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 원어 설교

[마태복음 16장 예수님 말씀] 베드로의 신앙고백(마 16:1-28)

체데크 2021. 11. 17.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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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6장에서 베드로의 신앙 고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을 깨닫고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이것을 네게 알게 하신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운다고 하셨습니다. 이 반석은 바로 예수님을 말합니다. 교회의 기초는 예수님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서 베드로에게 천국 열쇠를 준다고 했습니다. 이것으로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린다고 했습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마 16:1-28)

 

1-4,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함

[1]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 . . .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였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신앙 사상이 서로 달랐으나 예수님을 반대하는 데는 연합하였다. 사탄의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불화할지라도 진리를 대적하는 데는 연합하는 것 같다. 그들은 예수님께 와서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보여주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그 요청은 그들의 믿음을 위해 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단지 사람의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기적을 행하지 않으셨다.

믿으려 하는 자는 이미 그가 행하신 기적들을 확인함으로 충분히 믿을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주신 기적들을 확인해 보려 하지 않고 또 다른 하나의 기적을 구하는 것은 확실히 불신앙적이다. 오늘 우리도 성경에 기록된 기적들을 충족하게 여기지 않고 추가적 기적을 구한다면 그것은 믿음의 부족함과 마음의 완고함을 나타낼 것이다.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 . . .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중생치 못한 자들은 세상의 지식과 판단력은 있어도 진리의 지식과 영적 판단력은 없다. 메시아가 오셨다는 증거들은 많았다. 구약 예언들은 성취되고 있었다. 메시아의 베들레헴 탄생, 다윗의 자손으로 오심, 나병과 중풍병, 소경과 벙어리와 앉은뱅이 등 많은 병자들의 치료, 죽은 자를 살리심--이것들은 메시아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알려주는 표들이었다. 메시아는 확실히 오셨다. 그러나 소경된 지도자들은 시대의 표적들을 분별하지 못했다.

[4]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밖에는 . . . .

예수께서는,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시고 그들을 떠나가셨다.

경건한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였으나, 악하고 음란한 세대는 표적을 구하였다. 이런 자들은 참교회에 속하지 않고 교회 밖에 있다. 그러나 주께서 이런 자들의 불신앙과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행하실 표적은 없으셨다. 주님의 기적들은 주로 그를 따르며 그를 믿는 믿음을 가진 자들 가운데서 일어났다.

그러나 한 가지 표적은 있다. 그것은 요나의 표적과 같은 것이다. 요나가 삼일 밤낮을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삼일 간 무덤에 있으실 것이다. 요나의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의 모형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삼일만에 다시 사심은 불신앙적 세상을 위해 주시는 마지막 표적이다. 이 표적 앞에 사람은 가부간 결단을 내려야 한다. 예수님을 믿을 것인가, 아니면 그를 거부할 것인가? 또 다른 표적은 필요치 않다.

5-12,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을 주의하라

[5-10] 제자들이 건너편으로 갈새 떡 가져가기를 잊었더니 . . . .

제자들이 바다 건너편으로 갈 때 떡 가져가기를 잊었다. 예수께서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시자, 그들은 서로 의논하기를 우리가 떡을 가져오지 아니하였도다라고 하였다. 그들은 때때로 주님의 비유적 표현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예수께서는 아시고 말씀하셨다. “믿음이 적은 자들아, 어찌 떡이 없음으로 서로 의논하느냐?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떡 다섯 개로 5천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바구니며 떡 일곱 개로 4천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광주리이던 것을 기억지 못하느냐?”

주께서 제자들과 하신 이 대화는 앞에 기록된 두 차례의 떡 기적을 재확인하는 의미를 가진다. 떡 다섯 개로 5천명을 먹이시고, 떡 일곱 개로 4천명을 먹이신 이 두 차례의 떡 기적들은 지어낸 신화가 아니고 역사적 사건임을 주께서 다시 확증해주신 것이다.

이처럼 성경의 사건들은 이중 삼중적으로 증거되었다. 불신앙자는 그 어떤 증거를 보고 들어도 믿지 않을 것이지만, 믿으려 하는 자는 믿을 만한 증거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믿지 못할 불확실한 어떤 것을 믿으라고 강요하지 않으시고, 믿을 만한 많은 증거들을 성경에 제시해 주시면서 믿으라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권하시는 것이다.

