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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 오늘도 복음 빵집에 오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오늘은 사울 왕과 모르드개의 신앙 비교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사울의 신앙과 모르드개의 신앙”(삼상10:20-21, 에2:5)
♣명제: 사울의 신앙은 육적인 신앙이고 모르드개의 신앙은 영적인 신앙이다.
♣목적: 현재 나의 신앙은 사울의 신앙인가? 아니면 모르드개의 신앙인가?
오늘 이 시간에는 사울의 신앙과 모르드개의 신앙을 통하여 우리들의 신앙을 깨우쳐 보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울의 신앙은 육적인 신앙이었다면 모르드개의 신앙은 영적인 신앙이었습니다. 그럼 우리는 어떠한 신앙의 자세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가야 할 것인지를 말씀을 통하여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모르드개의 신앙과 믿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럼 사울과 모르드개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삼상10:20-21 사무엘이 이에 이스라엘 모든 지파를 가까이 오게 하였더니 베냐민 지파가 뽑혔고 베냐민 지파를 그들의 가족별로 가까이 오게 하였더니 마드리의 가족이 뽑혔고 그 중에서 기스의 아들 사울이 뽑혔으나 그를 찾아도 찾지 못한지라
사울과 모르드개는 같은 베냐민 지파의 출신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을 요구하자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준비하셨습니다. 베냐민 지파의 사울을 뽑아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사울이 뽑혔으나’ (לכד라카드 3920) 걸리다, 뽑히다, 뽑다, 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을 요구하자 하나님께서는 사무엘 선지자를 통하여 허락하셨습니다. 그리고 제비를 뽑았는데 베냐민 지파가 뽑혔습니다. 그리고 마드리의 가족이 뽑히고 그 중에 기스의 아들 사울이 뽑힌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요구를 들어주신 것입니다. 이미 사울이 뽑힐 수밖에 없도록 하나님께서 준비해 놓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닢알형을 통해서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사울’ (שאול샤울7586) 사울, 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שאל샤알 7592) 구걸하다, 거지가 되다, 요구하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인간의 요구에 의하여 왕이 된 사울은 육적으로는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는 것 같지만 영적으로는 하나님 앞에서 구걸하는 거지와 같은 신세로 전락되는 것입니다. 십자가 복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없는 사람들은 이와 같이 육적으로는 화려한 삶을 살고 있지만 영혼은 늘 배고파 구걸하는 거지와 같은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육신의 것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을 채우면 하나님께서 육신의 것도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에2:5 도성 수산에 한 유다인이 있으니 이름은 모르드개라 그는 베냐민 자손이니 기스의 증손이요 시므이의 손자요 야일의 아들이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자 느부갓네살 왕을 통하여 징계를 내리시게 됩니다. 그때에 모르드개도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오게 되는 것입니다. 모르드개도 베냐민 자손입니다. 여기에서 기스의 증손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사울 왕의 아버지와는 동일 인물은 아니지만 모르드개는 사울의 후손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모르드개라’ (מרדכי모르데카이 4782) 작은 사람, 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볼 때에 사울 왕은 육적으로는 최고의 왕권을 가진 큰 사람입니다. 그러나 모르드개의 모습은 육적으로는 초라한 작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포로로 끌려와 대궐 문 앞에서 걸인과 같은 인생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신앙만큼은 오직 하나님을 최고로 섬기는 영적 신앙을 가지고 있던 사람입니다. 모르드개와 같은 사람은 현재의 육적인 모습은 거지와 같은 삶을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영적인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이 있기 때문에 부자인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두려워하지 않는 신앙을 가지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생을 살았더니 하나님은 모르드개를 총리의 직분까지 올라가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르드개와 같은 예수 그리스도께 절개 있는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 하나님은 반드시 나를 이 세상에서도 높은 직분에 올라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럼 사울 왕과 모르드개의 사역을 비교해 보겠습니다.
