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 원어 설교

[모리아 산 설교문] “모리아에 바쳐진 후 이삭의 삶의 변화”(창22:2)

체데크 2020. 7. 9.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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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 오늘도 복음 빵집에 오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오늘은 모리아 산의 설교문에서 이삭을 바치고 난 후에 이삭의 삶의 변화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모리아에 바쳐진 후 이삭의 삶의 변화”(창22:2)

 

명제 : 이삭은 모리아에서 사생애의 삶에서 공생애의 삶으로 변화를 받게 된다.

목적 : 구원받은 자는 모리아와 같은 십자가에서 공생애의 삶이 시작된다.

 

이삭은 아브라함이 100세가 되어 얻은 아들입니다. 아브람의 이름일 때는 자신이 주체가 되어 낳은 이스마엘이 있습니다. 이삭은 자신이 주체가 되지 않고 하나님이 주체가 되어 주신 약속의 아들입니다. 이런 아들이 얼마나 소중하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시험하기 위해서 노년에 얻은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 가서 번제로 드리라고 말씀합니다. 아브라함이 이삭보다 여호와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지를 시험하려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주님보다 재물을 더 사랑할 수 있습니다. 주님보다 권력과 권세를 더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나에게 아브라함처럼 가장 사랑하는 것을 바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에 나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삭을 모리아 산에 번제로 드리라고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그 당시에 인신 제사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를 보여주려 하신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리아 산과 같은 골고다의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렸습니다. 이삭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으로서 모리아 산에서 바쳐짐으로 그리스도의 죽음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모리아 산에 바침으로 자신의 일을 모두 마쳤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신약의 요셉이 예수 그리스도를 사생애 기간 동안 보호하고 키워서 하나님의 사역인 공생애 사역을 할 수 있도록 준비했듯이 아브라함도 이삭을 보호하고 있다가 모리아 산에 바침으로 공생애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준비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삭은 모리아 산에서 육적인 아버지와의 사생애의 삶을 끊고 하나님 아버지와 관계를 맺음으로 공생애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나도 모리아와 같은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과거의 사생애 기간을 끊고 구원의 확신을 얻고 공생애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육적인 아버지인 아브라함과 같은 사생애 기간의 삶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를 만나 구원을 얻은 공생의 삶을 시작해야 합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모리아와 같은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구원을 얻고 영원히 주님을 모시고 사는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창22: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말씀합니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가르쳐 준 한 산 거기서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의 아들을 주시고 이제는 그 아들을 번제로 드리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어떤 이유일까요? 독자 이삭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모리아의 한 산과 같은 갈보리 골고다에서 번제로 드렸습니다. 이삭은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라면 예수 그리스도는 그대로 신약에서 성취하셨습니다.

 

우리는 이삭을 통해서 두 가지 관점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발견해 볼 수 있고 다른 하나는 성도의 삶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내가 구원받고 나면 이삭처럼 사생애의 삶에서 공생애의 삶으로 바뀌어야 할 것을 말씀합니다.

 

‘모리아’ (מוריה모리야 4179) 모리아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ראה라아 7200) 보다라는 뜻과 (יה야흐 3050) 여호와라는 뜻의 합성어입니다. 모리아는 여호와께 보인 땅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모리아 산은 하나님이 선택한 곳입니다. 이곳에 솔로몬은 성전을 세우게 됩니다. 이삭이 드려진 장소에 성전이 세워진다는 것은 장차 예수 그리스도가 이곳에 세워질 것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모리아 산에 이삭이 바쳐진다는 것은 이삭은 아브라함의 육적 아버지와의 관계는 끊고 영적 아버지인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새롭게 형성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창22:5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아브라함은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종들을 데리고 모리아 산 입구에 왔습니다. 아브라함은 종들에게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고 말합니다. 내가 이삭과 함께 하나님이 지시한 곳에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겠다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이 죽어도 다시 살아날 것을 믿고 있습니다.

 

히11:19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칠 때에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했다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부활의 신앙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이유를 설명드리겠습니다.

 

‘돌아오리라’ (שוב슈브 7725 동사, 칼, 미완료, 공성, 1인칭, 복수. 연장형) 되돌아오다, 회복하다라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은 종들에게 이삭과 함께 모리아 산에 가서 예배하고 같이 돌아오겠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가 공성, 1인칭, 복수를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예배를 마치고 나서 나는 반드시 너희들에게 이삭과 함께 돌아오겠다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미 이삭이 죽어도 하나님이 살리겠다는 것을 믿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부활신앙입니다.

 

우리도 주님이 이 땅에 오실 때에 부활시키게 됩니다. 아브라함처럼 부활의 신앙을 가지고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신앙이었다면 하나님은 왜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번제로 바치라고 했을까요? 이삭을 여호와 하나님의 독생자로 삼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는 이삭이 아브라함을 아버지로 섬겼다면 이제는 영적 아버지인 하나님을 섬기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거듭나지 못하고 세상적인 사생애의 삶만 살고 있습니까? 모리아 산에서 이삭이 바쳐짐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거듭남으로 공생애의 삶을 살고 있습니까? 아브라함은 이삭을 모리아 산에다 여호와 하나님께 바치고 자신만 내려오게 됩니다. 분명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과 함께 같이 내려온다고 종들에게 말했는데 내려올 때는 아브라함만 내려오게 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제 아브라함은 이삭에게 할 일을 다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길 수 있도록 도와주었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할 일은 모두 끝났습니다.

 

창22:19 이에 아브라함이 그의 종들에게로 돌아가서 함께 떠나 브엘세바에 이르러 거기 거주하였더라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의하여 이삭을 모리아 산에다 바치고 여호와께 큰 복을 받을 것이라는 약속을 받고 내려오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돌아가서 함께 떠나 브엘세바에 이르러 거기 거주하게 됩니다.

