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 원어 설교

[성경식물 하나님 말씀] 무화과 나무(요 1:48-49)

체데크 2020. 10. 23.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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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성경식물 하나님 말씀 중에서 무화과나무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의도를 알아보겠습니다.

 

‘무화과나무’ תאנה (테에나 8384) συκον (쉬콘 4810)

 

명제: 무화과나무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와 종말을 상징해 주는 나무이다.

목적: 무화과나무를 통하여 속죄의 은혜와 종말을 배우게 된다.

 

무화과나무는 성경에 많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무화과나무는 잎이 크기 때문에 고대 근동에서는 그늘을 많이 만들어 주는 나무입니다. 이스라엘 지역은 건기와 우기로 기후가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6개월은 비가 오게 됩니다. 이 시기가 11~3월까지이며 이때가 기후 상으로 우기입니다. 그리고 4~9월까지는 비가 전혀 내리지 않습니다. 이때는 건기가 됩니다. 비가 전혀 내리지 않기 때문에 우기 때에 비가 많이 온다고 해도 모든 우물과 샘들이 말라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물을 찾아볼 수가 없는 때입니다.

 

이런 건기의 때에 비가 오지 않기 때문에 습도는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태양이 내려쬔다고 해도 그늘에 앉아있으면 시원하게 됩니다. 그때에 무화과나무 그늘이 최고입니다. 잎이 크고 넓기 때문에 많은 그늘을 만들어 주게 됩니다. 이곳에서 유대인들은 공부를 하게 되는데 뜨거운 여름날에도 시원하게 토라를 공부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해가 넘어가면 그때부터 활동을 하게 됩니다. 그 증거를 성경에서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요1:48-49 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빌립이 나다나엘을 전도할 때에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말하면서 예수님은 메시아가 아니라고 의심을 했습니다. 이때에 나다나엘이 예수님께 찾아왔을 때에 주님이 나다나엘을 보면서 하시는 말씀이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너를 보았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나다나엘이 주님을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까?

 

‘나다나엘’ נתנאל(네탄엘 5417) 나다나엘은 נתן(나탄 5414) 주다, 라는 뜻과 אל(엘 410)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합성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셨다’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나다나엘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열심히 메시아를 기다리면서 토라를 공부했던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으로서 나다나엘에게 구원을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무화과나무’ תאנה(테에나 8384) 무화과나무,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었을 때에 보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테에나의 히브리적 의미를 보면 십자가에서 못 박히시기로 작정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힘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께서 영원히 죽었던 자들을 구원하시고 숨을 불어넣어 생명을 주셨다는 의미입니다.

 

무화과나무는 바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는 나무입니다. 나다나엘은 이 나무 아래에서 메시아를 기다리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미 나다나엘의 신앙과 믿음을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사람이 이미 구원받은 백성이라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주님이 보았다고 하는 단어에서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보았노라’ ειδω(에이도 1492 동사, 직설법, 과거, 능동, 단수, 1인칭) 보다, 알다, 시인하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다나엘을 빌립이 데려오기 전부터 아시면서 보고 있었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그리고 나다나엘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시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실제로 전부터 처음 보는 나다나엘을 알고 계신 것이 역사적 사실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직설법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나다나엘을 만세전부터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미 예정하시고 선택하신 사람이라는 것을 말씀합니다. 그 이유가 과거 시제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선택하심을 따라 이미 나다나엘처럼 구원이 확정된 자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나를 이미 알고 계셨고 선택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열심히 주님을 섬겨야 합니다. 바로 교회에서 열심히 주님을 섬겨야 할 것을 말씀합니다. 나다나엘은 초림의 예수님을 기다렸다면 나는 재림하실 예수님을 무화과나무와 같은 교회에서 기다려야 합니다. 이런 신앙이 저와 여러분들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무화과나무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상징해 주고 있습니다.

 

창3: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아담은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음으로 죽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함으로 하나님과의 영적 관계가 단절된 것입니다. 그때에 자신의 눈이 밝아졌음을 알고 무화과나무의 잎을 엮어 치마로 입고 있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죄를 속죄하기 위한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영원한 속죄가 이루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영원한 속죄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혀주셨던 것입니다.

