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성경 족보 설교문 중에서 베레스에 대한 하나님 말씀에 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베레스는 세라와 함께 쌍둥이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구속사의 대를 잇는 데는 베레스를 사용하였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우리의 구원도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오늘은 우리가 베레스라는 인물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를 발견해 보려고 합니다. 베레스는 십자가에서 주님의 몸이 부서지고 고통당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입니다. 주님은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나를 살려 주셨습니다.
베레스 פרץ(페레츠 6557) 터짐, 헤치고 나옴
♣ 명제 : 베레스는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이 부서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이다.
♣ 목적 : 주님의 고통과 수난으로 선택된 백성들이 구원을 얻었다.
마1:3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유다는 찬양받기에 합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는 인물입니다. 그런데 형제들의 찬양을 받기에 합당한 유다에게 씻지 못할 하나의 사건이 있는데 이것이 자신의 며느리와의 관계에서 아들을 낳았다는 것입니다. 이 아들들의 이름이 베레스와 세라입니다. 그럼 왜 유다에게 이런 기막힌 사건이 일어났는지를 우리는 영적으로 깨달아야 합니다.
창38:6-7 유다가 장자 엘을 위하여 아내를 데려오니 그의 이름은 다말이더라 유다의 장자 엘이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신지라
유다가 자신의 장자인 엘을 위하여 아내를 데려오게 됩니다. 그 여자의 이름은 다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장자 엘이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하므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를 죽이셨습니다. 무엇이 악했는지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엘’은 ער(에르 6147) 엘, 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עור(우르 5782) 격동시키다, 소동하다, 어지럽게 하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유다의 장자인 엘이 하나님께 진노를 받아 죽게 되는데 정확하게 하나님의 눈에 어떻게 보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엘의 이름을 추적해 보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을 격동시키고 화를 나게 만드는 행동을 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어지럽게 만들고 죄악의 행동들을 거침없이 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소동을 피워 피해를 주는 행동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눈 밖에 난 것입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눈에 띈 사람이지만 엘은 하나님의 눈 밖에 나서 결국 진노받아 죽어야 했던 것입니다.
결국 장자 엘이 죽자 다말은 과부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고대근동의 계대 법에 의해 장자가 아들이 없이 죽으면 형제가 대신 대를 이어주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동생인 오난이 형 대신에 대를 이어주어야 합니다.
창38:8-10 유다가 오난에게 이르되 네 형수에게로 들어가서 남편의 아우 된 본분을 행하여 네 형을 위하여 씨가 있게 하라 오난이 그 씨가 자기 것이 되지 않을 줄 알므로 형수에게 들어갔을 때에 그의 형에게 씨를 주지 아니하려고 땅에 설정하매 그 일이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도 죽이시니
유다는 장자가 죽자 오난에게 너의 형수에게로 들어가서 남편의 아우 된 본분을 행하여 형을 위하여 씨를 주라고 말합니다. 오난이 계대법에 의해 들어갔지만 그 씨가 자신의 것이 되지 않을 줄을 알고 형에게 씨를 주지 않으려고 땅에 설정해버렸습니다. 이 일이 하나님 보시기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죽였습니다.
‘오난’은 אונן(오난 209) 오난, 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און(온 202) 정력, 기력, 힘, 권세,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오난의 이름 속에 나타난 것을 보면 정력이 세어 기력이 충만한 자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힘과 권세를 자랑하여 아버지의 명을 거역한 것입니다. 자신의 아들이 되지 않을 것을 알고 자신의 씨를 땅에 뿌려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악하였고 오난을 죽이신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자신의 힘을 믿고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자들은 반드시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계대 법은 예수그리스도의 구속의 대를 이어가는 데는 반드시 없어서는 안 될 법입니다. 이 법이 없다면 예수그리스도의 구속의 대를 이을 수가 없습니다. 중간에 끊어지고 말 것입니다. 이렇게 중요한 법을 오난은 어긴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죽게 되었습니다.
