 모세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라고 말했고(신 6:4),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신의 신이시며 주의 주시요”라고 말했다(신 10:17).
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온 세상에서 가장 뛰어나신 분이시다. 그는 본래 하나님과 동등되신 자이시며(빌 2:6) 그로 말미암아 천지만물이 창조되었다(골 1:15-16). 그는 하나님의 비밀이시며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고 신성(神性)의 충만이 거하신다(골 2:2-3, 9). 그는 세세토록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자이시다(계 5:12).
우리는 우리가 믿고 섬기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시요 우리 구주 예수께서 온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분이심을 알고 그를 가장 사랑하자.
[10절] 나의 사랑하는 자는 희고도 붉어 만 사람에 뛰어난다.
10-16절은 신랑의 아름다움에 대한 묘사이다. 신랑은 ‘나의 사랑하는 자’라고 불린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도들이 가장 사랑하는 자이시다. 우리가 먼저 그를 사랑한 것이 아니고 그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위해 자신을 향기로운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다(엡 5:2).
“나의 사랑하는 자는 희고도 붉어 만 사람에 뛰어난다.” 예수께서 희시다는 것은 그의 성결하심을 나타내는 것 같고 또 그가 붉으시다는 것은 영적으로 그의 건강하심 즉 그가 쇠하지 않으시고 변하지 않으심을 나타내는 것 같다.
예수 그리스도는 지극히 거룩하시고 성결하시다. 그에게는 아무 죄가 없으시다. 그러므로 성경은 두 번이나(히 4:15; 요일 3:5) 그 사실을 증거한다. 또 성경은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셨다”고 말했고(고후 5:21), 또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다”고 증거하였다(벧전 2:22).
또한 그는 영적으로 항상 건강하시다. 그는 쇠하지 않으시고 변하지 않으신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신 대로(요 11:25-26), 그는 쇠잔함이 없는 충만한 생명 자체이시다. 그는 요한에게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라”고 말씀하셨다(계 1:17-18). 과연 히브리서 13:8의 말씀대로,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
그는 만 사람에 뛰어나신다. 본래 하나님과 동등하시며(빌 2:6-11) 만물보다 먼저 나신(골 1:15-16) 그 분과 비교할 자는 아무도 없다.
우리는 성결한 주님을 따라 거룩하게 살고, 변치 않는 주님을 변함 없이 사랑하고, 만 사람에 뛰어난 주님을 세상의 그 무엇보다 사랑하자.
[11절] 머리는 정금 같고 머리털은 고불고불하고 까마귀같이 검구나.
신부는 신랑의 완전한 아름다움을 묘사한다. 그는 신랑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흠이 없고 아름답다고 표현한다. 그는 신랑의 머리가 정금 같다고 말한다. 정금은 가장 귀한 것을 나타낸다. 만왕의 왕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는 가장 귀하며 금면류관을 쓰기에 합당하시다(계 14:14).
또 신부는 신랑의 머리털이 고불고불하고 까마귀같이 검다고 말한다. ‘고불고불하다’는 원어(탈탈림)는 ‘야자 열매 다발’을 뜻하는 것 같다. ‘까마귀같이 검다’는 것은 원기와 활기를 뜻하는 것 같다. 사람이 나이가 들어 노약해지면 흰머리가 많아지나, 아직 젊으면 머리털이 새까말 것이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는 세월이 흐른다고 쇠약해지는 분이 아니시다. 그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히 13:8). 그는 언제나 원기왕성하신 생명의 구주이시다.
[12절] 눈은 시냇가의 비둘기 같은데 젖으로 씻은 듯하고 아름답게도 박혔구나.
신부는 또 신랑의 눈이 시냇가의 비둘기 같으며 젖으로 씻은 듯하고 아름답게 박혀 있다고 말한다. 성경에서 비둘기는 순결함의 상징인 것 같다(마 3:16; 10:16). 그것은 짐승의 사체(死體)를 먹는 까마귀가 불결함과 음흉함을 상징하는 것과 대조된다. 더욱이 그 눈이 시냇가의 비둘기 같다는 표현은 그 눈이 시냇물에 씻은 것처럼 맑고 깨끗함을 나타내는 것 같다. 또 신부는 그것이 젖으로 씻은 듯하고 아름답게 박혀 있다고 말한다. 사람의 눈은 그의 마음을 표현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눈이 성결하고 아름답다는 것은 그의 마음이 성결하고 아름다움을 나타낸다.
우리는 정금같이 귀하신 주님, 쇠잔치 않으시고 언제나 원기왕성하신 주님, 지극히 순결하고 아름다우신 주님을 믿고 사랑하고 따르자.
[13절] 뺨은 향기로운 꽃밭 같고 향기로운 풀언덕과도 같고 입술은 백합화 같고 몰약의 즙이 뚝뚝 떨어진다.
