샬롬! 오늘도 복음 빵집에 오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오늘은 사사 드보라를 통해서 보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사사 드보라는 복음을 제공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삿4:1-5)
♣명제: 드보라는 꿀 송이와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제공한 사람이다.
♣목적: 주님도 드보라와 같이 십자가 복음을 나에게 제공해 주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본성이 악한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뿐만 아니라 우리들도 본성이 죄인의 모습이기 때문에 죄를 짓고 있습니다. 사사가 있을 때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신앙생활을 하다가 사사가 죽고 나면 여호와 앞에서 악행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영적 지도자가 사라지면 하나님을 떠나게 됩니다. 사사가 죽었다는 것은 복음을 전파해줄 지도자가 죽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 시대도 십자가 복음이 사라지면 성도들이 타락합니다. 복음의 말씀을 전해야 하는데 율법의 의를 전하니 자신의 소견대로 신앙생활을 합니다. 인간에게 하루라도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자동적으로 자신의 소견대로 행동을 하게 됩니다. 인간은 원죄의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가는 센서가 망가졌습니다. 죄를 짓는 자유의지는 있지만 의롭게 살면서 하나님 앞에 나가는 자유의지는 망가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강압적으로 구원받은 백성을 선택하셨습니다. 자신 스스로 하나님 앞에 나올 인간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 앞에 나가는 센서가 망가져 사사가 죽고 나면 바로 죄를 짓는 자유의지를 발동하여 여호와의 눈앞에서 악행을 저지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셨는데도 금방 잊어버립니다. 죄악의 고통에서 살면서 하나님께 부르짖었던 시간을 잊고 평안함이 찾아오면 다시 우상을 섬겼습니다.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원죄의 고통에서 살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의 은혜를 받고 평안함을 누리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가면서 주님의 품 안이 싫다고 세상으로 돌아가지는 않았습니까? 하나님을 동경(憧憬)하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우상을 동경(憧憬)하면서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온전히 주님만을 바라보면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사가 죽자 자신의 소견을 따라 인생을 살았지만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를 따라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내가 타락하지 않기 위해서는 매일매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들어야 합니다. 복음을 듣지 않으면 영육으로 타락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항상 주님의 십자가 복음을 가까이하는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럼 오늘 사사기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겠습니다.
삿4:1 에훗이 죽으니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매
하나님은 에훗이 죽으니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에훗 이후의 사사는 삼갈입니다. 삼갈은 소모는 막대기로 블레셋 사람 600명을 죽여서 이스라엘을 구원한 사사입니다. 그렇다면 에훗이 죽고 난 후가 아니라 삼갈이 죽고 난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 앞에서 악을 행하였다고 말씀해야 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우리는 사사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스라엘 땅에 그 당시에 한 명의 사사만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동시대에 많은 사사들을 일으켜서 이스라엘 전체를 통치했습니다. 여기에서 삼갈은 드보라와 같은 동시대의 사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에훗이 죽고 난 후에 하나님은 여 사사 드보라를 세워 이스라엘 백성들을 재판했습니다. 삼갈은 이스라엘의 다른 지역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블레셋을 소몰이 막대기로 600명을 죽이고 통치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에훗이 죽으니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을 저질렀다고 말씀합니다. 이 의미가 무엇일까요? ‘에훗’은 찬양하다, 감사하다, 라는 뜻의 사사입니다. 에훗을 통해서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80년 동안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리는 신앙생활을 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에훗이 죽고 난 후에는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도 끝났다는 것을 말합니다. 성도들의 입술에서 감사와 찬송이 사라지면 죄를 짓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라지는 순간 원망과 불평이 나오게 됩니다. 내 안에는 항상 진리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에훗이 죽고 나니 바로 타락하여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악행을 저지르게 됩니다. 죄가 들어오는 것은 순간입니다. 성도들은 항상 영적으로 깨어 복음의 말씀을 듣고 주님과 함께 해야 합니다.