삼상13:9 사울이 이르되 번제와 화목제물을 이리로 가져오라 하여 번제를 드렸더니
사울 왕은 블레셋 민족들이 이스라엘을 공격했을 때에 마음이 급해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쟁에 나가기 전에 하나님께 제사하여 응답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제사를 드려야 할 사무엘이 오지를 않고 있습니다. 이때에 사울의 마음이 조급해졌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번제와 화목제물을 가지고 오라고 하여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던 것입니다. 자신의 왕권을 가지고 하지 말아야 할 영적인 권리까지 행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가져오라 하여’ (נגש나가쉬 5066) 가까이 가다, 접근하다, 달라붙다, 이끌어 오다, 라는 뜻입니다. 사울은 블레셋 민족들이 두려운 것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에게서 떠나가는 것이 두려워 번제를 드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울의 어떤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까? 사람들이 자신에게 가까이 오게 하기 위하여 하지 말아야 할 번제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백성들의 마음을 자신에게 달라붙게 하기 위하여 제물을 자기에게 이끌어 오라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제사를 이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무엘이 정한 기한에 오지 않자 백성들의 마음이 사울에게서 떠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마음을 잡기 위하여 허락되지 않은 제사를 자신이 직접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왕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월권행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울 왕은 백성들에게 자신의 욕심에 의하여 번제물을 가지고 오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왕권을 가지고 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하나님이 허락하지도 않은 제사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백성들은 왕의 권한이 있기 때문에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명령법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삼상13:13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왕이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내리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리하였더라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위에 왕의 나라를 영원히 세우셨을 것이거늘
사무엘이 사울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다는 것입니다. 잘못을 해도 크게 잘못했다고 꾸짖고 있습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을 지켰더라면 당신이 왕위를 계속해서 세워나갈 것인데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다른 왕을 찾으셨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סכל사칼 5528) 사악하게 행하다, 어리석게 처신하다, 미련하다, 라는 뜻입니다. 사울이 하나님께 번제를 드린 행위는 사악한 행동이었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는 제사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릴 때에 방법이 잘못된 것입니다. 예배를 열심히 드린다고 하나님이 모두 인정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예배를 드릴 때에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사울은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이렇게 어리석게 하나님 앞에 처신하여 결국은 저주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미련하게 행동했던 행동이 왕위에서 버림받는 인생이 된 것입니다.
인간의 요구에 의하여 왕이 된 사울은 망령되게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릴 수밖에 없도록 지정된 사람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생각하는 것이 영적인 것이 아니라 세상적인 것입니다. 닢알형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사울의 생각은 모두가 육신적인 생각으로 가득 채워졌기 때문에 행동도 모두가 세상적인 유익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육의 사람들입니다. 완료 시제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사울은 예배 한 번 잘못 드림으로 왕권을 빼앗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 정도로 예배가 중요합니다. 어떻게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릴 것인지 저와 여러분들은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대상21:8 다윗이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이제 간구하옵나니 종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내가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 하니라
다윗이 교만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의 인구를 조사하게 됩니다. 전쟁에 나갈 만한 자들을 조사하여 오라고 요압에게 명령을 했습니다. 요압은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지켜주셨는데 왜 인간적인 생각으로 전쟁에 나갈 만한 자의 인구를 조사하십니까? 라고 말하면서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고집을 피우며 조사를 하라고 했을 때에 하나님께서 역병을 돌려 백성들을 죽였습니다. 그러고 나서 다윗이 하나님께 회개를 하고 있습니다.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 (סכל사칼 5528) 사악하게 행하다, 어리석게 처신하다, 미련하다, 라는 뜻입니다. 다윗도 하나님 앞에 사악한 짓을 한 것입니다. 인구를 조사하지 않아도 되는데 하나님 앞에 큰 죄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행동은 사울과 같이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미련하여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은 예배를 잘 못 드려 왕권이 폐하여졌습니다. 다윗은 이 문제 때문에 하나님 앞에 번제를 제대로 드려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염병으로 칠만 명이 죽을 때에 오르난의 타작마당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게 되는 것입니다. 이 제단을 통하여 모든 재앙이 끝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배가 중요합니다. 사울은 예배를 잘못 드려 인생이 망하는 자가 되었지만 다윗은 예배를 잘 드려 재앙이 끝나고 축복을 받는 자가 되었습니다. 이제부터 저와 여러분들은 예배를 소홀하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예배를 드리면 안 됩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예배를 드리면 하나님이 축복해 주시는 것입니다.