‘땅에 설정하매’는 שחט(샤하트 7843 동사, 피엘, 완료, 남성, 3인칭, 단수) 설정하다, 멸망시키다, 더럽히다, 깨뜨리다, 헐어버리다, 라는 뜻입니다. 오난은 유다의 명령을 받고 다말에게 들어갔지만 자신의 씨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땅을 향하여 있는 힘껏 버려서 그의 씨를 더럽히고 형에게 씨를 주지 않았습니다. 오난의 이러한 행동들은 형의 대를 완전하게 깨뜨려서 헐어버리려고 하는 사악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마음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시고 오난의 삶을 멸망시켜버렸습니다. 이렇게 오난이 땅에 자신의 정자를 설정한 것은 형에게 씨를 주지 않으려고 하나도 남김없이 땅에 뿌렸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피엘형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완료 시제를 씀으로 더 이상 앞으로도 주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고 땅에 쏟아버린 것입니다. 이렇게 행동했던 것이 하나님의 눈에 악하게 보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오난을 죽이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통해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아무리 자신의 생각에 맞는다고 하지만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씨를 주면 오난은 손해가 날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주지 않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눈에는 악하여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반면에 보아스는 룻을 만나 엘리멜렉의 대를 이어주었습니다. 그랬더니 보아스는 예수그리스도의 계보에 들어가는 영적 자손이 된 것입니다. 우리들도 이제부터 나의 생각대로 판단하여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에 맞추는 삶을 살아간다면 하나님으로부터 영적 자손의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엘과 오난이 죽자 유다는 마음이 다급해졌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막내아들인 셀라는 아직 장성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중에 대를 이을 것이라고 약속했습니다.
창38:11 유다가 그의 며느리 다말에게 이르되 수절하고 네 아버지 집에 있어 내 아들 셀라가 장성하기를 기다리라 하니 셀라도 그 형들 같이 죽을까 염려함이라 다말이 가서 그의 아버지 집에 있으니라
유다는 셀라마저도 하나님 앞에서 죽을까 봐 셀라가 장성하기를 기다리라고 다말에게 이야기하고 자신의 아버지 집에 가 있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셀라가 장성했는데도 아무 소식이 없자 다말은 유다가 딤나에 올라왔다는 소식을 듣고 변장하여 유다와 관계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창38:14 그가 그 과부의 의복을 벗고 너울로 얼굴을 가리고 몸을 휩싸고 딤나 길 곁 에나임 문에 앉으니 이는 셀라가 장성함을 보았어도 자기를 그의 아내로 주지 않음으로 말미암음이라
다말은 과부의 의복을 벗고 너울로 얼굴을 가기고 변복을 했습니다. 이렇게 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셀라가 장성함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아내로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무슨 큰 일이라고 이렇게까지 할 수 있냐고 물을지 모르지만 고대 근동에서는 여자가 자식을 낳지 못하면 신으로부터 저주를 받은 여인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런 상황들을 통하여 영적 장자인 유다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열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얼굴을 가리고’는 כסה(카사 3680 와우계속. 동사, 피엘, 미완료, 여성, 3인칭, 단수) 감추다, 숨기다, 두르다, 라는 뜻입니다.
다말은 유다가 딤나에 올라왔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이 유다의 며느리가 아니라는 것을 감추기 위해 과부의 옷을 벗고 너울로 얼굴을 꽁꽁 싸매어 유다가 보기에 전혀 자신이 며느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도록 자신의 얼굴을 감추고 있습니다. 이렇게 다말이 분주하게 즉시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면서 변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보아도 전혀 얼굴을 알지 못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여자들이 얼굴에 화장을 하여 전혀 모르는 사람으로 변장되는 것처럼 다말이 꾸몄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피엘형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에는 이렇게 얼굴에 화장을 해본 적도 없고 이렇게 얼굴을 가리기 위해 너울을 덮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너무나 완벽하게 변장을 하여 전혀 자신을 알지 못하도록 꾸몄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신이 자식을 갖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다말에게는 소원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대를 이어가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딤나’는 תמנה(팀나 8553) 딤나, 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מנה(마나 4487) 준비하다, 계산하다, 작정되다, 지정하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다말이 딤나에서 변복을 하고 유다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이미 다말의 계산에서 나온 것입니다. 어떻게 유다와 함께 잠을 자서 아이를 갖게 될 것인지를 계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딤나의 장소에서 이렇게 다말이 유다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이미 하나님의 계획과 작정 속에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아니면 절대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부적절한 관계가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렇게 이런 내용들을 성경에 기록하고 있는 것은 앞으로 지정받아 탄생하실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부적절한 죄악들을 모두 짊어지실 것을 예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에나임’은 עינים(에나임 5879) 에나임, 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עין(아인 5869) 주목하다, 바라보다, 겸손하다, 우물, 눈, 이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다말이 딤나의 에나임 문에 앉아있는 것은 깊은 영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성경은 이런 명칭들을 무의미하게 기록하지 않습니다. 그에 합당한 의미가 있기 때문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말이 에나임의 성문에 앉아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목하고 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은 육적인 눈으로 바라보고 이것은 너무나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하지만 하나님의 눈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앞으로 유다를 통해 탄생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겸손의 왕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한 생수를 주실 분이며 우물이 마르지 않는 것처럼 십자가 복음의 생수를 부어주실 분을 하나님은 바라보시면서 기뻐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눈으로 유다와 다말의 사건을 본다면 구원의 자리에 있지 않은 사람입니다. 구원받은 영적 자손들은 육적인 행위를 보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이러한 추악한 간음의 행위들을 유다를 통해서 나타나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죄악의 짊을 가져가셨다는 것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유다와 다말을 통하여 탄생한 아들이 베레스와 세라였던 것입니다.