삿4:2 여호와께서 하솔에서 통치하는 가나안 왕 야빈의 손에 그들을 팔았으니 그의 군대 장관은 하로셋학고임에 거주하는 시스라요
에훗이 죽고 난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악행을 하니 여호와께서 하솔에서 통치하는 가나안 왕 야빈의 손에 그들을 팔았습니다. 야빈의 군대 장관은 하로셋학고임에 거주하는 시스라입니다.
‘야빈’ יבין(야빈 2985) 야빈이며, בין(빈 995) 살피다, 분별하다, 가르치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가나안 왕 야빈은 ‘하나님이 감찰하신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야빈에게 팔아버린 이유가 무엇입니까? 현재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이 처한 환경과 상황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자신들의 처지를 분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지켜주시고 먹을 것과, 입을 것과, 쓸 것을 모두 주셨는데도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여호와 하나님을 배반했습니다. 하나님은 야빈 왕을 통해서 고통 중에 자신들의 영적 상황과 육적 환경을 분별하여 깨닫기를 원했습니다. 가나안 왕인 야빈을 통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교육시키게 됩니다.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넘침에도 불구하고 감사할 줄 모르면서 교회에 나오면 술, 담배도 끊어야 하고 나이트클럽도 다니지 말아야 한다는 압박에 교회를 떠나 가톨릭으로 가고 무교로 돌아가는 이런 행위를 일삼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람은 고통을 당할 때에 깨닫게 됩니다. 옛말에도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항상 넘치니 감사한 줄을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손을 떼시면 그때부터 환난과 고통이 밀려와 괴로움을 당하게 됩니다. 세상의 야빈 왕과 같은 사람들에게 팔려서 고통을 당함으로 주님의 은혜가 얼마나 컸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시스라’ סיסרא(시세라 5516) 시스라이며, ‘전투 정렬’이라는 의미입니다. 야빈 왕의 부하인 군대 장관 시스라는 전투에 능한 장군이라는 것을 이름 속에서 알 수 있습니다. 전쟁에서 일사불란하게 부하들을 통솔하고 전투에서 승리하는 장군임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시스라의 수하에 팔아버렸습니다. 전투에 능한 장군 밑에서 괴롭힘을 당하게 됩니다. 성도들도 약삭빠르게 자신들의 유익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버리고 세상으로 가지만 그곳에는 시스라와 같은 더 능력 있는 자들이 포진하고 있습니다. 결국 시스라와 같은 자들 밑에서 고통을 당하면서 생활을 해야 합니다. 내가 주님을 떠나 세상의 직장으로, 학교로, 사업장으로 가지만 그곳에는 나보다 더 능력 있고 권세 있는 시스라와 같은 자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야빈 왕과 시스라와 같은 자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방법입니다.
삿4:3 야빈 왕은 철 병거 구백 대가 있어 이십 년 동안 이스라엘 자손을 심히 학대했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라
가나안 왕 야빈은 철 병거 900대가 있었습니다. 그 당시 철 병거가 있다는 것은 문화적으로 발전된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철 병거는 전쟁에 유리하게 작용합니다. 남한이 북한에 의하여 6.25 사변을 맞게 되면서 속수무책(束手無策)으로 당하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북한은 소련제 탱크가 있었습니다. 탱크를 가지고 밀고 내려오니 남한은 막을 도리가 없었습니다. 현재 이스라엘 백성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탱크와 같은 철 병거를 가지고 압박하니 당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20년 동안 가나안 왕 야빈 밑에서 학대를 받게 됩니다. 이렇게 고통을 당하니 여호와께 부르짖기 시작합니다.