 

‘눈이 밝아져’ פקח(파카흐 6491 와우계속, 동사, 닢알, 미완료, 여성, 3인칭, 복수) 눈이 열리다, 뜨다, 열다, 라는 뜻입니다. 아담의 눈이 열린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선악과를 먹고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눈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눈이 열리고 나니 자신도 모르게 부끄러운 생각이 났고 죄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담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자 즉시로 눈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이 없이 죄에 대하여 눈이 뜨여지게 된 것입니다. 닢알형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도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면 죄에 대하여 눈이 열리게 되어 있습니다. 십자가 복음의 말씀을 듣지 않고 비 복음을 들으면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것처럼 우리들도 하나님의 교회에서 쫓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무화과나무 잎을’ עלה(알레 5929 명사, 남성, 단수, 연계형) 나뭇잎, 잎사귀, 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עלה(알라 5927) 치료받다, 올라가다, 상달되다, 옮겨가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고 영적으로 죽었습니다. 육신은 930세까지 살았지만 영혼은 바로 죽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회복하기 위하여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입은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속죄의 제사를 드림으로 죽었던 것을 바라봄으로 아담이 치료받기를 소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죽으심이 하나님께 올라가 상달되어 아담의 죽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옮겨져 생명을 얻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마음으로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서 입은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아담이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엮기 위해서는 나뭇잎이 많이 들어가야 합니다. 최소한 하나 이상은 필요합니다. 하지만 이 잎의 문법은 단수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아담은 십자가에 못 박히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해 입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죄를 대속해 주실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없다는 것을 말씀해 주는 것입니다.

 

‘엮어’ תפר(타파르 8609 와우계속, 동사, 칼, 미완료, 남성, 3인칭, 복수) 함께 꿰매다, 바느질하다, 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상징하고 있습니까? 무화과나무를 함께 엮어 바느질을 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엮이기를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 스스로는 하나님 앞에 나갈 수가 없다는 것을 아담이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죄인이라는 것을 안 순간 즉시로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서 치마를 해 입고 있는 것입니다.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우리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 앞에 나갈 수가 있습니다.

 

‘치마를’ חגור(하고르 2290 명사, 여성, 복수) 치마, 허리띠, 허리 덮개, 라는 뜻이며 이 단어는 חגר(하가르 2296) 묶다, 띠를 띠다, 매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아담이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엮어서 입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의 말씀인 복음을 허리에 띠고 함께 묶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엡6:14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진리의 허리띠를 띠어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담도 죄인이었지만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입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묶여서 진리의 허리띠를 띠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들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묶여서 내 허리에 주님과 함께 있어야 할 것을 의미합니다. 무화과나무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죄인들은 주님의 그늘 아래에 숨어야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 의에 숨지 않으면 죄가 드러나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저와 여러분들은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입은 아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의 치마를 입어야 할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무화과나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마21:17-19 그들을 떠나 성 밖으로 베다니에 가서 거기서 유하시니라 이른 아침에 성으로 들어오실 때에 시장하신지라 길 가에서 한 무화과(無花果) 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것도 찾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예수님께서 베다니에서 유하시고 이른 아침에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오실 때에 시장하셨습니다. 그래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가셨는데 잎사귀만 무성하고 열매를 찾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는데 무화과나무가 곧 말라버렸습니다.

 

‘베다니’ Βηθφαγη(베드파게 967) ‘무화과나무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베다니는 벳바게와 같은 마을 안에 있습니다. 이 단어는 히브리어에서 유래되었습니다. בית פג(베이트 파그)입니다. 이 단어는 בית(바이트 1004) 집이라는 뜻과 פג(파그 6291) 덜 익은 무화과 열매, 라는 뜻의 합성어입니다.

