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31장에서는 욥의 결백 주장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욥은 자기가 살아온 길을 되돌아볼 때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살았다고 말합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열심히 살았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욥—나는 의롭게 살았다(욥 31:1-40)
1-23절, 나는 의롭게 살았다 (1)
[1-4절] 내가 내 눈과 언약을 세웠나니 어찌 처녀에게 주목하랴. . . .
욥은 또 말한다. “내가 내 눈과 언약을 세웠나니 어찌 처녀에게 주목하랴. 그리하면 위에 계신 하나님의 내리시는 분깃이 무엇이겠으며 높은 곳에서 전능자의 주시는 산업이 무엇이겠느냐? 불의자에게는 환난이 아니겠느냐? 행악자에게는 재앙이 아니겠느냐? 그가 내 길을 감찰하지 아니하시느냐? 내 걸음을 다 세지 아니하시느냐?”
욥은 처녀에게 주목치 않았다. 주께서는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다(마 5:28). 성도는 보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 죄는 보는 데서부터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사람이 범죄하면 하나님의 복을 기대하기 어렵다. 사람은 범죄하면 이미 가진 복도 잃어버린다. 죄는 하나님의 복을 가로막고 빼앗아간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의 복을 원한다면 모든 죄를 버려야 한다.
욥은 불의한 자와 행악하는 자에게 재앙이 임할 것을 알고 있다. 욥은 악인이 재앙을 당한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가 친구들과 변론하는 것은 단지 모든 고난이 죄 때문에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욥기의 주요 진리는 성도의 고난 중에는 죄 때문에 오는 것이 아닌 고난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주님의 고난이요 주의 제자들의 고난이었다. 그러나 악인의 징벌은 욥도 인정하는 진리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길을 감찰하시고 그의 걸음을 다 세신다. 그는 사람의 품은 마음, 생각과 뜻, 의도와 의향을 아신다. 그는 그것들이 의롭고 선한지 아니면 불의하고 악한지도 판단하시고 보응하신다.
[5-8절] 언제 나의 행위가 허탄하였으며 내 발이 궤휼에 빨랐던가. . . .
욥은 또 말한다. “언제 나의 행위가 허탄하였으며 내 발이 궤휼에[거짓에] 빨랐던가. 그리하였으면 내가 공평한 저울에 달려서 하나님이 나의 정직함[순전함]을 아시게 되기를 원하노라.” 세상 사람들은 악하고 헛된 것을 구하고 그 발걸음이 거짓에 빠를지라도, 하나님의 백성의 기본적 덕은 진실함이다. 욥은 자신이 하나님의 공평한 저울에 달려 자신의 정직함이 드러나기를 원한다. 이것은 평소에 하나님 앞에서 성실하게 순종한 자가 아니고서는 가질 수 없는 담대함이다. 성도의 담대함은 성실한 순종의 삶에서 나온다.
욥은 또 말한다. “언제 내 걸음이 길에서 떠났던가. 내 마음이 내 눈을 따라갔던가. 내 손에 더러운 것이 묻었던가. 그리하였으면 나의 심은 것을 타인이 먹으며 나의 소산이 뿌리까지 뽑히는 것이 마땅하니라.” ‘길’은 정로(正路) 즉 의의 길을 가리킨다. 욥은 인생의 정로를 지켰고 그 길을 떠나지 않았다. 또 그는 자신의 눈을 따라가지 않았다. 사람의 눈은 육신적인 것과 감각적인 것에 빠지기 쉽다. 그러므로 성도는 육신의 눈에 보이는 것에 이끌려 살아서는 안 된다. 또, 욥은 자신의 손에 더러운 것, 즉 죄 되는 것이 묻지 않았다고 말한다.
욥은 만일 자신이 정로에서 떠났든지, 그의 마음이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을 따라 헛되고 죄악된 것에 빠졌든지, 그의 손에 더럽고 죄악된 것이 묻었다면, 그의 심은 것을 다른 사람이 먹고 그의 거두는 것이 뿌리까지 뽑히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의 보응이며 징벌이다. 그러나 욥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비록 지금 이해할 수 없는 고난 가운데 있지만, 그는 하나님의 계명의 정로를 떠나지 않았고 헛되고 죄악된 것을 좇지 않았다. 그는 승리할 것이다.