에2:21-22 모르드개가 대궐 문에 앉았을 때에 문을 지키던 왕의 내시 빅단과 데레스 두 사람이 원한을 품고 아하수에로 왕을 암살하려는 음모를 꾸미는 것을 모르드개가 알고 왕후 에스더에게 알리니 에스더가 모르드개의 이름으로 왕에게 아뢴지라
모르드개가 대궐 문에 앉아 있을 때에 문을 지키던 왕의 내시 빅단과 데레스 두 사람이 아하수에로 왕에게 원한을 품고 암살하려는 음모를 듣게 됩니다. 이것을 왕후인 에스더에게 알리고 에스더는 모르드개의 이름으로 왕에게 알렸습니다.
‘에스더에게 알리니’ (נגד나가드 5046) 고발하다, 공포하다, 일러주다, 보고하다, 라는 뜻입니다. 모르드개는 빅단과 데레스가 아하수에로 왕을 죽이려고 하는 음모를 알고 에스더에게 보고하여 일러주고 있습니다. 이 소식을 접한 에스더는 왕에게 찾아가 왕의 신하들이 왕을 죽이려고 음모를 꾸민다는 것을 고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안 아하수에로 왕은 빅단과 데레스를 죽여 나무에 매달라고 공포하여 그대로 행하고 궁중 일기에 기록하게 됩니다.
모르드개는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이렇게 한 것이 아니라 왕을 살리겠다는 신념으로 에스더에게 즉시 보고했던 것입니다. 사울 왕과 모르드개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사울 왕은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지만 모르드개는 대가를 바라고 왕을 죽이려는 음모를 보고했던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아하수에로 왕이 자신에게 대가를 주지 않아도 모르드개는 마음이 상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런 신앙이 영적 신앙입니다. 육신의 유익을 위하여 왕을 살린 것이 아니라 왕이기 때문에 살려야 된다는 마음을 가지고 보고했던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어떠한 신앙의 자세가 있어야 합니까? 사울 왕은 왕이신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번제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일도 아닌데 육적인 왕권을 함부로 사용하여 하나님께 사악한 죄를 지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세상에서의 직분을 가지고 함부로 하나님께 죄를 짓는 데에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물질을 함부로 남용하여 하나님께 도전하는 삶을 살아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직분은 하나님을 더 잘 섬기라고 주신 것입니다.
모르드개는 육적으로 천박한 신분에 불과한 존재입니다. 성문에서 오고 가는 사람들을 보고 있는 성전 문지기와 같은 존재입니다. 하지만 모르드개에는 여호와 신앙이 철두철미하게 녹아져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보다 더 큰 존재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만에게 절하지 않은 것입니다. 자신의 목숨이 끊어진다고 해도 아각의 후손인 하만에게는 절대 절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세상의 유익에 따라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을 따라 주님의 나라를 위해 사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삼상15:12 사무엘이 사울을 만나려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났더니 어떤 사람이 사무엘에게 말하여 이르되 사울이 갈멜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고 발길을 돌려 길갈로 내려갔다 하는지라
사울은 아말렉을 치고 좋은 것은 남겨두고 하찮은 것은 진멸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욕심에 따라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갈멜에 이르러 자신을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고 길갈로 내려갔습니다. 사울은 철저하게 자신을 높이는 율법적인 삶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기념비를 세우고’ (נצב나차브 5324) 세우다, 조립하다, 서게 하다, 정하다, 라는 뜻입니다. 사울은 아말렉 민족을 치고 나서 자신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나서 이렇게 자신의 영광을 높이기 위하여 갈멜에 기념비를 세우도록 명령하고 있습니다. 이 기념비는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높이기 위하여 돌을 하나하나 조립하여 정성스럽게 세웠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인간이 요구하여 세워진 왕은 결국 하나님을 배반하고 자신만을 높이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현재 이런 자들이 누구입니까? 인간 자신을 높이는 가톨릭의 교황이며 이단의 교주들입니다. 이들은 주님의 이름을 가지고 자신의 이름을 높이는 데 사용하고 있습니다. 사울과 똑같은 자로서 율법의 기념비를 세우고 자신이 최고인 것처럼 가르치며 영광을 받는 자들입니다. 사울은 결국 이렇게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말씀대로 살지 못했으며 잘못된 예배를 드리게 되고 전쟁에서 자신의 유익에 따라 좋은 것은 취하고 하찮은 것은 진멸함으로 하나님께 죄를 저지른 것입니다. 사울의 마지막은 길보아 전투에서 자살로 인생을 마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죽은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현재 이렇게 신앙생활하는 자들은 율법주의에 빠진 자들이라는 것을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사울처럼 자신만을 높이고 율법의 의를 나타내어 예수 그리스도를 무시하고 복음을 거부하는 자들입니다. 철저하게 복음을 버리고 율법의 의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자들입니다. 교회 안에서 이와 같이 사울처럼 헌금을 하고 자신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고 있다면 하나님 앞에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예배를 자신의 세상적 유익을 위해 드리면서 돈벌이로 교회에 나오고 있다면 이것 또한 사울과 같은 자들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것이며 죄 사함을 받는 곳입니다. 다윗도 죄를 지었지만 하나님께 예배를 잘 드려 복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예배가 중요하다는 것을 우리가 깨달아야 합니다.