2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을 학대했는데 우리가 20이라는 숫자를 통해서 영적 의미를 파악해 보겠습니다. 숫자 20은 기대, 기다림, 구속, 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가나안 왕 야빈에게 파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잊어버리고 악행을 저질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십자가 복음으로 돌아오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20년을 기다렸습니다. 그들이 진정으로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자신의 백성들에게 고통을 주면서까지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버리고 죄를 짓게 되면 하나님이 야빈 왕과 같은 자들에게 팔아버립니다. 하나님이 팔아버리면 내가 벗어나려고 해도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때가 되지 않으면 절대 벗어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내 힘으로 야빈과 시스라를 이길 수도 없습니다. 이런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부르짖어 회개하는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학대했으므로’ לחץ(라하츠 3905 동사, 칼, 완료, 남성, 3인칭, 단수) 압착하다, 압박하다, 괴롭히다, 학대하다, 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포도주를 내기 위해서 포도를 즙 틀에 넣고 짓밟아 압착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야빈과 시스라에 의해서 엄청난 핍박과 압박을 받고 있었음을 시사해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야빈에게 학대를 받았는데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면 빠져나올 수 없는 압박과 괴롭힘을 당했습니다. 그 이유가 칼, 단순 능동형과 완료 시제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완료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완전한 고통에 들어갔다는 의미입니다. 자신들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절대 야빈과 시스라의 손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들도 내가 잘났다고 세상의 권세와 권력이 있다고 잘난 체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거부하고 떠날 때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자신이 능력이 있어서 된 것처럼 착각하여 주님을 배신하고 죄를 지음으로 세상으로 돌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자에게는 야빈과 시스라와 같은 자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내 힘으로 이들과 맞서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절대 이길 수 없습니다. 이들은 더 큰 권세를 가지고 나를 이기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면 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연 것을 누가 닫습니까? 하나님이 닫은 것을 누가 열겠습니까? 오직 하나님이 열고 닫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통을 당하여 부르짖을 때에 하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여 선지자 드보라를 세웠습니다.
삿4:4 그 때에 랍비돗의 아내 여선지자 드보라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야빈 왕에게 20년 동안 고통을 당하면서 회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니면 자신들은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랍비돗의 아내 여 선지자 드보라를 사사로 세워 야빈 왕과 시스라의 손에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럼 랍비돗의 아내 드보라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적인 의미를 깨달아보겠습니다.
‘랍비돗’ לפידות(랍피도트 3941) 랍비돗, 이라는 뜻이며 ‘횃불’을 의미합니다. 랍비돗에 관하여 성경은 침묵합니다. 하지만 드보라의 남편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성경이 이런 이름을 기록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축자적 영감이기 때문에 이유가 있습니다. 랍비돗의 단어에 축자 된 영감이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랍비돗의 이름은 횃불입니다. 현재 이스라엘 백성들은 야빈 왕의 수하에서 20년 동안 어둠과 같은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영적으로 흑암 가운데 살면서 빛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랍비돗의 아내인 드보라를 통해서 영적으로 빛을 선포해 주는 인물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랍비돗은 남자인데 자신의 아내인 드보라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다는 것도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이름에서 횃불이 있다는 것은 자신은 죽고 하나님의 사역자인 드보라를 높여주었다는 것을 증명해 줍니다. 보통 남자들은 자신의 아내가 더 훌륭하고 뛰어나면 싫어하는 남자들이 있습니다. 자격지심을 가지고 아내를 끌어내리려고 합니다. 여자가 교회에서 사역을 하는데 목사이고 남편은 장로인 경우도 많습니다. 이럴 때에 목사로 인정하지 않고 한 명의 여자인 아내로 인정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랍비돗은 그렇지 않고 자신의 아내를 하나님의 사역자로 인정하여 하나님의 뜻을 잘 선포하는 아내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드보라’ דבורה(데보라 1683) 드보라이며, 이 단어는 דבורה(데보라 1682) 꿀벌, 이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이 단어는 דבר(다바르 1696) 말씀하다, 강론하다, 공포하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드보라를 종합해 보면 꿀 송이와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여 강론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치리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현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꿀 송이와 같은 복음은 사라졌습니다. 가나안 왕 야빈에게 속박을 받고 있는데 무슨 꿀 송이를 먹겠습니까? 하나님은 드보라를 사사로 세워 20년 동안 끊어졌던 복음을 선포하게 하는 자로 세웠습니다.