창38:27-30 해산할 때에 보니 쌍태라 해산할 때에 손이 나오는지라 산파가 이르되 이는 먼저 나온 자라 하고 홍색 실을 가져다가 그 손에 매었더니 그 손을 도로 들이며 그의 아우가 나오는지라 산파가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터뜨리고 나오느냐 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베레스라 불렀고 그의 형 곧 손에 홍색 실 있는 자가 뒤에 나오니 그의 이름을 세라라 불렀더라
다말이 임신을 하고 아이를 낳을 때에 쌍둥이였습니다. 이때 손이 먼저 나왔는데 산파가 먼저 나온 자를 홍색 실로 묶었습니다. 그리고 손을 도로 들이밀었고 그의 아우가 나왔는데 그 이름이 베레스입니다. 베레스가 육적으로는 동생입니다. 먼저 손을 내어 민 자가 세라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라를 선택하지 않고 베레스를 선택하여 영적 장자로 세우시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계보에 동생인 베레스를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세라’는 זרח(제라흐 2226) 세라, 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זרח(자라흐 2224) 떠오르다, 비치다, 임하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세라도 유다의 육적 자손으로 올라가는 자가 되고 유다의 가문으로서 후손들을 이루는 자가 됩니다. 세라의 손에는 홍색 실을 묶어 주었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는 실입니다. 세라는 육적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루었고 육적인 혈통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될 것을 예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에게도 복음을 주시고 구원해 주실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롬11:11-14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그들이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 나게 함이니라 그들의 넘어짐이 세상의 풍성함이 되며 그들의 실패가 이방인의 풍성함이 되거든 하물며 그들의 충만함이리요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이는 혹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하게 하여 그들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하나님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임하셨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구원자로 깨닫지 못하고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런데 이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전파되어 이방인들이 구원받는 모습을 보면서 유대인들이 시기가 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렇게 시기 나게 하여 유대인들도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려는 의도입니다. 바로 세라를 통하여 붉은 실을 묶어주었다는 것은 유대인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라가 먼저 세상 밖으로 나왔지만 손이 먼저 나온 것이고 완전하게 세상 밖으로 나온 자는 베레스였습니다. 그래서 육적으로는 세라가 장자이지만 하나님께서 인정한 영적 장자는 베레스인 것입니다.
‘베레스’는 פרץ(페레츠 6557) 베레스, 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פרץ(파라츠 6555) 깨뜨리다, 분쇄하다, 터뜨리다, 번성하다, 죽이다, 파괴하다, 무너지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베레스는 자신의 형보다 먼저 이 세상으로 몸이 나왔습니다. 하나님께서 베레스를 영적 장자로 선택하셔서 구속사의 계보에 올려주신 것입니다. 베레스도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입니다. 베레스의 이름에서 나오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이 십자가에 매달려 산산이 부서지고 깨져서 고통을 당하시고 모든 육신이 기계에 들어가 분쇄당하여 죽으신 모습의 예표입니다.
이렇게 주님께서 죽으심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백성들이 영적으로 죄악에서 건짐을 받고 번성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선택받은 백성들이 받아야 할 죄악의 저주를 주님께서 받으시고 자신의 몸이 죽어 철저하게 파괴당하셔서 구원받은 자들의 죄를 완전하게 깨뜨려 허물어 주신 것입니다.