[9-12절] 언제 내 마음이 여인에게 유혹되어 이웃의 문을 . . . .
욥은 또 말한다. “언제 내 마음이 여인에게 유혹되어 이웃의 문을 엿보아 기다렸던가. 그리하였으면 내 처가 타인의 매를 돌리며 타인이 더불어 동침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는 중죄(重罪)라. 재판장에게 벌받을 악이요 멸망하도록 사르는 불이라. 나의 모든 소산을 뿌리까지 없이할 것이니라.”
욥은 간음과 음란을 조심하였다. 이웃의 문을 엿보아 기다리는 것은 이미 유혹을 받아 은밀한 만남의 기회를 노리는 것이다. 성도는 그런 은밀한 만남을 하지 말아야 한다. 만일 성도가 음란죄에 떨어지면 고통스러운 결과를 경험할 것이다. 그는 경제적 파탄을 당하고 그의 처는 남의 종이 되어 남의 맷돌을 돌리는 신세가 될 것이며 심지어 다른 사람이 그와 동침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공의로 보응하시는 자이시다. 죄를 지으면 죄의 보응을 하시고 남을 해치면 남의 해를 받게 하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이시며 그의 도덕질서이다.
간음의 죄는 중죄(重罪)이다. ‘중죄’라는 원어(짐마)는 ‘악한 일’이라는 뜻이다. 간음의 죄는 매우 악한 일이다. 그것은 재판장에게 벌받을 악이다. 성경은 간음의 죄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말한다. 레위기 20:10, “누구든지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 곧 그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는 그 간부(姦夫)와 음부(淫婦)를 반드시 죽일지니라.”
모든 죄, 특히 간음과 음란의 죄는 불과 같다. 불이 나무나 집이나 물건들을 모두 다 사르듯이, 모든 죄, 특히 간음은 복된 모든 좋은 것들을 다 없앤다. 그것은 우리의 모든 소산을 뿌리까지 없이할 것이다. 의는 평강과 형통을 가져오지만, 죄는 불행과 재앙을 가져온다.
[13-15절] 남종이나 여종이 나로 더불어 쟁변할 때에 내가 . . . .
욥은 또, “남종이나 여종이 나로 더불어 쟁변할 때에 내가 언제 그의 사정을 멸시하였던가. 그리하였으면 하나님이 일어나실 때에는 내가 어떻게 하겠느냐? 하나님이 국문하실 때에는 내가 무엇이라 대답하겠느냐?”고 말한다. 욥은 자신이 종의 사정을 멸시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종이 무엇을 잘못했을 때 엄하게 꾸짖는 것은 정당한 일이지만, 종이 무엇을 불평하거나 호소할 때 그것을 듣는 것은 그의 인격을 존중하는 것이다. 에베소서 6:9, “[상전들아, 너희도] 공갈을 그치라.”
욥은 만일 그가 종을 멸시하였더라면 하나님께서 그를 심판하러 일어나 심문하실 때 하나님께 대답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다 하늘에 계신 크신 재판장 앞에서 서게 될 것을 안다면, 우리는 죄를 짓지 말아야 하고 사람을 멸시하는 잘못도 행치 말아야 한다. 우리는 남을 멸시할 만큼 그렇게 흠이 없는 인격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엄격하게 심판하신다면 우리는 그 앞에 머리를 들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남을 존중하는 심정을 가져야 한다.
욥은 또, “나를 태 속에 만드신 자가 그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우리를 뱃속에 지으신 자가 하나가 아니시냐?”고 말한다. 그는 자신이나 종이 다 하나님의 창조물임을 말한다. 잠언 22:2, “빈부가 섞여 살거니와 무릇 그들을 지으신 이는 여호와시니라.” 한 부모가 낳아 기른 자녀들이 서로 우애 있게 지내야 하듯이, 한 하나님께서 만드신 인류는 넓은 의미에서 한 형제들로서 서로 존중하고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 우리는 세상에 있는 가난한 자나 부자나, 귀한 자나 천한 자나 막론하고 다 하나님의 창조물임을 알고 서로를 귀히 여겨야 한다.
[16-23절] 내가 언제 가난한 자의 소원을 막았던가. 과부의 . . . .