에2:23 조사하여 실증을 얻었으므로 두 사람을 나무에 달고 그 일을 왕 앞에서 궁중 일기에 기록하니라
사울과 다르게 모르드개는 자신의 업적이 사라졌습니다. 아하수에로 왕을 죽이려고 음모를 꾸몄던 자들을 보고했음에도 불구하고 모르드개에게 돌아온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하수에로 왕은 모르드개의 모든 업적을 기억도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르드개는 실망하지 않고 인내하여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자신을 높이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조사하여’ (בקש바카쉬 1245) 찾다, 수색하다, 알아보다, 명령하다, 라는 뜻입니다. 모르드개의 보고를 받은 아하수에로 왕은 신하들에게 명령하여 빅단과 데레스의 집을 수색하여 물증을 찾아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음모자들의 집을 샅샅이 수색하여 물증을 찾아냈습니다. 그리고 이들을 심문하여 왕을 죽이려고 했던 사실을 자백받아 이들을 죽여 나무에 매달았던 것입니다. 헤로도투스나 요세푸스에 의하면 왕을 독살하려고 하던 자들은 십자가형에 처해졌다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이 나무가 십자가형의 나무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가 없지만 이런 형벌이 있었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모르드개가 보고하여 아하수에로 왕이 살아나게 됩니다. 이 사건은 왕이 즉시 명령을 내려 하나도 빠짐없이 빅단과 데레스의 음모에 관하여 조사하라고 명령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조사할 수밖에 없는 상황과 환경이 된 것입니다. 왕을 죽이려고 하는 음모의 증거는 하나도 빠짐없이 조사해야 되는 것입니다. 푸알형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음모를 찾아냈고 증거를 모두 수거하여 왕에게 보고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건을 제보했던 모르드개는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졌습니다. 결정적 단서를 준 사람은 모르드개인데 모르드개는 왕이 잊어버린 것입니다. 그래도 모르드개는 실망하지 않고 자신을 높이는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자신이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셨다는 것을 인정하고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내가 결정적 단서를 주었는데 왜 나를 인정하지 않고 있느냐고 따지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하나님의 깊은 뜻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인내하면서 하나님이 높여주실 때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모르드개는 이렇게 하나님이 높여주실 때까지 기다리면서 하나님을 높인 것입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아하수에로 왕에게 잠을 재우지 않으시고 자신을 암살하려고 했던 모르드개를 기억나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사울은 자신이 높아지려고 하다가 결국 죽음의 길로 갔지만 모르드개는 하나님이 높여주시니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사람이 높이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하나님이 높여주시는 것을 기뻐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높여주실 때까지 인내하면서 오직 주님만을 섬기는 신앙으로 기다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삼상15:15 사울이 이르되 그것은 무리가 아말렉 사람에게서 끌어 온 것인데 백성이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 하여 양들과 소들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남김이요 그 외의 것은 우리가 진멸하였나이다 하는지라
하나님께서는 사울에게 명령하였습니다. 아말렉 민족을 모두 진멸할 것을 사울에게 명했습니다. 아말렉 민족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광야에서 쳤기 때문입니다. 지쳐있는 자신의 백성들을 쳤던 것을 벌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사울 왕에게 모두 진멸하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은 이 명령을 받고 아말렉 사람들을 모두 진멸하지 않습니다. 특히 아각 왕을 살려주었습니다. 그리고 좋은 양들과 소들 중에서 좋은 것은 남겼습니다. 그러면서 하찮은 것들은 진멸했던 것입니다. 완전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욕심에 따라 좋은 것들을 남겨두었습니다.