 

그럼 예수님께서 베다니에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사건을 통해서 우리가 영적으로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무화과나무의 집에 무화과 열매가 없으면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의 열매가 없으면 저주를 받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무화과나무는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렇다면 구원받은 의인은 의의 열매를 맺어야 정상입니다. 선한 나무는 선한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시장하신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에게 다가가셨는데 열매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바로 저주하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다른 복음서에는 아직 무화과나무의 열매가 열리지 않을 때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직 때가 되지 않은 무화과나무를 왜 예수님이 저주하고 있을까요?

 

막11:13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똑같은 사건을 놓고 마가의 관점은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무화과나무는 아직 열매를 맺을 시기가 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아직 때도 되지 않은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다면 주님이 잘못된 것이 아닌가?라고 우리는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때가 되면 열매가 열릴 것인데 왜 때도 되지 않았는데 가셔서 미리 저주하고 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무화과나무의 특성을 깨달아야 합니다. 무화과나무는 특이하여 열매를 한 번만 맺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유월 절기의 4월부터 시작하여 초막절이 있는 10월까지 4~5번 정도 열매를 맺게 됩니다. 이때는 건기입니다. 비가 오지 않다가 우기가 시작되면 겨울에 앙상한 가지만 있던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게 됩니다. 이때 열매가 나오게 되는데 이 열매는 제대로 자라지 못하고 3월과 4월의 뜨거운 바람에 열매가 익게 됩니다. 상품성이 떨어지는 이 열매의 이름이 פגה(파게)입니다.

 