욥은 또 말한다. “내가 언제 가난한 자의 소원을 막았던가. 과부의 눈으로 실망케 하였던가. 나만 홀로 식물을 먹고 고아에게 먹이지 아니하였던가. 실상은 내가 젊었을 때부터 고아를 기르기를 그의 아비처럼 하였으며 내가 모태에서 나온 후로 과부를 인도하였었노라. 내가 언제 사람이 의복이 없이 죽게 된 것이나 빈궁한 자가 덮을 것이 없는 것을 보고도 나의 양털로 그 몸을 더웁게 입혀서 그로 나를 위하여 복을 빌게 하지 아니하였던가. 나를 도와주는 자가 성문에 있음을 보고 내가 손을 들어 고아를 쳤던가. 그리하였으면 내 어깨가 어깨뼈에서 떨어지고 내 팔 뼈가 부러짐이 마땅하니라. 나는 하나님의 재앙을 심히 두려워하고 그 위엄을 인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느니라.”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와 고아와 과부를 돌보시는 하나님이시다그는 고아와 과부의 억울한 일을 들어주신다(신 10:18; 시 68:5). 그는 율법에서 가난한 자를 해롭게 하지 말고 구제하라고 친히 명하셨다(출 22:22; 신 15:7-8).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므로 가난한 자를 돌아보는 것은 성도가 마땅히 힘써야 할 일이다. 잠언 14:31,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존경하는 자니라.”
사도들은 가난한 자들을 돌아보는 일을 힘썼다. 사도 바울은 그것을 본래 힘써 행했다고 말했다(갈 2:10). 야고보는 참된 경건은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는 것이라고 말했다(약 1:27). 그러나 가난한 자를 돌아보는 삶은 결코 자신을 빈곤하게 만드는 삶이 아니다. 잠언 11:24-25는,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고”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라고 말하였다.
우리는 간음과 음란을 조심하자. 우리는 욥처럼 이성에 대해 늘 깨끗한 마음과 단정한 태도로 대하자. 간음과 음란은 재앙을 받을 큰 죄악임을 인식하자. 우리가 이런 죄에 떨어지면, 하나님께 복 받기를 기대할 수 없고 육신적 질병이나 경제적 파탄을 당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거짓을 멀리하고 진실하게 살자. 우리는 정로를 벗어나 우리의 눈을 따라가지 말고 정당하고 진실하게 살고 부족한 점들을 진실하게 고백하며 회개함으로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잃지 말자.
우리는 선하게 살자. 우리는 이웃을 멸시하지 말고 우리의 권한 아래 있는 자들에게까지도 인격적으로 대하고 그들을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 또 우리는 가난하고 어려운 자들을 구제해야 한다. 그것이 신구약성경에 밝히 계시된 하나님의 뜻이며 성도가 힘써야 할 선한 삶이다.
24-40절, 나는 의롭게 살았다 (2)
[24-28절] 내가 언제 금으로 내 소망을 삼고 정금더러 너는 내 . . . .
욥은 또 말한다. “내가 언제 금으로 내 소망을 삼고 정금더러 너는 내 의뢰하는 바라 하였던가. 언제 재물의 풍부함과 손으로 얻은 것이 많음으로 기뻐하였던가. 언제 태양의 빛남과 달의 명랑하게 운행되는 것을 보고 내 마음이 가만히 유혹되어 손에 입맞추었던가. 이 역시 재판장에게 벌받을 죄악이니 내가 그리하였으면 위에 계신 하나님을 배반한 것이니라.” 해와 달을 보고 ‘손에 입맞추는 것’은 그것을 사모하고 공경하는 마음을 나타낸다고 본다.
욥은 재물을 의지하거나 소망하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우리는 재물을 의지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마 6:24). 물질적 부요는 신앙생활에 오히려 방해거리가 된다. 주께서는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이 말씀을 가로막아 결실치 못하게 한다고 말씀하셨고(마 13:22),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기보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더 어렵다고 하셨다(마 19:23-24). 사도 바울도 말하기를,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라고 하였다(딤전 6:9-10).
욥은 또 해와 달을 섬기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그는 재물에 대한 애착을 해와 달을 섬기는 우상숭배와 연관해 말했다. 해와 달을 섬기는 것이 우상숭배이듯이, 재물을 사랑하는 것도 우상숭배이기 때문일 것이다. 골로새서 3:5는 “탐심은 우상숭배”라고 말하였다.
[29-30절] 내가 언제 나를 미워하는 자의 멸망을 기뻐하였으며 . . . .