호6: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원하시고 제사를 원하지 않습니다. 번제보다 하나님의 뜻을 알기를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은 하나님이 제사를 더 원하고 있는 줄 알고 번제물을 더 좋아하시는 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끌어 온 것인데’ (בוא보 935) 선물을 가져오다, 옮겨가다, 통혼하다, 이끌고 오다, 라는 뜻입니다. 사울 왕은 사무엘에게 당당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좋은 것들을 이끌고 온 것은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께 선물로 바쳐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고 아말렉에서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이 소리를 듣고 사무엘은 화가 났습니다. 하나님의 명령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각 왕을 죽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죽이지 않았습니다. 왕을 죽이지 않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하나도 수행하지 않았다는 것과 같습니다.
사울 왕의 신앙은 어떤 신앙입니까? 세상과 결탁한 신앙이며 우상과 통혼한 신앙으로서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기고 있는 신앙입니다. 이런 신앙에서는 하나님이 함께 하실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울을 떠나 다윗에게로 하나님이 옮겨가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사건을 통하여 사울을 왕으로 삼으신 것을 후회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울이 좋은 것을 취하여 끌고 온 것은 자신 스스로 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결국 자신의 욕심에서 나온 것이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닙니다. 그것도 나쁜 것은 하나도 가져오지 않고 좋은 것만 취하여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완료 시제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군인들에게 좋은 것은 하나도 빠짐없이 챙기라고 명령을 내렸던 것입니다. 사울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명령은 사라지고 눈에 보이는 물질에 욕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여리고 성에 들어가서 욕심을 부린 아간과 같은 신앙을 가지고 있는 자가 사울 왕입니다.
현재 우리는 어떠한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까? 눈에 보이는 것은 두려워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주님은 두려워하지 않습니까? 육을 죽이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영을 죽이는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사울처럼 철저하게 육에 속하여 율법에 젖은 신앙을 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신앙은 하나님께 진노를 받게 됩니다. 영에 속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에9:10 곧 함므다다의 손자요 유다인의 대적 하만의 열 아들을 죽였으나 그들의 재산에는 손을 대지 아니하였더라
그럼 베냐민 지파의 후손인 모르드개는 어떠한 행동을 취하고 있습니까? 하만이 모르드개와 유대인들을 모두 죽이려고 음모를 꾸몄습니다. 그런데 하만 자신이 나무에 매달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신 승리입니다. 이런 승리가 있고 난 후에 모르드개는 사울과는 다르게 하만의 열 아들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재산에는 손을 대지 말라고 명령을 내렸던 것입니다.
‘하만’ (המן하만 2001) 하만, 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המה하마 1993) 시끄러운 소리를 내다, 소란하다, 날뛰다, 소동을 벌이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하만은 어떤 사람입니까? 사울 왕이 죽이지 않았던 아각 왕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모르드개는 사울 왕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는 인물입니다. 이런 아각 왕의 후손인 하만이 유대인들을 죽이려고 소동을 폈던 것입니다. 그 이유가 모르드개가 자신에게 절하지 않았다는 것을 핑계로 유대인들을 죽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자신이 영광을 받아야 하는데 총리에게 절하지 않은 것을 가지고 소란을 피워 아하수에로 왕을 이용하여 유대인들을 죽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런 소란을 피운 대가가 자신이 나무에 달리게 된 것입니다. 사울이 죽여야 했던 아각 왕을 죽이지 않으니 다시 하나님의 백성들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모르드개는 이것을 알았습니다.
‘열 아들을 죽였으나’ (הרג하라그 2026) 죽이다, 도륙하다, 쳐 죽이다, 라는 뜻입니다. 모르드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던 사람입니다. 자신의 조상인 사울이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여 아말렉 민족을 완전히 도륙하지 못한 것에 대한 보복이라는 것을 깨닫고 하만의 열 아들과 후손들을 모두 죽여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마음입니다. 제사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모든 죄악의 씨를 진멸해 버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래서 모르드개는 하만의 후손들을 모두 쳐 죽이도록 명령을 내리고 씨도 남기지 말라고 했던 것입니다.