히10: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셨는데 새로운 영생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성막에서 지성소는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장소입니다. 이 장소를 들어가려면 휘장을 반드시 거쳐야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곳에 들어가서 속죄 소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곳은 원죄가 있는 죄인들이 들어가면 반드시 죽게 되어 있습니다. 죄인이 거룩한 하나님을 보면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휘장을 거두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가 되는 휘장을 통해 누구나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담대함을 얻게 된 것입니다.
막15:38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고난당하시고 운명하실 때에 성전에 있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로 나누어졌습니다.
‘찢어져’는 קרע(카라 7167 동사, 닢알, 완료, 여성, 3인칭, 단수) 찢다, 조각내다, 떼어 버리다, 빼앗다, 라는 뜻입니다.
성전에 있던 휘장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는 성전의 기구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때에 이 휘장이 찢어졌다는 영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죄악 가운데 저주를 받아 몸이 갈기갈기 찢어지시고 번제물을 조각내어 각을 뜨듯이 예수님이 이와 같이 나의 죄 때문에 조각조각 각이 떠지시고 원죄에서 완전하게 떨어지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담의 원죄 때문에 사탄에게 영혼이 빼앗겨 죽어있던 나를 주님이 십자가에서 이런 고통을 당하시고 자신의 몸이 찢어짐으로 사망에 빼앗겼던 영혼을 주님의 품 안으로 들어오게 하신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휘장이 찢어진 것은 자신 스스로 찢어진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하여 찢어졌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닢알형을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 스스로 십자가에 올라가신 것이 아니라 선택받은 나를 위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올려놓으셨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외에는 어느 누구도 자신의 몸을 찢지 못하며 찢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완료 시제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휘장이 찢어진 것은 하나님의 의도이며 이렇게 찢어짐으로 영혼이 죄 가운데 죽었던 자들을 완벽하게 살리셨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한 분만으로 족하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구원을 위하여 더 이상 동물을 드릴 필요가 없고 어떤 사람이 다시 십자가에 달릴 필요가 없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성막의 휘장을 하나님께서 찢으셨을 때의 마음을 우리가 알 수 있는 좋은 예가 있습니다. 야곱이 요셉의 채색 옷을 보고 자신의 옷을 찢었을 때입니다.
창37:31-35 그들이 요셉의 옷을 가져다가 숫염소를 죽여 그 옷을 피에 적시고 그의 채색옷을 보내어 그의 아버지에게로 가지고 가서 이르기를 우리가 이것을 발견하였으니 아버지 아들의 옷인가 보소서 하매 아버지가 그것을 알아보고 이르되 내 아들의 옷이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도다 요셉이 분명히 찢겼도다 하고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오래도록 그의 아들을 위하여 애통하니 그의 모든 자녀가 위로하되 그가 그 위로를 받지 아니하여 이르되 내가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 아들에게로 가리라 하고 그의 아버지가 그를 위하여 울었더라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을 시기하여 자신들에게 찾아왔을 때에 요셉을 이스마엘의 상인들에게 팔아버렸습니다. 그리고 요셉의 채색 옷을 가져다가 숫염소를 죽이고 옷을 피에 적셔 야곱에게로 가졌습니다. 야곱은 요셉의 채색 옷을 보고 요셉의 옷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자신의 아들이 악한 짐승에게 잡혀 먹은 줄 알고 애통해하면서 자신의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그 아들을 위하여 애통하면서 통곡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야곱이 옷을 찢었다는 단어가 קרע(카라)라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성부 하나님께서도 자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달아 죽이실 때에 너무나 가슴이 아프고 애통하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야곱이 요셉을 위해 옷을 찢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성막의 휘장을 찢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죽이신 하나님의 애통이며 가슴이 아프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애통해하시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나 때문이 아닙니까? 나의 죄를 도말해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애통해 하시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다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베레스는 영적 장자로서 선택함을 받은 인물입니다. 베레스의 이름 속에는 터치고 나온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수가 터져 나오는 것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7:38-39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성경에 이름과 같이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마심으로 영원한 갈증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영혼의 갈증이 사라지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생명의 말씀 때문입니다.
요6:3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예수님은 생명의 떡이기 때문에 주님께 오는 자들은 결코 주리지 아니하며 주님을 믿는 자들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베레스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되는데 고난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됩니다. 또한 생명의 물이 영원토록 쏟아져 나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나를 위해 고난당하시고 저주받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면서 영원한 생수 되시는 주님을 믿고 따라가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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