욥은 또 말한다. “내가 언제 나를 미워하는 자의 멸망을 기뻐하였으며 그의 재앙 만남을 인하여 기운을 뽐내었던가. 실상은 내가 그의 죽기를 구하는 말로 저주하여 내 입으로 범죄케 아니하였느니라.”
욥은 그를 미워하는 자의 멸망을 기뻐하지 않았고 그가 재앙당함을 인해 뽐내지 않았다. 그는 원수의 영혼을 저주하는 죄를 범치 않았다. 욥은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그의 뜻을 실행한 착한 성도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에 “원수를 갚지 말라”고 명령하셨다(레 19:18). 또 잠언 17:5는 “사람의 재앙을 기뻐하는 자는 형벌을 면치 못할 자니라”고 말하며, 잠언 24:17-18은 “네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하지 말며 그가 엎드러질 때에 마음에 기뻐하지 말라. 여호와께서 이것을 보시고 기뻐 아니하사 그 진노를 그에게서 옮기실까 두려우니라”고 한다. 오바댜 12절에 보면, 이스라엘이 멸망할 때 그것을 방관하고 기뻐했던 에서의 자손들은, “네가 형제의 날 곧 그 재앙의 날에 방관할 것이 아니며 유다 자손의 패망하는 날에 기뻐할 것이 아니며 그 고난의 날에 네가 입을 크게 벌릴 것이 아니라”는 책망을 들었다.
누가복음 6:27-28에 보면, 예수께서는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다. 로마서 12장에서 사도 바울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교훈하였다(롬 12:19-21).
[31-32절] 내 장막 사람의 말이 주인의 고기에 배부르지 않은 . . . .
욥은 또 말한다. “내 장막 사람의 말이 주인의 고기에 배부르지 않은 자가 어디 있느뇨 하지 아니하였었는가. 나그네로 거리에서 자게 하지 아니하고 내가 행인에게 내 문을 열어 주었었노라.”
‘내 장막의 사람들’은 그의 집에 있는 종들을 가리킬 것이다. 그들은 욥의 삶을 가까이서 본 자들이다. 그들은, 그의 고기로 배부르지 않은 사람이 없었고 또 그가 나그네로 거리에서 자게 하지 않았고 그의 집 문을 열어주었다고 증거하였다. 하나님께 대한 참 경건은 그의 뜻을 실천하는 구제와 나그네 대접 등의 선행으로 표현된다.
아브라함도 평소에 나그네를 잘 대접하였다. 그는 자기 집에 찾아온 손님들을 기쁘게 영접하며 고운 가루로 만든 떡과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의 고기와 뻐터와 우유로 대접하였다(창 18:1-8). 소돔에 살았던 롯도 날이 저물 때 소돔성에 온 나그네를 간청하여 집으로 들이고 그들을 위해 식탁을 베풀고 급히 누룩 없이 떡을 구웠다(창 19:1-3). 사사기 19장에 보면, 기브아에 살았던 한 노인도 해가 저물어 밭에서 일하고 돌아오다가 성읍 거리에서 한 나그네를 보고 집에 영접하여 먹을것을 대접하였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은 나그네를 영접하고 즐거이 대접하였다.
신약성경도 우리에게 나그네 대접하기를 힘쓰라고 말한다.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주께서 하신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영생에 들어갈 자들은 주의 형제가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한 자들이었다. 로마서 12:13에서 사도 바울은,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고 교훈하였고, 히브리서 13:2는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고 교훈하였다.
[33-37절] 내가 언제 큰 무리를 두려워하며 족속의 멸시를 . . . .
욥은 또 말한다. “내가 언제 큰 무리를 두려워하며 족속의 멸시를 무서워함으로 잠잠하고 문에 나가지 아니하여 타인처럼 내 죄악을 품에 숨겨 허물을 가리었었던가.” ‘타인처럼’(케아담)이라는 원어는 ‘아담처럼’(KJV, NASB)이라는 말이다.
욥은 자기 자신이 사람들의 멸시를 두려워하여 자기 죄악과 허물을 숨기지 않았다고 말한다. 다윗도 그러하였다. 그는 선지자 나단 앞에서 자신의 죄를 그대로 인정하였다(삼하 12:13). 또 그는 인구조사를 한 후에도 마음에 자책하고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였다(삼하 24:10, 17).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숨기면 우리의 마음의 고통은 클 것이며,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그 고통 중에 그냥 버려두실 것이지만,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인정하고 고백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의 심령에 평안을 주실 것이다(시 32:3-5; 요일 1:8-10).