[11-12] 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 오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시기를, “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 오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하셨다. 그제야 제자들은 떡의 누룩이 아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줄을 깨달았다.

바리새인들은 당시에 보수주의자들이었다. 그들에게는 보수 신앙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사람의 전적 부패성과 무능력을 바로 알지 못했고 자기 의()를 의지하고 자랑했다. 그들은 영적으로 교만한 자들이었다. 그들은 종교적 지식도 많고 상당한 열심도 있었으나 종교의 외적 규례들을 중시하고 더 중요한 내면성을 무시했다. 그러나 실상 하나님 앞에 중요한 것은 외적 형식보다 마음이다. 마음의 할례는 경건의 시작이다. 그러나 그들은 형식주의에 떨어져 있었다.

다른 한편, 사두개인들은 그 당시의 자유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모세오경을 존중했으나 다른 성경들은 무시했다. 그들은 구약성경의 많은 부분을 믿지 않았다. 그들은 천사도 영도 몸의 부활도 믿지 않았다. 그들은 인간의 이성과 경험을 중시하는 인본주의자들이었고, 또 세상의 권력과 금력과 결탁한 세속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현실에 잘 적응하였고 잘 타협하였다. 당시의 부유한 고위 제사장들은 이 파에 속하였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누룩, 곧 교훈을 주의하라.” 교훈은 누룩같이 퍼져나가는 힘이 있다. 좋은 교훈은 좋은 영향을 끼치지만, 잘못된 교훈, 이단, 율법주의, 형식주의의 교훈, 혹은 자유주의, 인본주의, 세속주의의 교훈은 참된 경건을 해치는 나쁜 영향을 끼친다. 그러므로 우리는 잘못된 교훈을 분별하여 조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영적으로 큰 손해를 본다. 디모데후서 2:17에는 잘못된 교훈을 독한 창질의 썩어져 감에 비교하였다. 그것은 조기 발견, 조기 치료치 않으면 온 몸을 망치게 될 것이다. 자신만 망치지 않고 온 교회를 망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른 교훈을 분별하여 붙들어야 하고 잘못된 교훈을 분별하고 경계해야 한다. 여기에 성경 읽기와 성경 연구의 중요성이 있다.

13-20, 베드로의 신앙고백

[13-16]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 . . .

어느 날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을 방문하셨다.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은 이스라엘 땅의 가장 북쪽에 있는 헤르몬산 기슭이며 요단강의 발원지이다. 그는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인자인 나를 누구라 하느냐?”(전통본문)고 물으셨다. ‘인자’(人子, 사람의 아들)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의 인성(人性)을 나타낸다.

제자들은 대답했다.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그는 다시 물으셨다.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주는[당신은]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그리스도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이며 선지자, 제사장, 왕을 가리킨다. 예수님은 구원과 영생의 길을 전하시는 참 선지자이시며, 하나님 아버지께 자신을 제물로 드리신 참 제사장이시며, 교회와 온 세상을 의로 통치하실 왕이시다.

또 그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온 세상의 창조주와 섭리자와 주인이신 하나님께 외아들이 계시다. 아버지와 아들은 옷만 바꿔 입으신 것이 아니고, 두 구별된 인격이시다. 이것은 신비이다. 그러나 성경에 계시(啓示)된 만큼이 이러하다.

[17-18]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 . . .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바요나[요나의 아들]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친근하게 부르시면서, 베드로가 자기에 대해 한 고백이 복되며 그의 깨달음과 지식과 믿음이 사람에게서 난 것이 아니고 하늘에 계신 그의 아버지께서 알게 하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그가 우리의 눈을 여시고 우리의 귀를 여심으로써만 가능하다(16:14).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또,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다. ‘베드로반석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남성명사인데, “이 반석 위에라는 구절에서 반석은 여성명사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는 구절에서 반석은 베드로 자신을 가리키지 않고 그의 신앙고백을 가리킨다고 본다. 고린도전서 3:11은 교회의 기초가 예수 그리스도뿐이라고 말한다.