드보라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꿀과 같은 달콤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는 그림자입니다. 우리들도 가나안 왕 야빈과 시스라와 같은 사탄에게 압박을 받고 고통을 당했습니다. 세상에서 괴롭힘을 당할 때에 십자가 복음은 먹어보지도 못했습니다. 노예들이 먹는 음식이 무엇입니까? 동물들도 먹지 않으려고 하는 음식들을 먹으면서 육적으로 고통을 당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럴 때 하나님은 드보라를 세워 꿀과 같은 복음을 허락해 주십니다.
사탄의 압박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영적으로 복음을 먹지 못해서 영양실조에 걸린 영혼에게 십자가 복음을 선포하여 회복시켜 주십니다. 이 시간 우리들은 드보라와 같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꿀과 같은 달콤한 십자가 복음을 먹고 있음에 감사해야 합니다. 사탄을 짓밟으시고 영원한 구원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합니다. 내 영혼이 영양실조에 걸려서 죽어갈 때 주님은 나에게 찾아오셔서 꿀과 같은 복음을 주셔서 건강하게 해 주셨습니다. 이 시간에도 나에게 꿀과 같은 원어 복음을 선포하고 있음을 깨닫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삿4:5 그는 에브라임 산지 라마와 벧엘 사이 드보라의 종려나무 아래에 거주하였고 이스라엘 자손은 그에게 나아가 재판을 받더라
드보라는 에브라임 산지 라마와 벧엘 사이 드보라의 종려나무 아래에 거주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드보라에게 나와 재판을 받았습니다. 드보라가 라마와 벧엘 사이에 있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라마’ רמה(라마 7414) 라마이며, 높은 곳을 의미합니다. ‘벧엘’ בית אל(베트엘 1008) 하나님의 집을 의미합니다. 드보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입니다. 드보라가 하나님의 집에서 가장 높으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치했음을 가르쳐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도 교회의 주인으로서 가장 높으신 분이며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말씀을 선포하셨던 분입니다. 교회는 드보라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인 꿀을 선포해야 합니다. 드보라가 종려나무 아래에 거주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종려나무’ תמר(토메르 8560) 종려나무, 기둥, 이라는 뜻입니다. 종려나무의 특징은 똑바로 서있는 나무입니다. 많은 열매를 맺게 되는데 이 열매가 대추야자입니다. 유대인들은 종려나무의 열매를 꿀이라고 표현합니다. 말린 대추야자는 당도가 높아서 꿀과 같이 달콤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종려나무는 많은 열매를 맺기 때문에 풍요와 번성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풍요도 없었고 번성도 없었습니다. 가나안 왕 야빈에게 압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앞으로는 달라집니다. 하나님이 드보라를 통해서 가나안 왕 야빈과 군대장관인 시스라를 물리쳐 주시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는 대추야자와 같은 꿀을 먹지 못했습니다. 압제받으면서 불이익을 많이 받았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환경을 열어주셔서 꿀과 같은 생활로 회복됩니다.
우리들도 사탄의 압제 하에 고통을 당하고 있었지만 이제는 대추야자와 같은 꿀 송이를 먹게 됩니다. 환경이 열리고 상황이 풀어지게 됩니다. 육적인 고통의 압박과 물질의 고통과 질병의 고통의 괴로움에서 하나님은 회복시켜 주시고 영적으로는 대추야자와 같은 십자가 복음을 먹지 못한 자에게 복음을 주셔서 강건하게 해 주십니다. 지금 내가 야빈과 시스라와 같은 환경에 있다면 하나님은 드보라와 같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나에게 보내주셔서 고통의 환경에서 회복시켜 주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사탄의 압제와 육적인 압박들이 사라지는 시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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