욥은 또 말한다. “누구든지 나의 변백(辨白)을 들을지니라. 나의 서명이 여기 있으니 전능자가 내게 대답하시기를 원하노라. 내 대적의 기록한 소송장이 내게 있었으면 내가 어깨에 메기도 하고 면류관처럼 머리에 쓰기도 하며 내 걸음의 수효를 그에게[하나님께] 고하고 왕족처럼 그를 가까이 하였으리라.” ‘걸음의 수효’라는 표현은 자신의 모든 삶의 여정을 의미한다. ‘왕족처럼’이라는 말은 ‘존귀한 자처럼’이라는 뜻으로 그가 당당하게 재판관에게 나아가는 모습을 표현한다.
욥은 자신의 결백을 담대히 말하며 자기를 송사하는 대적자들과 변론하기를 원한다. 또 그는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가기를 원한다. 의인의 마음은 담대하다. 잠언 28:1은,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같이 담대하니라”고 말하였다.
[38-40절] 언제 내 토지가 부르짖어 나를 책망하며 그 이랑이 . . . .
욥은 또 말한다. “언제 내 토지가 부르짖어 나를 책망하며 그 이랑이 일시에 울었던가. 언제 내가 값을 내지 않고 그 소산물을 먹고 그 소유주로 생명을 잃게 하였던가. 그리하였으면 밀 대신 찔레가 나고 보리 대신 잡풀이 나는 것이 마땅하니라 하고 욥의 말이 그치니라.”
욥은 자신의 토지에 대해서나 그 소산에 대해 불법한 일을 하지 않았다고 말하며, 그의 토지가 부르짖어 그를 책망하거나 그의 밭이랑들이 함께 우는 일이 없었다고 말한다. 그는 정당하게 땅을 샀고 또 그 땅에 농작물을 경작하였다. 그는 그 경작을 누구에게 맡겼다면 그에게 정당한 수고의 대가를 지불하였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거나 그가 부당하게 남의 토지를 빼앗으므로 그로 생명을 잃게 하였다면, 그는 자기 밭에서 밀 대신 찔레가 나고 보리 대신 잡풀이 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한다. 그는 하나님의 징벌을 각오하는 것이다.
경건한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가 죽었을 때 그 매장할 무덤을 얻기 위해 헷 족속에게 요청하였고 그에게 땅을 거저 주겠다는 이가 있었으나 그에게 은 400을 지불하고 아내의 무덤으로 막벨라 굴을 샀다(창 23:9, 16). 의로운 다윗은 인구 조사한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내리신 온역의 재앙을 피하기 위해 번제를 드리고자 했을 때 제사드릴 땅과 소와 나무 등의 제사 재료를 상당한 값을 주고 샀다(삼하 24:24). 옛 시대에 경건한 사람들의 이러한 행위는 우리에게 본이 된다.
신약성경은 우리가 도적질하거나 남의 것을 빼앗지 말고, 우리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고(엡 4:28), 우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고(살전 4:11), 조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고(살후 3:12), 또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고 교훈한다(살후 3:10).
우리는 헛된 우상숭배를 하지 말자. 우리는 돈도 사랑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만 즐거움과 가치와 소망을 두고 살며 하나님만 섬기자.
우리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며 선대하자. 나그네들에게도, 심지어 원수에게라도 그렇게 하자. 우리는 우리를 미워하는 자의 재앙당함을 기뻐하지 말고 그를 불쌍히 여기고 그를 위해 기도하고 선을 베풀자.
우리는 양심에 가책되는 일이 없게 거리낌 없이 살고 죄를 감추지 말자. 우리는 자신의 죄와 부족을 고백함으로 하나님의 용서를 얻어야 하고, 사람들 앞에서도 담대하게 행해야 한다. 우리는 특히 상거래를 할 때 정당하게 하자. 우리는 남의 수고에 대해 정당한 대가를 주고 폐를 끼치지 말고 범사에 정당하게 살고 자기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자.
[느헤미야 13장 주석 성경말씀] 느헤미야의 바른 통치(느 13: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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