파게가 익어서 떨어지면 다음에 계속해서 열리는 무화과 열매는 תאנה(테에나)입니다. 이 무화과 열매는 상품가치가 있어서 수확하여 파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파게는 상품가치가 없기 때문에 주인이 따지를 않았습니다. 그대로 나무에 남겨두는 것입니다. 그러면 고아나 과부나 나그네들인 가난한 사람들이 우기인 겨울 동안 달콤한 열매를 먹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이 무화과나무의 첫 열매인 파게를 따먹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예수님께서도 시장하셔서 무화과나무로 가셨던 것은 유월절에 열리는 파게를 잡수시기 위하여 가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잎은 무성하지만 열매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게 된 것입니다. 그 이유가 봄에 열리는 파게 열매가 열리지 않았다는 것은 더 이상 상품성이 있는 테에나의 무화과 열매를 기대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무화과나무는 더 이상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저주하신 것입니다.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ειδω(에이도 1492 동사, 분사, 과거, 능동, 주격, 남성, 단수) 보다, 알다, 경험하다, 당하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다니에서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시기 전에 무화과나무를 보게 됩니다. 몹시 시장하셔서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가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의 열매도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경험으로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 나무는 절대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아셨던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과거 시제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지금 무화과나무를 바라보고 있다면 현재입니다. 그런데 이미 과거부터 예수님은 이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경험으로 아신 것입니다. 그리고 즉시 이 나무는 저주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맺지 못하리라’ γινομαι(기노마이 1096 동사, 가정, 과거, 중간디포, 단수, 3인칭/동사, 명령, 과거, 중간디포, 단수, 3인칭) 되다, 이루다, 맺다, 계시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 저주받은 무화과나무는 절대 열매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뿌리가 마르기 때문입니다. 영양분만 먹고 잎만 무성하고 열매를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는 결국 죽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상징하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의 말씀을 들었지만 구원의 확신도 없이 신앙생활을 했던 것을 의미합니다. 구원의 열매가 없다면 저주를 받은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 했는데 가정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너는 열매를 맺을 수도 있고 맺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인데 이 나무는 영원히 맺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과거 시제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 이 나무는 사람들이 볼 때는 건강한 나무입니다. 잎이 무성하여 멀리에서 보면 풍성한 열매가 열려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주님이 원하실 때에 열매를 요구했지만 하나도 내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미 과거에 열매를 맺을 수가 없었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열매를 맺지 못하니 결국 자신에게 돌아온 것은 저주였습니다. 중간 디포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무화과나무 저주 사건을 통해서 깨달을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선택받은 자들은 구원의 열매를 맺는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선택받지 못한 백성들은 자신의 의를 드러내어 잎사귀만 무성하게 됩니다. 원래 파게의 열매는 잎사귀는 없고 앙상한 나무에서 열리게 되는 열매입니다. 구원받은 백성들의 삶이 초라하고 육적으로 부족한 삶을 살아가지만 주님이 시장하여 원하실 때에는 얼마든지 의의 열매 구원의 확신의 열매를 내어 드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율법주의 신앙을 주장하는 자들의 삶은 풍성합니다. 잎이 무성하여 멀리에서 보니 대단한 나무 같습니다. 열매가 풍성하게 많이 열려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막상 가까이 가보니 내놓을 수 있는 열매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복음의 열매, 구원의 확신의 열매, 의의 열매는 하나도 내놓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신의 의를 드러내는데 모든 것을 써버렸기 때문에 막상 열매를 맺으려고 하니 맺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바로 율법주의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은 결국 저주를 받아 영원한 지옥의 불 못으로 들어갈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셔서 하나님의 마지막 과업인 십자가에 달리셔야 합니다. 이 과업을 수행하시기 위하여 무화과나무의 열매를 잡수시려고 가셨는데 아무것도 찾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현재 유대인들의 신앙과 믿음이 이와 같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주님을 제대로 섬기지 못하고 겉으로만 드러내는 신앙만 하고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의만 나타내고 있는 자들은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를 맺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현재 저와 여러분들은 어떠한 열매를 맺고 있습니까? 주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상품가치가 높은 테에나의 무화과나무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높이고, 주님만 찬양하고, 주님만 의지하는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볼품없고 가치가 없는 파게를 요구하셨습니다. 그런데도 나에게 이런 신앙과 믿음도 없다면 이 시간 정신 차려야 합니다. 테에나의 명품 신앙을 원하지 않으시는데도 파게의 신앙과 믿음이 없다면 영원한 불 못의 저주를 받아야 합니다. 이제 저와 여러분들은 파게의 신앙을 뛰어넘어 테에나의 명품 신앙으로 도약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한 번 구원받은 것은 취소가 되지 않는다는 명품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영원한 저주가 사라졌다는 테에나의 신앙입니다. 이것을 믿지 못한다면 파게의 열매도 없는 껍데기 신앙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으로는 절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이제 주님이 파게의 열매를 요구하셨지만 우리는 그것을 뛰어넘어 테에나의 신앙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무화과나무는 종말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마24:32-33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마태복음 24장은 종말 장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종말을 말씀하시면서 무화과나무로 비유를 하고 있습니다. 무화과나무의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알라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들도 이 모든 것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을 깨달을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종말을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무화과나무는 유대인들에게 봄, 여름, 가을, 겨울을 가르쳐 주는 나무입니다. 우기에 들어가는 겨울에는 잎이 떨어져 앙상한 나뭇가지만 남게 됩니다. 이때가 겨울이라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3~4월의 봄이 되면 앙상한 가지에서 잎이 자라게 되며 이때에 파게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러면 봄이 찾아온 것입니다. 여름은 파게 열매가 모두 떨어지고 잎이 무성하게 되며 테에나 열매를 맺게 되면 이때가 여름이 된 것입니다. 가을은 풍성한 잎사귀에 무화과에서 수액이 흘러나와 끈적거리게 됩니다. 그러면 공기 중에 떠돌아다니는 먼지가 달라붙어 지저분하게 보이게 됩니다. 이때가 가을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 잎이 무성해지면 여름이 가까이 온 줄로 깨달을 것을 말씀하시는 의도가 무엇일까요? 우리나라의 여름은 가장 뜨거울 때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뜨겁다라고 하는 여름에 대한 생각이 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여름 하면 종말이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우리나라의 계절 시작과 유대인들의 계절 시작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는 봄에 계절이 시작합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가을이 계절의 시작점입니다. 그 이유는 나팔 절기가 있는 10월 달이 이들에게는 민간력으로 11일 신년이 됩니다.