예수께서는 또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라”고 말씀하셨다. 교회의 소속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다. 또 그가 친히 그의 교회를 세우신다. 그는 성경의 바른 진리와 성령으로 그의 교회를 온 세계에 세우셨고 오늘도 세우고 계신다.

예수께서는 또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음부’(陰府, 하데스)무덤혹은 지옥을 가리킨다. 죽음은 죄 때문에 왔다. 모든 사람은 죄인이요 모든 사람은 죽는다. 무덤은 죽은 자들의 집이며, 지옥은 죄인들이 죽은 후에 들어가는 집이다. 그러나 주께서 대속제물이 되심으로 그의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의 죄가 깨끗게 되었다. 죄가 제거됨으로 죽음도, 무덤도, 지옥도 극복되었다. 무덤과 지옥의 권세가 구원받은 성도들을 이기지 못한다.

[19-20]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 . . .

예수께서는 또 베드로에게,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게 주신 권세를 가리킨다. 하나님의 복음 진리는 영생과 멸망, 천국과 지옥을 나눈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주께서는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고 말씀하셨다(16:15-16). 믿는 자는 천국에 들어간다.

주께서는 또, “제자들을 경계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당시에 사람들은 메시아를 정치적 자유와 물질적 복을 주는 자로 이해했던 것 같다. 주께서 죄인들의 구원을 위해 오신 사실은 아직 잘 이해되지 않았다.

우리는 우리의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반석 위에, 즉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성경의 바른 진리의 반석 위에 굳게 세워지도록 기도하고 함께 노력하자. 목사는 성경의 복음과 진리를 바르게 선포하고 성도들은 성경의 바른 지식 안에서 그 복음과 진리를 믿고 순종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의 은혜를 감사하자. 우리가 받은 구원은 무덤과 지옥의 권세도 이기지 못하는 영생과 천국의 복이다. 우리는 이 구원의 은혜를 감사하자.

우리는 담대히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는 일은 오직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다. 전도는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방법이며 전도자는 그 도구일 뿐이다. 하나님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세우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치 말고 분발하여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복음을 담대히 전하자.

21-28, 자기부정을 가르치심

[21-23]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 . . .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3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셨다. 시간이 어느 정도 흘렀고 제자들의 믿음이 어느 정도 분명해졌을 때, 그는 비로소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가르치시기 시작하셨다.

그때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들고 간하여[책망하여](KJV, NASB, NIV) 말했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그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생각했으나 그가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실 것에 대해 생각지 못하고 그를 영광의 왕으로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는 죄인들의 구원이 메시아의 죽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이치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

베드로의 책망을 들은 예수께서는 돌이키시며 그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베드로는 방금 전에 바른 신앙고백을 하여 칭찬을 들었지만, 지금 사탄이라는 책망을 듣는다. 성도가 하나님의 뜻을 생각지 않고 도리어 그것을 방해하면 사탄의 도구가 될 수 있다. 그의 충고는 주님을 넘어지게 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뜻은 메시아가 죽는 것인데 베드로는 그것을 가로막았다. 죽는 것을 싫어하는 것은 사람의 생각이며 하나님의 뜻은 자기의 독생자가 인류를 위해 죽는 것이었다.

[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 . . .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그것이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길이다. 자기를 부인하라는 것은 자기의 생각, 가치관, 명예, 자존심, 세상적 부귀와 영광을 버리고 그 대신 하나님의 생각과 가치관, 하나님의 영광만 구하라는 뜻이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것은 죽을 각오를 하라는 뜻이다. 사형수는 자기가 달릴 십자가를 지고 사형장에 가서 거기에 달려 죽는 것이다. 자기를 부인하는 자는 죽음을 각오할 수 있다.

나를 좇으라는 말씀은 주의 말씀을 배우고 그 말씀을 순종하며 그의 행위를 본받으라는 뜻이다. 주님은 친히 십자가의 길을 가졌다. 그의 제자들도 그의 길을 따라야 할 것이다.

[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 . . .

