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 입다가 암몬 자손과 싸워서 승리하고 돌아왔을 때 에브라임 지파가 입다에게 올라와서 시비를 걸고 있습니다. 왜 자신들은 부르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입다는 자신을 도와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에브라임 사람은 듣는 둥 마는 둥 했습니다. 그리고 승리하고 나니까 그대서 올라와서 공을 가로채려고 합니다. 이런 것을 잘못된 것입니다.
자존심의 허구(삿 12:1-4)
자존심 하면 “자기의 품위를 높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면 민족의 자존심을 높이고 신앙의 절개를 지킨 모르드개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과 숙적이었던 아말렉 사람 하만은 페르시아 제국에서 왕의 총애를 받아 국무총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궁정 안에 있는 왕의 모든 신복들은 왕의 명령에 따라 하만이 지날 때마다 정중하게 무릎을 꿇고 절하였습니다.
그러나 왕궁 문지기로 있던 모르드개는 다른 신하들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유다 사람임을 밝히면서 하만에게 절하는 것을 끝까지 거부했습니다. 이에 하만은 모르드개가 자기에게 무릎을 꿇지도 않고 절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알고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올랐습니다. 더구나 모르드개가 유다 사람이라는 말을 듣고서 그는 모르드개뿐만 아니라 페르시아 제국에 있는 모든 유다 사람을 전멸시키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음모를 꾸몄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우심과 왕후 에스더의 결단과 모르드개의 선행으로 인해 오히려 그 자신의 무덤을 파는 결과를 빚었던 사건이 에스더 3:1-6절까지 나와 있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백성의 자존심이 있는가 하면 종종 사람들이 자존심이 있어야 한다고 말을 하는 자아(自我)를 찾고자 노력하며 주체성을 확립하고자 힘을 기울입니다. 또한 세상 사람들은 이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새로운 피조물이 된 그리스도인들은 그 사고방식이 변하여 완전히 반대의 입장을 취합니다. 우리는 본문 말씀을 통해서 자존심의 부패성과 자아의 타락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제 이러한 자존심의 허구와 그로 인한 불행한 결과에 대해서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에브라임 지파는 잘못된 자존심 때문에 이웃의 기쁨에 동참하지 않았습니다.
사사 입다가 암몬 자손과의 전쟁에서 대거 승리를 하고 돌아왔을 때 모든 이스라엘 사람이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자존심이 강한 에브라임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전쟁에 동참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기쁨과 즐거움을 함께 나누는 대신 ‘네가 암몬 자손과 싸우러 갈 때에 어찌하여 우리를 불러 너와 함께 가게 하지 아니하였느냐’라고 불평불만을 늘어놓았던 것입니다. 잘못된 자존심이 강한 자들은 이와 같이 형제의 승리를 기뻐하기는 커녕 오히려 형제의 성공을 시기합니다. 에브라임 지파는 이스라엘 지파 중 가장 큰 지파였는데 그들은 이것 때문에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혼혈아의 천한 신분으로 길르앗 사람의 머리가 된 입다가 자기들과 한 마디의 상의도 없이 암몬 자손과 싸웠다는 거도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지만 자기들이 하지 못한 큰 일을 한낱 보잘것없는 첩의 자식이 이루었다는 사실이 그들의 자존심을 건드렸던 것입니다.
사실 입다는 그들이 같이 싸워 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암몬 자손과 크게 다툴 때에 내가 너희를 부르되 너희가 나를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지 아니한 고로’(2절)라는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그 요청의 시기는 입다가 한참 전쟁을 하는 중이었습니다. 아마도 입다는 전쟁의 출전 전에는 그들을 부르지 아니하였으나 싸움에서 위급할 때 그들에게 구원을 요청했던 것 같습니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보아 에브라임 사람들은 전쟁하기 전에 그들을 부르지 않았다는 것으로 트집을 잡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정말 유치한 자존심의 소치입니다. 싸움 중에 구원의 요청을 거절한 것이 두려운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감추고 다 싸워 이긴 후에 이러한 트집을 잡는 것은 상대방을 멸시하고 그 공을 가로채려는 파렴치한 행위입니다. 또한 그들은 자기들을 무시하였다는 대가로 ‘우리가 반드시 불로 너와 네 집을 사르리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사람의 어리석은 자존심은 기쁨을 함께 하기는커녕 시기하여 죽이고자 하는 악한 마음을 갖게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 에브라임 지파는 자존심 때문에 이웃의 고난에 동참하지 않았습니다.