 

왕상8:2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다 에다님월 곧 일곱째 달 절기에 솔로몬 왕에게 모이고

 

‘에다님월’ איתנים(에타님 388) 에다님, 이라는 뜻입니다. 이 달은 바벨론으로 끌려가기 전에는 에다님월이라고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바벨론으로 끌려간 후부터는 ‘티쉬리월’ 이라고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름이 계절의 끝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럼 예수님은 성경에 여름이 온다는 것은 마지막 종말이 온다는 것을 예고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이 회복되는 것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왔다고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연하여지고’ γινομαι(기노마이 1096 동사, 가정, 과거, 중간 디포, 단수, 3인칭) 생겨나다, 되다, 만들어지다, 행해지다, 라는 뜻입니다. 주님께서는 무화과나무의 가지가 연하여지면 여름이 가까이 온 줄로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메시아를 인정하기 시작하는 것이 가지가 연하여지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는 유대인들이 생겨나고 주님께 예배를 드리는 일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한다면 너희들은 종말이 가까이 온 줄로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이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아직 종말이 도래하지 않은 것이지만 만약에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면 신앙과 믿음을 준비하여 종말을 맞이하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가정법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시작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에 반드시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과거 시제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가지가 연하여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롬11:25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의 충만한 구원받은 수가 생기게 하시기 위하여 유대인들의 눈을 어둡게 하여 우둔하게 만들어 버리신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때가 되어 유대인들의 눈을 열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시고 메시아로 주님을 믿고 있습니다. 이런 일들이 현재 이스라엘에서 이루어져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방인들은 무엇을 예의 주시해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종말의 때가 도래하고 있다는 것을 빨리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나의 신앙을 점검하여 종말에 구름 타고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할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잎사귀를 내면’ εκφυω(에크퓌오 1631 동사, 가정, 현재, 능동, 단수, 3인칭) 산출하다, 싹이 나다, 라는 뜻입니다. 무화과나무가 잎이 나오고 싹이 나면 마지막 종말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이때가 되면 반드시 인자가 문 앞에 가까이 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일이 없으면 아직도 종말은 도래하지 않은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일이 현재 일어나고 있다면 인자가 가까이 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가정법과 현재 시제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현재 이스라엘에서는 유대인들이 잎사귀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점점 현재에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신앙은 어떠해야 합니까? 주님을 맞이할 믿음을 준비해야 합니다. 종말 때에는 심판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때에 우리는 점점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확신을 갖고 십자가 복음의 말씀 안으로 들어와야 합니다. 현재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의 눈을 열어주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에는 눈이 막혀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너무나 많아졌습니다. 이제는 주님의 재림이 가까이 오고 있음을 영적으로 감지하여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면서 기다리는 신앙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무화과나무를 통해서 영적으로 깨달은 것이 무엇입니까? 무화과에는 그늘, , 나라, 도시, 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뜨거울 때에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으면 쉼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무화과나무의 그늘이 뜨거운 태양을 가려주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영적으로 무화과나무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들도 세상에서 열심히 살다 보면 뜨거운 태양 아래에 고통스러운 것처럼 인생이 힘들고 지칠 때가 있습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이 고단하고 영적으로 지치게 되어 낙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삶을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에 무화과나무 아래에 오면 쉼을 얻게 됩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그늘 밑으로 들어오면 아무리 뜨거운 태양과 같은 고난이 있다 할지라도 안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쉼을 얻었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나다나엘이 토라를 공부하면서 메시아를 기다린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의 말씀을 공부하고 듣고 연구하면서 재림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려야 합니다. 그럴 때에 영적으로 항상 깨어 있어서 주님이 재림하실 때에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를 통해서 종말을 가르치고 있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그늘 아래에서 쉼과 안식을 얻으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기억하시면서 종말의 신앙을 가지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요한계시록 8장 설교말씀] “일곱째 인”(계8:1-5)

안녕하세요. 오늘은 요한계시록 8장 설교말씀 중에서 일곱째 인이라는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일곱째 인”(계 8:1-5) ♣명제: 일곱째 인은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의 때를 상징하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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