예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이는]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그것을]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그것을] 찾으리라[찾을 것임이니라].” ‘그것자기 목숨을 가리킨다. 이것은 자기 희생의 행위로 영생을 얻는다는 뜻이 아니고, 자기 희생의 행위가 영생 얻는 자의 당연한 삶임을 보인다. 성도의 자기 희생적 삶은 그가 영생의 길을 가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이다.

주께서는 두 가지 목숨에 대해 말씀하신다. 하나는 육신의 목숨이고 다른 하나는 영혼의 목숨이다. ‘목숨이라는 원어(프쉬케)는 ‘육신의 생명이라는 뜻도 되지만, 또한 영혼이라는 뜻도 된다. 본문은, “누구든지 자기의 육신의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자기의 영혼을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자기의 육신의 목숨을 잃으면 자기의 영혼을 찾으리라”고 번역할 수 있다.

사람의 영혼은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할 때 영생할 수 있지만 그 생명을 소유하지 못할 때 영생할 수 없고 도리어 둘째 사망(21:8) 즉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는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있어서 육신의 목숨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영혼의 목숨이다.

성도의 자기 부정과 십자가의 길은 주께서 가신 길과 비슷하다. 그는 십자가에 죽으신 후에 부활하셨다. 그는 죽음으로 죄인을 위한 영생의 길을 여셨고 아버지의 뜻을 완수하셨고 삼일 만에 부활하셨다. 이와 같이, 우리도 주를 위하여 죽으면 확실히 부활할 것이다.

[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 . . .

예수께서는 또,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고 말씀하셨다. 영어성경들은 본절의 제 목숨자기의 영혼이라는 말로 번역하였다(KJV, NASB, NIV).

본절은 육신의 목숨에 적용될 수 있다. 아무리 세상의 모든 좋은 것을 얻은 자라도 그가 죽으면 그 모든 것이 그에게 아무 유익이 없다. 그러나 본절은 영혼에 더욱 의미심장하게 적용된다. 사람들은 세상의 부귀와 영광을 얻기 위해 믿음을 버리고 죄를 짓지만, 비록 세상의 좋은 것을 누린다 할지라도, 죽어 지옥에 던지운다. 그러므로 수십년의 행복을 위해 영원한 불행을 택하는 것은 결코 유익하거나 지혜로운 삶이 아니다. 영생은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화이다.

[27-28]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 . . .

주께서는 또 영혼을 잃어버리는 것이 유익이 없는 이유를 말씀하셨다. “[이는]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갚을 것임이니라].” 주께서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의 천사들과 함께 오는 날은 그의 재림 때이다(24:30; 살전 4:16). 그때 그는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갚으실 것이다. 그 날은 그의 공의로운 심판의 날이다(2:6-7).

예수께서는 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좀 어려워 보이지만, 다음에 기록된 변화산 사건을 가리키지 않는가 생각된다.

본문에서 주께서는 두 목숨에 대해 증거하셨다. 우리는 육신의 목숨도 귀한 것이므로 잘 관리해야 하지만, 천국에서 영원히 누릴, 영광스런 부활의 생명은 비교할 수 없이 더 귀한 것이므로 잘 지켜야 한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과 성령의 거듭나게 하심으로 시작되었다. 예수께서는 이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해 오셨고 성령께서는 그를 믿는 우리 모두에게 이 생명을 주셨다(5:24; 10:28; 11:25-26; 5:18; 3:5; 딛 3:4-5). 또 그 영생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과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순종으로 유지된다(6:22). 성경은 우리에게 죄 지으면 죽는다고 여전히 경고한다(8:13). 그러므로 우리는 단지 육신의 목숨을 위하여 살지 말고, 천국에서 누릴 영원한 영광의 삶을 위하여 살아야 한다(딤전 6:11-12). 그것은 믿음과 순종으로 살고 죄를 멀리하는 것이다.

[누가복음 4장 예수님 말씀] 예수님의 공생애 전도사역 시작(눅 4:1-44)

 

[누가복음 4장 예수님 말씀] 예수님의 공생애 전도사역 시작(눅 4:1-44)

누가복음 4장에서 예수님은 공생애 시작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단강에서 세례 요한의 세례를 받으신 후에 예수님은 공생애의 시작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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