인간의 관점에서는 정말 야속한 일입니다. 모르드개는 정이 없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모르드개를 기뻐했고 좋아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도 남김없이 죽였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완료 시제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위해 어떠한 일을 하고 있습니까? 철저하게 순종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악한 죄악의 뿌리를 완전히 내 마음속에서 뽑아내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명령대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가 모르드개의 신앙을 보면서 먼저 주님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손을 대지’ (שלח샬라흐 7971) 대다, 돌이키다, 버려두다, 라는 뜻입니다. 모르드개는 하만을 죽이고 나서 그들의 재산에는 절대 손을 대지 못하도록 명령을 내리게 됩니다. 총리의 직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재산을 축적해 놓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르드개는 사울이 욕심이 있어서 아말렉 민족들의 재산을 챙긴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르드개는 재산에는 욕심을 버리고 하만의 재산에서 생각을 돌이킨 것입니다. 하만의 재산을 버려두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한 것입니다. 모르드개와 유대인들이 하만의 재산에는 손 하나도 대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완료 시제를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사울과 모르드개가 우리에게 주는 영적 교훈은 무엇입니까?
사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지키지 않자 이것이 후손들에게 고통이 찾아왔다는 것을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한 것이 나에게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내 후손들에게까지 고통을 주고 어려움을 주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최선을 다하여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아말렉 민족을 살려주고 아각 왕을 살려주었더니 그의 후손인 아각 사람 하만이 500년이 지난 후에 사울의 후손인 모르드개와 유대인들을 죽이려고 하는 환난에 몰아넣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악의 씨를 뽑아버리려고 사울에게 명령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은 자신의 욕심에 눈이 멀어 하나님의 명령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럼 내가 현재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제대로 지키지 않아서 자녀에게 고통을 주고 있는 것이 없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내 안에 있는 죄악의 뿌리 때문에 후손들에게 죄악의 씨를 뿌리고 있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서원을 해 놓고 지키지 않는 것도 결국 후손들에게 그 몫이 돌아가게 된다는 것을 이 말씀을 통해서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나 혼자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결국 자녀들을 고통 가운데 넣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반면에 모르드개의 신앙은 어떤 신앙입니까? 하나님만을 생각하고 주님만을 바라보는 영적 신앙입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만 섬기는 신앙입니다. 모르드개는 사울 왕이 지키지 못했던 것들을 모두 기억하여 지키는 인물입니다. 자신의 세상적 유익에 따라 신앙생활을 하는 자가 아닙니다. 율법에 빠져 사는 신앙이 아니라 복음의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 것들을 반드시 통과하실 때까지 시험이 연결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울이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자 후손인 모르드개가 이 시험을 통과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울이 아말렉의 시험을 통과 못하자 사울의 후손인 모르드개가 아각의 후손인 하만과 다시 시험을 치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시험에서 모르드개는 철저하게 주님만을 섬기는 신앙으로 통과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가 이 시간 영적으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현재 많은 하만과 같은 존재들과 영적 전투를 하고 있습니까? 이것이 믿음의 조상들이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여 하나님은 나를 통해 신앙으로 이기게 하시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이 시험만 통과하면 엄청난 축복이 있습니다. 모르드개는 한 나라의 총리로 발탁이 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은 생명이며 축복을 주시기 위하여 주시는 시험입니다. 모르드개에게 온 시험은 사울이 통과하지 못한 시험을 통과하여 마침내 축복을 주시기 위해서 주신 시험입니다. 이런 시험이 저와 여러분들에게 있다면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적 신앙으로 이겨나가십시오. 반드시 하나님의 축복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반면에 내가 하나님 앞에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여 자녀들에게 똑같은 시험을 주고 있지는 않는지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사울이 시험에 통과만 했다면 모르드개에게 이런 시험은 오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처럼 내가 하나님의 시험을 말씀으로 통과하지 못하는 신앙을 가지고 교회에 나온다면 이 시험이 내 자녀에게 대물림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죄악의 불씨가 남아있으면 사탄은 그 불씨를 가지고 내 자녀들을 괴롭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죄악의 불씨를 모두 제거하셔서 자녀들에게 시험을 대물림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 때문에 자녀들이 고민하는 것을 보고 있는 것이 더 힘든 일입니다. 이제 저와 여러분들은 모르드개처럼 복음의 신앙을 가지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섬기는 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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