신부는 신랑의 뺨이 향기로운 꽃밭 같고 향기로운 풀언덕 혹은 ‘돋운 화단’ 같다고 말한다. 향기로운 풀들과 나무들이 있는 꽃밭과 화단은 아름다운 풀과 꽃 때문에 보기에도 좋고 냄새도 향기롭다. 이와 같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아름다운 주님이시며 그의 인격은 참으로 향기롭다. 주께서는 친히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라고 말씀하셨다(마 11:29). 히브리서는 증거하기를,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자라”고 한다(히 7:26). 또 베드로전서는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救贖)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고 말한다(벧전 1:18-19). 주 예수 그리스도는 온유하고 겸손하시며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과 같으시다.
또 신부는 신랑의 입술이 백합화 같고 몰약의 즙이 뚝뚝 떨어진다고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입술은 백합화같이 아름답고 몰약의 즙이 뚝뚝 떨어지듯이 은혜로운 말씀으로 가득하다. 사도 요한은 증거하기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했고(요 1:14),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고 하였다(요 1:16-17). 또 누가는, “저희가 다 그를 증거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기이히 여겼다”고 기록하고 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의 아름다움과 향기를 깨닫자. 또 지금도 하늘에서 우리에게 성령으로 공급하시는 은혜의 말씀을 받자.
[14절] 손은 황옥을 물린 황금 노리개 같고 몸은 아로새긴 상아에 청옥을 입힌 듯하구나.
신부는 신랑의 손이 황옥을 물린 황금 노리개 같다고 말한다. ‘황금 노리개’라는 원어(갈릴)는 ‘원통 막대(cylinder)’를 가리키는 것 같다. 옛날 영어성경은 ‘반지(ring)’라고 번역했고(KJV) 근래의 것들은 ‘막대기(rod)’라고 번역하였다(NAS, NIV).
손은 사람이 무슨 일을 하는 가장 중요한 도구이며, 특히 무엇을 나누어줄 때 꼭 필요하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손은 능력의 손이다. 그는 그 손으로 수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누가복음 4:40, “해 질 적에 각색병으로 앓는 자 있는 사람들이 다 병인을 데리고 나아오매 예수께서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고치시니.”
손이 황옥에 물린 황금 원통 막대와 같다는 것은 그의 행하시는 일들과 은혜를 나누어주심이 부요하고 순수하고 존귀함을 가리키는 것 같다. 고린도전서 12:5,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에베소서 4:7, 11,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또 신부는 신랑의 몸이 아로새긴 상아에 청옥을 입힌 듯하다고 말한다. ‘몸’이라는 원어(메에)는 ‘창자, 배, 몸’ 등의 뜻을 가진다. 특히 ‘창자’라는 뜻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상징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은 가장 아름답고 지극히 존귀한 몸이며 특히 그의 마음에 가득한 긍휼과 사랑은 참으로 아름답고 고귀하다. 고린도후서 5: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우리는 주님의 손이 황옥을 물린 황금 원통 막대 같고 몸이 아로새긴 상아에 청옥을 입힌 듯함을 묵상하고 감사하며 영광을 돌리자.
[15-16절] 다리는 정금 받침에 세운 화반석 기둥 같고 형상은 레바논 같고 백향목처럼 보기 좋고 입은 심히 다니 그 전체가 사랑스럽구나. 예루살렘 여자들아 이는 나의 사랑하는 자요 나의 친구일다.
신부는 신랑의 다리가 정금 받침에 세운 화반석 기둥 같다고 말한다. 사람의 다리는 몸을 이동하고 지탱하는 도구이다. 다리가 튼튼한 사람은 어디든지 잘 다닐 수 있고 높은 계단도 잘 올라가며 또 오랫 동안 서 있어도 피곤치 않는다. 그러나 다리가 튼튼하지 못하면 어디 다니기도 힘들고 서 있기조차 힘들다.
예수 그리스도의 다리는 정금 받침에 세운 화반석 기둥처럼 아름답고 튼튼하시다. 그는 많은 죄인의 죄짐을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셨다(요 1:29). 그는 솔로몬 성전 앞 낭실의 두 기둥 야긴과 보아스처럼(왕상 7:21-22) 그의 나라와 교회를 붙드신다. 그러므로 교회는 모든 악한 세력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견고히 서 있다.
또 신부는 신랑의 형상이 레바논 같고 백향목처럼 보기 좋다고 말한다. 그것은 레바논 백향목처럼 아름답고 크고 위엄 있음을 묘사한 것일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은 아름답고 당당하고 위엄이 있으시다. 주의 모습을 본 요한은 그 발 앞에 엎드러졌다(계 1:17).
또 신부는 신랑의 입이 심히 달다고 말한다. 입은 말하는 기관이다. 그의 입이 심히 달다는 말은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들이 심히 은혜스럽다는 뜻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것은 성도들에게 심히 은혜가 된다. 시편 119:103,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하니이다.”
신부는 신랑의 몸 전체가 사랑스럽다고 말한다. 그의 눈에 신랑의 몸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사랑스럽다. 우리 주 예수는 성도들에게 바로 그러하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를 사랑하며 기뻐한다(벧전 1:8).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든든한 다리를 감사하고 그의 아름답고 위엄한 모습을 의지하며 또 그의 은혜로운 말씀을 항상 사모하자.
[전도서 11장 주일 설교말씀] 식물을 물 위에 던지라(전 1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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