자존심이 강한 자들은 이기주의 자들입니다. 입다가 전쟁의 싸움 중 위협을 느낄 때 에브라임 사람의 도움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습니다. 그때에는 그들이 전쟁에 참가하지 않았다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자들은 가난한 자나 고통 중에 있는 자들에게 자존심만 내세우면서 그들의 고난을 돌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권세로 그들을 착취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3. 에브라임 지파는 상대방의 약점만을 바라보았습니다.
‘너희 길르앗 사람은 본래 에브라임에서 도망한 자로서 에브라임과 므낫세 중에 있다’(4절)라고 한 말은 길르앗 사람이 본래 에브라임과 므낫세 사이에서 쫓겨 다녔던 사실과 ‘도망자’라는 표현은 입다가 형제들의 핍박에 도망한 자라는 의미로서 이러한 언사는 입다의 약점을 감정적으로 표현한 치욕적인 언사였습니다. 이것은 입다와 길르앗 사람들을 심히 격분시켰습니다. 원래 길르앗 자손들은 므낫세 지파이지만 므낫세 지파가 요단 동편과 서편에 분산되어 있기 때문에 므낫세 지파에 소속되었지만 세월의 흐름을 통해서 또한 지파로서의 자리를 굳혀갈 만큼 성장한 지파였는데 그들은 한 지파의 자격이 없을뿐더러 길르앗에서 이스라엘 사사로 입다가 추대된 것에 대한 에브라임의 불평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도망자라는 언사를 사용했습니다. 이러한 말은 전쟁에 참가하지 못한 약점을 지파의 권위로 감추려고 한 자존심의 결과입니다. 이로 인하여 에브라임은 입다와 길르앗 사람들의 공격으로 요단 나루턱에서 사만 이천 명이나 죽임을 당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삶입니다. 세상은 자기 자존심을 중요시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서 살아가는 우리는 주님의 말씀대로 자신을 부인하며 살아야 합니다.(마 16:24)
사도 바울도 갈 2:20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자기 자아와 자존심을 주장하는 자는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할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일군으로는 쓰임 받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또 하나의 본문의 사건은 평화로운 시기에도 하나님은 사사를 일으키셨는데 환난의 시기에 사사의 사명은 그들을 구하는 것이라면 평화의 시기에 사사의 사명은 이스라엘이 또다시 타락하지 않도록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육하는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사사로서 세움을 받고 평화로운 시기에 그들의 사명을 망각하며 오히려 자기의 쾌락만 추구한다면 불충한 사사일 것입니다. 입다 후 세움을 받은 입산은 평화로운 시대에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의 할 일은 평화로운 시기에 이스라엘을 재 정비하고 그들이 타락하지 않도록 잘 교육하는 것일진대 그의 풍요함을 누리며 이스라엘 가운데 죄악이 스며들지 않도록 감독하는 일을 게을리하게 된 것입니다. 평화로울 때 사사의 사명이 중요한 것은 환난의 때보다 풍요로울 때 더욱 유혹이 많기 때문이며 가난한 자보다 부요한 자가 더욱 교만해져서 하나님을 떠나기 쉽기 때문인 것입니다. 오늘날은 물질의 풍요요 말씀의 풍요로운 때입니다. 이러한 때 더욱 근신하여 깨어 있어 하나님께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민수기 23장 주일 성경말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민 23:2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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