 

‘돌아가서’ (שוב슈브 7725 와우접속사. 동사, 칼, 미완료, 남성, 3인칭, 단수) 되돌아오다, 회복하다라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은 모리아 산에서 바로 즉시 내려와 종들에게 도착했습니다. 와우접속사를 쓴 것은 아브라함이 즉시 내려와 종들을 만났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올라가서 같이 내려오겠다고 할 때는 복수를 사용했지만 종들에게 내려왔을 때는 단수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삭은 모리아 산에 남겨두고 아브라함만 내려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아들 이삭에게 여호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육적인 아버지로서는 모든 것이 끝났습니다. 이제부터 이삭은 영적인 분가를 해야 합니다. 모리아 산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아버지를 만나 평생 하나님 아버지를 섬기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은 오늘 나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요?

 

갈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삭이 모리아 산에서 죽고 다시 태어난 것처럼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어야 합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야 합니다. 이삭은 모리아 산을 기점으로 인생이 바뀌게 됩니다. 사생애의 삶에서 공생애의 삶으로 바뀝니다. 그럼 나는 언제 인생이 바뀝니까? 내가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을 때에 바뀌게 됩니다. 육적인 아버지를 섬기고 살았던 이삭의 삶은 사생애의 삶이었다면 모리아 산에서 죽고 난 후에 여호와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는 삶은 공생애의 삶이 됩니다.

 

이 시간 나도 주님과 함께 죽고 하늘로부터 거듭나서 하나님 아버지를 영원히 섬기면서 살아가는 공생애의 삶이 시작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교회만 다닌다고 해서 공생애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야 만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길 수 있습니다. 현재 저와 여러분의 모리아 산은 어디입니까? 언제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었습니까? 내가 하나님께 온전히 이삭처럼 바쳐진 그 날이 내가 거듭난 날이 됩니다. 모리아 산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거듭났던 이삭이 어디에 거주하게 됩니까?

 

창24:62 그 때에 이삭이 브엘라해로이에서 왔으니 그가 네게브 지역에 거주하였음이라

 

이삭은 브엘라해로이에서 왔는데 그가 네게브 지역에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있을 때 어머니인 사라가 죽고 난 후에 리브가를 맞이하여 아브라함으로부터 완전한 분가를 이루게 됩니다. 구원받은 자는 세상으로부터 분가하여 자신의 살림을 차려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는 자는 신랑 되신 주님과 분가하여 신방(新房)을 차려야 합니다. 영원히 주님과 함께 살면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는 공생애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브엘라해로이’ (באר להי ראי베에르라하이로이 883) 브엘라해로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באר베에르 875) 우물과 (חי하이 2416) 살아있는과 (ראה로에 7203) 선견자에서 유래되었습니다. 그 뜻은 ‘나를 감찰하시는 살아계신 자의 우물’을 의미합니다. 이삭은 모리아 산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만남으로 인생이 달라지게 됩니다. 공생애의 삶을 살아가는 자들은 자기 자신을 감찰하시는 살아계신 자의 우물 옆에 있어야 합니다. 광야에서 우물은 정말 중요합니다. 광야는 물이 부족한 곳이기 때문에 물이 없으면 죽습니다. 이 세상도 광야와 같은 곳입니다. 이런 곳에서 우물은 생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는 공생애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런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항상 나의 영혼과 육신을 감찰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곁에서 생수의 물을 마셔야 합니다. 죽은 물을 먹어서는 안 됩니다. 이삭은 리브가를 만날 때에 브엘라해로이에서 만났습니다. 완전한 분가를 이루고 육적 아버지인 아브라함이 죽고 난 후에는 어디에 거주할까요?

 

창25:11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하나님이 그의 아들 이삭에게 복을 주셨고 이삭은 브엘라해로이 근처에 거주하였더라

 

이삭은 육적인 아버지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브엘라해로이 근처에 거주하게 됩니다. 이제는 육적 아버지와 영원히 끊어졌고 영적 아버지인 하나님과 영원히 거주하면서 사는데 브엘라해로이 근처에서 살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 신앙생활을 해야 할까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자는 살아계신 자의 우물을 떠나서는 안 됩니다. 영혼의 생수가 넘치는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안 되고 복음의 생수가 흘러나오는 교회를 떠나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무엇을 깨달아야 할까요? 모리아 산을 기점으로 이삭의 삶이 변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영적 변화가 일어나야 할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내가 교회만 열심히 나왔지 아직도 십자가 사건을 경험하지 못하고 율법의 늪에 빠져 있다면 사생애의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구원도 받지 못하고 세상의 삶에 빠져 육체만 기뻐하는 기복적 신앙만 하고 있는 삶입니다.

 

하지만 오늘 이 시간 내가 모리아 산에서 이삭이 바쳐진 것처럼 십자가에서 내가 죽고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나면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면서 사는 공생애의 삶이 시작됩니다. 공생애의 삶을 시작했다면 브엘라해로이에 영원히 거주해야 합니다. 나를 항상 감찰하시고 살아계셔서 복음의 생수를 날마다 내려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야 합니다. 아직도 영적 분가를 하지 못하고 세상에 빠져 살고 있다면 오늘 말씀을 통해서 구원받고 거듭나서 영적 분가를 이루어야 합니다.

 

율법의 아버지 밑에서 종노릇 하면서 고통당하지 말고 복음의 아버지 밑에서 자유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항상 나를 감찰하시고 살아계셔서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공급해 주십니다. 이제 저와 여러분들의 삶은 공생애의 삶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주님이 책임지시고 주님이 앞길을 인도해 나가게 됩니다. 이제부터 영적인 하나님 아버지를 섬기면서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브라함 설교] “아브람과 아브라함의 차이점”(창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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